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4화 (4/425)

제4화. 태동 (3)

날씨가 좋은 어느 화창한 오후.

승도가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느릿느릿 제 방을 나와 회랑을 거닐었다. 이런 날은 담백하고 향이 좋은 해산물 요리가 제격이었다. 방에서 나오기 전에 하녀 하나를 불러 음식을 준비하라 일러두었으므로 가서 숟가락을 드는 일만 남아 있었다.

막 배를 채울 생각에 미소가 절로 꽃피던 차에 유하가 ‘공자님.’ ‘공자님.’을 연발하며 그를 불렀다. 승도는 무슨 연유로 그녀가 그리 다급하게 찾나 싶었다. 겨우 승도를 따라잡은 유하는 ‘놀라운 볼거리’가 있다며 소매를 잡았다.

“아직 배가 많이 고픈데.”

“나중에 드셔도 늦진 않사와요. 지금 놓치면 후회하실 것이어요.”

유하의 재촉에 승도는 하는 수 없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그녀는 계속 걸었다. 그러다 장원을 가로지를 기세라 승도가 그녀의 발을 멈춰 세우고는 물었다.

“어딜 가자는 것인데?”

“지금 상관 거리에 큰 구경거리가 있사와요.”

목소리가 몹시 다급한 것이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새로 상선이 들어온 듯싶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새로운 물품이 들어오기라도 한 거야?”

“가보시면 아셔요.”

유하가 빙긋 웃으며 재촉하자 승도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장원을 가로지르고 상관 거리까지 걷다보니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이제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승도는 유하를 다시 부르려 했다. ‘국수’라도 말아먹고 가자라는 말이 턱까지 차올랐다.

승도가 유하를 부르려는데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로 쏙쏙 들어왔다. 그토록 시끄러운 시전에서 하필 그런 말들이 잘 들릴 줄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홍모귀 여인이여.”

“낮도깨비 같은 것이 희한하게도 생겼구먼.”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에 승도의 귀가 쫑긋 섰다. 승도는 문득 호기심이 생겨 인파 사이로 고개를 디밀었다. 유하는 벌써 그를 앞질러 앞줄까지 파고들어 있었다. 겨우 인파를 헤치고 고개를 들이밀자 유하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상점가에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승도가 흠칫 놀랐다. 그곳에는 정말 서역 여인이 있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나 볼 수 있던 서역 여자가 코앞에 있었다.

서역 여인은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에 티 없이 맑고 깨끗한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 눈은 잘 세공된 유리알, 아니 보석을 연상시켰다. 피부는 눈처럼 희었고 허리는 한 줌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숨이 막힐 듯한 코르셋 때문인 듯싶었지만 그 굴곡은 지금껏 보아온 여인들보다 훨씬 선명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홍모귀 여자를 보고 기괴하다고 말했다. 꼭 붉은 도깨비같이 생긴 것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살결을 훤히 내놓고 있어 ‘오랑캐’답다고 말했다. 키도 사내만큼 훤칠하고 체격도 커 여성스런 느낌을 반감시켰다.

그런 선입견을 더욱 강화시킨 것은 바로 차림새. 그들의 옷차림은 신의 기준으로 보면 몹시 기괴한 것이었다. 서역인들은 여인의 가슴을 훤히 드러내는 것을 ‘미’의 표시라고 보았지만, 신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보수적인 신의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노출. 그야말로 오랑캐다운 차림이다.

“공자님, 정말 신기하지 않으셔요? 홍모귀 남자들은 자주 보았지만 홍모귀 여인은 처음이어요. 저 옷차림도 보세요. 아아, 망측스러워라.”

유하가 볼 것 다 보며 손으로 가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여자들도 모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시늉만 하고는 서역 여자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서역 여자를 ‘이상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피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승도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말끝을 흐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홍모귀 여자들에 대한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어 아니라고 대답하기는 좀 그랬다.

하지만 강주에서 홍모귀 여인을 본 것은 처음이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묘하게 말끝을 흐리자 눈치 빠른 유하가 다시 물었다.

“공자님은 어디서 홍모귀 여자를 보신 것이어요? 그때 그린 그림도 홍모귀 사람 같사온데…….”

유하가 그림을 들고 가다 본 모양이었다. 승도는 변명할 말을 궁리하다 자기도 믿지 않을 말을 변명이랍시고 던져보았다.

“으응. 그냥 홍모귀 남자를 보고 생각해본 거야.”

“정말이어요?”

유하는 미심쩍다는 눈으로 승도를 힐끗 보았다. 왜 변명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승도는 쩔쩔매며 말했다.

