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장 잔인한 심계(心計)
①
이경 말쯤이었다.
백천강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올 때가 되었다. 군주. 너는 한낱 여인에 불과하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가볍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여인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백천강의 방으로 들어섰다.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인, 바로 태화군주였다.
"......."
백천강은 짐짓 잠든 척 했다.
사르륵.......
옷자락이 가볍게 끌리는 소리와 함께 향풍(香風)이 다가왔다.
태화군주는 백천강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잠든 백천강의 얼굴을 하염없이 내려다 보았다.
한 순간 그녀의 입술이 힘겹게 떨어졌다.
"결심했답니다. 당신의 여인이 되기로.... 이 순간부터 이 몸은 태화군주가 아니라 주화령(朱華鈴)일 뿐이에요.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그저 평범한 여인이 되겠어요. 오로지 당신만의......."
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를 나무라지 마세요. 저 스스로가 원한 길이니까요. 오늘밤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어요."
주화령은 옷자락에 떨리는 손을 가져갔다. 달빛이 불꺼진 방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교교한 달빛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사르르륵.......
한 겹뿐인 나삼이 가볍게 흘러내렸다.
정녕 황홀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나신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주화령은 나삼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태고 이래의 나신이 달빛 속에 새하얗게 빛났다. 동그란 어깨로부터 알맞게 부푼 젖가슴이며, 잘룩한 세류요는 가히 천계의 여인을 방불케 했다.
"이 몸. 이제부터 당신의 것이랍니다."
주화령은 슬픔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완전히 알몸이 된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 보았다. 달빛이 흘러내리고 있는 나신은 너무도 아름다왔다.
그녀는 잠깐동안 두 손으로 자신의 젖가슴과 하반신을 가렸다. 그러나 곧 손을 떼더니 몸을 굽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금침을 들고 침상으로 올랐다.
그녀는 깊이 잠든 듯한 백천강의 옆으로 파고 들었다.
백천강은 잠결에 인기척을 느낀 듯 흠칫 눈을 떴다. 그때였다.
"아...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여인의 소근거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어 여인의 불타는 듯한 입술이 백천강의 뺨에 닿았다.
"아니?"
백천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순간 비단결보다도 매끄러운 여체가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백천강은 아찔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목석같은 사나이라고 해도 주화령의 육체가 불러일으키는 유혹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물론 백천강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주......."
백천강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주화령의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었기 때문이다.
"음!"
백천강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주화령의 몸은 이미 불덩어리였다. 그녀는 뜨거운 나신을 뱀같이 움직이며 백천강의 몸을 감아왔다. 황녀라는 지고한 신분 속에 숨겨져 있던 뜨거운 정열이 일시에 폭발한 듯 싶었다.
그녀는 자꾸만 백천강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아아!"
주화령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져나왔다. 백천강의 손이 그녀의 등을 힘차게 끌어 안았기 때문이다.
백천강의 손은 그녀의 매끄러운 등을 쓰다듬다가 아래로 내려가 팽팽한 주화령의 둔부에 이르렀다. 그는 힘껏 둔부를 끌어당겼다. 주화령은 그저 입술을 벌리며 뜨거운 입김을 토할 뿐이었다.
비록 그녀 스스로가 원해서 왔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남자 경험이 없는 그녀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아!"
문득 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흘렸다. 어느새 자세가 바뀌고 있었다. 백천강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선 것이다.
주화령은 그만 눈을 꼭 감고 말았다. 사나이의 탄탄하고 육중한 몸이 그녀의 나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온몸이 전율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며 머리 속이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문득 젖가슴에 우악스런 손길이 느껴졌다.
백천강의 손에 소담스런 젖가슴이 형태를 잃고 이지러졌다. 주화령은 고개를 꺽으며 입술을 벌려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흐으윽!"
주화령은 마침내 흐느낌과도 같은 신음을 발했다. 어찌된 셈인지 온몸이 열탕에 떨어진 듯 끓어 오르고 있었다. 백천강의 손길이 그녀의 육체 구석구석을 애무하고 지날 때마다 그녀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무서운 쾌감에 전율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었나? 아아!'
주화령은 내심 죽어도 좋아! 하고 외치며 온몸을 열었다. 백천강이 그녀의 몸 깊숙히 들어오도록 전신을 개방한 것이다. 백천강은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다가 마침내 마지막 자세를 취했다.
