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륜공자 제2권
11장 아버지와 아들
①
숭산(嵩山).
숭산은 아득한 옛날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지칭되어 왔다. 세인들은 숭산을 중원오악(中原五嶽) 중에서 중악으로 천하의 한가운데로 일컬었다. 숭산은 그만큼 명산이었다.
명성에 걸맞게 우람한 세 개의 봉우리가 숭산의 위용을 자랑했다. 그 세 봉우리에는 각각 준극(埈極), 태실(太室), 소실(小室)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휘이잉.......
칼날같은 냉기를 지닌 바람이 강하게 휘몰아쳤다.
"......."
핏빛보다 붉던 석양이 떨어지며 어둠의 장막이 천지를 뒤덮어오기 시작하는 시간. 짙어가는 어둠을 바탕으로 태실봉 정상에 우뚝 선 흑의인이 있었다.
흑의인은 어둠 속 한곳을 향해 냉막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의 장포가 바람에 찢어질 듯이 펄럭거렸다.
흑의인의 시선이 멎은 곳.
그곳은 바로 태산북두(泰山北斗)격인 소림사(少林寺)가 위치해 있는 소실봉이었다.
흑의인은 한동안 소실봉을 바라보던 눈을 거두고 죽립(竹笠)을 고쳐 쓰더니 끈을 질끈 묶었다.
그의 용모는 깊숙이 눌러 쓴 죽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몸 전체에서 풍기는 살벌한 기도는 그가 고금의 대살수라는 것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불현듯 찢어진 죽립 사이로 싸늘한 한광이 솟으며 냉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제 나의 혼을 되찾을 때다. 후후! 모친의 사십구일제(四十九日祭)를 지키며 만들었던 나의 혼백이 실린 비검을 되찾을 때다."
비검(悲劍).
비검은 바로 백천강이 궁가병기점을 떠나기 직전 최후로 사십 구일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묵검을 말하는 것이다. 백천강이 궁가병기점에서 모습을 감춘 후 수 년 동안 무림을 떠돌며 숱한 피보라를 일으켰던 마검.
흑의인은 신주제일룡(神州第一龍)이라고 일컫는 사유성(査流星)이 회수하여 소림에 비장시킨 마검을 되찾으러 온 것이다.
물론 흑의죽립인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비검이 울고 있다. 이제 비검은 나의 손에 돌아와 저주의 피맛을 실컷 즐기게 되리라."
흑의인은 창백한 입술 사이로 섬칫한 웃음을 토해냈다. 그 순간 죽립 사이로 흐르는 한광이 더욱 냉혹해졌다.
잠시 후 그의 음성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곳은 그가 있는 곳......."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의문을 풀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유령처럼 증발해 버렸다.
스스스.......
유령귀허환영비(幽靈鬼虛幻影飛).
이는 사백여 년 전 활동했던 유령인마(幽靈人魔)의 독문절세경공이었다.
뎅... 뎅... 뎅.......
삼경을 알리는 웅후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종소리는 침묵에 감싸인 소림사 경내를 고즈넉하게 흔들며 사바세계로 퍼져나갔다. 중생들의 혼곤한 잠을 괴롭히는 업(業)을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했다.
깊이 잠든 대찰(大刹) 소림사(少林寺).
소림사는 천오백 년 정도 무림의 역사를 지켜온 말없는 거인이었다. 따라서 아무도 대소림의 존재를 정면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
마지막 타종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어둠 속으로 묻혀가기 시작했다.
스스스.......
한 줄기 흑영이 유령처럼 소림사의 일주문(一柱門)을 날아 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멈추시오, 시주."
어둠에 휩싸였던 일주문의 전후좌후에서 불호성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회색빛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바로 소림을 지키는 수호승들이었다.
모두들 잠든 소림사에서도 긴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크윽!"
문득 단말마의 비명이 야음을 깨뜨리며 연이어 퍼져나갔다. 정말이지 귀신도 곡할 일이었다.
야음을 틈타 잠입한 흑영이 중생구도를 목적으로 하는 소림사에 난입하여 살생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흑영의 손속은 독했다. 일장을 뻗을 때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보라가 튀었다. 정확히 칠장이 뻗어나간 후 적막감이 다시 찾아왔다.
스스스.......
흑영은 더이상 손볼 것이 없어지자 거침없이 일주문을 통과했다. 그리고는 대웅전을 향해 날아갔다.
