7장 대혈륜서(大血輪書)
①
"가가. 이곳은 안에서 열지 않으면 밖에서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앞날을 위해서도 가가께서는 여기 있는 무학비급들을 익혀두는 것이 좋을 거예요."
설화영의 말에 백천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랬다. 백천강은 무공 방면에서는 문외한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제마천문의 지하서고에 비치된 무학비급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상고기서들이었다. 천하의 모든 무학이 총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금 무림을 영도하는 구파일방의 무학을 비롯하여 실전되었다고 전해진 전설적인 무공비급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가 대충 살펴본 비급만 해도 절정무학으로써 손색이 없는 것들이었다.
빙옥수라진결(氷玉修羅陣訣).
태극현옥비급(太極玄玉秘汲).
불령천화경(佛靈天華經).
천룡대파도법(天龍大破刀法).
대원천강검경(大元天 劍經).
태양감리신공결(太陽坎離神功訣).
제왕빙화지수(帝王氷火之手).
천산칠금장경(天山七擒掌經).
철혈파천공(鐵血破天功).
현현무유살강해(玄玄無幽煞 解).
오행금륜무적강(五行金輪無敵 ).
.......
실로 대경실색할 일이었다. 천 수백 년 전의 상고기학(上古奇學)으로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비급이 꽂혀 있었다.
백천강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렇다. 내가 걸어야 할 길은 혈선풍(血旋風)의 길이다. 강하지 않으면 비참하게 꺾일 것이다. 꺾이지 않으려면 내가 강해져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무학들이 내게는 극히 필요한 것들이다.'
마음을 다진 백천강은 오로지 자기만을 지켜보고 있는 설화영을 향해 물었다.
"화영, 이곳에서 며칠이나 묵을 수 있을 것 같소?"
설화영은 서늘한 눈동자를 들어 허공을 잠시 응시했다.
"식량은 없지만... 허기를 메꾸고 정신을 맑게 한다는 공청현령수(孔淸玄靈水)가 있어요. 그것을 마시면 능히 백일은 견딜 수 있을 거예요."
몸을 돌린 설화영은 한 곳을 가리켰다.
"바로 저곳에 공천현령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어요."
백천강은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하나의 석반이 있었다. 석반의 한가운데에는 한 자 깊이의 천연 웅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바위틈으로부터 샘(泉)이 있었다.
샘에서 솟아나는 물은 푸른색으로써 은은한 향기를 동반했다. 그 향기만 맡아도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몸을 돌린 백천강은 뒤따라온 설화영의 손을 잡았다.
"화영, 그대에게 못할 짓을 시키는 것 같소."
"가가, 그런 말 마세요."
기다렸다는 듯이 설화영이 그의 품으로 파고 들어왔다.
이날부터 백천강은 서가의 책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운공(運功) 시간을 제외하고는 백천강은 모든 시간을 비급을 읽는데 바쳤다.
비급을 읽어 나가는 틈틈이 백천강은 매일 수 차례씩 광명대현령기를 운공했다. 그러한 과정 중에 그의 마음 속에 내재해 있던 마성이 차츰 씻어져 나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천강의 표정은 맑고 평온하게 변해갔다. 설화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내심 기뻐했다.
'아! 가가는 점점 더 완숙되어 가고 있어. 할아버지께서는 가가가 마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잘못보신 걸거야. 오히려 가가께서는 더욱 정기(正氣)가 짙어가고 있지 않아?'
그녀는 기뻤다. 무공비급에 몰두하는 백천강의 모습에서 그녀는 희열을 금치 못했다.
'종사(宗師).... 어쩌면 저 분은 대무학종사(大武學宗師)가 되실지도 몰라.'
설화영은 비급을 익히기에 열중하는 백천강을 바라보며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백천강은 끝없이 심오무비한 무학경지에 빠져들었다. 수많은 무공구결이 그의 머리 속에서 빛을 발했다.