이제 고귀하기로 천하에서 비할 바 없는 황녀가 일개 강호의 무부와 한 몸이 되려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일어났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녀의 몸을 뜨겁게 애무하던 사나이가 행동을 멈추어 버린 것이다. 미지의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눈을 꼬옥 감고 있던 주화령은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백천강이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두 팔로 침상을 짚은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 보지 마세요. 부끄러워요."
주화령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문득 백천강이 고개를 흔들며 완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안 되오!"
"......!"
주화령은 찬물을 한 바가지 덮어쓴 기분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대번에 열기가 식는 것을 느꼈다.
"왜...? 어째서죠?"
그녀는 따지듯 물었다.
"이러면 안 되오."
"왜죠?"
주화령은 바보같이 재차 반문했다.
"당신은 군주이기 때문이오."
"그럼 당신은?"
"나는 일개 강호무부(江湖武夫)에 불과하오."
"왜... 안 되죠? 그것이 무슨 상관이죠?"
주화령의 음성은 애원에 가까웠다. 백천강은 담담하게 말했다.
"봉황과 까마귀는 같이 놀 수 없는 법이오. 아니, 같이 놀아서는 안 되는 법이오."
그때였다. 주화령은 문득 날카롭게 웃었다.
"호호홋! 제가 봉황이라고요? 제가?"
"그렇소."
"호호호홋! 스스로 옷을 벗는 봉황도 있나요?"
주화령은 미친 듯이 웃었다. 그 바람에 눈물이 찔끔거리며 흘러내렸다.
그녀의 나신을 가렸던 금침이 흘러내렸다. 눈부시게 뽀얀 젖가슴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녀는 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실성한 듯이 계속 웃을 뿐이었다.
백천강은 어느새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돌아선 채 담담히 말했다.
"군주께서 잠시 마음이 어지러우신 탓이오."
"호호홋! 어지럽다고?"
주화령은 연신 눈물을 찔끔이며 웃어댔다. 백천강은 차갑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잊지 마시오. 당신은 황녀요."
"황녀, 그까짓 황녀 다 소용없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버릴 수......."
그때였다. 돌연 주화령의 말이 끊어졌다. 그것은 백천강의 입에서 새어나온 뜻밖의 말 때문이었다.
"그럴 수는 없소. 왜냐면 군주의 주인이 살아 있기 때문이오."
주화령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주인? 나의 주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군주의 정혼자가 살아 있다는 말이오."
순간 주화령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거,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는 죽었어요. 나만을 남겨두고!"
그녀는 발악하듯 외쳤다.
"그는 죽지 않았소."
주화령은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죽... 죽지 않았다고요? 그럴 리가!"
백천강은 침중하게 말했다.
"사실이오. 대원수의 공자이신 사유성 대협은 분명 살아 있소. 그는 재기의 일념으로 비밀장소에서 지사들을 모으고 있소이다."
"아!"
주화령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며 혼절하고 말았다. 백천강의 말이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②
"후후후......."
백천강은 기소를 흘렸다.
주화령은 죽은 듯이 혼절해 있었다. 금침이 흘러내린 주화령의 나신이 달빛에 드러났다. 실로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빙기옥골지신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격렬한 애무에 달아올랐던 여체는 지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 여체는 웬지 슬퍼 보였다.
"......."
백천강은 주화령의 나신을 내려다 보았다. 달빛에 그늘진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비인간적이었다.
그런 백천강의 눈에는 뜻밖에도 이글거리는 탐욕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욕정의 불길이었다.
문득 그는 중얼거렸다.
"참는다. 널 범하지 않는 것이 범하는 것보다 백 배 더한 고통을 줄테니까. 이로써 너는 영원히 날 잊을 수 없을 테고... 더이상 사유성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후후후!"
백천강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주화령의 젖가슴을 슬쩍 쓰다듬었다.
'크ㅋ! 참으로 탐스러운 몸이다. 그러나 이제 넌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백천강은 흘러내린 금침을 들어 주화령의 옥신을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오늘 밤은 잠들긴 틀렸다. 푸풋!"
스슷!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어딘가 사라졌다. 깊을 대로 깊은 밤이었다.