"멈추시오!"
"시주는... 으악!"
소림사는 정녕 무림의 태두다웠다.
흑영이 일주문에서 살행을 저지르며 머뭇거린 것은 찰나적인 시각이었다. 그런데도 어느새 소림사의 고승들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선방이나 침방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소림 고승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번쩍!
흑영은 손만 뻗었을 뿐이다.
그 순간 흑영을 향해 어지럽게 짓쳐들던 승려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들은 눈 앞에 혈광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 자신의 목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있다는 것을.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흑영은 한 자루의 혈죽도(血竹刀)를 썼다. 하지만 승려들은 혈죽도가 언제 어떻게 뻗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단지 핏빛이 일직선으로 뻗었다 싶으면 어김없이 승려들의 목에 구멍이 뚫렸다.
흑영은 삽시에 삼십여 명의 승려들을 죽였다.
털썩!
마지막 승려가 피분수를 뿌리며 쓰러지자 흑영은 거침없이 신형을 날렸다.
그가 목표로 하는 곳은 소림사의 깊숙한 경내였다.
뎅! 뎅! 뎅!
다급한 타종소리가 경내를 뒤흔들었다.
소림사는 삽시에 발칵 뒤집어졌다.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듯했다. 여기저기 불이 밝혀졌다. 승려들은 어지럽게 옷자락을 휘날리며 이리저리 날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흑영은 어느새 소림중지(少林重地)로 깊숙이 들어간 뒤였다.
②
불병각(佛兵閣).
소림오각 중의 하나인 불병각은 소림의 중지 중에서도 중지였다. 그곳은 소림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병기(神兵器)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대저 소림의 승려들은 병기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쓰는 병기는 주로 계도(戒刀), 선장(禪杖), 방편산, 비발 따위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병각에는 중원 고유의 병기인 십팔반병기(十八班兵器)를 비롯하여 고대(古代)의 신병이 수두룩하게 비장되어 있었다.
비상검(飛霜劍), 어장검(魚藏劍), 거궐(巨闕), 태양검(太陽劍) 등의 신병으로부터, 구루혈조(九루血爪), 화혈비(化血匕), 만독묵편(萬毒墨鞭) 따위의 희대 마병(魔兵)에 이르기까지 없는 병기가 없었다.
한 마디로 천하의 모든 신병들은 소림사의 불병각에 모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강호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역대 신승들이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다.
스스슷!
소림사를 쑥밭으로 만든 흑영은 마침내 불병각에 당도했다. 그러나 이미 경종이 울린 터라 불영각에는 엄밀한 수비가 쳐져 있었다.
"아미타불. 멈추시오. 시주!"
웅후한 호통소리가 불병각을 흔들었다. 뒤이어 십팔 명의 승인들이 기묘한 자세로 흑의인을 포위했다.
십팔소나한진(十八少羅漢陣).
바로 소림의 비기가 펼쳐진 것이다.
"......."
삿갓을 깊숙이 눌러쓴 채 혈죽도를 들고 있던 흑의인은 마침내 나한진 속에 갇히고 말았다.
"아미타불. 시주는 왜 함부로 살생을 하는 것... 엇!"
제일 먼저 입을 연 우두머리 승인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파공성과 함께 가공할 도기가 시뻘건 혈광을 뿌리며 목젖으로 뻗어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불의의 기습이었다.
쐐액!
"큭... 비... 비겁하게......."
승인은 목에서 피화살을 뻗으며 쓰러졌다. 나머지 십칠 명의 승인들은 그 순간 대노했다.
우우웅!
십칠 명의 승인들이 풍차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한대진이 발동한 것이다. 소림사상 절대 깨진 적이 없다는 나한대진이.
"......."
흑영은 그러나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흑영은 그저 목석인 양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흑영의 찢어진 죽립 사이로는 시뻘건 혈광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츠츠츠츳.......
사방이 철벽으로 변한 듯 가공할 경기가 밀려들기 시작했으나 흑영은 요지부동이었다. 혈죽도를 든 흑영. 그는 바로 동해 쌍봉도에서 대혈륜서를 익힌 백천강이었다.
대혈륜서의 중편인 천하멸망전(天下滅亡典).
그 속에는 각 대문파의 약점과 파해무공결이 적혀 있었다는 것을 독자 여러분은 기억하는가? 물론 소림나한진법도 예외가 아니었다.
