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장 난화소영루(蘭花素影樓)
①
금릉(金陵).
금릉은 중원의 남경이기도 한 천하명도였다.
당금 금릉의 화려함은 황도(皇都)에 못지 않았다. 사통팔달된 도로하며 흥청거리는 가도상의 번화한 상점, 객잔, 주루, 전장, 마장 등등 금릉은 천하대도로써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특히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금릉이야말로 천하제일의 색도라는 것이었다. 내노라하는 천하의 풍퓨객들은 금릉을 들르지 않고는 풍류를 논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금릉은 명기와 미녀들이 구름같이 많았다.
양자강 하변에 즐비한 기루와 강상(江上)에 떠있는 호화로운 유람선들에서 비쳐오는 불빛은 가히 천경을 방불케 했다.
그야말로 금릉에는 밤이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밤이 되어야만 금릉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진회하(秦淮河).
풍경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진회하 양안은 화려한 홍등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띵... 띠딩... 띵......!
진회하에서는 주악가무의 현란한 소리와 미녀들의 교태로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만큼 진회하는 홍등과 기루의 천국이었다. 그런 가운데 유난히 한 기루가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난화소영루(蘭花素影褸).
그 기루는 단연 천하제일기루라 불리울만 했다.
일잔홍(一棧紅), 모백화(母白靴), 천야홍(千夜紅), 화서시(華西施).
그녀들은 중원에서 이름을 다투는 천하명기들이었다. 그런 여인들이 모두 난화소영루에 있었다.
난화소영루는 결경이 펼쳐지는 진회하의 상류에 우뚝 서 있었다. 이곳을 찾는 풍류객들의 발길은 사시사철 끊이질 않았다. 그야말로 주야가 따로 없었다.
마땅히 풍류귀(風流鬼)들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사내들이 중원각처에서 황금을 싸들고 난화소영루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중원사화(中原四花)라고도 불리우는 네 명기들의 얼굴만이라도 본다면 가산 탕진은 물론 목숨까지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는 풍류귀신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금릉제일이자 천하제일기루인 난화소영루는 그래서 항상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옥운생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난화소영루 앞에서였다.
난화소영루의 문루는 화려하기가 자금성을 능가하고 있었다. 옥운생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전에 줄을 잇고 있었다.
그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공자대부이거나 명문귀공자들뿐이었다. 허리춤에 두둑한 전대(錢代)를 차거나 하인들을 대동하고 황금을 실은 마차 등을 몰고 있었다.
옥운생은 이 놀라운 광경에 입을 딱 벌렸다.
"서... 석형! 이... 기루엘 들어가잔 말이오?"
그는 아연하여 물었다.
하지만 석무심의 얼굴은 한결같았다.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문전성시를 이룬 풍류객의 대열에 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즐기려면 천하제일의 기루에서 천하제일 명기의 수발을 드는 것이 영웅의 풍도가 아니겠는가?"
"세... 세상에! 그... 그만큼 쓸 은자가 있소?"
옥운생은 그야말로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가 듣기로 중원사화의 시중을 받으려면 적어도 황금 일백만냥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석무심의 몰골에서는 황금 일백만 냥은커녕 은자 만 냥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석무심은 옥운생의 걱정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능청스럽게도 이렇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풍류란 황금으로 하는 것이 아니네. 진정한 풍류를 안다면 중원사화도 우리를 알아보고 맞아들일 것이네."
"터... 터무니 없는......!"
옥운생은 기가 차 마침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좋아! 어떻게 되나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뭐... 제 까짓게 얼마나 수단이 있는지 두고보자!'
옥운생은 아예 체념을 해버렸다.
"자, 들어가자구."
석무심은 지극히 태연했다.
이윽고 그들은 방명록을 적으며 계산을 하는 화주 앞에 이르게 되었다. 화주는 황금을 받고 그에 해당하는 기녀를 정해주는 자였다.
그 자는 사십 정도의 중년인으로써 화복을 입고 있었다. 중년인은 금주판을 튕기고 있었다.
