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장 백도통일대계(白道一統大計)(4권) (33/54)

혈륜공자 제4권 

30장  백도통일대계(白道一統大計)

태실봉(太室峰).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을 마주한 숭산의 고봉 태실봉 기슭에는 우람한 산채(山寨)가 형성되어 있었다.

산채가 생긴 지는 불과 수 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규모는 엄청났다. 산채는 태실봉을 빙 두른 크기로 곳곳에 고각(高閣)이요, 웅장한 규모의 목전(木殿)이 처마를 맞대고 끝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중원 칠백백도제파연합맹인 대광명회의 총본산이었다. 

광명각(光明閣).

광명각은 칠층의 누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광명각의 각 층은 크고 작은 대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대전들은 정도 무림맹의 각종 대소사를 처리하는 회의장으로 이용되었다. 

때로는 대광명회를 방문한 자들의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칠층만은 예외였다. 그곳은 바로 대광명회의 회주인 신주제일룡 사유성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단향목으로 만들어진 의자였다. 그럼에도 그것은 화려하거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의자는 활짝 열려진 창가에 놓여 있었다. 

백삼을 입은 청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쏴... 아... 쏴아아아!

폭우가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청년의 시선은 창 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의 시선은 뚜렷한 목표물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스스로의 내면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청년이 앉아 있는 오른쪽.

그곳에는 한 자루의 장검이 걸려 있었다. 손잡이는 백상아(白象牙)였다. 또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집은 만년교룡피로 된 것이었다. 게다가 손잡이에는 열 알의 보주가 박혀 찬연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 광명지존검(光明至尊劍).

만년교룡피로 만들어진 검집에는 그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광명지존검은 바로 대광명회를 이끄는 신물(信物)이었다. 열 알의 보주는 바로 구파일방(九派一 )을 상징하는 것으로 각파 장문인들이 직접 바친 것들이었다.

광명지존검은 오직 대광명회주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칼을 가진 자는 대광명회의 생살권(生殺勸)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자였다.

의자에 앉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청년. 그의 나이는 이십팔 세 가량 되어 보였다.

쏴... 아... 쏴아아아.......

폭우는 일 주야를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사선(斜線)으로 불어왔다. 그 바람에 약한 빗줄기들은 방향을 바꾸어 창틀 너머로 떨어졌다.

후두두둑!

창틀을 때리는 빗줄기가 반동으로 인해 튀어올랐다. 튀어오른 물방울들이 청년의 얼굴을 적셨다. 

"......!"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청년은 그때서야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청년은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물방울들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또다시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는 숭산의 웅자한 모습을 자욱한 장막으로 가리고 있었다.

"도대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군......."

청년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바로 대광명회주 사유성이었다.

그때였다.

사유성의 등뒤에서 한 중년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매우 담담한 음성이었다.

"공자, 그 비는 폭우성시(暴雨星時)로 인해 내리므로 앞으로 보름 간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에도 바로 이런 비가 내렸소이다.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외다."

그 말에 사유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조만간 황하(黃河)가 범람할지도 모르겠군."

"그렇소이다. 적어도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 일을... 자금성에서는 알고 있소?"

"대원수 어른께 전했으니 황상(皇上)께서 조치가 계시리라 봅니다."

"음. 정녕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 이토록 무력하단 말인가?"

사유성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허허! 공자, 그러나 때로는 인간의 힘이 하늘을 앞지를 수도 있소이다."

"......?"

"대혈륜궁의 망동이 그 예입니다."

"대혈륜궁......."

"그러나 그들의 혈겁을 가로막는 것 또한 바로 공자께서 하셔야 할 일이오."

"내 힘으로......."

"공자는 하늘을 대신할 하늘이 내린 기재이십니다."

사유성의 얼굴에 한 가닥 미소가 흘러 나왔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백문선생. 처음 아버님의 친서를 갖고 선생이 내게 찾아 왔을 대 솔직히 나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소이다."