수없이 많은 비급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것을 읽고 제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값어치없는 허접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천지를 단 한 순간에 뒤바꿔놓을 심오한 심법(心法)을 적어놓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손이 닿아 유용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세월이라는 좀벌레의 한 줌 양식으로밖에 더는 무엇이 되겠는가?
명검(名劍)이 이름을 날리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주인의 능력에 달려있듯이 무공비급이 무공비급인 까닭도 그것을 완전히 익혀 그 오의를 깨우치는 자의 능력에 달린 것이다.
결국 설가장의 지하서고에 처박혀 먼지가 쌓인 채 좀이 쓸어가던 비급들은 백천강이라는 인물에 의해 빛을 발하게 되었다.
실로 방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비급들은 한 인간이 소화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내용이었다. 백천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내용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백천강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세 번째 서가의 아랫부분에서 한 권의 책을 뽑아내 표지를 넘기던 순간이었다.
책(冊).
그것은 양피지로 만들어진 평범한 한 권의 책에 불과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내용이 없었다. 아무리 넘겨보아도 텅 빈 양피지만 계속되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무자서(無字書)였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씌여져 있지 않은 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은 웬일인지 백천강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책에 아무것도 씌여져 있지 않다니... 세상에 이런 책도 있단 말인가?'
그는 강렬한 호기심을 금치 못했다.
한동안 망설이던 그는 결국 무자서를 품 속에 갈무리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그 한 권의 무자서를 취함으로써 앞날에 엄청난 변화가 닥칠 줄이야.
그것은 오직 신이 은밀하게 안배해 놓은 대변수에 불과했다. 그것이 백천강에게 행이 될런지 불행이 될런지는 하늘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②
마침내 백일이 지나자 백천강은 지하서고의 수많은 기서들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그가 찾는 대혈륜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빠뜨린 것이 있나하여 다시 한 번 샅샅이 뒤졌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녕 이곳에 없단 말인가?"
백천강은 전신의 맥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만 같았다.
대혈륜서.
백천강은 오로지 그 책 한 권을 찾기 위해 중원을 떠나 머나먼 동해의 쌍봉도를 건너온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대혈륜서는 없었다.
"가가께서 찾는 책이 이곳에 있는 것은 확실한가요?"
허탈감에 빠져있는 백천강을 향해 설화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소. 어머님의 유언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소."
확고한 믿음이 서린 말투였지만 그 음성에는 좌절감이 짙게 배어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지막 지하서고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대혈륜서는 오리무중이었다.
"화영. 틀림없이 더이상의 서고는 없는 것이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백천강이 고개를 쳐들고 다시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낙심의 기색이 역력했다.
"......!"
다음 순간 설화영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엇인가를 숨기는 것이 있는 듯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백천강은 금방 설화영의 그런 태도를 눈치챘다.
"화영.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오?"
벌떡 일어선 백천강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소매는......."
"말해다오. 화영, 제발!"
설화영을 쏘아보는 백천강의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아... 저 눈빛!'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설화영은 전율했다.
백천강의 눈에서는 섬뜩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설화영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자신의 불안을 억눌렀다. 잠시 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백천강을 향해 말했다.
"생전의 아버님으로부터... 이 지하서고에 마경(魔經)만을 모아둔 비밀철궤가 있다고 들었어요."
"마경이라고!"
백천강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그곳이 어디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부르짖었다. 갑작스럽게 돌변한 백천강의 행동에 설화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 가가, 무서워요!"
"화영!"
백천강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탄식하듯 사죄하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미안하오. 내가 너무 흥분했나보오."
백천강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자 설화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비밀철궤 속에는... 극랄하기 짝이 없는 천하의 마경들만 모아 놓았다고 했어요. 특히 지난날 대마성이 무너졌을 때 그들의 무고에서 가져온 것들도 들어있다고 했어요. 어쩌면 대혈륜서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 어느 곳에 있지?"
설화영은 백천강이 서 있는 뒷편의 서가를 가리켰다.
"저 서가의 오른쪽을 밀면......."