타탁! 탁!
손님들을 받으며 그는 연신 주판을 튕겼다. 이윽고 석무심의 차례가 되었다. 석무심은 중년인의 앞에 섰다.
"얼마를 갖고 왔소?"
중년인은 얼굴을 들지도 않고 물었다.
"구리돈 한 문(一文)."
석무심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쫘르르륵......!
화주는 주판을 한쪽으로 쭉 밀었다. 그리고는 눈을 부릅떴다.
"장난을 하자는......"
순간 그는 입을 다물었다. 석무심의 무심한 눈빛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어 버린 것이다.
"원하는 기녀는?"
중년인은 한순간 고개를 움추리며 다시 물었다.
석무심은 붓을 들었다. 이어 그는 중년인이 펼친 종이 위에 거침없이 썼다.
- 일잔홍(一棧紅).
- 모백화(母白靴).
종이 위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그같은 두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 아니... 석형!"
옆에 있던 옥운생은 그 순간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중년인은 황급히 종이를 접어 품속으로 집어 넣는 것이었다. 이어 그는 허리를 굽히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이어 중년인은 문 안을 향해 길게 외쳤다.
"화중루(花中樓)로 두 분 공자님을 모시어라!"
그 바람에 놀란 것은 옥운생이었다.
"서... 석형! 이게 어찌된 일이오? 구리돈 한 문으로 중원사화 중 가장 비싼 이화(二花)를 볼 수 있단 말이오?"
석무심은 빙긋 웃었다.
"아마 화주도 우리의 풍류솜씨를 눈치챈 모양이오."
"그...그렇지만......."
옥운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옥운생은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제아무리 난화소영루의 루주가 풍류를 아는 자라고 해도 단지 구리돈 일 문으로 두 여자를 내어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 이게......?"
옥운생은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순간 석무심이 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들어가세."
문안으로부터 화려한 금의를 입은 장한이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공자님들."
장한은 허리를 땅바닥에까지 굽히며 그들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석무심과 옥운생은 그의 안내를 받아 거대한 문루 안으로 들어갔다.
②
난화소영루는 그야말로 자금성 이상으로 으리으리했다.
그들은 대략 다섯 채쯤의 대전을 지났다. 도중에 지나친 화원과 누각, 가산 등은 정말 인간성경을 보듯 화려하고 절경이었다.
"이쪽으로 오르십시오."
그들은 이번에는 두 명의 청의시녀에게 인계되었다. 그녀들만 해도 가히 절색이었다. 청의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그들은 다시 세 채의 대전과 화원, 가산 등을 차례로 지나쳤다.
이윽고 그들은 우아한 단청(丹靑)이 칠해진 청옥 유리기와로 쌓여진 담장의 문 앞에 이르렀다. 월동문은 황금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월동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시 화원이 나타났다. 꽃향기가 그윽하게 흐르는 화원에는 갖가지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이쪽이옵니다."
이어 그들은 한 채의 누각으로 안내되었다. 화중루(花中樓)라는 현판이 황금으로 걸려 있는 곳이었다.
화중루는 난화소영루 내에서 가장 화려하면서도 은밀한 곳이었다. 바로 중원사화를 만날 때만 들어올 수 있는 누각이 화중루였던 것이다.
화중루의 전경은 선경을 방불케 했다.
먼저 넓은 화원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인공 가산이 한 채 있었다. 가산 중앙에는 인공호수가 있고 그 호수 속에는 정자가 그린 듯이 서 있는 것이었다. 그 정자가 바로 화중루였다.
화중루의 누각은 칠층이었다.
석무심과 옥운생은 또다른 시녀의 안내를 받았다. 그들은 삼 층의 화려한 객청으로 안내되었다.
객청의 장식 또한 점입가경이었다. 바닥에는 서역산의 양탄자를 깔았다. 탁자는 선향목(仙香木)으로 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궁등 대신 야명주(夜明珠)가 박혀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기둥에는 황금을 입힌 선녀무(仙女舞)가 조각되어 있었다.
