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태동 (2)
용씨 형제의 화방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상점 주인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가자 과연 ‘용가화방’이라는 현판을 붙인 화실이 하나 있었다. 가판대처럼 보이는 나무 목판 위에는 금방 그려낸 그림들이 수십 점이나 널려 있었다. 모두 서역의 화풍대로 그려진 그림들이었다.
승도는 목판으로 다가가 그림을 몇 번 살피고는 자신의 안목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는 화가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는데, 전통 화가들의 낙관 대신 꼬부라진 글씨로 서명을 그려 넣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모두 서역의 풍습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이들이 그림을 허투루 배우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승도는 그림 앞에 멈춰 선 채로 묘한 감상에 잠겼다. 기억속의 풍경을 담은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 묘한 색감이 추억을 되새겨 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그림을 바라보는 동안 유하는 꽃신을 신은 발을 동동 굴렀다. 척 보기에도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차림새도 그리 깨끗하지 않아 잠깐 골목에 있는 것만으로도 악취가 스멀스멀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유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승도의 곁으로 다가가 문사복의 소맷자락을 당겼다. 그녀는 우선 표정으로 말했다. 눈썹을 살짝 찡그리기도 하고 코를 문지르는 시늉도 했다. 그래도 승도가 모른 척하자 눈치를 살피며 살며시 속삭여 보았다.
“고, 공자님. 오래 계시면 옷에 악취가 남으실지 모르셔요.”
사실 그녀가 참기 어려워서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승도는 깊은 감상에 빠져들어 유하의 말을 듣지 못했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주변의 소리를 잘 듣지 않는 것이 그의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유하는 ‘후’ 하고 낮은 한숨을 쉬고는 코를 잡은 채 뒤로 물러났다.
“손님이 오셨군요.”
그때 용가화방에서 큰 키에 탄탄한 근육을 가진 청년이 물감 통을 지고 나오며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승도는 그제야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는 청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즐거운 기분을 반영하듯 호기심이 담긴 눈빛이 절로 나왔다.
“그대가 화가 용씨 형제인가?”
“예. 그렇습니다.”
용문대는 소년의 차림새와 그 옆에 선 시비를 보고 공손하게 응대했다. 시비만 봐도 소년의 신분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장사를 오래 하고 싶으면 고객의 신분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그가 돈을 지불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비록 그가 화가라고는 하지만 상품을 파는 점에서는 장사치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림을 한 점 주문하고 싶은데. 주문을 받을 수 있는가?”
“물론입니다. 어떤 그림으로 해드릴까요? 초상화? 경물화?”
“풍경화로 하나 그려줬으면 하는데, 좀 특이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네.”
“특이한 그림이요?”
“내가 일러주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지. 말만 듣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하겠나?”
승도의 말에 용문대는 두툼한 손으로 머리를 쓱쓱 긁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감이 많지 않은 터에 이런 후한 조건의 주문을 거절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체류하는 서역인들 외에 그림을 주문하는 경우는 또 처음이라 고객에 대한 흥미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림 값은 최소 은화 2닢은 주셔야 합니다.”
용문대는 조금 망설이다 값을 불렀다. 너무 많이 불렀나? 그가 다시 값을 깎아줄 수도 있다는 말을 붙이려는데 승도가 말했다.
“선불로 10닢을 쳐주지.”
“감사합니다!”
용문대는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례를 했다. 그러더니 화방 안에 대고 큰 소리를 외쳤다.
“형님! 형님! 큰손님이 오셨소. 은화 10닢짜리 주문인데!”
“뭐?”
용흥기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화방에서 뛰쳐나왔다. 은화 10닢짜리 거래라니. 한 달은 물감 값을 걱정하지 않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금이었다. 그런 거래라면 그들 형제가 최선을 다해 모셔야 할 큰 고객이었다.
“그럼, 공자님. 여기서 그림을 그려 올리면 되옵니까?”
“음, 오호관에서 그려주게. 그림을 그리는 동안, 먹을 것과 잘 곳 모두 제공해주겠네.”
“오호관이라면.”
두 화가 형제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러다 뒤늦게 그 이름을 알고 놀라 부르짖었다.
“오유도 대인의 가족분이셨습니까?”
“그렇다네.”
