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장 뜻밖의 정사(情事) (21/54)

 18장  뜻밖의 정사(情事)

지난 사흘 동안 악진원은 마치 여우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사흘 전 그는 하북(河北)의 석문(石門)에 위치한 화양객점에서 무림구공자와 만날 예정이었다. 약속시간까지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제 시간에 화양객점에 도달할 수 없었다. 이유는 바로 석문에 도착하기 직전에 맞닥뜨린 괴이한 사건 때문이었다.

석문을 불과 오십 리 가량 남겨두었을 때였다. 그는 이름없는 얕으막한 산기슭에 닿았다. 

하북의 가을(秋)은 중원 어느 곳보다 빨리 찾아왔다. 산기슭에는 어느덧 선홍의 단풍들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단풍들은 고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며 가을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악진원. 

그는 무림구공자의 일원이기 이전에 풍부한 감성을 가진 한 인간이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이번 여행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비롯하여 무림구공자들의 신변에 관한 일 때문에 하는 여행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악진원의 마음은 느긋했다. 

아무리 중차대한 일 때문에 하는 여행이라지만 충분한 시간이 그에게 만추(晩秋)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던 것이다.

그는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가을의 경치를 감상하며 석문으로 향했다.

그가 선홍의 막 단풍이 우거진 야산 기슭을 지날 때였다.

"아악!"

어디선가 가련한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럇!"

악진원은 급히 비명이 들린 곳으로 말을 몰았다. 

그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간 숲 속. 그곳에는 한 명의 여인이 녹림무리들에게 겁탈당하기 직전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의분을 금치 못했다. 명색이 무림구공자로서 협명을 가지고 있던 그가 아닌가 말이다. 

악진원은 가차없이 녹림무리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천하의 몹쓸 놈들! 벌건 대낮에 여인을 겁탈하다니!"

표호를 내지르며 악진원은 녹림도적들을 덮쳐갔다. 이어 그는 유감없이 악씨세가의 가전절학인 전궁십팔섬(電穹十八閃)을 발휘했다. 

그는 단 일도에 여덟 명이나 되는 녹림무리들을 가차없이 황천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는 겁탈당하기 직전의 여인을 구해냈다.

옷이 걸레쪽처럼 찢겨나간 여인은 빈사지경(瀕死地境)이었다. 그녀는 전신에 비침(飛針) 따위의 암기를 맞았던 것이다. 여인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악진원은 급한 대로 그녀를 구한 뒤 가까운 곳의 객점에 들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충분히 약속 시간에 화양객점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귀신에 씌운 것일까? 정신을 잃은 여인을 객점의 침상에 눕혔을 때, 악진원은 자신의 목숨과 관계되는 중요한 약속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여인의 육체 탓이었다. 여인은 분명 빈사지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여인의 육체는 갓 목욕을 하고 잠에 든 것만 같았다.

"......!"

이름도 모르는 여인의 육체를 바라보는 악진원의 눈썹이 가늘게 떨었다.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여체의 곳곳에 생긴 푸른 반점. 그것은 바로 독암기(毒暗器)가 파고 든 흔적이었다. 

그 반점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육봉에 두 군데를 비롯하여 학같이 가는 목에 한 군데, 대리석같은 허벅지에 세 군데, 둔부에 두 곳, 그리고 방초 우거진 여인의 중지에 나 있었다. 도합 아홉 곳이었다. 

정말 보기드문 미녀로써 나이는 대략 삼십을 전후해 보였다.

이미 사내를 익히 알만한 성숙한 나이여서인지 익을 대로 농익은 여체는 가히 폭발적인 유혹을 내뿜고 있었다.

'대체 어떤 부인이길래 혼자 길을 가다 수난을 당한 것일까?'

악진원은 의아심을 느꼈다. 

그러나 벌거벗은 육체 앞에서 악진원의 이성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여체를 내려다보는 악진원의 안면근육이 시간이 흐를 수록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정말 뇌쇄적이군."

그는 야릇한 신음을 흘리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의 안색이 변했다.

'이럴 수가?'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체를 내려보고 있는 사이 점차 단전 어림이 뜨거워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남자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심 경악해하던 악진원은 새삼스럽게 몇 년 전의 일을 기억해냈다.

낙양의 북망산이었다.

천하를 혼란에 빠뜨리던 희대의 색녀. 사풍색혼소(死風色魂笑)라고 했던가? 그 색녀의 백치같은 미소가 걷잡을 수 없이 그를 욕정 속에 빠뜨렸던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그때도 나는... 불구(不具)였다......."

악진원은 불현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허공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욕정을 느꼈다. 분명히 그랬다.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교홍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오늘 또다시 그것을 느끼다니......."

