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장 두 개의 얼굴
①
두두두두......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였다.
석양이 핏빛을 토하며 서녘으로 넘어가는 황혼 무렵이었다. 한 대의 화려한 사두마차가 미친 듯이 내닫고 있었다.
덜컹... 쿠쿠쿵!
마차바퀴는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이 덜컹거렸다. 네 마리의 혈리총은 죽어라 발굽을 놓고 있었다. 말들은 마차가 부서질 듯 흔들리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차는 몹시 화려했다. 기둥과 지붕은 황금을 씌운 듯 번쩍거렸다. 주렴은 칠채보주로 꾸며져 있었다.
"......."
화려한 비단무복을 입은 장한 하나가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장한은 고삐를 잡은 채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있었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게도 그는 죽어 있었다.
거대한 화살 하나가 그를 관통해 마차의 기둥에 박혀 있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장한은 요란하게 흔들리는 마차에서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쿠쿠쿵... 덜컹... 덜컹!
마차는 거친 돌밭을 달려가며 마구 흔들렸다. 그때였다. 겁에 질린 아름다운 음성이 마차 안에서 다급히 흘러나왔다.
"황위사(黃衛士)! 어떻게 된 거예요? 길을 잘못든 것은 아니에요?"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다음 순간 마차 안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흐흑! 위사대 사십팔 명이 모두 전멸하고 이 지경이 되었으니... 그 자는 정녕 국법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덜컹... 쿠쿠쿵!
이제 마차는 관도를 벗어나 거친 벌판을 마구 달렸다.
뽀오얀 먼지가 마차 뒤에서 뭉게구름처럼 일고 있었다. 부서질 듯 덜컹거리며 달리는 마차 사이로 여인의 흐느낌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몸이 태화군주임을 알면서도 이토록 핍박하다니... 대체 그자는 황상(黃上)도 안중에 없단 말인가? 흐흑! 황위사! 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태화군주(太華君主).
그녀는 바로 자금성(紫金城)에 기거하는 황제의 누이였다. 즉 그녀는 황녀였던 것이다. 태화군주는 복잡한 황성을 피해 금릉에 살고 있었다.
그런 태화군주가 지금 누구에겐가 ㅉ기고 있다는 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화려한 양탄자가 깔린 마차 안은 몹시 넓었다. 그곳에는 궁장여인 한 명이 겁에 질린 얼굴로 비단을 깐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인은 정녕 서시(西施)를 능가할 만한 절세미녀였다.
여인의 피부는 눈보다 희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황녀로서의 고귀한 인품이 은은히 넘쳐 흐르고 있었다.
쿠쿠쿵!
마차는 다시 한 차례 쓰러질 듯 덜컹거렸다.
"아악!"
태화군주는 의자 모서리를 잡고 몸을 떨었다. 불현듯 그녀의 뇌리에 사흘 전의 일이 떠올랐다.
천궁공자(天弓公子).
그녀가 탄 마차를 추적하기 시작한 그는 스스로를 천궁공자라고 밝혔다.
언뜻 보기에 천궁공자는 몹시 위풍당당했다. 얼굴도 제법 영준한 청년이었다.
천궁공자가 앞을 가로막는 순간 태화군주는 그야말로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 자는 느닷없이 태화군주를 취하겠다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황녀로서의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이미 정혼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천궁공자는 안하무인이었다. 그는 사흘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추격해 왔다. 마차를 호위하던 사십팔 명의 위사대는 그동안 하나씩 죽어갔다. 천궁공자가 쏜 거대한 화살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천궁공자. 그는 정녕 오만불손하면서 공포스런 무뢰배였다.
"흐흑! 황위사, 결국 그대도 죽었나요?"
마침내 태화군주는 황위사가 죽었음을 알았다. 사십팔인의 위사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던 황위사마저도 죽은 것이다. 그때였다.
쿠쿠쿵... 콰쾅!
미친 듯이 앞으로 내달리던 마차가 무엇에 부딪혔는지 거센 충격을 받으며 멈추었다.
"아악!"
태화군주는 마차의 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흐흐흐! 군주 이제 더이상 갈 곳이 없게 되었소. 이제 본 공자의 품에 안기는 것이 어떻겠소?"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사나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태화군주는 정신이 가물거리는 와중에서도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가... 감히 어쩔려고 그러느냐?"
"흐흐흐......!"
대소와 함께 부서진 마차의 주렴 속으로 손이 하나 쑥 들어왔다.