"저곳이라고!"
설화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백천강의 신형이 섬전처럼 서가로 날아갔다. 백천강은 한쪽 벽을 독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서가의 오른쪽 모퉁이를 힘껏 밀었다.
그그긍.......
기관이 작동하는 괴이한 음향과 함께 서가의 한 부분이 분리되며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실로 교묘한 장치였다.
잠시 후 가까스로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공간이 드러났다. 백천강은 급히 공간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일각(一刻) 후.
백천강은 비좁은 공간 속을 빠져나왔다. 그의 품에는 커다란 철궤 하나가 안겨져 있었다. 사방 두 자 정도 길이로 장방형의 모양을 한 검은 철궤는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팍!
철궤를 내려놓은 백천강이 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 녹슨 열쇠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설화영이 불안한 눈으로 백천강의 행동을 주시했다.
"......!"
백천강은 마침내 철궤의 뚜껑을 열었다.
끼이익.......
음산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신음과 함께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서고 말았다.
"으음......!"
철궤 속으로부터 한랭한 기운과 함께 으스스한 마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마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소멸되었다.
백천강은 철궤 앞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철궤 속에는 수백여 권은 족히 넘을 고서가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백천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서들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백천강의 몸 속을 흐르는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책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은 한없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피가 끓어 오르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파괴하고 싶은 충동이 한순간 백천강의 뇌리를 휘어잡았다.
"으음!"
백천강은 이를 악물으며 가까스로 그런 충동을 자제했다.
그는 철궤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경들을 하나씩 들춰보기 시작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겨내는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마혈영참혼경(天魔血影斬魂經).
역혈마라보(逆血魔羅譜).
백골음풍경(白骨陰風經).
마마귀허진결(魔魔鬼虛眞訣).
살인멸혼지결(殺人滅魂指訣).
지옥극혈무무경(地獄極血無無經).
광혈패극경(狂血覇極經).
고루극마파천부(孤壘極魔破天符).
마령수라통혈경(魔靈修羅通血經).
.......
그것은 전설적인 거마들이 일세를 대혈겁에 빠뜨렸던 가공할 마공이 담긴 비급들이었다.
"......!"
마침내 마경들을 뒤적이는 백천강의 손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어느 틈엔지 그의 눈에 붉은 핏발이 서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설화영은 그 공포스런 광경을 접하고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아... 저... 저럴 수가!"
설화영의 서늘한 눈에 경악과 함께 공포의 분위기가 가득 떠올랐다.
백천강은 마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미친 듯이 마경을 뒤적여나갔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이...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넋을 잃은 설화영이 속수무책인 양 중얼거렸다. 일이 잘못되어도 보통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차... 찾았다. 오오!"
느닷없이 백천강은 부르짖었다. 희열에 찬 그의 부르짖음이 서실 안을 가득 메웠다.
놀란 설화영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백천강은 표지가 피처럼 붉은 책을 한 권 쳐든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혈륜서(大血輪書)>
표지에 쓰여진 글씨가 설화영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그 글씨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 했다. 그 순간 환상처럼 설화영의 코속으로 짙은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들었다.
"이... 이럴 수가!"
설화영은 쓰러질 듯이 휘청거렸다.
백천강은 빨려들듯 대혈륜서를 펼쳐보았다. 대혈륜서의 첫장에는 웅휘무비한 필체의 글씨로 아래와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
<...... 만마지존(萬魔至尊)이 남긴다. 노부는 어려서부터 온갖 불행이란 불행은 모두 겪었다.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노부에게는 죄악이었다.
결국 노부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위선의 탈을 쓰고 있는 천하백도인들을 모두 궤멸시키겠다는 것이다.>
실로 통천경악할 일이었다.
만마지존.