"......."

"그러나 지금 나는 하늘에 감사하는 기분이오. 과거 유비가 공명을 얻게 된 것 만큼이나 기쁜 심정이오."

사유성의 음성에는 활기가 넘쳐 있었다.

그때였다.

스르륵.......

서실로 통하는 월문(月門)의 휘장이 걷혔다. 그다음 한 명의 백의 중년문사가 걸어 나왔다.

중년문사는 섭선과 한 장의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백문선생(百門先生) 우문기(宇文奇)였다. 바로 우내일봉(宇內一鳳) 사운봉(査雲鳳)의 글선생이었다.

그가 사광천의 천서를 품고 광명회에 찾아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이었다. 

- 사랑하는 아들 유성아.

네가 천하 강호계의 평화를 위해 부심하고 있음을 알기에 아비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대사(大事)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하여 우문선생을 보낸다. 

그를 얻음은 유현덕이 공명을 얻음과 같으니 그의 지혜를 빌면 용이 비를 만난 듯 하게 되리라. 반드시 크게 쓰임이 있을 것이다.

사광천의 편지는 짧았다.

처음 사유성은 백문선생의 존재를 그다지 크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사유성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백문선생은 광명회의 대소사를 일사천리로 해결했다. 그의 수완은 참으로 명쾌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탁월한 예지와 분석력으로 천하대계를 짰다. 그리하여 단시간 내에 칠백대파(七百大派)라는 방대하고 치밀한 조직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결국 백문선생은 사유성에 의해서 광명회의 군사(軍師)로서의 직위를 공고히 하게 된 것이었다.

번쩍! 콰르르르.......

한차례 섬광이 하늘을 찢으며 떨어졌다.

"......."

사유성은 벼락이 떨어진 소림사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개방총단이 피로 씻긴 지 보름이 지났소. 그 후로 별다른 일은 없는 지..., 폭우로 인해 중원 각처의 전서구들도 차단되어버렸으니 도무지 사정을 알 길이 없소."

개방총단을 휘몰아친 혈풍. 그것은 광명회로서는 치명타를 입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광명회로서는 그야말로 오른팔을 잘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실로 들어온 백문선생은 사유성의 등뒤에 공손히 섰다. 그는 현기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폭우로 인해 이목(耳目)이 차단된 것은 본회뿐만 아니라 혈륜궁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조해 하실 것 없다고 봅니다."

사유성은 한숨을 쉬었다.

"우문선생의 말씀을 듣고보니 다소 위안이 되오. 하지만......."

그는 문득 이를 갈았다.

"개방이 혈겁을 당한 원한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그 십 배, 아니 백 배로 갚을 것이오!"

사유성은 차갑게 외쳤다. 한순간 그의 두 눈에서는 섬칫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백문선생은 담담히 말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우선 추진 중에 있는 백도일통대계(白道一通大計)부터 완성시켜야 합니다."

그 말에 사유성은 앉은 채 의자와 함께 빙글 돌았다.

"그래, 진전은......?"

그는 말을 멈추었다. 백문선생이 두 손으로 두루마리를 받쳐 올렸기 때문이다.

"여기 있소이다."

"오오. 벌써 완성하셨소이까?"

"다행히 공자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유성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두루마리를 받아들고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과연 백문선생답소이다. 칠백백도제파의 수십만 고수들을 일통시킬 대계를 단 보름만에 완성시키다니."

좌르르륵.......

사유성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두루마리의 길이는 근 일 장여나 되었다. 그 속에 웅휘유려한 필체로 깨알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

사유성은 두 눈에 광채를 빛냈다. 그는 백도일통대계를 온 정신을 기울여 읽어 내려갔다.

"오오... 귀... 귀신이 놀랄 대계요!"

"......."

"이럴 수가! 가히 공명이라 해도 이 정도의 대계를 짤 수는 없으리라!"

"......."

"진정 무림사 초유의 대계이오!"