"악!"
태화군주는 질겁을 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가냘픈 몸은 우람한 사내의 옆구리에 안긴 후였다.
팔 척 거구의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불타는 석양을 등진 채 태화군주를 옆구리에 안아 들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호랑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등에 금궁(金弓)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호랑이는 아니었다. 허리에는 굵은 활통을 차고 있었다.
사나이의 얼굴은 거구인 외모와는 달리 몹시 영준했다. 그러나 눈빛만은 몹시 포악했다. 사나이는 어딘지 모르게 이국인 냄새를 풍겼다.
"클클클! 본 공자가 한 번 점찍은 여인은 설사 공주라해도 벗어나지 못한다. 알겠느냐?"
그는 바로 천궁공자였다.
휘익!
그는 혼절한 태화군주를 옆구리에 낀 채 독수리처럼 허공을 솟구치는 것이었다. 사내의 몸놀림은 생긴 것과는 달리 쾌속무비했다.
"클클! 더구나 널 취하라는 명이 있고 보면... 네가 아무리 황녀라 해도 계집은 계집이다. 푸풋! 어쩔 수 없이 너는 내 계집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황권(皇勸)도......."
천궁공자의 말이 멀어져 갔다. 그때였다.
스슥!
마차가 부서진 자리에 한 백영이 나타났다. 백영은 다름아닌 극락서생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부서진 마차를 내려다 보더니 중얼거렸다.
"천궁공자는 천마부주 위지경의 제자다. 그가 태화군주를 취하라는 명을 받았다니.... 혈의교는 이제 황궁까지도 손을 뻗었단 말인가?"
천궁공자는 바로 마도제일인인 혼세천마 위지경의 대제자였다. 혈륜궁주였던 백천강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백천강의 무심한 눈이 저물어가는 석양 속에서 번쩍였다. 실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눈빛이었다.
②
산 중턱에 아담한 초옥이 한 채 있었다.
초옥의 창으로부터 어슴프레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그 불빛을 향해 다가서는 백의 인영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땅 위를 스치듯이 걷고 있었다. 그의 보법은 바람과 같았다. 마침내 백천강은 초옥에 다다랐다.
사위어가는 편월(片月)이 짙은 구름을 뚫고 나왔다. 편월은 으슴프레한 빛을 초옥의 마당으로 흩뿌렸다. 그때였다.
"음."
백천강은 불현듯 신음을 흘리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초옥의 마당에 세 구의 시신이 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 다. 그들은 조금 전 살해된 것이 분명했다. 채 마르지 않은 피가 비릿한 혈향과 함께 마당을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냥꾼 부부인 듯한 중년남녀와 한 명의 소년이었다. 그들은 머리가 으스러진 채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그들의 부릅뜬 눈은 경악과 분노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문득 초옥으로부터 천궁공자의 음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킬킬! 태화군주. 넌 어쩔 수 없이 본 공자의 계집이 되는 거다. 오늘밤 이후 너는 내 계집이다!"
백천강은 즉시 모옥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는 창문 곁에 바짝 붙어서서 모옥 안을 들여다 보았다.
낡은 침상 위에 태화군주가 쓰러져 있었다. 천궁공자는 두 눈에 음탕한 빛을 띄운 채 침상가에 서 있었다. 천궁공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크크ㅋ! 이제 본인은 너의 낭군이 되는 것이다."
태화군주는 쓰러진 와중에서도 치를 떨었다.
"감히 날 범하려 들다니... 구족(九族)이 참수당하는 것이 두렵지도 않느냐? 더구나 이 몸을 범한다고 해서 어찌......."
"킬킬! 네게 정혼자가 있다 그 말이냐? 그 놈은 이미 죽었지 않았느냐?"
천궁공자는 탐광을 흘리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오늘밤만 지나면 넌 어쩔 수 없이 날 섬기게 될 것이다. 그후에는 황실까지도......."
천궁공자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태화군주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다, 다가오지 마라! 아악!"
찌익!
순식간이었다. 천궁공자의 손놀림은 번개같았다. 태화군주의 몸을 가리고 있던 궁장이 무참히 찢겨져 나갔다. 다음 순간 천궁공자는 얼굴색을 바꾸며 냉혹하게 말했다.
"내일부터 나와 함께 황궁으로 간다. 그리고 날 위해 황제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다오."
부욱!
다시 옷가지가 찢겨나갔다.
"놓, 놓아라! 크흐흑!"