그는 바로 과거 대마성의 성주였다. 그렇다면 대혈륜서는 만마지존 백무웅(白武雄)이 남긴 것이라는 말이었다. 실로 가공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 노부는 상고의 기환궁에서 흘러나온 마경 일곱 권을 얻으면서 천하백도를 궤멸시키기로 결심했다. 이에 노부는 기환마경을 바탕으로 대마공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싸움은 힘만으로 승을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다. 이에 노부는 백도천하를 멸망시킬 계략을 강구해 두었다. 언젠가는 노부의 마도천하가 이루어질 것이다. 훗날을 위해 노부 만마지존의 모든 것을 대혈륜서에 남긴다.>
"......!"
백천강은 피가 끓어 올랐다.
그는 빨려들듯이 대혈륜서를 읽어나갔다. 대마성주이자 만마지존인 백무웅이 직접 남긴 대혈륜서는 상중하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상편인 용악지계(用惡之計).
용악지계 속에는 일백팔종에 달하는 사악한 지계(智計)와 권모술수를 비롯하여 이간책, 속임수, 함정, 위악책 따위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실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계(惡計)라고 아니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중편인 천하멸망전(天下滅亡典).
천하멸망전은 상편인 용악지계보더 더 놀라운 내용을 담은 책이었다. 그곳에는 구파일방을 비롯한 천하 정대문파(正大門派)의 무공을 일일이 파헤친 파해무공결(破解武功訣)이 적혀 있었다.
만일 천하 정대문파의 파해무공결을 모두 익힌다면 정대문파를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천하멸망전에는 각 대문파의 총본산의 상세한 지도(地圖)가 작성되어 있었다.
각 문파의 장문인이 기거하는 곳은 물론이거니와 무공비급을 소장하는 곳과 조사동(祖師洞) 등의 요지(要地) 모든 부분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실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과거 대마성의 첩자들이 각 대문파에 잠입하여 탐지해낸 것들이었다.
하편인 대마인절기편(大魔人絶技編).
하편은 대혈륜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대마인절기편에는 만마지존 백무웅이 터득하고 창안한 대마성의 마학(魔學)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신공결(神功訣).
역혈수라심공(逆血修羅心功).
광혈참혼강(狂血斬魂 ).
천극인혼멸강(天極人魂滅 ).
파옥도륙혼천공(破玉屠戮混天功).
대마검결(大魔劍訣).
대마도결(大魔刀訣).
대마편결(大魔鞭訣)
대마장결(大魔掌訣).
.......
실로 끝없는 마공들이 대혈륜서 하편인 대마인절기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가공을 극한 절기들로써 십팔만병기를 능가하는 마학이었다.
"오오!"
가슴 가득히 밀려오는 뿌듯한 전율에 백천강은 연신 탄성을 금치 못했다.
대마인절기(大魔人絶技).
그것은 백천강의 가슴에 벅찬 희열을 안겨주었다. 어째서 마공을 접하는 순간 희열을 금치 못하는지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으나 분명 그러했다. 어쩌면 백천강은 타고난 마성의 소유자인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대혈륜서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백천강의 안색이 대변했다.
"이... 이것은!"
백천강은 놀란 눈을 떼지 못했다.
대혈륜서의 마지막 장. 그곳에는 급하게 무명지를 깨물어 쓴 듯한 글씨가 있었다. 굵기가 제각각인 선혈이 뭉쳐진 글씨는 몹시 흐트러져 있었다.
<......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두 놈이 배반할 줄이야.... 대제자(大弟子) 궁우(宮羽)와 만보총관(萬寶總官).... 그놈들의 배신으로 대마성은 무너졌다. 언제고 복수하리라. 이제자(二弟子) 천기(天奇)와 삼제자(三弟子)수련(水蓮)이 살아난다면... 훗날 대혈륜서를 얻는 자는 대마성을... 다시 일으키길......바라노라.>
피가 뭉쳐 굳어진 글씨는 그곳에서 끊어졌다.
"오오!"
엄청난 충격이 체내의 피를 역류케 했다.
전율하듯 백천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이름 넉 자 때문이었다.
궁우(宮羽).
수련(水蓮).