"차핫!"
돌연 백천강은 신형을 솟구쳤다. 혈마충소신법(血魔充素身法)을 전개한 것이다.
파파파팟!
그의 몸에서 열일곱 자루의 비도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날아갔다. 비도는 승인들의 이마 한복판을 꿰뚫어갔다.
"흐억!"
승인들은 호신강기를 뚫고 날아오는 비도를 피하기 위해 휘청거렸다. 찰나지간 진세가 흐트려졌다. 바로 그 순간을 놓칠 백천강이 아니었다.
"낙성혼천수라참(落星混天修羅斬)!"
허공에서 폭갈이 터진 순간 수만 갈래의 시뻘건 도편강(刀片 )이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무수한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파츠츠츠츠!
"크아악!"
십팔소나한대진. 무적의 소림비공은 한순간에 핏방울로 화해버렸다. 백천강은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선회하며 불병각 안으로 들어갔다. 단말마의 비명이 채 그치기도 전이었다.
백천강의 신형이 불병각 안으로 사라졌을 때였다.
투두두두둑.......
자욱한 피보라와 함께 동강난 승인들의 혈육잔해가 바닥에 떨어졌다. 뒤이어 역한 피비린내가 불병각 주위를 감싸고 흐르기 시작했다.
끈적거리는 혈향(血香). 그것은 바로 죽음의 냄새였다. 정녕 참혹의 극을 이룬 아비지옥이 경건해야 마땅할 소림경내에 펼쳐진 것이다.
"오... 아미타불!"
"이럴 수가!"
펄럭!
허공에서 수십인의 인영들이 탄식과 불호성을 토해내며 떨어지듯 내려섰다. 그들은 모두 홍색가사를 입고 있었다. 그로 미루어 신분이 극고한 고승들이 틀림없었다.
"오... 이럴 수가. 어찌 이토록 참혹한 살겁을 불사에서 벌인단 말인가?"
홍색가사의 노승이 주위를 둘러보며 장탄식했다. 그는 우수에 은은한 빛을 발하는 녹옥불장(綠玉佛杖)을 들고 있었다.
녹옥불장. 그것은 바로 소림의 장문인만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신표였다.
녹옥불장을 든 노승은 바로 뇌정대사(雷霆大師)였다. 뇌정대사의 좌우에는 뇌광(雷光)과 뇌우(雷雨), 뇌명(雷明) 등의 소림삼원주가 호위하듯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혜원이 죽은 후 다시 장문인감이 된 혜천(慧天)도 함께 서 있었다.
그밖에도 십팔 명의 백미노승들이 기러기 날개처럼 신형을 펼치고 서 있었다.
소림십팔대법사(少林十八大法師). 다름아닌 십팔인의 백미노승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나이가 모두 백 세에 이른 자들이었다. 따라서 배분으로 보자면 오히려 장문인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소림 백팔나한대진의 중추인물이자 소림의 무예를 전승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었다.
"......!"
그때였다. 불병각을 노려보고 있던 뇌정대사의 우수에 힘이 들어갔다. 불병각 안으로부터 한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흑의인은 뜻밖에도 오른손에 한 자루의 묵검을 들고 있었다. 그를 본 뇌정대사의 백미가 파르르 떨렸다.
"마검을 꺼내 오다니... 시주는 뉘시오?"
뇌정대사는 경직된 음성으로 물었다. 백천강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그는 묵검을 들어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이 검의 이름은 비검이다. 그것은 오직 나만이 안다. 나는 주인으로서 비검을 돌려받으러 온 것뿐이다."
그 말에 뇌정대사는 노안을 가늘게 떴다.
"대체 시주는 뉘시길래 마검의 주인이라 하시오?"
"낙양을 휩쓸었던 죽음의 칼바람을 기억하는가? 세인들은 그를 일컬어 사풍인(死風刃)이라고들 했지."
백천강의 말이 끝났다. 그 순간 승인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일제히 몸을 떨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부르짖었다.
"아미타불... 사풍인!"
"오오!"
백천강은 광소를 터뜨렸다. 뒤이어 그는 냉혹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 나는 사풍객이다. 너희들이 내게 아주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주었지. 후후...! 동시에 나는 너희들이 농락하고 죽였던 여인의 아들이기도 하다."
승인들은 다시 한 번 휘청거렸다.