사유성의 입에서 감탄의 신음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세찬 격동이 사유성을 떨게 만들었다. 그는 백도일통대계를 읽어내려가며 희열에 가득찼다. 

백문선생은 그때까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희열을 감추지 못하는 사유성을 침묵으로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백문선생 우문기의 입가에서 야릇한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사유성은 두루마리를 모두 읽었다.

"오오... 정말 훌륭하오!"

사유성은 감격에 찬 부르짖음을 발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백문선생의 두 손을 덥썩 쥐었다.

"선생은 하늘이 내리신 분이오!"

"허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백문선생은 겸허하게 웃었다.

"아니오. 진정이오. 나 사유성이 무림정기를 바로 세우고 마도척결의 대위업을 이루게 된다면 그 공의 절반은 필히 선생께 돌릴 것이오."

"무슨 말씀을.... 노부는 단지 일개 유생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유성에게 손을 잡힌 우문기는 여전히 겸손했다. 

"......!"

사유성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만족스런 웃음이 번져나갔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우문기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깊은 신뢰와 믿음이 담겨 있었다. 

마침내 사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문기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두루마리를 접어 소중한 듯이 품 속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오늘은 선생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으로 연회를 베풀겠소이다. 결코 사양해서는 아니되오이다."

그 순간 백문선생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되오이다. 일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

사유성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놀란 듯이 물었다.

"시작이라니? 백도일통대계말고도 더 큰 일이 있단 말이오?"

백문선생은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정녕 공자께서는 발견하시지 못하셨단 말이시오?"

"......?"

"허허... 왜 이러십니까? 공자의 심기가 너무 깊어 노부가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정녕 그리 나오신다면 노부는 이만 제독부로 돌아갈까 합니다."

그때서야 사유성의 안색에 웃음이 감돌았다. 그는 급히 포권했다.

"하하... 소생이 잘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선생께서 그렇게 나오시다니 소생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허허허!"

"하하하핫!"

사유성과 우문기는 한동안 웃었다. 잠시 후 사유성은 웃음을 거두었다. 그는 정색을 하더니 심각하게 말했다.

"백도일통대계 속에 구공자(九公子)만 유독 빠져 있었소이다. 그들을 포함하지 않으신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소이까?"

백문선생의 입가에 뜻모를 기소가 어렸다.

"허허허... 그것은 노부의 복안이오이다. 그들은 차후 복병(伏兵)이 될 것이오이다. 감추어 둔 비병(秘兵)으로......."

사유성의 눈이 번쩍 빛났다.

"하핫... 그렇다면 그 방법은......."

"허허... 공자께 지필묵을 드리오리까?"

"좋소이다!"

이윽고 그들은 종이 위에 자신들의 의견을 적었다.

"후후... 선생의 고견과 소생의 우둔한 생각이 맞을지 모르겠소이다."

사유성과 백문선생은 자신이 쓴 종이를 동시에 내밀었다. 

- 고육지계(苦肉之計).

그것은 사유성이 쓴 글이었다. 백문선생이 쓴 글은 낭중지침(囊中之針)이었다.

"역시!"

두 사람의 눈에서 희열의 빛이 넘쳐 흘렀다. 사유성은 백문선생의 팔을 덥썩 잡으며 외쳤다.

"과연 선생이시오!"

"허허... 공자의 지혜를 감당 못하겠소이다."

백문선생은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서운 자다!'

백문선생은 내심 중얼거렸다.

고육지계란 스스로의 살(肉)을 끊어 적을 속이는 계책이었다. 낭중지침(囊中之針)은 문자 그대로 주머니 속의 침(針)이라는 뜻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의 의견은 일치했다.

"핫핫핫!"

두 사람은 마주 본 채 한참동안 대소를 그치지 않았다.

잠시 후 사유성은 웃음을 그쳤다. 그의 얼굴에 침중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백문선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선생께서 직접 해주시오."