그 이름은 바로 궁가병기점의 궁우노인과 자신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어... 어머니의 신분이 바로 대마성이었단 말인가?"
그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충격이었다. 아니 어렴풋한 짐작이 확연한 사실로 드러났던 것이다.
"하... 할아버지, 아니 나를 키워준 궁우노인이 대마성의 배신자라니!"
피가 끓었다. 백천강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죽이리라. 모두 죽이리라!"
그 순간 설화영이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가가!"
③
"핫핫핫핫핫!"
콰쾅!
광소가 터지는가 싶은 순간 서실의 서고가 박살나며 흑영이 솟구쳤다.
"이놈. 서라!"
설붕비의 분노에 찬 노성이 설가장을 흔들었다.
"핫핫핫! 나를 막지마라. 나를 막는 자는 죽음밖에 얻을 것이 없다."
백천강은 지하서고를 빠져나왔다. 그는 광소를 터뜨리며 혈광충소신법을 전개해 설가장을 치달렸다. 그의 옆구리에는 설화영이 매달리듯 끼어 있었다.
백천강이 막 설가장의 담을 뛰어넘으려는 때였다.
쐐액!
한 자루 철부(鐵斧)가 파공성을 토해내며 허공을 가로질러 왔다. 능히 만 근(萬斤)의 경력이 실린 도끼가 백천강의 뒷통수를 노리고 날아든 것이다.
"핫핫핫!"
끊이지 않는 백천광의 광소가 돌연 멈추었다.
"크윽!"
폭음과 함께 외마디 비명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솟아올랐던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상황이 드러났다. 어느 틈엔가 흑웅(黑熊) 앞가슴에 자신의 도끼가 박혀 있었다.
후원에서 장작을 패던 그는 백천강이 설화영을 옆구리에 끼고 담장을 넘는 것을 발견하고는 철부를 날렸던 것이다. 그러나 백천강이 내뿜는 막강한 반탄지기에 의해 튕겨 날아온 철부에 의해 자신의 심장이 쪼개지고 말았던 것이다.
백천강의 몸은 붉은 혈무(血霧)에 뒤덮인 공포스런 모습이었다.
혈무.
그것은 바로 대혈륜을 익힌 자만이 시전할 수 있는 극도로 사악한 마성을 지닌 호신강기(護身 氣)였다.
"제발... 가가... 제발 멈추어요!"
설화영은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후훗... 화영. 나는 이길로 이곳을 떠난다."
백천강은 옆구리에 낀 설화영을 향해 차갑게 말하며 해변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이곳은 섬(島)이에요!"
"후훗... 그러기에 네가 필요하다."
백천강의 음성이 또다시 냉혹하게 변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설화영은 전율했다.
"가가!"
그녀는 소리치면서 생각했다.
'변했다. 이미 가가의 심성은 변했다. 오오... 이럴 수가. 가가가 마성에 휩싸이다니!'
"크핫핫핫!"
백천강은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단숨에 선착장에 당도했다.
"마... 막아랏!"
선착장에 있던 쌍봉도의 어부들, 아니 제마천문의 고수들이 그물과 어구(魚具)들을 팽개치고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놀랍도록 기쾌한 몸놀림이었다.
그들이 막 백천강을 에워쌌을 때였다.
"핫핫핫! 나를 가로막지 마라. 내 앞을 가로막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돌연 신형을 멈춘 백천강이 우수를 뻗었다.
우우웅... 꽈르릉!
손바닥 중심에서 핏빛 강기( 氣)가 회오리치며 뻗었다. 가공할 내심공력(內心功力)인 역혈수라심공(逆血修羅心功)에 속하는 역혈수라장심강기(逆血修羅掌心 氣)가 폭사된 것이다.
"크윽!"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역혈수라장심강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뒷편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맞은 사람들은 엄청난 압력을 느끼는 찰나에 내장이 파열되면서 죽어갔다.
휘익!