기녀 매월(梅月).
매월은 오늘밤따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노류장화의 몸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청백지신(淸白之身)을 지키고 있었다.
같은 기녀들조차 그녀를 비웃었다. 그러나 매월은 웃음을 팔지언정 몸만은 절대로 팔지 않았다.
그녀는 누각의 침실 창문을 열어놓고 멍하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달아. 너는 알고 있니? 뜨거운 내 마음을.... 나라고 왜 사나이가 그립지 않겠니? 하지만......."
매월은 침의를 뚫고 나올듯한 젖가슴을 제 손으로 만졌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이 매월의 뜨거운 마음을 주고 싶지는 않은 거야."
이때였다. 문득 담담하면서도 매력 넘치는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나라면 어떨까? 매월."
"......!"
매월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몸을 잔뜩 움츠리면서 돌아섰다. 놀랍게도 그녀의 침상 위에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백의미서생이었다. 아니었다. 그녀가 그토록 꿈 속에서도 그리워하던 왕자였다.
백의미서생은 웃으며 팔을 활짝 벌렸다.
"매월. 널 안아주러 왔다."
"아!"
매월은 온몸에 짜릿한 그 무엇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 뿐이었다. 그 다음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 안아줘요!"
그녀는 뜨겁게 할딱이며 다가갔다.
사르륵.......
그녀는 제 손으로 침의를 벗어 던졌다.
알몸이 된 그녀의 육체가 달빛을 받아 터질 듯한 열기를 발했다.
그녀는 온몸이 타버릴 것 같은 열기와 갈증을 느끼며 그대로 백의미서생의 품 안에 쓰러졌다.
백의미서생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매월의 무르익을대로 익은 나신을 끌어 안으며 중얼거렸다.
"좋은 몸이군."
그는 매월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
매월은 젖가슴이 떨어져 나갈 듯한 아픔을 맛보았다. 그러나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사나이의 무릎에 걸쳐진 채 몸을 있는 힘껏 활처럼 굽혔다.
사나이의 억센 팔이 그녀의 허리와 둔부를 강하게 조이고 있었다. 달빛이 무척이나 고운 밤이었다. 교교한 달빛이 젖어들 대로 젖어 들고 있었다.
그날 밤 매월은 난생 처음으로 여인의 기쁨을 알았다.
그녀는 한 번도 팔지 않은 육체를 그날 밤 고스란히 사나이에게 바쳤다. 그대로 타서 재가 된다해도 그녀는 후회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③
제독부(提督府).
제독부는 당금 명조(明朝)의 대들보같은 곳이었다.
또한 그곳은 팔십일만 금군통령이자 대원수인 사광천의 부중이기도 했다.
두두두.......
제독부의 정문. 위용을 자랑하는 돌사자가 버티고 서 있는 정문 앞에 한 대의 마차가 당도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사두마차였다.
마부석에는 금의를 입은 청년무장이 힘차게 고삐를 쥐고 있었다. 청년무장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히힝.......
말은 요란한 울음을 울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마차는 제독부 앞에서 멈추었다. 그때였다.
한 명의 노장이 황급히 금군차림의 무사들 사이에서 달려나왔다. 그는 마차 앞에서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군주님의 행차를 받듭니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것은 백의미서생이었다. 뒤이어 미서생의 부축을 받으며 한 여인이 뒤따라 내렸다. 여인은 바로 태화군주였다.
영빈청(迎賓廳).
제독부를 방문하는 사람치고 영빈청에 들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곳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왕후장상 뿐이었다.
왕후장상이 아니면 대개 외전(外殿)에서 대원수의 하명을 며칠이고 기다려야 했다.
영빈청은 몹시 장엄하면서 정갈했다. 대원수 사광천의 근엄함과 검박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분위기였다.
특히 무장인 사광천의 취미답게 영빈청의 네 벽에는 십팔반 병기를 비롯하여 여러 자루의 명검보도가 걸려 있었다.
"......."
태화군주는 장총관의 안내를 받았다. 장총관은 침향목으로 된 탁자로 그녀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장총관의 말투는 극히 겸손했다. 태화군주는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때였다.
태화군주를 뒤따르던 금의청년이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섰다. 금의청년의 허리에는 금빛 패검이 걸려 있었다.