악진원의 호흡이 점차로 가빠졌다. 이어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악진원의 열기 가득한 두 눈은 정신을 잃은 여체의 구석구석을 탐색해 나갔다. 눈에서 발산되는 열기는 무척이나 뜨거운 것이었다. 그 열기에 의해 여체는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타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곧 정신을 추스렸다.

'우선은 독침을 제거해야 겠구나.'

악진원은 곧 여체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는 푸른 반점이 돋아난 탱탱한 젖가슴에 입을 갖다댔다. 젖가슴을 덥썩 문 악진원은 힘껏 여인의 젖무덤을 빨았다.

"ㅌ!"

마침내 입을 뗀 그가 입속에 고인 것을 뱉어냈다. 우모침(牛毛針)이 든 시커먼 핏덩어리였다. 

여인은 우모침에 당했던 것이었다.

악진원은 차례로 여인의 상처부위에 입술을 대고 빨았다. 그의 입술은 서슴없이 여인의 나신 곳곳을 누볐다.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의 두 곳과, 동산을 연상케 하는 둔부까지도 빨았다.

이제 마지막 한 곳이 남아 있었다.

"흐음!"

그는 질식할 듯한 방향에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악진원은 여인의 중지에 입술을 얹었다.

마침내 그는 여인의 비밀스러운 곳에서 한 웅큼의 독혈과 우모침 하나를 빨아냈다. 

여인은 여전히 인사불성이었다.

한동안 여인을 내려다보던 악진원은 아쉬운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여인의 몸을 이불로 덮어 주었다. 

악진원은 곧 눈을 감고 운공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머리 속에는 석문의 무림구공자와의 회합 따위는 잊혀진 지 오래였다.

그로부터 사흘이 흘렀다.

사흘 동안 악진원은 정성을 다해 여인을 간호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여인이 마침내 정신을 되찾았다.

"여... 여기는......?"

"안심하시오 부인. 이제야 정신이 들었구려."

부인을 내려다보고 있던 악진원이 반가운 듯이 말했다.

"어... 어떻게 제가 이곳에?"

악진원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게 또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흑흑흑!"

악진원이 말을 끝냈을 때였다. 연인이 불현듯 침상에 얼굴을 묻고는 오열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부인!"

악진원은 난처한 듯이 중얼거렸다. 

"흐흐흑!"

여인의 오열은 격렬했다. 그녀는 어깨를 바르르 떨며 서럽게도 울음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여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금침자락이 한순간에 흘러내렸다. 눈부신 어깨가 드러났다.

"흐흑흑.... 여인의 정조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제 외간남자의 손에 모든 것을 보였으니... 흑흑! 천녀는 이제 죽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여인은 오열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악진원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여인을 달래었다.

"하지만 부인. 이번 일은 경우가 다르오. 부군께서는 이해하시리라고 믿소."

그 말에 여인이 고개를 쳐들었다. 여인은 눈물 그렁한 눈으로 악진원을 바라보았다.

"천첩은 부군이 없사옵니다. 오래 전에 부군께서 타계했사옵니다. 하오나... 흐흑!"

또다시 여인이 어깨를 들먹이며 애처롭게 흐느꼈다. 부드러운 어깨가 가녀리게 떨리며 탐스러운 젖가슴이 흔들렸다.

그것은 완벽한 미태(美態)였다.

흐느끼는 여인의 모습은 참으로 안스러웠다. 그런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남자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그 여인이 절세의 미인일 때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으음. 이럴 수가.'

악진원은 이빨을 앙다물며 내심 절규를 토하고 있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그의 신체 일부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주... 죽은 나무에도 꽃이 필 수 있단 말인가?'

내심 절규하던 악진원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침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염려할 필요가 없지 않소?"

그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네......."

여인이 눈물 그렁한 얼굴을 들었다. 

악진원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거렸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몸매였다. 특히 여인의 아름답고 눈부신 얼굴은 그의 혼을 빼앗는 듯했다.

악진원은 뚫어져라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섬섬옥수로 자신의 젖가슴을 가렸다.

그 순간 악진원은 엉겁결에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부인을 책임지겠소!"

"저... 정말인가요?"

놀란 듯이 여인이 소리쳤다. 악진원을 바라보는 여인의 두 눈에 야릇한 광채가 일었다. 그 광채는 순식간에 악진원을 어떤 환각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저... 정말이오."

그는 내뱉듯 말함과 동시에 침상으로 쓰러졌다.

"다... 당신을... 갖고 싶소."

악진원은 다짜고짜 여체를 끌어 안았다. 

돌연 여인이 몸을 묘하게 비틀었다. 그 순간 여인의 알몸이 악진원의 품을 벗어났다. 그것은 오히려 악진원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아... 제발... 부탁이오!"

악진원은 온몸의 혈맥이 폭발할 듯한 괴로움을 느끼며 여체를 다시 끌어 안았다.

"음.... 이러면 안돼... 으음!"