단 일격에 제마천문도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백천강은 경쾌히 신형을 날려 한 척의 소선(小船)에 올라탔다. 그 순간 그의 손에서 한 물체가 날아갔다.
"악... 제발 가가!"
설화영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백천강은 설화영을 선착장으로 내던진 것이다.
"핫핫핫핫!"
백천강은 광소를 터뜨리며 선미(船尾)의 수면을 향해 장력을 내쏘았다.
그 순간 반탄지력을 받은 배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백천강은 번갈아 장력을 치며 배를 쏜살같이 달리게 했다.
"가가! 가면 안 되요. 제발... 제발!"
멀리서 설화영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크핫핫핫핫!"
잔혹한 광소를 남기며 백천강은 소선과 함께 점점 멀어져 갔다. 잠시 후 하나의 까만점이 되어 가물거리던 소선이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흑!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설화영은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뼈를 깎는 후회가 그녀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바로 자신의 욕심 때문에 백천강이 마성에 빠져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흐흐흑...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그녀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휙!
그녀의 뒤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백미백염(白眉白髥)의 노인. 바로 설가장의 장주인 설붕비였다. 설붕비는 백천강이 사라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으음.... 조금만 더 참았어도 마성을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을. 이제 그로 인해 중원에 엄청난 마풍이 일어나리라."
설붕비가 어두워져가는 수평선을 향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설화영은 설붕비의 발아래 엎드리며 흐느꼈다.
"흐흐흑! 할아버지. 모두가 제 탓이에요. 영아가 그를 돕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흐흐흑!"
설붕비의 하얀 수염이 부르르 떨었다.
"네... 네가 천강을 도운 것이라고? 그랬... 었......!"
"으흐흑!"
설화영은 터져나오는 오열을 멈추지 못했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눈꼽만치의 후회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랬던 것이 하루아침에 뒤바뀌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일은 그녀 혼자만의 후회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때였다.
"가가... 가가가 떠났어? 응? 언니야?"
맑은 음성과 함께 노란색 연의를 입은 인영이 날아들었다. 바로 설운정이었다.
서늘한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담고 있던 설화영이 그녀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흐흑... 정아야!"
잠시 그들 두 자매를 내려다보던 설붕비가 돌아서며 침중하게 말했다.
"준비해야겠다. 쌍봉도는 또다시 중원에 나가게 될 것 같다."
설붕비의 말에 설화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곧바로 눈물을 떨치고 일어선 그녀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모든 것이 제 책임이에요. 그가 만약 대마인이 된다면......."
설화영의 서늘한 눈에서 일순 살기가 흘러 나왔다.
"반드시 제 손으로 죽이고... 따라 죽겠어요."
참으로 무서운 결심이 아닐 수가 없었다. 설붕비는 탄식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자, 해야 할 일이 있다."
쌍봉도의 사람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설붕비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쌍봉도의 동편 하늘로부터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참혹하게 붉던 바다는 흑색으로 물들어갔다.
끼룩... 끼끼룩.......
짝을 잃은 해조(海鳥) 하나가 섬으로 날아들었다.
그날 이후 쌍봉도에서는 두 번 다시 고깃배가 뜨지 않았다. 질식할 것만 같은 적막감이 쌍봉도를 무겁게 짓누루고 있었다. 가끔씩 번쩍이는 금속의 광체와 기이한 괴음만이 은은히 해역으로 퍼질 뿐이었다.
④
누가 세월의 흐름을 유수(流水)와 같다고 말했던가?
흐르는 물과도 같은 세월이 바람처럼 흩어져 갔다.
사풍인.
낙양의 무림인들을 피의 회오리 속에 몰아 넣었던 사풍인이 중원에서 사라진 지 어느덧 사 년이 지난 것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들도 점차 잊혀져 갔다.
그러나 지나간 중원의 사 년은 결코 평화로운 나날이 되지 못했다.
마검(魔劍).
거무튀튀한 한 자루의 묵검이 사 년 동안 일으킨 피보라 때문이었다.