"......!"
너무나도 휘황찬란한 광경이었다. 옥운생은 상상을 초월하는 객청의 광경에 그만 넋을 잃었다.
그때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옵소서. 곧 향차를 올리겠나이다."
두 청의시녀가 날아갈 듯이 절을 하며 물러났다.
"서... 석형! 이곳이... 일개 기루란 말이오?"
옥운생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석무심의 소매를 흔들었다.
옥운생도 천하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명가에서 자란 몸이었다. 그러나 지금같은 화려한 장소는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석무심은 호피(虎皮)가 덮인 의자에 기대 앉으며 말했다.
"이곳이 천하제일기루 난화소영루임을 잊었는가?"
"그... 그렇다해도......."
"하루에 황금 일천만 냥은 쉽게 버는 곳이네."
"......!"
옥운생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그렇지, 내가 너무 당황했군!'
그는 비로소 자신의 우매함을 탓하며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였다. 사라졌던 두 시녀가 향차를 받쳐들고 나타났다.
"운남산 용작향(龍雀香)이옵니다."
두 시녀는 무릎을 꿇고 찻잔을 받쳐올렸다. 청옥향배에 담긴 차에서는 하얀 김이 소담스럽게 피어올랐다.
석무심과 옥운생은 차를 받아 맛을 보았다. 차맛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한 입 머금는 순간 입 안에 향긋한 다향이 가득 찼다.
뿐만 아니었다. 차는 매우 뜨거웠다. 그러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즉시 청량감이 전신에 퍼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석무심은 묵묵히 차를 마셨다. 그러나 옥운생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평소에도 차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중원 전역에서 생산되는 차 중에서 맛을 보지 않은 차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맛을 가진 차는 평생 처음이었다.
옥운생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석형, 정말 이 차맛이야말로 일품입니다. 설사 황제라 해도 이 정도 차를 상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는 아쉬운 듯 찻잔을 내려 놓았다. 그 순간 석무심이 두 시녀를 향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일잔향과 모백향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느냐?"
두 시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곧... 되옵니다. 지금 준비 중......."
바로 그때였다.
띵... 띠딩.......
위층으로부터 맑은 금음(琴音)이 들려 왔다. 두 시녀는 비로소 안색을 활짝 폈다. 시녀들은 급히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어서 오르시옵소서!"
석무심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턴지는 몰라도 석무심은 변해 있었다. 겉보기에는 화려함이라든가 풍류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였으나 지금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석무심과 옥운생은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윗층으로 오를 수록 그 화려함은 더욱 극치를 이루었다. 각 층마다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장이 있었다.
그들이 안내된 곳은 육층이었다.
"......!"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던 옥운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산진해미(山珍海味).
붉은 양탄자가 깔린 곳에 넓은 상이 가로 놓여져 있었다. 상 위에는 보지도 듣지고 못한 각종 육류로부터 해류, 조류로 만든 음식이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져 있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걸로 미루어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띵... 띠딩... 띵.......
그들이 육층의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주악이 현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십팔 명의 악녀(樂女)들이 각종 악기를 탄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천 명에 한 명 가려뽑은 미녀들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여덟 명의 선녀같은 무녀들이 속살이 환희 내비치는 나삼을 입고 주악에 따라 현란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두 분 영웅(英雄)!"
"호호호... 일잔화와 모백화가 두 분을 모시겠사옵니다."
천상의 옥음처럼 귓전을 간지럽히는 음성이 들렸다.
한 마디로 인간우물(人間尤物)이었다. 홍의여인과 백의여인 둘이 석무심과 옥운생을 향해 날아갈 듯이 절을 했다.
그녀들의 용모는 필설의 형용이 따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홍의여인은 몹시 육감적이고 정열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백의여인은 이국적이었다.
그녀의 풍만한 모습은 중원 여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피부색은 눈보다 희었다. 보기만 해도 터질 듯이 무르익은 육체에서는 농염한 색감이 물씬 풍겼다.