백문선생은 공손히 읍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유성은 빙긋이 웃었다.

"선생이라면 틀림없이 잘 해내실 것이오."

콰쾅!

문득 멀리 불혼애 쪽에서 뇌전이 번쩍였다. 

섬광은 두 사람의 얼굴을 환하게 만들었다가 금방 사라졌다. 한 사람의 얼굴은 신비하게 웃고 있었다. 다른 하나의 얼굴에는 야망의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방 안에 다시 어슴푸레한 어둠이 찾아들어왔다. 어느새 저녁이었다.

쏴아아... 쏴아아아.......

폭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일까? 폭우는 줄기차게 쏟아져 내렸다. 

가히 오십 년만에 재발되는 대홍수(大洪水)의 시작이 틀림없었다. 

구중천(九重天).

구중천은 광명회 내에서 두 번째로 큰 대전의 이름이었다. 구중천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몹시 컸다. 

그것은 아홉 개의 하늘을 말하는 것이었다. 더욱 자세하게 파고 들자면 그것은 바로 무림구대세가(武林九大勢家)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 구중천에는 구대세가의 신가주(新家主)들인 무림구공자가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우문선생! 이럴 수가 있소? 어째서 우리 구공자가 광명회 내에서 아무런 직위도 얻지 못한단 말이오?"

제일 먼저 노성을 지른 것은 유성비천협(流星飛天俠) 남궁신효(南宮神梟)였다. 그는 바로 남궁세가의 새로운 가주로 무림구공자 중에서 제일 연장자였다. 

쾅!

소진천(少震天) 하웅천(河雄天)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는 진천세가(震天勢家)의 새로운 가주였다. 하웅천은 노성을 질렀다.

"우리 구대세가가 전만 못하다고 해서 꼭 이런 푸대접을 받아야 한단 말이오? 이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오!"

"제기럴! 이건 정말 우리들을 얕보는 짓인 걸 모른단 말이오?"

"퉤엣! 도저히 참을 수 없소!"

탈백신도(奪魄神刀) 팽무위(彭武韋)는 가래침을 뱉으며 분해했다. 장내의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장내의 세 사람만이 무표정했다. 그들은 바로 화신 사마고웅(司馬古雄)과 다지신호(多智神豪) 석장청(石長靑), 석몽화(石夢花) 남매였다.

화신 사마고웅은 과거 오해로 인해 구공자의 합공을 받아야만 했다. 그 후로 사마고웅은 무공이 폐지된 몸이었다. 그는 묵묵히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커다란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벽력장이 날아간 이후 그는 한곳에 틀어박혀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석장청과 석몽화. 그들은 쌍둥이 남매였다. 

과거 석장청은 환상자(幻像子)의 무학을 폐관수련했다. 그동안 쌍둥이 동생이었던 석몽화는 남장을 하고 그녀의 오빠 행세를 했다. 그런 사실은 이제 더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

석장청은 묵묵히 침묵을 고수했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사풍객에게 암습당한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듯했다.

석몽화는 줄곧 고개를 떨구고만 있었다. 

장내의 공기가 점차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백문선생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대협들, 흥분하지 마시고 노부의 말을 들어 보시오."

철수룡(鐵水龍) 수검악(水劍嶽)이 코웃음을 쳤다.

"흥! 들어보나 마나요. 모든 조직은 바로 선생이 짜지 않았소?"

"그... 그렇지 않소이다. 그것은 노부의 뜻이 아니었소."

남궁신효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럼 누구의 뜻이오?"

구공자의 시선은 일제히 백문선생의 얼굴로 집중했다. 찰나지간 백문선생의 얼굴에는 당황이 번졌다.

"그것은......."

"빨리 말하시오!"

남궁신효가 재촉했다.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누구요?"

"누구냐니깐!"

찰나지간 백문선생의 입이 열렸다.

"좋소. 내 속시원히 말하리다. 그것은 바로 회주의 명이었소."

"......!"