금의청년의 얼굴은 준수했다. 눈빛은 기이하게도 물빛처럼 담담한 청년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원수께서 곧 드실 것이옵니다."
장총관은 황급히 대례를 하며 사라졌다.
잠시 후 대청 안에서 곧 두 명의 청의시비가 다반을 들고 나왔다. 시비들은 태화군주를 향해 향차를 받들어 올렸다.
"......."
태화군주는 옥수를 뻗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찻잔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하하하.... 군주께서 어인 행차이시오?"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대청 안쪽으로부터 한 명의 황의노인이 걸어 나왔다. 노인은 턱 밑에 한 자에 가까운 반백의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나이는 언뜻 보아 육순을 넘은 것 같았다.
황의노인의 걸음걸이는 위풍당당했다. 그의 얼굴에는 일면 온화하고 치밀한 성품이 엿보이기도 했다. 가히 대장군의 웅장함과 거인으로서의 풍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노인이었다.
그는 바로 대원수 사광천이었다. 사광천이 나타나자 태화군주는 몸을 일으키더니 다소곳이 일례를 했다.
"소녀 대원수님을 뵈옵니다."
사광천은 황급히 마주 일배하며 말했다.
"감히.... 군주의 예를 받을 수 없소이다."
겸허함과 기도가 적절한 조화를 이룬 훌륭한 태도였다. 그 광경을 보던 금의청년의 눈이 번쩍 빛났다. 두 사람은 곧바로 침향목 탁자에 마주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태화군주였다.
"소녀가 이번에 제독부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유성공자님의......."
그녀의 말은 곧 끊겼다. 사광천의 탄식 때문이었다.
"허어! 참으로 할 말이 없소이다. 불민한 자식 놈이 강호에 뛰어들어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이까? 황상은 물론 군주께 볼 낯이 없소이다."
태화군주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공자님은 장차 이 몸의 지아비가 되실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 모든 것이 운명이겠지요."
"아아! 불효자식같으니!"
사광천의 안색은 비통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후 태화군주는 다소곳이 입을 열었다.
"소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오! 어서 말씀해 보시오. 군주."
태화군주는 속눈썹을 슬픈 듯이 파르르 떨었다.
"사공자께서 비록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지는 못했사오나 이 몸의 부군이 아니옵니까?"
"......?"
사광천의 눈에 한 점 의혹이 어렸다. 태화군주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말했다.
"소녀는 이곳에 머물며 그 분의 명복을 빌려 하옵니다."
사광천은 깜짝 놀랐다.
"아... 어찌 고귀하신 옥체를 그런... 그건 아니될 말씀이오이다. 거두어 주십시오."
"아니에요. 소녀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어요. 어찌 일국의 황녀로서 두 지아비를 섬기겠사옵니까? 이 몸은 이미... 사공자와 한몸이옵니다."
태화군주의 음성은 미미하게 떨렸다.
사광천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군주께서 그런 결심을 하셨다면 신으로서는 무한한 영광이오이다. 그러나 군주께는 너무 불행한 일이 아니오이까?"
태화군주는 고개를 떨구며 몸을 일으켰다.
"이 몸의 마음은 이미 굳어졌어요. 가능하면 사공자의 처소를 빌었으면 합니다. 그 분의 체취나마 가까이 모시고 싶으니......."
사광천은 그녀를 따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를 말이오? 속히 준비하오리다!"
사광천은 곧 시녀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태화군주의 안색은 몹시 창백해 보였다.
④
밤이었다.
태화군주는 사유성의 처소에 들어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서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리( )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 의자는 평소 사유성이 즐겨 앉던 의자였다.
그녀의 뒤에는 금의청년이 여전히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문득 태화군주가 금의청년을 돌아 보았다.
"진공자. 정말 그가 가짜일까요?"
청년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비록 완벽하게 그를 흉내내고 있으나 틀림없이 가짜이오."
"그걸 어떻게 알죠?"
태화군주는 의혹이 깃든 음성으로 물었다.
"군주는 잘 못 보았을 것이오. 그 자의 얼굴색과 손의 색이 다르다는 것을. 자세히 보면 틀림을 알 수가 있소."
"아!"
태화군주는 탄성을 발하며 일어섰다. 그녀는 금의청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당신은 정말 치밀하군요."