태화군주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느새 그녀는 알몸이 되어 있었다. 천궁공자의 완력은 무지막지했다.
태화군주의 탐스럽게 부푼 젖가슴이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이제껏 어느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나신이 드러났다. 매일 같이 천축산 값비싼 향유(香乳)로 씻은 피부는 눈부시게 희었다.
"흐흐흐!"
천궁공자는 두 눈에 탐광을 흘리며 태화군주를 덮쳤다. 바로 그때였다.
"풍류를 모르는 친구로군!"
느닷없이 음성 하나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그 음성은 대단히 냉막한 것이었다.
스슷!
찰나지간 천궁공자의 몸이 섬광처럼 회전했다. 동시에 그의 두 팔이 한쪽 벽을 향해 뻗었다.
천궁공자의 손아귀에서 무서운 장력이 뻗어나갔다. 그것은 무척이나 빠른 반응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리조차 내지 않는 가공할 공격이었다.
콰쾅!
장력을 받은 한쪽 벽이 모랫가루처럼 무너져내렸다.
"쯧쯧, 너무 느리네."
조소하는 듯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천장 쪽이었다. 천궁공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이 번개처럼 등으로 올라갔다.
"헉!"
그는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휘청거리고 말았다. 없었다. 분명히 등에 있어야 할 금궁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때였다.
"쯧쯧, 이걸 찾나?"
등 뒤에서 예의 그 음성이 들렸다.
"으으!"
천궁공자는 이빨을 앙다물며 서서히 돌아섰다. 그 순간 그는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한 사람이 자신을 향해 금궁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냉막한 얼굴을 가진 백의미서생이었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 장난감으로 많은 사람을 사냥했더군."
"으으음!"
천궁공자의 입에서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는 백의미서생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깨달았다. 호수처럼 투명한 그의 눈 속에 어리고 있는 냉혹한 기운을.
그것은 고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자신의 목숨을 체념하기에는 너무나 아쉬움이 많았다.
어느새 천궁공자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백천강은 장난처럼 살기없는 웃음을 흘렸다.
"후후, 이번에는 자네가 사냥감이 되어보는 것도 좋겠네."
우... 웅.......
공기가 떠는 진동음과 함께 금궁시위가 팽팽히 당겨졌다.
"으으, 정말로 주... 죽일 셈이냐?"
천궁공자는 온몸이 땀으로 젖고 말았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백천강을 향해 말했다.
백천강은 빙긋 웃었다.
"글쎄, 이따위 장난감이 자네를 다치게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네만... 한 번 시험해 보고 싶군."
"그, 그건 장난감이 아니다. 제발!"
"그런가? 내 눈에는 형편없는 장난감으로 보이는데... 글쎄, 어디 시험해 보지."
백천강은 시위를 힘껏 당겼다.
천궁공자는 완전히 사색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살려 주시오!"
백천강은 혀를 찼다.
"쯧쯧! 천하의 천궁공자가 빌다니 송구스럽군."
"내... 내 명호를 어찌?"
천궁공자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백천강은 조소하듯 말을 이어갔다.
"후후... 네가 위지경의 대제자라는 것도 알지."
"어... 어떻게?"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무... 무엇이오?"
천궁공자는 똥줄이 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백천강은 그의 심중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든 금궁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이 금궁은 무척 강하군. 한 번 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군. 그것도 사람을 말이야."
"제발!"
천궁공자는 비굴해질 대로 비굴해졌다. 그는 자신의 무기인 금궁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강한 철판이라도 가볍게 뚫는 위력을 지닌 가공할 무기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금궁을 맞는다면 시신인들 온전할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백천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군주를 범한 뒤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그게 궁금하군."
"그건......."
"뭐 굳이 듣고 싶은 생각은 없군."
"마... 말하겠소!"
천궁공자는 완전히 체념해 버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황제를 협박하여......."
백천강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서?"
"혈의교에 책봉을 내리게 하려고 했소."
놀라운 일이었다. 백천강은 놀람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섬뜩함을 금치 못했다. 그는 멍하니 천궁공자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천궁공자는 더듬거렸다.
"물론 힘든 일이나... 지지자가 있으므로......."
문득 그는 실수를 느낀 듯 황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백천강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흉물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크크! 황실 내에 지지자가 있단 말인가? 그가 누구지?"
"그... 그건......."
천궁공자는 어물거렸다. 백천강은 금궁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말하기 싫다 그건가?"