“그래, 정말이야.”

승도는 멋쩍은 웃음으로 유하의 눈빛을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 귓속말을 나누던 승도와 유하는 다시 서역 여자를 구경했다. 이미 서역 여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어 거리는 한 발 떼기조차 어려웠다.

그 과한 관심을 즐기기라도 하듯 서역 여자는 도자기와 차를 사고는 하인에게 짐을 맡겼다. 그녀가 가벼운 행동을 할 때마다, 슬쩍 가슴을 내비칠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장탄성이 흘러나왔다.

“서역 요괴가 부끄러운 줄도 몰라.”

“망측스러워서, 원.”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도리어 서역 여자가 살결을 비친다 싶으면 숨소리조차 죽이며 그에 집중하기에 바빴다.

물론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서역인에 대한 강주 사람들의 호기심은 이전부터 정평이 난 것이었다. 어떨 때는 서역 상관의 담을 넘어 서역 여자를 훔쳐보려는 자들이 나올 정도였다.

상관 거리에 나온 서역 여자는 강주에 주재하는 연합왕국 동방 무역회사 회계사의 딸로 ‘병치레’를 핑계로 이 도시에 체류가 허락된 사람이었다.

원래 신제국 정부는 ‘미풍양속’에 심히 해를 끼치는 서역 여성의 거주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과 지내고 싶어 하는 서역인들의 거센 반발 때문에 암묵적으로는 그들 소유의 상관 건물에 여자를 머물게 하는 것까지는 허락하고 있었다.

신과 서역인들의 타협점은 ‘병치레’였다. 서역 여자들이 병치레를 구실로 상관에 머물면 강주 관리들은 이를 명분으로 그 체재를 허락하는 식이다.

이 금기에 도전을 하면 신제국 정부는 무거운 처벌을 내리곤 했다.

로우랜드 대반의 부인 베아트리체가 그 좋은 예였다. 베아트리체는 강주 상관 거리에 나와 ‘쇼핑’을 즐겼는데, 그것을 본 제국 정부는 즉시 로우랜드 공화국의 상관을 폐쇄하고 대반과 그 가족들을 추방했다.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뇌물도 통하지 않았다. 이는 ‘보편적인 사회적 인식’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여자의 쇼핑도 그저 단순한 서역 여인의 나들이 정도로 일단락될 사건이 절대 아니었다.

물론 서역인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여자를 내보낸 것은 무언가 노림수가 있다는 뜻이었다. 신제국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이든, 아니면 다른 것을 노린 것이든. 서역인들이 얼마나 실용적인지 알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선 이 사건을 단순한 ‘소동’으로 보기 어려웠다.

승도는 베아트리체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조금 심각한 눈빛을 보였다. 유하는 그 사건에 대해 잘 몰랐기에 단순히 서역 여자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홍모귀는 정말 낮도깨비처럼 생겼는데, 뜯어놓고 보면 아름다워 보이는 것 같사와요.”

홍모귀의 모습에 감탄한 것인지 유하의 눈이 반짝반짝 빛냈다.

“오랑캐라 해서 추하기만 할 수는 없지. 그저 추하다고 생각하고 바라보면 그저 추할 뿐이니까.”

둘이 귓속말을 주고받는 사이 관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매우 다급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관리들에게 있어 서역 여자의 출현은 간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역 여인을 만악의 집합체, 도덕에 대한 파괴자로 간주하고 있었던 터라, 강주 시내에 서역 여성이 나타난 사건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세상이 멸망하는 일이 있어도 관이 이토록 빠르게 대응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제국 정부에 있어 세상의 종말보다 서역 여인의 출현이 더 충격적이고 놀라운 사건이었다.

“강주 관리사 대인의 명이다. 지금 즉시 서역인들을 상관으로 압송할 예정이니 모두 길을 비키도록 하라!”

“관병들이여?”

“서역 여인이 뭘 했다고 잡아간단 말인가?”

“예끼. 홍모귀 여인은 보는 것만으로 도덕이 무너진다고 하지 않던가. 나라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사람들은 수군거리면서도 좌우로 길을 비켰다. 관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은 곧 역도로 몰리는 지름길이었다. 호기심이 아무리 크다곤 하지만 역적이 될 위험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었다. 승도와 유하도 인파 사이에 떠밀려 뒤로 밀려났다.

곧 서역 여인의 앞에 관병이 섰다. 그녀는 당당한 눈빛으로 관병들을 바라보다 뭐라고 말했다. 승도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연합왕국 특유의 거친 언어였다. 그녀는 상당히 고압적인 언사로 투덜대었다. 그래도 관병들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자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푸념했다.