청년은 빙긋 웃었다.
"강호에서 밥을 먹으면 그 정도쯤은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법이오."
태화군주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때였다.
청년의 음성이 태화군주의 귓전에 전해졌다. 어느새 그의 음성은 모기소리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군주, 침착하시오. 감시자가 있소. 창밖 화원에 둘, 천장에 셋, 방금 도착했소."
"......!"
태화군주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문득 그녀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진호장(陳護將).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 겠어요."
"알겠습니다. 군주님."
금의청년은 공손히 읍했다. 이어 그는 침착하게 걸어 방을 나갔다. 금의청년은 태화군주의 방문 밖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방문을 지키려는 행동임이 분명했다.
그 순간 태화군주의 눈에는 다시 뿌우연 물안개가 어렸다. 그녀는 내심 중얼거리며 침상을 향했다.
'아아! 당신은 정말 내게는 먼 그대인가요?'
금의청년.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목상처럼 태화군주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
돌연 그의 몸에서 한 가닥 기류가 빠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기체는 곧바로 화원으로 스며들었다. 뒤이어 극히 경미한 신음이 두어 차례 들렸다.
화원으로 스며들었던 기류는 다시 천장과 마루로 스며들었다.
백천강이 지금 펼치고 있는 전설적인 분신술인 마령이혼분영대법(魔靈離魂分影大法)이었다. 그것은 과거에 진우명이 석대가(石大家)에서 썼던 술법이었다.
스스스.......
그 기류는 천장과 마루밑에 숨어 있는 자들의 숨을 가차없이 끊어놓았다. 이어 기류는 제독부 깊은 곳으로 유령처럼 날아갔다.
고풍스런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 침소였다. 그곳은 바로 대원수 사광천이 거하는 곳이었다.
"......."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그는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띄며 침상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음침한 웃음이었다.
그것은 평상시의 사광천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흐흐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진짜 사늙은이가 감쪽같이 바꿔치기 당한 줄은 모두 모르고 있다."
불현듯 사광천은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클클! 과연 하늘을 울리는 권세를 지닌 자리인지라 아무런 불편이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 놈의 늙은이가 평소 여색을 멀리하는 버릇 때문에 벌써 백 일 간이나 굶었으니. 이대로 가면 성불이라도 하겠는 걸?"
그것은 전혀 뜻밖의 내용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요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호호호! 천면환요(天面幻妖)! 낮말을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걸 모르나요? 영주께서 들었다면 당신은 목이 열 개라도 부지하지 못했을 거예요!"
"으읏!"
찰나지간 사광천은 안색이 핼쓱해지고 말았다.
그는 진짜 사광천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혈천마국의 천면환요였다. 천면환요는 파랗게 질려 입을 열었다.
"인요(人妖)! 설마 보고는 않겠지?"
스슷.......
촛불이 일렁거렸다. 뒤이어 방 안에 한 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타는 듯한 붉은 홍의를 입고 있었다.
여인의 긴 머리채는 탐스러웠다. 그것은 풍만한 둔부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얼굴에서는 요기가 철철 넘쳐 흘렀다.
인요(人妖).
무림인이라면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 이름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경멸하고 침을 뱉을 강호육요(江湖六妖)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강호육요는 무림의 비겁자들로 불리웠다. 따라서 그들은 정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사도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철면피한들이었다.
바로 그런 자들이 지금 제독부의 침전에 두 명이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사광천으로 변한 천면환요(千面幻妖)였다.
인요는 터져나갈 듯 부푼 젖가슴을 제 손으로 주무르며 음소를 흘렸다.
"호호호! 그건 당신의 태도에 달렸어요."
천면환요의 두 눈이 일순 반짝였다. 그것은 바로 탐욕의 눈빛이었다.그는 인요의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천면환요는 짐짓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떻게?"
인요는 엉덩이를 흔들었다.
"호호! 무척이나 간단해요. 오늘밤 저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장춘신단(長春神丹) 한 알을 나누어 준다면......."
천면환요는 킬킬거렸다.
"그대도 인생의 즐거움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모양이군."
그는 품 속에서 밀랍으로 싼 흑색단약 한 알을 꺼냈다.
"흐흐! 이것을 원한다는 말이지? 이것 한 알이면 밤새 쾌락을 즐겨도 지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듭할 수록 피부가 윤택해지고 더욱 젊어지지."