구공자는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장내에는 냉랭한 살기가 감돌았다.

백문선생은 계속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꺼리낄 것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회주께선 여러분을 백도일통대계에서 빼도록 명하셨소이다."

백문선생의 말에는 은밀히 불만이 섞여 있었다.

"노부가 수 차례 간언을 하였소. 그러나 회주의 뜻은 강경하셨소이다."

"......!"

구공자의 얼굴에서 서서히 분노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하웅천은 흥분했다. 그의 분노는 이제 극에 달해 있었다.

쾅!

하웅천은 탁자를 또다시 내리쳤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서며 고함쳤다.

"그 자는 우리 구공자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닌가?"

한순간 구공자의 안색이 홱 변했다. 하웅천이 대광명회주에게 그 자라는 칭호를 썼기 때문이었다. 

구공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공감의 빛이 떠올랐다.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구공자들의 마음은 일치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백문선생을 노려보았다. 백문선생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허허... 노부도 동감이오. 이번 일만은 회주께 불만이오."

구공자의 얼굴은 다소 밝아졌다. 남궁신효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가 우리들을 무시한다면 굳이 우리들이 이곳에 붙어있을 이유가 없지 않소? 더구나 우리들은 구중천의 후예들이 아니오? 결코 구파일방에 뒤지지 않는 전통을 지니고 있지 않소?"

남궁신효의 말은 구공자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렇소!"

"떠납시다!"

"이따위 썩은 광명회에 연연할 필요가 없소!"

중인들은 흥분하여 외쳤다. 남궁신효는 안광을 번쩍이며 가라앉은 침성으로 말했다.

"이제 중지는 모아졌소. 남은 것은......."

그는 슬쩍 백문선생을 바라보았다. 백문선생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도 여러분들을 힘껏 돕겠소이다. 구중천이 다시 무림의 하늘이 될 때까지"

그 말에 구공자는 모두 감격했다.

"선생!"

"이 은혜 잊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모두 백문선생에게 포권했다. 

그들은 모두 백문선생의 탁월한 지략과 심기에 이미 탄복하고 있었다. 그가 도와만 준다면 구중천이 무림의 하늘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구공자의 가슴에는 새로운 야망이 싹텄다. 

그때였다. 백문선생이 중인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이어 그는 심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부는 최선을 다해 여러분을 돕겠소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노부는 광명회에 묶인 몸이오."

구공자의 얼굴에는 미미하게 동요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 대신 노부가 여러분께 한 분 이인(異人)을 소개해 드리겠소이다."

"......?"

중인들은 모두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그 분은 노부보다도 뛰어난 분이시오. 여러분들은 귀곡선생(鬼谷先生)을 아시오?"

"......!"

구공자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석장청이 재빨리 되물었다.

"귀곡자... 바로 제갈무후의 스승이신 귀곡자를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이다."

백문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소개하려는 분은 귀곡문(鬼谷門)의 전인이외다. 또한 여러분이 잘 아는 분이시기도 하오."

"......?"

구공자는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구공자들 중에서 귀곡자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귀곡자의 제자로서 귀곡문의 전인이 있다는 말은 뜻밖이었다. 더군다나 백문선생은 무림구공자인 자신들이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무림구공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무림구공자들은 제각각 수없이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무림인들을 만났지만 자신이 귀곡문의 전인이라고 소개한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백문선생은 잠시 무림구공자들을 바라보았다. 

"......?"

무림구공자들의 얼굴에는 의아심이 가득했다. 마침내 백문선생은 입을 열었다.

"그 분은 바로 무림일비(武林一秘)이시오."

"무림일비!"

"서... 설마!"

구공자는 안색이 홱 변했다. 한순간 그들의 뇌리에 잊고 있었던 기억 한조각이 떠올랐다.

무림일비. 그는 수 년 전 그들에게 서찰을 띄워 낙양외성 색녀를 차단케한 바로 그 신비인물이었던 것이다.