"아, 아니오! 그는... 바로 대원수인 사광천(査光天)이오"
"뭐라고?"
백천강은 정말 크게 놀랐다.
대원수 사광천.
그는 당금 대명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인물로 황제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뿐만 아니라 대광명회를 이끌었던 사유성의 부친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혈의교의 앞잡이라는 말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으음!"
백천강은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불현듯 천궁공자를 노려보았다.
"그게 정말인가?
그때였다. 백천강의 눈은 두 개의 시뻘건 광구(光球)로 화했다. 그것은 마치 악마의 눈 같았다.
"으으으!"
천궁공자는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벌벌 떨었다. 하지만 그는 백천강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백천강은 이령심혼통심대법(以靈心魂通心大法)을 시전한 것이다. 마침내 천궁공자는 혼을 뺏긴 듯 술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 사광천은 가짜요. 진짜는 갇혀 있소. 본교의 천면환요(千面幻妖)가 대신 사광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오."
천궁공자는 심지를 완전히 제압당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놀라운 비밀들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마침내 백천강은 모든 사실을 알아냈다. 더이상 캐물을 것이 없어지자 백천강의 두 눈은 원상태로 돌아왔다.
"내... 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이지?"
정신을 차린 천궁공자는 겁에 질려 벌떡 일어났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무 말도!"
그는 부르짖으며 백천강을 덮쳤다. 그때였다.
슉!
금빛 화살이 파공성을 남기며 날았다.
"크아악!"
화살은 일직선으로 날아 천궁공자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고서도 천궁공자의 몸을 이끌고 날아가더니 그대로 맞은 편 벽에 콱 박히는 것이었다.
천궁공자는 화살에 꿰인 채 눈을 부릅뜨고 죽고 말았다.
백천강은 금궁을 버렸다. 이어 그는 천궁공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혈의교의 손길이 황궁까지 뻗쳤을 줄은 몰랐군."
③
한편 태화군주는 공포스러운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았다. 그녀는 황궁에서 곱게 자란 황녀였다. 무림인들의 이런 비정한 세계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잊고 벌벌 떨고 있었다.
"......."
백천강은 비로소 모옥 안에 그녀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듯 시선을 돌렸다. 완미한 군주의 나신을 본 백천강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는 태화군주를 향해 다가갔다.
"오... 오지 마라!"
태화군주는 비로소 사태를 깨달은 듯 황급히 두 손으로 젖가슴과 아랫배를 가리며 외쳤다. 그러나 그 모습은 더욱 고혹적이었다.
백천강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강렬한 빛을 뿌렸다.
"너... 너도 똑같은 치한이냐?"
태화군주는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바로 그때였다.
휙!
무엇인가가 태화군주의 발치 아래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뜻밖에도 백천강의 장삼이었다. 그는 장삼을 벗어 태화군주를 향해 던진 것이었다.
"......?"
뜻밖의 행동에 태화군주는 멍청해지고 말았다. 다음 순간 백천강은 정중히 읍하며 말했다.
"군주. 일개 강호인에 불과한 천민이 어찌 무례를 범하겠소이까? 우선 아쉬운 대로 옥신을 가리십시오."
"......."
태화군주는 그만 맥이 풀리고 말았다. 이어 그녀는 안도의 눈물을 쏟았다.
"흐흐흑!"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가 아닌가? 그녀는 장삼으로 나신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쁨의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부드러운 손길이 장삼으로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이어 그녀의 귀에 사내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군주께서 보신 대로요. 무림의 음모가 황궁까지 뻗치고 있소이다. 소생은 군주의 협조를 바랍니다."
"어... 어떻게?"
태화군주는 고개를 들었다.
순간 사나이의 서늘한 두 눈이 그녀의 가슴에 깊이 박혀 들었다. 백천강은 담담히 말했다.
"소생은 혈의교를 무너뜨려야 할 숙명이 있소이다. 따라서 그들의 음모를 파괴하려고 하오이다. 군주께서 소생의 뜻대로 따라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 알겠어요."
마침내 태화군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백천강은 짐짓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우선 북경으로 군주를 모시겠소이다."
"고마워요. 황상께 대협의 노고를 말씀드리겠어요."
"과찬의 말이오. 소생은 그저 한낱 강호인일 뿐이오."
백천강은 이어 말했다.
"이곳은 흉한 곳이오. 군주께서 오래 계실 곳이 못되오이다. 용서하시오."