"아, 아미타불......."
"서, 설마 했더니. 이럴 수가......."
승인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일제히 먹구름이 뒤덮였다.
"으으음......."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은 뇌정대사가 신음을 토해내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그렇다면 시주가 바로 마검을 만들고 사라진 궁가병기점의 파검소년이기도 하단 말이오?"
"그렇다."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 정적을 백천강의 살벌한 웃음이 깨뜨렸다.
"나는 내가 만든 비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사풍인은 다시 피맛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소림사도 그 대상의 하나다."
백천강은 끔찍한 저주를 토해냈다.
"오오!"
그의 저주어린 선언에 뇌정을 비롯한 소림고승들은 경악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안색이 급변하던 혜천대사가 앞으로 나서며 일갈을 토해냈다.
"사풍객! 소승은 혜천이다! 죽은 사형 혜원대사의 원한을 갚겠다!"
휘익!
혜천은 단숨에 백천강을 죽일 듯 승포를 펄럭이며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 순간 뇌정대사의 사자후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혜천, 멈추어라!"
"사부!"
"물러나라."
"하지만......."
"불제자로서 어찌 원한을 운운한단 말이냐? 부끄럽지도 않느냐?"
"......!"
뇌정대사의 꾸지람은 단호했다. 혜천은 마침내 고개를 푹 떨구며 물러나고 말았다. 잠시 후 뇌정대사는 불심이 깊이 깃든 눈으로 백천강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시주. 고해란 끝이 없소. 그러나 고개를 돌리면 바로 피안이오.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면 무한한 자비를 품을 수 있건만 어이해 시주는 스스로 고해를 자초하시오?"
백천강은 코웃음을 쳤다.
"훗! 피비린내나는 입으로 불법을 말하다니 간도 크군. 나 사풍객이 그런 위선에 흔들릴 줄 아는가?"
백천강의 음성에는 조소가 가득했다. 음성뿐만 아니라 눈빛도 그랬다.
한동안 백천강의 비웃음 가득한 눈을 응시하던 뇌정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 불심이 못미치는도다. 할 수 없구료. 천하창생을 위해 살계를 여는 수밖에."
백천강은 뇌정대사의 말을 바로 받았다.
"훗훗, 아직은 때가 아니나 사풍객의 무서움을 보여 주리라."
스슥!
백천강이 유령처럼 신형을 움직였다. 그 순간 뇌정대사의 옆에 있던 달마원주 뇌광대사가 일갈을 토해내며 쌍장을 뻗었다.
"아미타불. 뇌광이 너를 상대하리라!"
콰르르.......
무겁게 가라 앉았던 공기를 뒤흔들며 소림의 금강대력신공(金剛大力神功)이 노해처럼 쏟아졌다.
"썩어빠진 소림의 무공으로는 어림도 없다!"
백천강은 싸늘하게 말하며 소매를 저었다.
콰쾅!
폭음과 함께 전각들이 흔들렸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 따로 없었다. 엄청난 돌풍과 폭음을 일으키며 백천강과 뇌광대사의 싸움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통 무공을 쓰는 뇌광에 반해 백천강의 무공은 패도적이고 악랄했다.
쐐액!
혈죽도가 핏빛을 뿌리며 뇌광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헛!"
뇌광이 신형을 뒤로 날리며 쌍장을 다시 뽑았을 때였다.
쌍장을 드는 순간 드러난 앞가슴의 헛점을 향해 혈죽도가 찰나의 여유도 없이 파고 들었다. 혈죽도는 한 치의 틈도 없이 뇌광을 괴롭혔다.
백천강은 물이 흐르듯 여유롭게 이어지는 공격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그의 일초식 일초식은 소림무공의 약점을 무자비하게 찌르는 것이었다.
극도로 짧은 순간에 십합이 펼쳐졌다. 십일합째였다.
"으윽!"
백천강의 혈죽도 끝에서 싸늘한 강기가 뇌광대사의 가슴을 노리며 폭사되었다.
뇌광대사는 그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피를 뿜으며 뒤로 삼 장이나 튕겨나가 뇌광대사의 오른쪽 가슴으로부터 시뻘건 선혈이 물컹거리며 치솟았다.
"핫핫핫...! 얼마든지 덤벼봐라. 소림의 돌중들아!"
휘익!