낙양의 궁가병기점에서 만들어진 묵검 한 자루가 무림천하를 돌면서 무수한 영웅들의 꽃같은 목숨을 낙화(落花)시켜버린 것이다.
검을 얻은 자는 하루 해를 넘기지 못하고 분시(分屍)되었다. 피에서 피를 부르는 한 자루의 마검 때문에 무림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은 그저 있는 말이 아니었다. 만나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시작 후에는 끝이 있는 법이 아니던가?
마침내 마검의 혈풍은 종식되었다. 뜻밖에도 혈풍의 종식은 한 절세기협의 출현 때문이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따로 있고 거두는 자 따로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신주제일룡(神州第一龍) 사유성(査流星).
무림구공자의 우두머리이자 천하 정도무림의 후기제일지수인 그는 무림에 나오자마자 일백팔일의 대추적 끝에 마침내 묵검을 찾아냈다.
결국 그는 혼자의 힘으로 묵검을 얻었고 그 묵검을 거두어 자신의 사문인 소림사에 비장시켰던 것이다. 한 자루의 가공할 마검이 불러일으켰던 대혈풍의 막은 그렇게 종식되었다.
그 일로 인해 신주제일룡 사유성의 명성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났다.
중원 무림에는 숱한 기인들이 있었다.
기인(奇人).
이는 뛰어난 무공을 소지했거나 한 방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일무이한 일인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칠인(七人)이 있었다.
강호칠기(江湖七奇).
그들 일곱 사람을 무림인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들 중에는 물론 무림인도 있었고 무림인이 아닌 자들도 있었다. 물론 남자들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일한 공통점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 가지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하유일자(天下唯一者)라는 것이었다.
재보(財寶) 화양금(華陽金).
그는 중원제일의 거부였다.
그가 지닌 재산은 나라와 맞먹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대강남북의 전장(錢場), 기루, 도박장, 선박, 마장할 것 없이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드러난 소문과는 달리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사는 자였다.
신기자(神機子) 공손연(公孫燕).
그는 기관토목지학(機關土木之學)의 대가(大家)였다. 공손연은 기관학과 토목학에서 고금제일인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가 꾸민 기관은 신이라 해도 돌파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활사묘인(活死妙人) 사마방(司馬方).
그는 마음만 먹으면 한여름에도 매화를 피게 할 수 있는 자로 통했다.
사마방은 생물의 병을 치유시키는데 신같은 재주가 있었다. 그는 꽃을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의 의술은 화타나 편작을 능가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귀진자(鬼陣子) 서문량(西門亮).
진법(陣法)의 대가인 그는 천하의 모든 기문진법(奇門陣法)에 달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 보를 내디딜 때마다 일백팔변(一百八變)하는 기문진법을 자유롭게 구사했다. 그가 알고 있는 진법의 종류만도 일만 종이 넘는다고 했다.
만사지관(萬事地官) 구천서(仇天書).
그는 무림인이 아니었다. 그는 지관(地官), 즉 땅의 형상을 살피는 자였다. 그는 천하지세에 통달해 있으며 명당을 찾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디 그뿐인가? 수맥(水脈)이나 화천(火泉) 등도 귀신같이 짚어내는 자질을 가진 자였다.
무유생(無有生) 상무효(常無效).
무유생 역시 무림과는 관계가 없는 자였다.
그는 고금을 통해 가장 뛰어난 조각가였다. 그는 돌을 살아있는 여자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그의 조각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그가 조각한 물체에는 혼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환락천마녀(歡樂天魔女).
그녀의 이름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환락천마녀라는 별호로 불리울 뿐이었다.
불과 수 년 전에 강호에 나타난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는 즉시 천하의 남자들을 색(色)의 환락으로 사로잡았다.
그녀의 색공에 빠진 사내들은 재산뿐만 아니라 무공마저 잃고 일신을 망치는 것이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환락천마녀는 천의 얼굴을 지녔으며 그녀의 몸에서 스며나오는 기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향기로워 한 번 그 향을 맡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