여인은 다시 악진원의 품 안에 갇히고 말았다. 여인은 비음을 터뜨리며 뒤로 쓰러졌다. 그 위에 악진원이 덮치듯이 쓰러졌다.

악진원은 짐승처럼 거친 신음을 토해냈다. 그는 터질 듯한 여인의 젖가슴에 미친 듯이 입술을 비벼댔다.

여인은 능수능란했다. 그녀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사내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악진원은 짐승이 되어 여체를 짓이겼다. 마침내 여인의 육체에도 불이 붙기 시작했다. 

여인은 섬섬옥수를 움직여 악진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악진원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체가 되었다.

"으음!"

두 사람은 뜨겁게 얽혀들었다.

악진원의 애무는 짙었다. 그의 애무에 여인의 몸은 달아오를대로 달아 올랐다. 

뜨거운 신음과 함께 여인이 두 다리를 살짝 벌리며 허리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악진원의 우람한 허리가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여인은 갈증이 난 듯이 뜨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곧이어 여인은 손을 아래로 뻗어내렸다. 악진원의 배꼽을 후비던 길다란 손톱 끝이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악진원의 무성한 수풀이 여인의 손가락을 파묻었다. 수풀을 헤집던 여인의 손이 무엇인가를 움켜쥐려는 듯이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였다.

"앗!"

여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그녀는 자지러질 듯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악진원은 그녀의 경악성을 듣지 못했다. 악진원은 허기진 어린 아이처럼 여인의 젖가슴을 빨아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미친 듯이 몸부림칠 뿐이었다.

"부... 불구(不具)일 줄이야!"

여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새어나왔다. 바로 그 순간 악진원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이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참으로 뜻밖의 사태가 그 순간에 벌어졌다.

여인의 섬섬옥수.

미세하게 떨리던 여인의 손가락이 악진원의 목과 등을 어루만지듯이 하면서 요혈을 눌러갔던 것이다.

"윽!"

악진원은 단숨에 천주혈(天柱穴)을 비롯하여 신당혈(神堂穴)과 명문혈(命門穴)을 눌리고 말았다. 

그는 곧바로 축 늘어졌다. 그 순간 여인은 뱀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그의 몸 아래서 빠져 나왔다. 

여인은 나신 그대로 악진원을 내려다 보았다. 어느 순간 그녀의 얼굴에 곤혹의 빛이 어렸다.

"정말 뜻밖이야. 무림구공자 중의 하나인 섬혼검 악진원이 남자 구실을 못하는 불구자였다니......"

그녀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악진원을 내려다 보는 것이었다. 잠시 후 여인은 또다시 중얼거렸다.

"호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를 유혹할 수 있게 했다니. 과연 소녀미향탈심대법(素女迷香奪心大法)의 위력은 고금제일이라 할만 하구나."

여인의 붉은 입가에 한순간 의기양양한 미소가 어렸다.

"헉! 이... 이럴 수가!"

눈을 뜬 악진원은 혼비백산하여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는 놀란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

그의 눈에 지울 수 없는 의혹이 담겼다. 그는 내처 중얼거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는 다시 한 번 사방을 둘러보았다. 뒤이어 자신의 품 속에서 잠든 여인을 보았다.

분명 그 객점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그가 품에 안고 있는 여인도 낯이 설었다. 그녀는 전혀 낯선 여인이었다.  

그가 녹림당 패거리들에게서 구해낸 여인은 유난히 길면서도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지금 그의 옆에서 엎드려 잠든 여인은 머리를 틀어 올리지 않았는가? 그는 즉시 엎드린 여인을 바로 눕혔다.

"윽!"

찰나지간 악진원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는 거대한 쇠뭉치가 뒷통수를 크게 때리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뒤이어 악진원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튕겨 일어났다. 그리고는 창백하게 외쳤다.

"소... 소운부인!"

소운부인(素雲婦人).

그녀는 바로 악진원의 의붓 어머니였다. 그의 생모가 죽은 뒤 부친인 악지명이 후실로 맞아들인 여인이 바로 소운부인이었던 것이다.

그 소운부인이 전신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채 자신과 함께 침상에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으으... 이럴 수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악진원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무나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의 이성은 완전히 얼어붙고 마는 듯했다. 그러나 무림구공자라는 위명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소... 소운부인!"

악진원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렸다. 이어 그는 절규하듯 부르짖으며 여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악진원의 손끝이 여인의 탐스러운 어깨를 흔들었다. 바로 그 순간 악진원은 뜨거운 불꽃에 데이기라도 한 듯이 다급하게 손을 움츠렸다.

싸늘했다. 여인의 어깨는 뜻밖에도 얼음장처럼 싸늘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악진원의 눈에 소운부인의 목덜미가 들어왔다.

"헉!"

그는 한순간에 경직되고 말았다. 