광소와 함께 백천강은 신형을 풍차처럼 돌렸다. 이어 그는 찰나지간의 여유도 두지 않고 고승들을 덮쳤다.
"아미타불!"
"아수라(阿修羅)의 화신(化身)이로다!"
마침내 더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뇌정대사가 녹옥불장을 꼬나들며 나섰다. 그러자 뇌우와 뇌명에 뒤이어 혜천도 신형을 솟구쳐 올리며 공격에 합세했다.
차차차... 창!
선장(禪掌)과 계도(戒刀)가 살기를 내뿜으며 허공을 날았다.
"핫핫핫! 소림무공이 겨우 이것뿐이더냐?"
츠츠츠츳!
백천강은 오싹한 웃음을 흘리며 비검과 혈죽도를 신랄하게 휘둘렀다. 그는 사인의 고승들을 무자비하게 몰아부쳤다. 그의 무공은 악랄하고 패도적이었다. 물론 내력도 측량할 길이 없었다.
콰쾅!
백천강은 무척이나 부드럽게 팔을 놀렸다. 그러나 그 위력은 대단했다. 가공할 위력을 지닌 살기가 뻗쳐나오자 고승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풍객의 무공이 그토록 높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마침내 뇌정대사는 녹옥불장을 번쩍 들었다.
"십팔나한진을 펼치시오!"
그순간 소림십팔대법사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리며 백천강을 에워쌌다.
우우우웅.......
마침내 소림 최고의 고승들은 신형을 움직이며 나한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천강은 결코 우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물러나려는 뇌광과 뇌우, 뇌명, 혜천을 놓아주지 않았다.
츠츠츠... 번...쩍!
그는 연신 뒤로 물러서려는 네 고승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렇게 되니 자연 나한대진도 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수라벽력강(修羅霹靂 )!"
엄청난 경력의 강기가 백천강의 몸에서 줄기줄기 뻗었다.
꽈르릉... 꽈꽈꽝!
"으악!"
네 고승들이 일제히 비명을 토해내며 신형을 날렸다. 고승들이 신형을 날려 백천강의 공격을 피했을 때였다.
"금강항마법력강(金剛降魔法力 )!"
십팔대법사들이 일제히 외치며 쌍장을 뻗었다. 열여덟 줄기의 태산도 무너뜨릴 강기가 백천강에게 뻗었다.
꽈꽈꽝... 콰르르릉.......
천번지복(天飜地覆)에 견줄만한 엄청난 폭음이 터지며 불병각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러한 와중에서 각기 다른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뇌정을 비롯하여 뇌우, 뇌명, 혜천 등은 입과 코로 피를 뿌리며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백천강도 성한 몸이 아니었다.
십팔대법사의 합공은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백천강은 그들의 공격을 한몸에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죽립은 어느 곳으로 날아갔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옷자락은 갈기갈기 찢겨 당나무에 걸린 깃발처럼 너덜거렸고 안색은 백지장이었다. 입과 코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렀다.
그러나 그의 마기만은 여전했다.
"크핫핫핫...! 소림은 그래도 미약한 힘이나마 지니고 있군. 그러나 소림이 멸망할 날이 반드시 있으리라. 그럼 오늘은 이만......."
휘익!
백천강은 암흑 속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막으시오!"
가까스로 녹옥불장에 몸을 지탱한 뇌정대사가 일갈을 토해냈다. 십팔대법사가 일제히 장력을 날렸다.
콰쾅!
장력을 받은 백천강의 몸이 수십 번이나 회전하면서 암천 높이 떠올랐다.
"크핫핫핫...! 기다려라. 소림은 소멸될 것이다."
백천강은 십팔대법사의 장력을 이용해 삽시에 삼십 장이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면서 한 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백천강의 처절한 음성이 장내를 휩사고 감돌며 긴 여운을 남겼다.
"오...! 악마... 악마로다!"
"아미타불! 대혈성(大血星)이 나타났도다!"
장내에 남아 있던 고승들은 모두 눈을 내려 감으며 합장불호했다. 그들의 승포가 떨리는 것이 암흑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③
어둠을 가르며 소림사로부터 한 흑영이 불혼애(佛魂崖)를 향해 날고 있었다.
날아오던 흑영은 암흑 속에서도 시퍼렇게 살아 빛나는 청죽림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후두둑.......
비도 오지 않는데 죽엽(竹葉)을 두드리는 물방울소리가 나면서 비릿한 혈향이 풍겨오르는 것이 아닌가?
