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화 (프롤로그) (1/425)

제1화. 프롤로그

신성 동맹과의 회전에서 패배한 지 16개월, 제국은 황제의 재능과 분투에도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도 한정된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 1년이 넘는 시간을 싸웠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역사서에 잉크 몇 줄만 남기고 쓸쓸히 퇴장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어느 겨울, 나는 제국의 황제로서 귀족들을 징벌해온 법정에 출두했다. 참관인들이 앉은 재판정에는 이글거리는 적의가 가득했다.

피고인석에 앉아 재판관을 기다렸다. 곧 법의를 걸친 재판관들이 흰 가발을 쓰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은 시선으로 이쪽을 흘깃 보더니 제자리에 착석했다.

그 중에는 오래전 내 손으로 사형 선고를 내렸던 전왕 루이의 조카, 루브르망 공작이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말과 왕실에 대한 충성 의례가 이루어진 후 재판 절차가 진행되었다. 차가운 눈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던 공작이 천천히 죄목을 읽어내려 갔다.

“황제를 참칭한 자여. 그대는 왕국의 헌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정당한 왕을 축출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국왕 폐하께 사형을 언도하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 국가 내란죄, 모반죄, 왕족 시해 죄 등 그 죄는 입에 담기에도 참람한 것들이다. 또한 그대는 정당한 국왕 폐하를 보호하기 위해 일어난 충성스런 귀족들에 대해 잔인한 진압 명령을 내려 무려 7천명을 학살했다. 이는 왕국 법 위반죄, 귀족 살해죄 등에 모두 해당된다. 여기까지의 죄도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대의 죄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대는 대군을 일으켜 주변국들을 침공하고 정복하는 참담한 범죄를 저질렀다. 그 과정에서 그대가 저지른 약탈, 강간, 방화, 살인 등의 행위는 각국이 보낸 검사들에 의해 기소장이 올라와 있다. 이외에도 열거하기에 입이 아픈 무수한 죄목들이 있다. 증인들은 증언하도록 하라.”

증인석에 세워진 자들은 모두 내 옛 부하들이다. 충성을 맹세하며 부와 명예, 권세를 얻은 자들.

그 중에는 ‘무능했음’에도 관대한 처벌을 받은 베르티에 원수도 끼어 있다. 그를 보니 절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참칭자는 보급 없는 진군을 명령했습니다. 모든 물자는 철저히 현지 조달에 의존할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 말대로 조직적인 약탈을 자행하였습니다.”

“황제를 자칭한 자는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도시마다 전쟁 배상금의 지불을 명령했습니다. 저는 그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충성을 맹세한 귀네스트 원수마저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을 보인다. 정작 정해진 몫 이상의 약탈을 금지한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 배를 불릴 기회로 보고 약탈에 열을 올린 자답지 않은 면피였다.

“모든 재판 결과는 비밀경찰의 총수 푸웨르의 손을 거쳐 황제의 손에 올라갔습니다. 나는 책임질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충성심 하나만 믿고 수도를 맡긴 레이 원수의 말은 차라리 걸작이었다.

멋대로 ‘반혁명 분자’들을 수백이나 찾아내 부지런히 단두대로 보낸 ‘공포시장’이 꺼낸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반박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원수들은 모두 입을 모아 한 목소리로 모든 책임은 ‘황제’에게 있다고 떠들어댔다. 전제 군주정에서 궁극적 책임은 국가 원수인 군주가 지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 손발이 되어 권세를 누리고 부와 명예를 나누어 받은 자들이 옛 군주를 공격하여 죄를 줄여보려는 행위는 비열하고 치졸했다.

루브르망 공작은 증인들의 발언을 중단시키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으로 죄에 대한 증언을 마치고 피고의 변론을 듣겠다. 죄인은 할 말이 있다면 해도 좋다.”

알량하나마 루브르망은 변론을 허락했다. 그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왜 그리했는지는 그대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길거리에 어린아이가 죽어가고 밀 한 줌을 얻지 못해 소녀가 몸을 파는 왕의 치세 따위, 없는 것이 좋았다.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도 그렇다. 너희 버러지들이 권세를 지키기 위해 군세를 일으킴에 무슨 자비를 베푼단 말인가. 주변국을 왜 침공했냐고? 연합왕국은 우리를 상대로 해적질을 일삼았다. 프리지아는 공공연히 폐왕 루이를 옹호했고, 오스티아는 자국 출신 왕후를 방패삼아 내정에 간섭하려 했다. 우리 권리를 침탈하려는 자들에게 군마를 보여주는 것 외에 무슨 답이 필요할까?”