"......."
석무심은 태연히 걸어가 홍의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백의여인이 일어서서는 머뭇거리는 옥운생을 이끌었다. 자리가 정해지자 여인들이 자기 소개를 했다.
"천첩은 일잔홍이옵니다."
"호호... 천첩은 모백화라 하옵니다."
홍의미녀가 일잔홍, 백의미녀가 모백화였다.
띵... 띠딩... 띵.......
시간이 흐를 수록 주악은 더욱 흥겹게 무르익었다.
일잔홍과 모백화는 석무심과 옥운생의 무릎에 안기다시피 하면서 갖은 교태를 다 지었다.
"호호호... 아이... 이것 좀 드세요."
"호홋... 제 것도 좀......."
석무심은 일잔홍이 권하는 대로 술과 음식을 받아 먹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연스럽게 일잔홍이 권하는 술과 안주를 받아 마시는 것이었다. 석무심은 이따금씩 손장난을 치기도 했다.
"호호호... 아이... 으음!"
석무심의 손이 어디를 어떻게 건드린 것일까? 일잔홍은 비음을 발하며 더욱 그의 품에 안겼다. 어느덧 석무심의 손은 그녀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한편, 옥운생은 연거푸 들이킨 술탓으로 인해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옥운생의 얼굴은 붉은 동백꽃처럼 새빨개졌다.
"어머... 호호... 서방님은 꼭 여자같애요!"
모백화가 흥겨운 듯이 말했다.
"하하... 내가 여자같다고? 어디... 이래도?"
"어머...! 흐응... 음!"
옥운생과 모백화는 모로 쓰러졌다. 옥운생이 그녀를 쓰러뜨린 것이다.
이어 옥운생은 거칠게 그녀를 눕힌 뒤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백화의 상의를 끌렀다.
출렁!
모백화의 가슴이 드러나는 순간 깜짝 놀랄만큼 큰 젖통이 튀어 나왔다.
"하하... 네 젖은... 으음... 크구나... 으음!"
옥운생은 모백화의 젖가슴 사이에 고개를 처박았다. 마침내 더 이상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뻗은 것이었다.
③
"호호... 천첩이 침실로 모시겠사옵니다."
일잔홍은 석무심을 부축하고 일어섰다. 아니, 부축했다기보다 그녀는 석무심의 품에 안겨 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
일잔홍을 안은 석무심은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옥운생을 힐끗 바라보았다.
모백화는 사랑스러워 어쩔줄 모르겠다는 듯이 옥운생을 안아 들었다.
"호호, 나의 귀여운 서방님, 인생의 참맛이 무엇인지 백화가 가르쳐 드릴께요."
그 순간 석무심의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옥운생을 안아든 모백화. 그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옥운생의 뺨에 수도 없이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러면서 옥운생을 안고 휘장 뒤로 사라졌다.
석무심은 칠층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반쯤 올랐을 때였다. 석무심의 품 안에 안기다시피 매달려 있던 일잔홍이 문득 그의 품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궁주께옵서는 그동안 몹시 걱정하셨사옵니다."
"......."
석무심의 얼굴은 여전했다. 일잔홍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암호를 받으시고 궁주께서는 태상궁주(太上宮主)를 뵈온다는 기쁨에 어쩔 줄 모르셨사옵니다."
"......."
석무심은 묵묵히 계단을 올라갔다.
은은하게 꾸며진 규방이었다. 규방은 여인의 그윽한 체향이 배어 있었다.
선향목 탁자와 침향목 의자가 놓여 있는 규방은 아늑했다. 바닥에 깔린 양탄자며 벽에 걸린 장식구들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그윽한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
천장에는 단 한 개의 주먹만한 야명주가 박혀 있었다. 야명주는 대낮같이 밝은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쏴아.......
내실 쪽으로부터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때였다. 일잔홍이 다소곳이 물러나며 허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소녀는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일잔홍은 조금 전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이제 그녀는 기루의 요화가 아니라 정숙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석무심을 향해 큰절을 하고는 뒷걸음질로 내실을 빠져나갔다.