피!
청죽의 잎을 때리며 떨어지는 것은 시뻘건 핏방울이었다. 흑영은 몸으로부터 선혈을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흑영은 쾌속무비한 신법으로 청죽림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는 연신 핏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흑영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그는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는 상세를 입고 있었다.
'과연... 소림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백천강은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십팔대법사들의 금강항마법력강의 위력은 가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천강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하고 냉혹했다.
휘익!
백천강은 어둠을 가르는 야조처럼 날아갔다. 그가 가고 있는 곳은 소림사의 반대편에 있는 한 절애(絶崖)였다.
휘이이우우웅.......
가파른 절벽을 거슬러 오른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귀신의 울음을 운다.
불혼애(佛魂崖).
불혼애는 소림의 최대금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소림사의 방장이라 해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일반 고승들의 접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불혼애. 그곳은 바로 소림사상 최고의 기재로 꼽히는 일대신승 천무대선사가 머무르고 있는 곳이었다. 그는 십수 년 동안 한결같은 동작으로 거대한 불상을 깎으면서 그곳에서 참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휘이이잉.......
한 차례 음풍이 부는 듯했다. 그 순간 혈향과 함께 한 흑영이 거짓말처럼 불혼애에 내려섰다.
"......!"
격동으로 인해서인지 미미하게 신형을 떠는 흑영은 다름아닌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잠시 후에 가까스로 떨리는 신형을 억제했다. 뒤이어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불혼애의 전면을 노려보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절벽의 중간지점으로 방원 오십 장 정도의 넓이를 지닌 평평한 곳이었다. 앞쪽은 석벽이 가로막았고 뒤는 벼랑이었다.
벼랑 뒤쪽에는 한 칸의 석옥이 있었다. 한순간 백천강의 눈에서 혈광이 솟아났다.
맞은편 석벽. 그곳에는 놀랍게도 미완성의 거대한 석불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음각화된 석불은 입상불(立像佛)의 형상이었다. 크기는 엄청났다. 키만 해도 능히 오십 장에 이를 정도였다. 실로 엄청난 크기의 불상이 절벽 위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런 석불을 새겼으리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칠흑의 어둠 속이라지만 부처의 외형만큼은 뚜렷하게 드러났다.
불상의 외형은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다만 얼굴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대자대비한 부처의 입가에 감돌아야할 미소, 즉 염화시중의 미소가 아직 새겨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백천강은 석벽에 새겨진 불상의 얼굴을 한동안 쏘아보았다.
그의 눈길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서는 한없이 풍요로와 보이는 가슴께에 멎었을 때였다.
"......!"
백천강은 돌연 화살이라도 맞은 듯이 전신을 격렬하게 떨었다.
마지막 웃음이 완성되지 않은 불상의 발치 아래. 한 인영이 가부좌를 튼 채로 어둠의 일부인 양 미동도 없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인영의 뒷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인영은 일신에 잿빛의 승포를 입고 있었다. 그의 머리칼은 길게 자라 허리를 가릴 정도였다.
인영의 뒷모습에는 처절한 고독감이 배어 있었다. 더불어 세월을 인내하는 뼈저린 참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모습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극기하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백천강은 전신의 피가 세차게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툭!
움켜쥔 손아귀에서 따뜻한 핏방울이 하나 떨어져 내렸다. 너무나 억세게 움켜쥔 탓에 손바닥을 손톱이 파고 들어간 것이다.
그때였다.
"왔느냐?"
한없이 자애스러운 음성이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부르르!
백천강은 그 순간 신형을 부르르 떨었다. 그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진 흑의가 세차게 나부꼈다. 분명 바람 탓은 아니었다. 지나친 긴장과 격동이 그런 현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한없이 자애스런 음성.
그것은 바로 불상 앞에 앉아 있는 회의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네가 바로 천강, 그 아이임이 틀림없느냐?"
"......!"
다음 순간 회의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천시지청술(天視地廳術)로 네가 소림사에서 한 얘기를 모두 들었다. 네가 수련의 아들이라니......."
순간 백천강은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다... 닥쳐라! 네가 입에 담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툭... 툭........
움켜쥔 백천강의 손아귀에서 핏방울이 계속 떨어져 내렸다.
백천강의 악다구니에 회의인은 잠시 훔칫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입을 열었다.