나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전왕 루이가 성군이 아니라는 사실은 만인이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루브르망은 그런 반박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어차피 결말이 정해진 재판이었다.

“죄인은 그런 말로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하는가?”

“물론 죄는 인정한다. 나를 믿고 아들을 군대에 보내준 시민들에게, 대포와 총을 살 수 있는 돈을 내준 납세자들에게 죄를 지었다. 그들의 충성과 희생에 승리로 보답하지 못한 것이 죄다. 그것이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죄다.”

냉소가 절로 흐른다. 그렇기에 이 희극적인 재판에 더는 어울려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공작이 판사석에서 내려와 앞에 섰다.

오만한 눈으로 피고석을 내려다보던 공작이 나지막이 물었다.

“죄를 인정한다면 형량을 감해줄 의사도 있다. 살고 싶지 않나? 네 휘하에 종군하던 원수들 대부분이 죄를 자복한 것을 보지 않았나.”

“우습군. 명예를 안다는 귀족이 명예를 저버릴 것을 종용하다니. 나는 미천한 서민으로 태어나 옥좌에 앉았으나 부끄러움을 안다. 전쟁에 지고 수십만의 제국민을 전장의 백골로 만들었다.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살기를 바라겠는가? 죽여라.”

“죽음을 원한다는 말인가? 정말 살고 싶지 않은가?”

공작의 달콤한 제안에 쓴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루브르망 공작, 그대는 나를 죽이기를 원할 터인데, 날더러 살라고 말하는 것인가?”

공작은 방청석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리를 죽였다.

“그것도 그렇군. 솔직히 말하면 한번 뿌리가 뽑힌 왕실로서는 세계를 호령한 그대의 목을 치는 것이 쉽지 않다. 가능하면 그대의 목을 붙여두는 편이 우리 왕실의 입지를 위해 유리하다고 해야겠지. 그러니 죄를 인정한다면 적당히 정상참작을 해주고 유배형을 내려주겠다. 그럼에도 자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동맹국들의 입장도 있으니 그대의 목을 자르는 수밖에.”

“그럼 그리하라.”

더 이상은 말을 섞을 이유가 없다. 조개처럼 입을 다물자 루브르망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판사석으로 돌아가 망치를 쥐었다. 그리고 판결이 내려졌다.

“피고 필리프 아우구스트 퐁퓌르. 본 법정은 왕실과 신성 동맹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감옥은 차갑고 음습했다.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독방에 앉아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자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세계를 떨어 울린 제왕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복수의 길을 달린 끝에 황제의 보랏빛 망토를 걸치고 옥좌에 앉아 호령하게 되다니.

날 때부터 유난히 머리가 좋아 가족들이 피땀 흘려 모아준 돈으로 왕국 육군 포병학교에 입학했다. 무리한 일이었지만 출세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기에 누구보다 땀을 흘려 공부하고 노력했다. 남들이 6시간을 잘 때 3시간을 잤다. 잠을 쪼개가며 공부한 결과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국왕 루이가 주는 배지를 가슴에 달았다.

그 피나는 노력으로 육군에서도 선망의 대상인 엘리트 포병 장교로 임관했다.

그렇게 장교가 되었다. 출신도 배경도 없이 출세하기 위해 귀족의 발을 기꺼이 핥으며 개 노릇을 자청했다. 아끼고 아낀 봉급으로 귀족의 한 끼 식사를 대접하며 인맥을 쌓았다.

그래, 개같이 살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리고 돌아보았을 때 가족은 그 곁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들의 운명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죄책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커져 갔다.

혁명 전야의 혼란 속에 비참하게 죽어간 가족들의 죽음. 그래서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을 국왕 루이에게 묻기로 결심했다.

하나하나 친분이 있는 장교들을 포섭하고 실력을 길렀다. 그리고 장군의 지위에 올랐을 때 쿠데타를 일으켰다.

뜻이 맞는 동료들과 손을 잡고 공화국을 세우며 다짐했다. 가족들처럼 비참하게 죽는 이들이 없게 하겠다고.