"......."
그녀가 사라지자 석무심은 침향목 의자에 앉았다.
쏴아.......
내실 쪽에서는 여전히 물 끼얹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호호... 오래 기다리셨지요? 부군을 모시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어 소첩이 목욕재계 하였사옵니다."
심금을 뒤흔드는 여인의 해맑은 음성이 석무심의 등뒤로부터 들려왔다.
석무심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누가 그대의 부군이란 말인가?"
"호호... 부마께오선 설마 잊지 않으셨겠지요? 이미 이 공야운리와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사르륵.......
내실의 휘장이 걷혔다. 뒤이어 반라의 눈부신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나왔다.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칼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천으로 가슴과 허리 아래만을 대충 두른 터라 뽀얀 어깨와 팔, 두 다리가 그대로 노출된 차림새였다.
그때였다. 등을 돌리고 있던 석무심의 입에서 싸늘하기 짝이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단 한 번 맺어졌다고 해서 내가 그대의 남편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더더구나 부마라는 것은......."
석무심은 말을 다하지 못했다. 공야운리의 느닷없는 웃음소리가 그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호호호...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그것말고도 당신은 저의 동맹자이자 사형이라는 것을 모르시나요? 당신은 이 운리와는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사이랍니다. 그것을 잊으시면 안 되지요."
"......."
석무심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눈 앞의 탁자를 노려보았다.
석무심의 앞으로 다가오던 공야운리의 입에서 놀란 듯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머! 이것은 ... 중상을 입었군요?"
공야운리는 그때서야 발견한 것이었다. 석무심이 가슴을 천으로 동여맨 것을. 찰나지간 그녀는 석무심의 발치 아래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왜... 왜 그 자와 불필요한 싸움을 하셨지요? 당신이 사풍객이라는 것은 천하에서 오직 당신과 이 운리밖에 모를 텐데요?"
"......."
공야운리는 다시 일어섰다. 이어 그녀는 석무심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염려스러운 듯 말했다.
"저는 그때 당신이 정말 사유성의 검에 관통되어 죽는 줄 알았어요."
석무심은 무심히 말했다.
"가장 완벽한 속임수란 바로 상대를 속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속여야 하는 법, 왼쪽 가슴으로 날아드는 검을 오른쪽으로 옮겼다고 해서 상세를 줄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석무심.
그는 바로 사풍객 백천강이었다.
"......!"
한순간 돌처럼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온기가 도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사라졌다. 지금 백천강의 얼굴은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욱 냉막한 표정이 되었다.
"그... 그 얼굴은 싫어요. 어서 본래의 얼굴을 보여줘요."
공야운리가 그의 무릎에 상체를 기대며 응석 부리듯 말했다. 백천강은 차게 웃었다.
"후훗... 이 얼굴이 어때서? 난 마음에 드는데."
"싫어요. 표정없는 그런 얼굴은 정말 싫어요."
"그럼......."
스스스.......
백천강의 얼굴이 변했다.
그의 얼굴이 삽시에 본 모습을 되찾았다. 냉막했다. 그러나 섬세하면서도 영준한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푸르스름한 사기(邪氣)가 흐르고 있었다.
"......!"
공야운리는 한 순간에 그것을 깨달았다.
"이 얼굴이라고 다를 것이 있소?"
백천강은 냉랭하게 물었다. 찰나지간 공야운리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녀는 되물었다.
"다... 당신... 무슨 일이 있었군요?"
"후훗... 이 얼굴도 싫단 말인가?"
백천강이 조소를 띄며 되물었다. 공야운리는 그의 얼굴을 향해 섬섬옥수를 뻗었다. 그녀는 백천강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그녀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얼굴이 아닌... 당신의 마음이 중요해요. 이 운리의 사람이라는 확인이 내게는... 필요해요. 그밖에는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
"그동안 저는 당신을 관찰했어요. 당신이 구대세가를 무너뜨리고 혈륜궁을 세우는 사이 저는 당신을 그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게 되었어요."