"누가 뭐래도 너는 내 아들이다."
그순간 백천강이 저주하듯 외쳤다.
"더러운 자! 천무 너에게 그런 자격이 있단 말이냐?"
완성되지 않은 불상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회의인.
그는 다름아닌 천무대법사였다. 소림사상 최고의 기재이자 이십여 년 전 대마성을 무너뜨린 무림맹의 맹주인 천무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천무. 그는 바로 불미스럽게 태어난 백천강의 부친이었다. 대마성의 셋째 제자였던 백수련을 추적 끝에 겁간한 사나이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것은 정해진 운명이었는지, 아니면 하늘의 실수로 맺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불행한 부자지간의 첫 상봉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④
"아이야."
천무대법사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백천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격동되는 가슴을 억누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는 독수리가 병아리를 노리듯이 천무의 등짝을 노려볼 뿐이었다.
"너는 내가 왜 이십 년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으며 오직 불상만 깎았는지 아느냐?"
"......."
천무의 음성은 무척이나 낮았다. 또한 그 음성은 한없는 떨림을 가지고 있었다.
무한한 고통이 담겨져 있는 천무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파계를 한 나의 죄업을 참회하기 위해서 였다. 불도를 이루어야 할 손을 피에 젖게 하고... 색을 범한 씻을 수 없는 죄를 참회하기 위해서 였다."
"닥쳐라! 듣... 고 싶지 않다!"
백천강은 울부짖듯이 외쳤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다!"
"원수... 라고......?"
천무대법사의 몸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렇다. 너는... 어머니를 죽게 한 원수일 뿐이다. 위선의 탈을 쓴 색마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사문이자 나의 사문이기도 한 대마성의 원수이기도 하다!"
백천강은 분성을 토해내듯 외쳤다. 그 순간 천무대법사는 앉은 채 부르르 떨었다.
"대마성이... 너의 사문이라고?"
천무는 외마디 절규같은 말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
백천강은 천무대법사의 시선을 맞닥트리는 순간 심장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천무대법사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럴 수가!"
"으으음!"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똑같이 경악성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백천강은 자신의 눈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완벽했다. 너무나 완벽한 모습이었다. 천무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을 너무도 닮아 있었다. 판에 박은 듯이 닮은 듯이 천하절세의 용모를 가진 아버지와 아들.
오로지 달라보이는 것은 나이 차이와 기질뿐이었다.
백천강은 차고 냉혹한 얼굴인 반면 천무대법사는 고통과 인고가 배인 얼굴이었다.
두 부자는 얼어붙은 듯이 서로의 얼굴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먼저 입을 연 것은 천무였다. 억누를 수 없는 격동 탓이었을까? 헤아릴 수 없는 애정을 담은 천무의 음성이 뜻밖에도 가늘게 떨렸다.
"아이야. 너는 나를 꼭 닮았구나."
"크흐흑...! 저, 저주한다!"
백천강은 피눈물을 뿌리며 돌연 손을 들었다.
파츠츠츳!
비검이 묵광을 뿌렸다. 그순간 바닥으로부터 불꽃과 함께 돌먼지가 일었다. 찰나지간,
크르르릉.......
굉음과 함께 백천강과 천무대법사의 사이가 반으로 갈라졌다. 백천강은 비검으로 땅바닥을 자른 것이다.
"이것으로... 이것으로... 부자의 인연은 끊어졌다!"
백천강은 끓어오르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것을 알림과 동시에 철저히 백도를 무너뜨리겠다는 선언을 하기 위해서다!"
"아... 아이야!"
천무대법사는 경악했다. 백천강은 조소와 함께 냉혹한 말을 계속 내뱉았다.
"훗훗훗...! 지켜보라. 나 사풍객이 어떻게 백도를 궤멸시키는가를.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이 비검을 너의 더러운 심장에 꽂겠다!"
"아... 아미타불!"
너무도 끔찍한 선언이었다. 천무대법사는 그만 두 눈을 감고 불호를 외웠다.
"훗훗훗! 머지않아 모든 것이 실현될 것이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아주 철저히 부술 것이다!"
"아미타불!"
문득 불호를 토해내던 천무대법사의 미간에 홍광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살기였다.
'지금이라면 이 아이를 죽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천하는 평화로와진다.'