“내가 뭘 했다고 이러는 거죠?”

“정해진 곳으로 돌아가.”

그녀의 항의는 소용없었다. 곧 관병들은 그녀를 둘러싼 채 손가락으로 상관 방향을 가리켰다. 한참이나 뭐라고 떠들던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순순히 그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서역인 부녀자 소동은 그것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돌아가는 길에 유하는 ‘서역 여자’의 미모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자기도 흰 피부를 갖고 싶은데 찻잎으로 목욕을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느니 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승도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지만, 그의 생각은 이미 다른 곳에 닿아 있었다.

***

승도는 오유도의 후계자로서 가끔 상관 거리로 나가 상점들을 둘러보곤 했다. 그때마다 도자기 상점과 면포 상점, 향신료, 차, 비단 등 다양한 품목을 거래하는 상점들을 둘러보며 서책에 숫자를 꼼꼼히 기입했다. 가끔 기억 속의 이국적인 풍물에 눈을 팔며 살았지만 가업을 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일을 할 때는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세심하다 보니 강주의 오씨 소유 상점치고 승도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가끔 순시를 돌 때면 강주 상관 거리가 마르고 닳도록 걸어 다닐 정도였다.

오늘이 바로 그런 특별한 날이다.

유하는 오늘따라 유달리 많이 걷는 승도를 수행하다 보니 다리가 아프다고 느꼈다. 뒤에서 걷는 호 아저씨야 무술인이니 그렇다 쳐도, 공자가 그렇게 힘차게 돌아다닐 줄은 미처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날씨는 무더워 땀이 났다. 분홍빛 입술이 절로 벌어졌지만 유하는 그것도 몰랐다. 이상하게 다리는 무겁고 이마에 땀이 났다. 조금씩 뒤쳐지는 것 같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부채를 살랑살랑 흔드는 공자와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소맷자락을 살짝 당겼다.

그제야 승도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유하의 얼굴빛을 살피고는 혀를 찼다. 얼굴이 빨갛고 가쁜 숨을 억지로 참는 것이 무척 힘들어 보였다.

“괜찮아?”

유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시녀로서의 자존심이 ‘네’라는 대답을 쉽게 끌어내지 못했다. 주인의 발을 잡는 시녀라니. 유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아니요’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것을 본 승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등을 내밀었다. 성장하며 머릿속을 자연스레 채운 서역의 관습 때문인지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 대한 거리낌은 전혀 없었다.

유하는 그 모습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신의 전통 관념에서 남녀가 신체를 접촉하는 것은 가족에게 허락되는 개념에 가까웠다. 손을 잡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으니, 벌건 대낮에 업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승도는 부끄럼도 모르는지 등을 내밀고 있었다. 유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승도가 재촉했다.

“시간이 없어.”

유하는 우물쭈물했다. 여기서 업히면 공자에게 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딱 잘라 거절하기에는 체면불구하고 등을 내밀어준 그에게 쉽게 할 말이 아니었다. 유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갑갑함을 느낀 승도는 그녀의 손을 확 당겼다. 그러더니 그대로 등에 기대게 했다. 아직 낭만이 있는 소녀인 유하에게 그것은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하지만 승도는 그것에 대단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승도는 유하를 기대게 한 상태에서 엎어들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볼이 새빨갛게 변한 유하는 창피함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얼른 얼굴을 승도의 등판에 묻었다. 심장은 콩닥거리고 숨이 가빴다.

길을 지나가던 상인들이며 고용인들이 모두 승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승도는 오히려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는 유하의 허벅지 아래에 깍지를 낀 채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고 들었다. 승도의 손이 느껴지자 유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머’ 하고 소리가 나오려 했지만 그녀는 숨을 참듯 꾹 눌러 삼켰다.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꽉 잡고 있어.”

승도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를 냈지만 유하는 달랐다.

“공자님.”

“응?”

“내려주셔요.”

“괜찮지 않잖아?”

유하는 다리 아픈 것보다 이게 더 불편하다고 말하려다가 말을 꾹 삼켰다. 승도는 그녀의 손도 앞으로 당기게 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목을 안은 자세로 유하는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승도는 그녀를 업은 괴상망측한 모습으로 상관 거리를 거닐었다. 그녀를 내려놓은 것은 비단과 모직물을 취급하는 오호관 소유의 포목상에 도착해서였다. 거기서도 유하가 내려달라고 사정을 하지 않았으면 내려놓지 않았을 것이다.

겨우 승도의 등에서 벗어난 유하는 잔뜩 쌓인 비단 사이에 앉아 겨우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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