"......."
"당신은 차고 냉혹하지만 본 모습은 그게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공야운리는 문득 백천강의 무릎에 상반신을 얹었다. 이어 그녀는 팔을 뻗어 백천강의 목을 휘어감았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백천강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 소근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저의 동맹자이자 사형... 그리고 저의 부군이에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운리... 당신의 여자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제가 당신께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공야운리의 말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다음 순간 백천강은 냉랭하게 되물었다.
"네가 나의 여자라고?"
"그래요."
"내가 범한 계집들은?"
"그들은 모두 당신의 여인들이에요."
"......?"
공야운리는 고개를 들고 생긋 웃었다.
"당신은... 너무 강해요. 너무 강하기에 이 운리 혼자 감당할 수 없는 큰 그릇이에요. 그래서 많은 여인이 당신을 따른다해도 이 운리는 결코 질투 따위는 하지 않을 것예요. 다만 이 운리가 당신의 첫 여인이라는 것에, 그 위치에 만족할 뿐이에요."
"......!"
찰나지간 백천강의 눈에 열기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정욕의 불길이었다.
공야운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당신의 몸 속에는 아직도 전갈의 정액분이 남아 있어요. 그것이 고갈되기 전에 당신은... 이 운리를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을 거에요. 왜냐면... 으읍!"
공야운리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백천강이 그녀를 거칠게 안아버렸기 때문이다.
백천강의 눈은 어느새 붉게 충혈되었다. 그는 거칠게 손을 놀렸다.
부욱!
나신을 감싸고 있던 비단천이 찢어지며 공야운리의 백옥지신이 드러났다.
"허헉!"
백천강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나신이 된 공야운리를 안고 미친 듯이 그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그녀의 젖가슴을 빨았다. 어린아이가 엄마 젖을 빨듯이.
"허억!"
열락의 신음소리가 침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침상 위에는 젊디젊은 남녀의 육체 한 쌍이 뱀처럼 뒤엉겨 있었다.
"아음... 하아!"
백천강은 거대한 불기둥이었다. 공야운리는 몸 전체가 타오르는 분하구였다. 두 육체는 숨가쁜 불의 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쾅폭한 쾌락을 동반하고 있었다. 마치 육지를 덮치는 태풍이 커다란 해일(海溢)을 동반하듯이. 그 순간 모든 것은 혼돈이었다. 혼돈은 또한 완벽한 통일이기도 했다.
공야운리는 백천강의 목을 부러져라 끌어 안았다. 그녀는 백천강의 뜨거운 입술을 전신에 받으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왜냐구요...? 당신의 몸 속에는 이 운리가 언제고 조종할 수 있는 심인고가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전갈 정액분에 들어있는 심인고는 운리가 명령만 하면 당신을 죽일 수도... 또 노예로 만들 수도 있답니다. 하나, 노예가 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운리랍니다."
심인고(心人蠱).
그것은 천축지방에서 나는 전설의 고충(蠱蟲)이었다. 심인고에 중독된 자는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었다. 사술자는 자기 마음대로 상대방을 죽일 수도 조종할 수도 있었다.
"아... 흑!"
그들은 수차례나 절정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그들의 육신은 땀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그들은 이제 최후의 합일을 위해 모든 것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④
"......."
백천강은 침상에 걸터 앉아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무심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는 곧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백천강의 무심해 보이는 눈빛 속에 깊이 숨어 있는 허탈감 하나를.
이제 그들의 육체를 불사르던 열풍은 사그라든지 오래였다. 사실 한순간의 쾌락을 위한 몸부림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던가?
그러나 인간이란 참으로 이상한 족속인 것이다. 오로지 인간이란 존재만이 덧없어 보이는 쾌락이나 사소한 행위 하나에 목숨보다 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공야운리는 백천강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정말 제가 싫은가요?"