구공자는 모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무림일비... 그가 실제 인물이란 말이오?"

석장청은 의아심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허허... 그렇소이다. 단지 그는 꼬리를 보이지 않은 신룡일 뿐이오."

백문선생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자신있게 말을 이어갔다.

"노부는 이미 그 분에게 연락을 해두었소이다. 여러분이 광명회를 떠나기만 하면 반드시 무림일비를 만날 수 있을 것이오."

"......!"

구공자는 모두 경악했다. 

백문선생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구공자는 그런 것을 따지고 들기에는 너무 연륜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그들의 얼굴에는 결심이 어렸다. 마침내 그들은 입을 열었다.

"그를 만나겠소!"

"당장 이곳을 떠나겠소이다!"

구공자는 모두 의자에서 벌떡벌떡 뛰어 일어났다. 단지 남장을 하고 있는 석몽화만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은 부드러운 초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곳은 바로 태실봉 후면이었다. 초지에서 보면 불혼애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쏴아아.......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자욱한 비안개 때문이었다. 

빗줄기는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빗줄기 사이로 부드러운 장막과도 같은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뿌옇게 서린 안개는 계곡의 신비로움을 한층 더하게 했다.

한 채의 소각(小閣)이 언덕 위에 서 있었다. 현판도 걸리지 않은 무명각이었다. 그러나 그 무명각의 주인은 천하가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곳은 바로 대광명회주인 신주제일룡 사유성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였다.

후두두둑.......

바람이 또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세력이 많이 약해진 빗줄기가 소각의 창을 때리며 지나갔다. 

"......."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사유성과 석몽화였다. 석몽화는 남장을 하고 있었다.

자욱한 비안개를 내려다 보던 사유성이 물었다.

"몽화,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석몽화의 아름다운 눈에 물안개가 어렸다. 그녀는 사유성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잠시 후 석몽화는 꽃잎같은 입술을 열었다.

"몽화가 떠남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예요."

"떠난다고?"

사유성은 흠칫했다.

"왜... 왜지?"

그는 빙글 돌아서며 석몽화의 가냘픈 어깨를 잡았다. 석몽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 그녀는 사유성의 눈을 바라보며 가늘게 말했다.

"성랑이 구중천을 너무 푸대접했기 때문이에요."

"......."

사유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석몽화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사유성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다시 창 밖으로 향했다.

잠시 후 사유성은 중얼거렸다. 

"결국... 그 때문이었군."

석몽화는 따지듯 물었다.

"왜? 왜죠?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죠?"

"후훗... 몽화, 너는 모른다. 나의 마음을."

"무엇 때문인가요?"

"천하를 위해서지."

"서... 성랑의 야심 때문이라고 왜 말 못하나요?"

"후훗! 그럴지도 모르지."

"아!"

석몽화는 비틀거렸다.

"성랑은... 너무 야심이 커요. 그러나 큰 야심에 비해 그릇이 작아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하거늘... 넘치는 것을 배척하려 든다면 언젠가는 후회할 거예요."

"후훗! 나 사유성은 결코 후회할 짓은 하지 않는다."

"구중천은 결코 이대로 주저앉지 않을 거예요!"

"알고 있다."

사유성은 고개를 돌린 채 짧게 응수했다. 석몽화는 사유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느꼈다. 지금의 사유성은 옛날의 사유성이 아니라는 것을. 뒤돌아선 그의 뒷모습에서는 냉기가 뚝뚝 흐르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석몽화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럼 왜 구중천을 푸대접하죠?"

사유성의 대답은 단호했다.

"각자의 길이 틀리기 때문이다."

석몽화의 눈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이보다 더 치명적인 말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그들은 지금까지 한 길을 같이 걸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것이 전부인가요......?"

바로 그때였다. 