벌거벗은 소운부인의 가녀린 목에는 선명하게 손자국이 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자명했다.

간살(姦殺).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의붓 어머니를 범하고 살해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으으으... 아니야! 난 아니야!"

악진원은 미친 듯이 외치며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방 안은 너무 비좁았다. 불과 세 걸음도 물러나지 못해 무엇인가가 그의 어깨를 움켜쥔 것이었다.

"헉!"

악진원은 공포를 느끼며 급히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어깨를 움켜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벽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다가 벽과 부딪힌 것이다.

악진원의 등줄기로부터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휴......."

악진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악진원은 급히 침상으로 다가가 옷을 주워입기 시작했다.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악진원은 먼저 허겁지겁 바지를 꿰어 입었다. 뒤이어 허리끈을 묶지도 못하고 상의를 집어들었다. 

그때였다. 무엇인가 무거운 것이 말려진 상의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철커덕!

그것은 한 자루의 고색창연한 보검이었다.

"아니, 뇌전신검(雷電神劍)이?"

악진원의 두 눈이 또다시 부릅떠졌다.

그것은 분명 가문의 보검이었다. 그 보검이 자신의 웃옷과 함께 있다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악진원의 머리가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악진원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 대체 누가 이런 함정을 파놓은 것이란 말인가?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악진원은 공포에 질린 눈을 돌렸다. 그의 눈이 이번에는 사지를 뻗은 채 죽어 있는 소운부인을 향했다. 이유는 몰랐다. 그러나 분명 누군가의 가공할 음모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악진원은 직감했다.

'달아나야 한다!'

불현듯 그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뇌전신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옷을 걸쳤다. 한시라도 빨리 이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진원은 허둥거렸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악진원은 이빨을 깨물며 속으로 수십 번 다짐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치면서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무림구공자로서의 패기와 용기가 그 순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음모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악진원이 막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쿵! 쿵! 쿵!

누군가가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악형! 소제를 만나기로 해놓고 웬 늦잠이오? 원......."

"......!"

순간 악진원은 찬물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패... 팽무위가!'

그 음성은 분명 팽무위의 음성이었다. 그는 바로 무림구공자 중의 일인인 하북(河北) 전궁세가(電穹勢家)의 탈백신도(奪魄神刀) 팽무위(彭武韋)의 음성이었던 것이다.

"패... 팽형이 어떻게 여길 오셨소?"

악진원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하하하...! 악형. 어떻게 된 것 아니오? 소제에게 이곳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해놓고선 모른다는 것이오?"

"내... 내가 팽형을 만나자고 약속을 했단 말이오? 으으......!"

악진원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었다. 이제 모든 것이 자명해졌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흉수는 자신의 이름을 도용하면서까지 팽무위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 그렇다면 녹림당에게 겁탈을 당하고 있던 그 여인도 나를 함정에 몰아넣기 위한 술책이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풀리지 않는 의혹이 악진원을 괴롭혔다. 그와 함께 때늦은 깨우침이 악진원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다시 소운부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이 상황은 입이 백 개가 있어도 변명할 길이 없다!'

절망이 그를 엄습했다.

정말이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흉수의 계락은 치밀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흉수가 자신을 노리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쾅!

악진원은 신형을 창문으로 날렸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창문을 뚫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엇! 악형! 왜......?"

팽무위가 경악성을 발하며 급히 방문을 열었다.

"아니? 이... 이 여인은 백모(伯母)! 이럴 수가! 그럼 악형이?"

경악에 찬 팽무위의 음성이 방 안을 진동했다. 그 순간 악진원은 미친 듯이 외치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난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무림구공자의 일인이자 악가장의 소가주인 섬혼검 악진원의 돌연한 광기(狂氣)로 인한 악씨세가의 파멸은 그것 자체로써 중원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 악진원이 미쳐서 그의 부친을 죽였다!

...... 그는 악가장(岳家莊)의 충복과 가신(家臣)들을 살해했다!

...... 악진원은 그의 양모인 소운부인을 범한 뒤 목졸라 죽였다!

...... 악가장은 악진원에 의해 완전히 멸문되고 말았다.

발없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중원 전역을 전염병처럼 떠돌았다.

그 어찌 청천벽력이 아니겠는가? 

무림구공자의 한 명으로 장래가 구만 리같은 젊은 기재가 한순간에 미쳐 부친을 죽이고 양모를 간살하는 대패륜을 저지른 것이었으니.

무림은 뜻하지 않게 터져나온 악씨세가의 불행한 사건을 앞에두고 점차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전궁세가(電穹勢家).

전궁세가는 무림구대세가의 하나로써 하북(河北)의 태원부(太原府)에 자리잡고 있었다. 전궁세가가 태원부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사백 오십 년 전의 일이다. 

전궁세가의 시조는 파기사단(巴畿舍端)에서 무역을 위해 중원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참혼신정도(斬魂神正刀) 팽천(彭天).