말이 끝나자 그는 태화군주를 안았다.
백천강은 태화군주를 안은 채 몸을 날렸다. 태화군주는 엉겁결에 그의 목에 매달렸다.
"......!"
그녀의 후각으로 강렬한 남자의 체취가 숨막힐 듯 밀려들어 왔다. 그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휘휘익!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태화군주는 그만 백천강의 가슴에 옥용을 묻고 말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알몸을 모두 본 남자였다. 또한 자신을 구한 남자이기도 했다. 이제 그 남자의 모든 것이 태화군주의 마음 깊숙히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정인조차도 지금까지 이런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아아!'
태화군주는 백천강의 목을 감은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었다.
④
향운거(香雲居).
향운거는 자금성이 있는 북경으로부터 남쪽 백 리 밖에 있는 객점이었다.
만춘의 밤은 그지없이 훈훈했다. 그런 밤 한 남자가 홀로 객점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
백천강은 다구를 마주하고 앉아 묵묵히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태화군주와 함께 먼 길을 온 것이었다.
태화군주는 황족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오만하거나 도도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부드러우면서 온화했다. 그리고 속마음도 깊었다. 세상의 어떤 사내라도 그녀의 행동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태화군주를 호위하는 백천강의 행동은 뜻밖이었다. 그는 예전의 백천강이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그는 태화군주를 그냥 놔두었을 리 만무했다.
그것은 백천강의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전갈의 독에 의해서 욕정을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태화군주를 만난 후 욕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는 태화군주에게 황족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어 주는 것 외에는 어떤 관심도 드러내지 않았다. 정말이지 전혀 딴 사람처럼 행동해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태화군주는 그런 백천강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것은 신뢰 이상의 믿음이었다.
지금 태화군주는 옆 방에 있었다.
"후후!"
한순간 차를 마시던 백천강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흘렀다. 그때였다. 그의 현기어린 담담한 눈빛에 극히 음산한 빛이 찰나적으로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군주. 당신은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들어야 한다. 더 깊이... 도저히 뻐져 나올 수 없도록 말이다.'
그는 찻물을 손가락에 찍었다. 이어 탁자 위에 글씨를 썼다. 그것은 단 한 글자였다. 하지만 글자는 금방 지워지고 말았다.
"후후!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가리지 않으리라. 고금초유로 강호와... 황(皇)까지도......."
그의 음성은 너무도 낮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선을 내세우는 길이다. 사람들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제부터는 악은 감추고 선한 얼굴만 내세우는 것이다. 후후! 이것이야말로 고도의 책략이다."
태화군주.
그녀는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인이었다. 바로 당금 황제의 누이였던 것이다. 바로 그 사실이 지금 그녀를 괴롭힐 줄은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아! 차라리 평민이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태화군주는 침상보를 움켜쥐며 괴로운 듯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황족의로서의 권위따위는 애초부터 없는 듯했다. 그러나 타고난 핏줄만큼은 세상 어느 것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고통의 원인이었다.
태화군주의 괴로움에 찬 몸부림 때문이었을까? 조용히 타오르던 촛불이 파르르 흔들리며 한 줄기 검은 연기를 피워올렸다.
"휴우......."
태화군주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돌아누웠다.
이어 그녀는 멍하니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 촛불이 한 사람의 얼굴로 화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에게... 그에게 갈 수가 없는 것이 한이다. 이제 내 마음은 온통 그에게 향해 있건만......."
어느새 태화군주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내일이면 자금성에 도착한다. 그러면 아마 영원히... 다시 그를 만날 수는 없겠지."
그때였다.
"그럴 수는 없어!"
태화군주는 부르짖듯 외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침상에서 일어나 멍하니 허공을 바라 보았다.
"유성은 떨어졌어. 그렇다고 이 몸이 황녀라는 신분 때문에 외로운 별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아냐! 그럴 수는 없어. 나는 그저 평범한 아낙이 되고 싶어. 그를 마음껏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어."
문득 태화군주의 얼굴에 한 가닥 비장한 결심이 어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가자. 그에게로 가는 거야. 가서 이 몸은 황녀도, 군주도 아니라고... 그저 당신의 여인이면 족하겠노라고 고백하는 거야. 그리고 오늘밤 모든 것을 주어버리겠어."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급히 옷을 걸치고는 객실의 문을 열었다.
팔랑.......
도화꽃잎 하나가 이슥한 봄밤의 훈풍을 타고 창가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