창 밖을 응시하고 있던 사유성이 갑자기 빙글 돌아섰다. 이어 그는 깊은 눈으로 석몽화의 눈을 직시했다. 두 남녀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

석몽화는 한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유성의 눈빛. 그것은 옛날과 하등 다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조금 전의 싸늘한 어투와 냉정한 행동과는 너무나 달랐다. 사유성의 깊고 투명한 눈빛 속에는 어느새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석몽화는 어떤 것이 그의 진실된 모습인지 혼동스러웠다. 그때였다. 불현듯 사유성이 입을 열었다.

"믿어다오. 몽화."

"......?"

"유성은 결코 몽화를 실망시키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석몽화의 눈에 잔잔한 파랑이 일었다.

"정... 정말인가요?"

사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하마."

"아!"

석몽화는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한순간의 원망과 분노가 봄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믿겠어요! 믿겠어요... 세상이 어떻게 바뀐다 해도... 당신만을 믿고 따르겠어요! 으흐흑!"

그녀는 사유성의 품에 안긴 채 가늘게 오열했다.

"몽화......."

사유성은 그녀의 머리에 씌워진 문사건을 벗겼다.

사르르륵.......

칠흑처럼 검고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장발이 폭포수처럼 흘러 내렸다.

사유성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너를 사랑한다."

석몽화는 눈물 그렁한 눈을 내리깔았다. 살풋 긴 속눈썹이 내려 감겼다. 이어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다소곳이 말했다. 

"소... 소매두요."

사유성의 두터운 입술이 내려 앉았다. 파르르 떨리던 석몽화의 속눈썹이 그의 입술에 덮혔다.

"아......!"

석몽화는 뜨거운 신음을 토해내며 그의 품에 전신을 묻었다. 사유성의 입술이 매끄러운 석몽화의 볼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지상의 세계에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겨울의 한밤중, 바람도 잠든 시간에 눈이 내리는 소리일 것이다.

겨울의 한밤중에 내리는 눈의 소리. 그것은 이별을 예감하게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이별을 예감하는 것이기에 아름답다. 결국 영원한 것은 추하거나 진부할 뿐인 것이리라.

여인이 돌아서서 옷을 벗었다. 

사르르륵.......

여인이 옷을 벗는 소리는 묘하게도 한밤중에 눈이 내리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그것은 사랑과 동시에 아련한 슬픔을 느끼게 했다.

"......!"

사유성은 분명 그 음향을 들었다. 

옷을 벗는 여인은 바로 석몽화였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사유성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몽화... 이래도... 되겠소......?"

석몽화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가장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의 모든 것은... 당신 거예요. 성랑... 오늘의 헤어짐에 간직할 추억이 없다면 언젠가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죠. 그래서 아예... 성랑께 모든 것을 드리기로 했어요."

"몽... 화......."

사유성은 마침내 돌아섰다.

여인의 나신은 완벽했다. 풋풋한 싱그러움이 배여 있는 석몽화의 육신은 완미옥결지신(完美玉結之身)이었다. 터질 듯 부푼 젖가슴 정상에 매달린 두 알의 유실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연분홍빛이었다.

"......!"

사유성의 눈길은 탐색하듯이 여체를 훑어내려갔다.

"혹시 저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계집이라고 욕하시진 않겠지요?"

석몽화는 두 손을 다소곳이 내리며 수줍게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몸을 내보이는 것은 분명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알몸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한 행동은 결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몽화. 그대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같거늘 어찌 부끄러움을 모른다 하시오?"

"성랑."

"몽화!"

말과 함께 사유성은 아주 환하게 웃었다. 뒤이어 그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으음!"

그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죽침상 위에 쓰러졌다.

쏴아아아.......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가히 오십 년만의 폭우다웠다. 그러나 그들의 귓가에는 더이상 폭우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아!"

두 개의 불덩어리는 서로를 살랐다. 

사유성의 뜨거운 손 끝이 석봉화의 육체를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그때마다 그녀의 내밀한 곳에서 뜨거운 희열과 기쁨이 터져 올랐다.

폭우는 쉬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쏴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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