전궁세가의 가주인 참혼신정도 팽천은 칠십이로전궁도법(七十二路電穹刀法)으로 사백 년 동안 전궁가를 계승해온 제 팔대가주(八大家主)였다.

그는 말년에 들어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맡기고 전궁가에 틀어박혀 활동을 하지 않았다.

탈백신도(奪魄神刀) 팽무위(彭武韋).

참혼신정도 팽천의 아들인 그는 무림구공자 중의 한 명이었다.

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였다.

쏴아!

사위는 어둑어둑했다. 음력 구월에 접어든 저녁 무렵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비는 몹시도 괴괴한 느낌을 주었다.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비 속에 웅대한 장원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스스스.......

유시(酉時) 말이었다.

전궁세가를 향해 빗속을 뚫고 유령처럼 날아드는 인영이 있었다. 인영은 웅대한 장원의 대문 앞에 내려섰다. 인영은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흑의인이었다. 

쿵 쿵 쿵!

흑의인은 굳게 닫힌 대문 앞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주먹을 들어 대문을 세 번 두드렸다.

"누구냐?"

대문 안쪽에서 걸직한 장한의 음성이 들렸다. 죽립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냐니까?"

끼익!

문이 열리며 기골이 장대한 무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헉!"

무사는 노한 눈초리로 죽립인을 노려 보았다. 그 순간 무사는 어깨를 움찔 떨면서 헛바람을 들이켰다. 바로 죽립인의 전신에서 풍기는 냉기 때문이었다.

죽립인은 죽립을 벗었다.

"억? 고... 공자님이셨군요! 휴우... 난 또......."

중년무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대문을 활짝 열며 공손히 읍했다. 

죽립인.

그는 바로 탈백신도 팽무위였다.

"여... 연락도 없이 돌아오십니까? 더구나 이 비를 맞고......?"

중년무사는 허리를 굽히며 말을 했다.

"아버님은?"

대답 대신에 팽무위는 짧게 물었다. 중년무사가 급히 대답했다.

"서재에 계십니다. 그보다 비월보(飛月堡)의 천아월(千我月) 낭자께서 오셨습니다."

"비월보?"

팽무위가 흠칫했다.

"헤헤.... 중양절날 혼례식을 올리기로 했는데 천낭자가 그 새를 못참고 공자님을 뵈러 온 모양입니다. 지금 월영각(月影閣)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팽무위는 무사의 너스레를 잠자코 들었다. 잠시 후 그는 후려치는 빗방울을 피하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헤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중년무사는 재빨리 대문을 닫아 걸었다. 무사는 뒤이어 우산을 받쳐들고 앞장섰다.

전궁세가는 몹시 넓었다. 건물의 엄청난 위용만으로도 하북의 패주다운 성세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두 사람은 여러 채의 대전과 전각을 지나갔다. 그들은 곧 화원으로 통하는 소롯길로 들어섰다. 

화원에도 어느덧 늦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화원 한가운데 월영각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 월영각은 매우 특이했다. 그것은 중원의 건물양식을 닮지 않은 것이었다. 월영각은 크다고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섬세하면서도 고귀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파기사단에서만 나는 한수석(寒水石)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탈백신도 팽무위.

그가 무림구공자로서의 위명을 떨치게 된 것은 바로 도(刀)를 잘 썼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의로웠고 성격도 호탕했다. 

하지만 강직한 외모와는 달리 팽무위는 은밀하게도 두 가지의 취미를 즐기고 있었다.  

하나가 시화(詩畵)를 몹시 즐기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특이하게도 파기사단의 교유 종교인 청진교(淸眞敎)에 심취하고 있었다.

엄밀하게 말해 시화는 팽무위의 취미라고 할 수 있었지만 종교는 취미가 아니었다. 

선조 대대로 전해온 회교의 율법을 신봉하고 지키는 것. 그것은 팽무위에게 살아가는 의미와 참된 진리를 따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가 무림구공자로서 위명을 떨친 것도 따지고 보면 권선징악(勸善懲惡)을 교리로 하는 신앙심 때문이었다. 취미와 신앙심을 위해서였는지는 몰라도 팽무위의 거처인 월영각은 전궁세가의 후원 조용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팽무위는 월영각에 이르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야심하니 아버님은 내일 뵙겠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중년무사는 즉시 물러갔다.

월영각 앞에 선 팽무위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월영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천아월이라........."

그의 눈이 야릇한 광채를 발했다 .

후두둑.......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더욱 세차게 휘몰아쳤다. 마침내 팽무위는 문을 밀고 월영각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바로 빈청이었다.

"누구예요? 위랑(韋郞)이에요?"

안쪽에서 여인의 음성이 울리듯이 들렸다. 그 음성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팽무위는 비에 젖은 죽립을 벗어 벽에 걸며 대답했다.