오유도는 강주 상계 거인 중의 거인이었다. 행상으로서 부를 쌓아 천하제일 거부의 자리에 올랐고, 조정에 공납을 바치고 벼슬을 얻어 명예까지 얻은 입지적인 인물이니, 그 이름을 듣고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흥기는 고개를 숙이며 그 뜻에 따르겠다는 뜻을 보였다. 용문대도 재빨리 대답을 꺼냈다.
“알겠습니다. 물감과 화구를 준비해서 찾아뵙겠습니다.”
두 형제의 인사를 받으며 용가화방을 나섰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유하는 갑자기 승도가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신기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공자님, 갑자기 왜 저런 뜨내기 화가들에게 거금을 주시고 그림을 청하신 것이어요?”
유하가 묻자 승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뜨내기라니. 네가 그림을 볼 줄 몰라서 그런 거야.”
“어머. 소녀도 그림을 보는 안목이 있사와요.”
유하는 자신도 난을 잘 친다고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년은 가볍게 웃고는 앞서갔다. 유하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지금 소녀를 비웃으신 것이어요?”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살짝 웃는 미소가 영 거슬리는 유하였다.
***
용씨 형제는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장원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 그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가 끝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담밖에 보이지 않으니 오씨 가문의 부에 기가 질릴 뿐이었다.
그들은 한참 만에 겨우 정문을 찾았다. 정문에는 문지기들이 서서 잡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대낮처럼 훤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절로 꺼려졌지만 계약을 깰 수는 없었다. 용씨 형제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정문으로 다가갔다. 문지기들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로 오호관을 찾은 것이냐?”
“이 댁 공자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용씨 형제가 조금 눌린 음성으로 대답하자 문지기가 거만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공자님이라면 오승도 공자님께 용무가 있는 것이더냐?”
“그러하옵니다.”
“기다려라. 안에 기별을 해보겠다.”
문지기 하나가 딱딱하게 말하고는 문 사이로 사라졌다. 용문대는 형의 귀에 입을 가져가 소곤거렸다.
“형님. 오호관 오호관 하더니 정말 대단합니다.”
“강주 제일 거상이니 당연한 일이지.”
“꼭 왕공들의 저택을 보는 듯합니다.”
“왕공들보다 더할 거야.”
“그보다 이번에 공자님이 은화 10닢을 주면 화구나 새로 바꿉시다. 물감을 살 돈은 있지 않습니까?”
“아직 쓸 만한 화구를 왜 바꾼단 말이냐?”
둘이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문지기가 돌아왔다. 그는 두 형제를 보고는 마뜩찮은 눈길을 던지다 마지못해 말했다.
“들어오시오.”
보기에도 썩 잘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 출입객을 들이는 것은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문지기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두 형제는 하인의 안내를 받아 외원을 가로질렀다. 외원에는 값비싼 정원수와 기화요초로 가득하여 두 형제의 눈을 잡아끌었다. 그 풍경이 질릴 정도로 걷자 해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경은 둘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집 안에 인공 해자를 만들 정도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원과 내원을 나누는 구름다리를 건너자 하인은 발을 멈추고 둘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딱 부러지게 선을 그었다.
“여기서부터는 남자의 출입에 제한이 있소. 하나 공자님의 내락이 있어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니 경거망동해선 안 될 것이오.”
하인의 말에 용씨 형제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다리를 건너자 둘은 왜 하인이 단단히 주의를 시켰는지 알았다. 그곳에 보이는 사람은 모두 여자였다. 값비싼 비단옷을 걸친 아름다운 여자들이 곳곳에 보였다.
대부분은 시비였지만 일부는 오유도의 처첩과 딸들이었다. 그 신분을 옷차림으로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하인은 용씨 형제가 여자들에게 시선을 던질 때마다 헛기침을 하며 그들에게 재차 ‘경고’했다.
여자들 중 일부가 낯선 출입자에게 흥미를 보이기도 했지만 하인은 딱 잘라 ‘오승도’ 공자의 손님이라고 말했고, 그것으로 불미스런 접근은 차단되었다.
겨우 내원을 지나 승도의 별원에 도착했다. 별원 입구엔 낯익은 여자가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전에 승도와 함께 왔던 아가씨였다. 그녀를 알아본 용씨 형제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물었다.
“공자님은 어디 계시옵니까?”
“후원으로 가시면 계셔요. 따라오세요.”