천무대법사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는 천하창생을 위해 부정(夫情)을 버리고 또다시 파계하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당연했다. 아무리 피를 나눈 자식이라지만 엄청난 마성으로 세상을 피의 혈겁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아들을 어떻게 두고만 볼 수 있겠는가?
"아미타불... 아미타... 불......!"
하지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건 자식에 대한 이기적인 애정 때문이 아니었다. 연신 불호를 읊어나가는 천무의 전신에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아! 내가 또다시 살의를 일으키다니... 결국 모든 것이 허사다. 법력마저도.... 그러기에 불상에 새겨야 할 부처님의 미소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뜨거운 눈물이 일대신승 천무대선사의 뺨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훗훗! 거짓 눈물을 흘리는군. 더럽고 추악한 자! 이제 너의 눈에 피가 흘러내릴 것이다!"
백천강이 증오스런 말을 퍼부었다.
다음 순간 천무는 눈을 떴다. 그는 한없이 자애로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이야. 나를 보아라."
"......?"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옮기다가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한 줄기 미소 때문이었다. 천무대법사의 얼굴에 어느덧 부처의 해맑은 미소가 어려있는 것이 아닌가?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백천강의 가슴에 뜻밖에도 따스하고 평화로운 온기가 살아났다.
'아, 아버지!'
하마터면 그는 앞으로 달려나가 상대의 품에 안겨 펑펑 울 뻔 했다. 천무대선사의 미소는 평범한 미소가 아니었다.
대항마불현소(大降魔佛玄笑).
천무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달마절예(達磨絶藝) 중 극히 고강한 대법력이었다.
으드득!
한순간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자 백천강의 입에서 억센 광소가 터졌다.
"크하하하핫......!"
백천강은 순식간에 야차(夜叉)처럼 변했다.
바로 소녀미향탈심대법(素女迷香奪心大法)의 야차혈왕소(夜叉血王笑)를 전개한 것이다.
"아미타불!"
찰나지간 천무대법사는 휘청거리며 힘찬 불호를 외웠다. 바로 그때였다.
"크윽!"
백천강은 사발만한 핏덩이를 왈칵 토해냈다. 이어 그는 폭풍에 휩쓸린 듯이 이십 장이나 뒤로 날라갔다. 백천강은 거대한 바위에 몸을 부딪치고 말았다.
"끄으윽!"
백천강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음공(音功)이 실린 천무의 대사자후에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백천강은 가까스로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이어 그는 입가로 흐르는 선혈을 씻을 생각도 않고 떠듬거리며 외쳤다.
"천무! 날 낳게 했으나 내가 죽어야 할 자...! 다시 만나는 날 반드시 네 가슴에 비검을 꽂겠다!"
백천강은 절규하듯 말을 끝마쳤다. 동시에 그의 몸이 쓰러지듯 컴컴한 불혼애 아래로 떨어져갔다.
휘이우우웅.......
세찬 음풍이 불혼애 아래로부터 회오리치듯 불어왔다.
"아미타불! 그 아이가... 그 아이가... 정성과 마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니... 불행중 다행이란 말인가?"
천무대법사의 탄식이 들렸다.
'대항마불현소와 대사자후... 그리고 불가의 비기 중 비기인 불령무한통심술(佛靈無恨通心術)을 써보았다. 그 결과 아이는 가공할 마성을 지니고 있지만 정성도 갖고 있었다. 아아! 결국은 마가 극에 이른 극마지기(極魔之氣)가 꺾인 이후에야 정성을 찾는단 말인가?'
천무대법사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이 그 아이가 무림의 중죄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타불. 모든 것이 나의 죄과인 것을!'
내심 중얼거리던 천무대법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아이의 무공은 너무도 강하다. 그의 적수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그 아이를 저지할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득 격동으로 떨리던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유성. 그렇다. 그 아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휘이잉!
세차게 부는 바람이 부르짖는 천무의 회색빛 승복자락을 세차게 날렸다. 다음 순간 천무대법사는 석불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손을 뻗어 녹슨 정과 쇠망치를 들고서는 석불의 얼굴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새기리라. 무한한 불법을 지난 부처님의 미소를. 그 미소로써 모든 마풍을 거두리라."
잠시 후.
쩡... 쩡... 쩡.......
바람을 타고 정을 때리는 쇠망치소리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준비하리라. 천하의 혈란을 막을 준비를......."
힘이 깃든 천무대법사의 음성이 망치소리를 타고 불혼애 아래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