"그렇소. 월매(月妹)."

"호호.... 왜 이렇게 늦으신 거예요? 이 아월이 위랑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아시나요?"

쏴아......!

내실 안쪽에서 그녀의 음성과 함께 물 끼얹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월은 지금 목욕중이에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

팽무위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일지 않았다. 

그는 잠시 빈청 안을 서성거렸다. 잠시 후 팽무위는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탁자에 앉았다. 

바야흐로 오일만의 귀가였다.

팽무위는 오일 전 전궁가를 떠났었다. 그것은 바로 구공자의 일원인 섬혼검 악진원의 연락을 받고서 였다. 

그런데 악진원을 만났을 때 그가 본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는 바로 미친 까닭에 양모를 간살해 버린 악진원을 본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더욱 끔찍했다. 악진원은 양모를 간살한 것뿐만 아니었다. 그는 그 전에 부친인 악지명은 물론이거니와 숙부와 가신들까지 무자비하게 도륙을 냈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미 악가장의 참화는 무림 전역에 퍼진 후였다.

"무서운 일이야......."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팽무위가 중얼거렸다.

"호호! 뭐가 무섭다는 거죠?"

그 순간 등 뒤에서 은방울이 구르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

팽무위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두 눈에서 일순 신광이 뻗어나왔다.

반나녀(半裸女).

여인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물기에 젖은 윤기있는 흑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비단천으로 젖가슴 아랫부분을 두른 채 서 있었다.

투명한 물방울이 묻어있는 어깨는 대리석처럼 빛났다. 비단천을 붙잡고 있는 가녀린 손가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피부는 빙결같았고 오관은 완미(完美)에 가까왔다.

팽무위의 눈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비단천 아래로 드러나는 무릎과 미끈히 뻗어내린 다리가 드러났다. 그러나 여인의 종아리는 좀 이상했다. 그곳에는 마치 채찍으로 맞은 듯이 푸른 선이 그어져 있었다.

팽무위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미가 어느 순간 파르르 떨었다.

"......!"

그는 비로소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문신이었다. 그녀는 문신을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문신은 뜻밖에도 뱀이었다. 발목 부분에 또아리를 튼 뱀은 종아리를 타고 올라가 그녀의 허벅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광경은 징그럽다기보다도 기묘한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위랑! 아이... 뭘 그렇게 멍청히 봐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여인은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도 득의한 듯이 말했다.

천아월.

그녀는 바로 하북의 명문인 비월보(飛月堡)의 소보주였다. 또한 그녀는 팽무위와 정혼한 사이였다. 전궁가와 비월보가 사돈을 맺은 사실은 무림이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태중정혼(胎中定婚)한 사이였던 것이다.

"월... 월매가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와 보여서......."

팽무위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어색하게 말했다. 양쪽 뺨에 홍조를 띈 천아월이 등을 돌렸다.

"호호.... 위랑이 제게 그런 말을 다 하시다니 정말 기뻐요. 자, 등을 좀 닦아 주시겠어요?"

"......!"

팽무위의 호흡이 문득 뜨거워졌다.

한 장의 비단천만을 두른 팔등신의 쭉 빠진 여체에서는 이성을 아찔하게 만드는 육향이 풍겨났다. 

어쩌면 그녀는 파기사단(巴畿舍端)에서만 나는 극락향(極樂香)을 사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극락향은 최음향의 일종이었다. 그것을 물에 타서 목욕을 하면 온몸에 향이 배이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좋아지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 어서요."

천아월이 재촉했다.

"아... 알겠소."

팽무위는 그녀에게서 수건을 받아들었다. 이어 그는 침을 삼키며 어깨와 팔 등에 맺힌 물방울들을 닦아냈다.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비단수건을 든 팽무위의 손이 천아월의 등을 쓰다듬듯이 닦아나갔다. 순간 그녀는 야릇하게 몸을 비틀었다.

"음!"

그녀는 들릴듯 말듯 비음을 토했다. 이윽고 물기가 모두 제거되자 그녀는 빙글 몸을 돌리더니 팽무위의 목에 매달렸다.

"안아줘요. 위랑."

"......!"

팽무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어 그의 두 눈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팽무위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천아월의 매끄러운 등을 쓸었다.

"혼례가 한 달 후인데 이러면......."

그가 중얼거렸다.

"흐응.... 이번만이 아니잖아요. 새삼스럽게... 어서 안아줘요."

천아월은 가쁜 숨을 내쉬며 할딱거렸다.

천아월.

그녀는 뜨거운 피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정숙하기보다는 정열적인 여인이었다. 

천아월은 오래 전부터 팽무위와 통정을 했다. 아니 팽무위의 손에 길들여진 여인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오늘밤따라 유난히 그녀는 뜨거워졌다.