유하는 화구를 든 용씨 형제의 모습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녀가 앞장을 서고 두 남자가 뒤를 따랐다. 전통적인 풍습에선 거의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물론 그들에게 내재된 신분의 차이를 생각하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유하는 시녀라고는 하지만 명가의 자식. 그런 그녀와 강주 빈민가에 살던 하층민 용씨 형제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유하는 꽃신을 부드럽게 옮겼다.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다기보다는 그녀의 몸에 밴 습관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용문대는 약간 동경에 찬 눈빛을 보였다. 그네들 주변에 사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품위가 없고 행동이 거칠어 여성스런 면을 엿보기 어려웠다.
여자들에게 단아한 여성상을 요구하는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하층민의 세계에선 그런 여자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공자님, 모셔왔사와요.”
용문대가 한눈을 팔던 사이에 유하의 말소리가 들렸다. 용흥기는 얼른 동생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용문대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승도는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그림을 그릴 차비를 하라고 말했다.
용씨 형제는 가져온 화구를 재빨리 펼쳤다. 붓과 나무 팔레트, 그리고 새로 산 고급 종이와 물감을 담은 병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준비를 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하지만 승도는 그들을 탓하는 대신 밤하늘을 바라보며 뒷짐을 지고 섰다.
한참 만에 화구가 겨우 정리되었다. 용씨 형제가 그림 준비가 다되었다 말하자 승도가 작업 방식을 설명하였다.
“내가 말하는 풍경을 그려주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그려주어야 하네. 물론 그 만큼의 삯은 더 지불하겠네. 일전에는 풍경화라고 했네만 사람도 그려 주었으면 하네. 물론 보고 그리는 것은 아니네.”
용씨 형제가 거절할 이유가 없는 후한 조건이었다. 그들이 조건을 승낙하자 승도는 입을 열었다.
아기자기한 집과 오밀조밀한 들판, 숲. 이국적인 서역인의 외양에 대한 묘사가 술술 흘러나왔다.
용씨 형제는 설명대로 그림을 그렸다. 보지 않은 것을 말로만 듣고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첫 번째 그림이 완성되자 승도는 그것을 보고는 수백 군데를 지적했다. 이런 느낌으로 고쳐야 한다. 등등.
형제는 다시 붓을 들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림을 그려갈 때마다 승도가 지적하는 부분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자그마치 몇 시간이 지나서야 형제는 스케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승도는 스케치를 보고는 그 위에 덧칠을 할 색감을 정해주었다. 첫날의 작업은 그렇게 끝났다.
다음 날부터 용씨 형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림을 그려야 했다. 칠을 하고 그림을 버리기를 반복했다. 저녁마다 승도는 형제를 불러 그림을 검사했는데, 그때마다 고개를 흔들곤 했다.
승도가 만족하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용씨 형제의 한계에 도전하는 작업과 같았다.
그림을 그리고, 그리고 다시 그리고. 칠하고, 칠하고, 다시 칠했다. 색감이 조금만 달라도 승도가 고개를 저었으므로 덧칠을 다시 해야 했고, 그래도 안 되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만 했다. 단시간에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려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승도도 이 작업에 지루함을 느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참을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보름이 지나서야 승도는 용씨 형제가 새로 그려낸 그림 하나를 보고 만족스런 빛을 보였다.
“수고했네.”
“가, 감사합니다.”
용씨 형제로서는 그보다 기쁜 말이 없었다. 더는 작업을 하려 해도 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유하로부터 은화를 건네받았다. 수입은 쏠쏠했지만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대작업이었다.
형제를 구름다리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던 유하는 그림을 하염없이 보고 있던 승도를 보았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공자를 모셔왔지만 그가 이토록 깊은 눈빛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그림을 쓸어보던 승도가 유하에게 그림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 그림. 내 방에 걸어줘.”
“공자님 침실 말씀이셔요?”
“그래. 참, 그림은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지 않게 신경써줘.”
“네. 주의하겠사와요.”
승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씁쓸한 모습에 유하는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그림을 들고 공자의 침실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호기심이 생긴 유하는 그림을 보았다.
그림에는 이름 모를 낯선 풍경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모두 유하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딱 하나만 빼고.
유하의 눈을 잠시 잡아 붙든 것은 밝게 웃고 있는 금발 머리의 소년, 소녀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