하지만 한 번 얻은 권력의 단맛에 취한 시간에 그 생각은 깨끗이 지워졌다. 인기를 얻어 대중의 지지 속에 황제의 제관을 쓰고 군림한 순간부터.

‘무능한 왕정’들과 ‘귀족’들에게 싸움을 걸고 수십 개의 나라를 불태우며 광활한 에우로페를 누비는 데 정신이 팔렸다.

그사이에 가족들보다 더 많은, 수십만의 백성들이 죽어 나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모두가 어리석은 자신의 죄였다.

“그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겠지.”

스스로를 비웃으며 손에 깍지를 꼈다. 문득 꺼끌꺼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 이물감에 손가락을 보니 구릿빛 반지가 보였다.

오래전 그의 곁을 떠난 황후 리아가 준 선물이었다. 이국적인 동양 혼혈 여성인 리아. 지금도 가슴속에 남아 있는 추억의 여인이자 소중한 첫사랑.

신성 동맹군을 상대로 출전하던 전날 밤에 반지를 건네며 ‘황제 폐하’께 바치는 제 마음입니다, 라고 말한 그녀의 옅은 목소리가 생각났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리아 생각에 차가운 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중한 추억에 취해 녹이 슨 반지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어둠 속에서 희미한 글씨 같은 것이 반지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볼품없는 구리 반지에서 빛이 나다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황제로서 언제나 화려하고 밝은 곳에만 서 있었으니 그런 희미한 빛을 알아볼 정도로 어두운 곳에 설 일이 없었다. 전장에서든 궁정에서든.

이제 고민의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 터. 이승에서의 짧은 시간을 호기심 따위에 허비할 수는 없었다.

남은 기억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아 황제다운 태도로 의연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나으리라.

날씨는 차고 흐렸다. 빛조차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 단두대가 설치되었다.

비록 적이라고 하나 황제를 칭했던 사내.

그 처형은 왕족에 준하는 예로 준비되었다.

간수장이 눈짓을 하자 간수들이 팔을 잡고 단두대로 데려갔다. 차가운 목재 틀에 목이 닿자 눈을 감았다.

죄인의 최후를 지켜볼 신부가 주기도문을 낭송하는 동안, 입회가 허락된 샹폴레옹이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유언으로 남기실 말씀이 있으시면 전해 주시옵소서.”

“무슨 할 말을 남기겠나. 그럼에도 부족한 지도자로서 말을 하지 않고 간다면 죄업일 터. 제국 신민들에게 전해주게. 죄송하다, 라고.”

“폐하.”

“그동안 고마웠네. 샹폴레옹. 자네를 잊지 않겠네.”

마른 손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따스한 눈물에 조금은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그래. 인생의 막바지에 한 사람이라도 내 죽음에 눈물을 흘려줄 수 있다면, 값어치가 없는 인생은 아니지 않은가.

샹폴레옹이 뒤로 물러나자 신부가 축성을 해주며 말했다.

“이제 신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 죄인에게 묻겠습니다. 위대하신 그분의 아량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뉘우치겠습니까?”

“내가 죄를 뉘우칠 대상은 신이 아니라 제국민이다. 너희 성직자들도 귀족들과 같은 자들일진대, 어찌 내가 너희 앞에서 죄를 인정하겠더냐.”

모욕적인 일갈에 성직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이 사형을 위해 특별히 초빙된 대주교 신분의 고위 사제였던 터라 이 모욕을 참지 않았다.

잠시 붉어진 얼굴로 노려보던 대주교는 저주 섞인 말을 내던지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제마저 내쫓아 버리는 모습에 간수들은 혀를 찼다. 모르긴 몰라도 지옥으로 떨어지려 작정한 모습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하나 지옥이면 어떠랴. 지옥을 만든 악인에게 그 또한 과분한 곳인 것을.

가볍게 마음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숙인 채 마지막 생각을 떠올렸다.

‘다시 태어난다면 평온한 삶을 살고 싶다. 복수에 미친 삶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는 삶을.’

“기요틴 내려!”

눈꺼풀이 감긴 순간 차가운 쇠붙이가 목으로 떨어졌다. 의식이 공허로 잠기는 찰나에 새하얀 빛이 망막에 맺혔다.

그것이 에우로페를 떨어 울린 황제의 마지막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