'아아, 오늘은 위랑이 또 다른 면모를 보이셨다. 차가운 기운이... 그것이 나를 뜨겁게 하고 있어.'

팽무위는 특이하게 성(性)을 즐길 줄 아는 사내였다. 

전궁세가에는 고래로부터 파기사단의 비서(秘書)가 있었다. 그것은 남녀의 성교에 관한 책이었다. 그 책은 성을 통하여 극단적인 쾌락과 함께 절대자(絶對者)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비법을 적은 것이었다.

그 가운데서 팽무위가 천아월에게 적극적으로 가르친 것은 피학증(被虐症)이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싸늘한 냉기를 접한 그녀는 또다른 쾌감에 전율하면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사르르륵.......

천아월의 몸을 두르고 있던 비단천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 순간 요기(妖氣)를 띈 듯한 여체가 드러났다.

"으음!"

쥐면 부러질 듯 가는 허리와 그 아래로 급격히 동산을 이루며 확산된 둔부. 대리석같은 두 다리를 보는 순간 팽무위는 뜨거운 신음을 삼켰다. 

어느새 그의 눈이 시뻘겋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터질 듯한 욕화(欲火) 때문이었다. 실상 그는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끼고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또... 또 불이 붙었다!'

내심 부르짖는 팽무위의 검미가 파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에 한 가닥 잔혹한 표정이 스쳤다.

"어서... 위랑!"

천아월의 몸은 이미 달아 오를 대로 달아 올라 있었다. 그녀는 팽무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엎드렸다. 이어 팽무위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팽무위가 그녀의 나신을 안았기 때문이다.

뜨겁고 격렬한 파도가 침상 위를 휘몰아쳤다.

"으음... 아학!"

천아월은 정말이지 까무라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수십 번은 족할 정도로 팽무위와 사랑을 나누어왔다. 그러나 이토록 화끈한 기분을 느끼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팽무위의 애무는 집요하고도 광포했다.

"아앗!"

젖가슴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고통이 그녀를 찾아왔다. 천아월은 부르르 사지를 뻗었다. 

"......?"

그녀의 눈이 휩떠졌다. 그것은 분명 공포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잔인한 쾌락의 눈빛이기도 했다.

그는 분명 이전의 팽무위가 아니었다. 

천아월. 그녀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팽무위는 절대로 이런 식의 사랑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너무나도 강렬한 쾌락이 그녀의 육체와 정신을 온통 마비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활처럼 몸을 뻗으며 비명을 토했다. 팽무위의 일부가 그녀의 몸 속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천아월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공포였을까?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 표정은 다시 희열로 바뀌었다. 이제 그녀의 육과 영은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오직 팽무위에 의해 조종되고 지배되어지는 애욕의 노예(奴隸)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팽무위의 몸이 하자는 대로, 그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고 울부짖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하아아!"

쥐어짜내는 듯한 쾌음이 그녀의 벌어진 입으로부터 새어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팽무위의 욕정은 식을 줄 몰랐다.

마침내 천아월은 전신이 타버릴 대로 타버렸다. 끝없는 나락에 떨어졌다 떠오르기를 몇 번이나 거듭했을까? 

마침내 그녀는 혼절하고 말았다.

바르르.......

비수(匕首)를 쥔 천아월의 섬섬옥수가 떨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었다. 

그녀는 비수를 움켜쥔 채 침상에 반듯이 누워 잠든 사나이의 가슴을 겨누었다. 사나이는 우람한 육체를 드러내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바로 팽무위였다.

팽무위는 격렬한 정사(情事)를 벌인 후 잠에 취해 떨어지고 만 것이다. 

'이럴 수가 없어. 정말이지 이럴 수가....... 이 자는 위랑이 아니야. 분명 가짜야! 그것은 나의 직감으로 알 수 있어... 위랑은 결코 이 사람과 달라. 위랑은 지금까지 나를 이렇게 다루지 않았어. 그렇다면 이 자는 누구길래......?'

천아월의 눈물젖은 눈에는 독기가 일렁였다.

'대체 누구길래 위랑으로 변장하고 날 범했단 말인가?'

비수를 움켜쥔 천아월의 손목이 파르르 떨렸다.

"죽여야 해!"

그녀는 앙칼지게 중얼거리며 비수를 아래로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사나이의 가슴에 비수를 꽂지 못했다. 일직선으로 내려꽂히던 비수가 가슴 한 치 위에서 딱 멈추었다.

그런 상태로 그녀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팽무위. 아니 그녀가 그렇게 믿고 밤새 격렬한 정사를 벌였던 정체불명인 사나이의 우람한 가슴을 보는 순간 그녀는 짜르르 전해오는 전류를 느꼈다.

'이... 이 자의 가슴에서... 내가... 내가.......'