공야운리의 음성은 나직했다. 그러나 그 음성 속에는 비탄의 흐느낌이 서려 있었다.
백천강의 입가에 조소가 흘렀다.
"이렇게 한다고 하여 너와 가까와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여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증오할 뿐이다."
"......!"
공야운리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백천강은 계속 말했다.
"후훗... 모든 것이 끝난 후 가장 먼저 죽어야 할 사람은 바로 운리... 그대이다."
"다... 당신!"
"후회한다고 그랬다. 내가 증오하는 색을 범케한 너를 미워하는 나의 감정은 영원할 것이다."
"펴... 편견이에요. 그건!"
"뭐라해도 소용없다. 지금은 너와 나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동맹(同盟)에 대한 약속뿐이다. 그 외는 아무것도 없다."
"조... 좋아요!"
공야운리는 마침내 몸을 떼었다.
그녀의 가슴에 매달린 두 쪽의 젖가슴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토록 뜨거운 애무를 받았던 두 알의 유실은 자줏빛이었다.
공야운리의 얼굴에 싸늘함이 어렸다. 사랑을 거부당한 여인의 한은 무서웠다. 그녀는 백천강을 향해 표독스럽게 외쳤다.
"더이상 당신에게 구걸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우리의 동맹은 목적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변함이 없을 거예요!"
"후훗... 물론, 나도 그대가 필요하고... 그대 역시 내가 필요하니까."
어느새 공야운리의 눈에서 수정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았다.
"......!"
그녀는 한동안 백천강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부드득 이를 갈았다.
"가장 먼저... 내가 뜻을 이루는 날 본국의 모든 힘을 기울여 당신을... 쳐부술 것을 맹세해요."
"후훗... 네 소원대로 되기를 빌겠다."
백천강의 입가에 잔혹한 조소가 어렸다.
일각 후였다.
백천강과 공야운리는 선향목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은 싸늘했다.
"그 자는... 점차 주력을 중원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
공야운리의 음성 속에는 증오와 한이 서려 있었다.
"그 자를 따르는 본국의 반도들의 힘은 엄청나요. 그들은 마음만 먹는다면 능히 보름 안에 중원을 장악할 수 있을 정도예요."
"그 자라니?"
백천강은 짧게 물었다.
"그 자가 아직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이유는... 어부지리(魚夫之利)를 노리고 있음이 틀림없어요."
"어부지리?"
"그래요. 바로 사형이 세운 혈륜궁과 중원정도연합 광명회가 부딪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
"소매는 이미 사형을 위해 할 일을 모두 했어요. 대혈륜궁이 이렇게 크는 데에 소매의 힘은 절대적이었으니까요. 숨어 있던 마도들은 소매의 음양궁의 힘이 아니었으면 끌어내기 어려웠을 거예요."
백천강은 입을 열었다. 그의 어조는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내 방식대로 한다. 그 자와... 사매와의 일은 사매가 처리하라. 만일 내게 도움을 청하면 그때... 나서겠다."
그 순간 공야운리는 백천강을 노려보았다.
"흥! 조심해야 할거예요. 그 자는 워낙 음흉한 자이니 필시... 혈륜궁 내에도 그 자의 첩자가 있을 거예요."
"첩자라......."
"보이지 않는 곳의 화살은 피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할 거예요."
문득 공야운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내가 왜 이 자를 위해 걱정을 하지?'
그녀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백천강은 몸을 일으켰다.
"할말은 끝났나?"
"그래요."
"그럼 가겠다."
"어디로?"
"대혈륜궁으로."
백천강의 음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냉랭했다.
"가... 세요."
공야운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하지만 백천강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성큼성큼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백천강은 계단의 중간쯤 내려가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이어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물었다.
"옥운생은 어찌 되었소?"
"......!"
눈물이 맺혀 있던 공야운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뒤이어 그녀의 입가에 묘한 조소가 스쳤다.
"사형이 데려가세요. 그는 아직도 취해 있으니까요!"
공야운리가 말했다.
"......."
백천강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곧바로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