"호호홋!"
인요는 엉덩이를 흔들며 다가왔다.
"후훗! 어차피 서로가 좋은 일이니 그러자구."
천면환요는 인요를 향해 단약을 던졌다.
인요는 재빨리 단약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누가 뺏을 새라 냉큼 밀랍을 벗기고 삼켰다.
천년환요는 욕정 가득한 두 눈으로 그녀를 지켜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흐흐응!"
인요는 몸에 마침내 장춘신단의 약효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몸을 비비 꼬며 비음을 발했다.
"흐응! 안아줘요. 어서!"
인요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듯 옷을 활활 벗어던졌다.
그녀는 삽시에 알몸이 되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정말 컸다. 커다란 젖가슴이 덜렁거리고 둔부가 묘하게 움직였다. 그야말로 온몸이 색정으로 넘치는 광경이었다.
"클클! 갈수록 탐스러워지는군."
천면환요는 덥석 인요의 나신을 안았다. 두 탕남탕녀는 한덩어리가 되어 침상에 나뒹굴었다.
이때였다.
스스.......
침상 위의 천장에 하나의 인영이 어른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마령이혼분영대법을 시전하고 있는 백천강이었다.
두 탕인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불붙기 시작하는 육체의 음욕을 마음껏 불사르고 있었다.
백 일 간이나 굶었다는 천면환요의 공격은 가히 개걸스러웠다. 그는 인요의 육체 구석구석을 핥고 빨기에 여념이 없었다.
백천강은 입가에 비웃음을 띄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후후! 진귀한 구경감이군.'
천면환요과 인요는 미친 듯이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그들은 온갖 작태를 연출하며 쾌락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백천강은 천장에 매달린 채 그 광경을 내려보고 있었다.
문득 그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두 탕인들의 행위는 자극적이라기보다는 추해보였던 것이다.
"허억, 역시 너는......."
천면인요는 연신 요분질을 쳐대는 인요를 누르며 가쁜 숨을 쉬었다. 인요는 그의 두 다리를 허공으로 내두르며 교성을 질러댔다.
"좋아요, 좋아!"
두 탕인의 행위로 인해 방 안은 후끈한 열기로 가득차고 말았다. 두 사람의 자세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이었다.
막 상위(上位)에서 아래로 자세를 바꾸던 인요가 눈을 크게 떴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보고 말았다. 천장에 거미처럼 붙어있는 한 명의 금의청년을.
그녀는 전신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금의청년이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것이 아닌가?
"악!"
마침내 인요는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일시적으로 혼절하고 말았다.
"억! 왜 그러느냐?"
막 절정을 치닫던 천면환요는 아연실색했다. 이때 그의 뒤통수를 무엇인가가 새차게 때리는 것이 있었다. 천면환요는 그만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는 채 혼절하고 말았다.
스슷!
백천강은 침상 곁에 내려섰다. 그의 입가에는 기소가 어려 있었다.
"후후후! 재미있는 광경이군."
그는 혼절한 두 탕인을 내려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백천강은 슬쩍 손을 흔들었다.
천면환요는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인요는 허공을 끌어안은 채 눈을 뜨고 혼절해 있었다. 백천강의 손바닥이 그녀의 백회혈을 눌렀다.
"인요. 이제까지의 모든 것을 잊는 거다. 그리고 너는 뜨거운 정사를 벌이는 거다."
다음 순간 백천강의 입에서는 주술과도 같은 괴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바로 섭혼음이었다.
"아아...."
불현듯 인요는 베개를 끌어안으며 신음을 흘렸다. 쾌락에 젖은 신음이 점점 높아졌다. 백천강은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혼절해 있던 천면환요는 무엇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섰다. 백천강은 천면환요를 바라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내 눈을 보아라."
다음 순간 백천강의 두 눈은 시뻘건 광구(光球)로 화했다. 천면환요는 그 눈을 보는 순간 혼을 빼앗기고 말았다. 백천강의 마법에 걸려 든 것이다.
백천강은 담담히 말했다.
"대원수 사광천이 갇힌 뇌옥으로 가자."
"으으!"
천면환요는 신지를 완전히 상실한 후였다. 그는 꼭두각시처럼 앞장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