그녀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분명 팽무위와 정혼을 하기로 약조한 사이였다. 그런 그녀가 정체불명의 사나이에게 몸을 허락한 것이다. 뿐인가?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극도의 쾌감에 정신을 잃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천아월은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하게 생각되었다.

'아아! 두 남자에게 몸을 맡기다니!'

천아월은 수치와 절망감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의 젖가슴에 맺힌 두 알의 열매가 떨었다. 밤새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희롱했던 열매가.

"흐흐흑! 죽이리라!"

그녀는 마침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비수를 내리 꽂았다.

푹!

비수는 섬칫한 음향과 함께 침상 깊숙이 꽂혔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아... 아니?'

그녀의 목구멍 안에서 경악성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 말은 밖으로 새어나올 겨를이 없었다. 

"......!"

경악으로 커다랗게 떠진 그녀의 눈동자가 흰동공으로 가득찼다.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그녀의 안색은 한순간에 백지장처럼 되고 말았다. 

털썩!

마침내 그녀는 침상 위로 쓰러지며 혼절하고 말았다. 

사내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나신을 드러낸 채 혼절하고 만 천아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천아월의 짐작은 맞았다. 지금 사내의 얼굴은 분명 팽무위가 아니었다. 밀랍처럼 창백한 입술과 냉랭한 눈빛을 가진 사내. 그는 다름아닌 혈륜공자 백천강이었다.

'꼭... 이렇게 했어야 했던가?'

백천강의 얼굴에 일말의 후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곧바로 분노의 기색으로 바뀌었다.

'모든 것이 공야운리의 탓이다. 그녀가 전갈의 정액분을 내게 복용시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백천강은 눈 앞의 허공을 노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에 한순간 무서운 살기가 떠올랐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악가장에서 교홍을 범한 것도, 이곳에서 천아월과 관계한 것도 실상 그의 체내에 남아있는 전갈(全蝎)의 정액(精液)이 만들어내는 독성 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은 바로 공야운리가 타 준 차 속에 들어있던 것이었다. 백천강은 멋모르고 그것을 마셨던 것이다. 

그 정액의 효능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백천강은 계속 끓어오르는 음욕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백천강의 눈에 또다시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그는 눈 앞의 허공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으스스하게 중얼거렸다.

"구공자. 어쨌든 너희들을 철저히 파괴하리라!"

스스스.......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이 안개처럼 방 안에서 사라졌다.

사신(死神).

깊이 잠든 전궁세가(電穹勢家)에 날이 새기도 전에 사신의 그림자가 덮칠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인들 하였으랴.

"너... 너는?"

전궁세가의 팔대가주 참혼신정도(斬魂神正刀) 팽천(彭天).

그는 잠을 자다가 문득 공기가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떴다. 바로 앞에 흑영이 우뚝 서 있었다. 놀란 그는 재빨리 신형을 일으켰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가 미처 흑영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후훗! 첫 번째 사풍의 재물이다!"

번쩍!

"크아악!"

참혼신정도 팽천. 그는 미처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눈 앞에 섬광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절명(絶命)했다. 

툭... 데구르르......

몸에서 분리된 참혼신정도의 머리통이 침상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팽천의 몸뚱아리가 반쯤 일어났다. 

머리통을 잃은 그의 우수는 침상 머리맡에 세워둔 보도(寶刀)를 향해 뻗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우수는 영원히 보도에 닿을 수 없었다. 

목을 잃은 팽천의 우수가 허공에서 잠시 떨었다. 그것이 마지막 움직임이었다.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흑영이 안개처럼 사라지는 순간 머리통을 잃은 팽천의 몸뚱아리가 거목처럼 쓰러졌다.

그것이 전궁세가에 드리워진 사신(死神)의 첫 번째 방문이었다.

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소리없이 흩뿌려지고 있는 사이에 전궁세가는 소리도 없이 영원히 무림에서 그 흔적을 지워야 했다. 

어둠을 안고 찾아든 은밀한 사신의 발자국이 전궁세가를 하룻밤 사이에 짓밟고 만 것이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구대세가(九大勢家).

중원 무림의 하늘을 받쳐들고 있는 무림구대세가가 산동(山東) 악가장(岳家莊)의 멸망(滅亡)과 전궁세가주를 비롯한 백팔가신(百八家臣) 몰살(沒殺)에 뒤이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천(四川) 당문세가(唐門勢家)의 당문주(唐門主)와 십이대가노(十二大家老)의 죽음.

호남(湖南) 수운세가(水運勢家)의 수운보(水運堡)를 비롯하여 칠십여 정예고수의 죽음.

.......

피보라를 일으키는 사풍(死風)이 중원 곳곳에 끊이질 않고 불기 시작했다.

엄청난 피비린내를 풍기는 사풍이었으나 그것을 일으키는 자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모든 혈겁의 흉수가 사풍객(死風客)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