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5화 (5/425)

제5화. 태동 (4)

승도는 유하를 쉬게 내버려두고 포목상 점주 이춘식을 불렀다. 그로부터 상점의 경영 상태와 매출, 상품의 거래 내역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이춘식이 오자 승도는 먼저 상점의 상품부터 점검했다.

마침 포목상의 선반에는 비단 외에도 연합왕국과 세이비아 산 모직물이 잔뜩 쌓여 있었다. 승도는 모직물들을 보다 잠시 의아한 빛을 보였다.

그중 제품 하나를 꺼내 꼼꼼히 살펴보다 이춘식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연합왕국 산 모직물이 들어와 있던데, 품질 좋은 세이비아 산을 들이기로 한 것 아닙니까?”

승도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이춘식은 그 식견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연합왕국 산보다는 세이비아 산이 훨씬 품질이 우수했다.

대부분의 상인은 모직물을 만져보는 것만으론 차이를 쉽게 인식하지 못했는데 아직 어린 승도가 그것을 알아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전에 장부를 보고 그를 놀라게 하더니 이제는 모직물까지 구분할 줄 알아 또 놀라게 하다니. 과연 오유도의 장남 오승도에게 상재가 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우로페에서 최고급으로 치는 것이 바로 세이비아 산이나 연합 왕국 산이나 동일한 품종의 양을 키웠다. 그래서 상등품만 놓고 비교하면 차이를 아는 게 몹시 힘들었다.

꼼꼼히 봐야 알 수 있는 실낱보다 작은 차이.

그 차이를 결정한 것이 가공이다. 상대적으로 연합왕국 모직물은 생산량이 많아 세심한 부분에선 미진한 점들이 더러 있었다.

모르는 자는 그런 차이가 있는 줄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공자님. 그 차이를 구분하시고 원산지를 알아보시다니. 이 이 모가 공자님의 높으신 식견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연합왕국 산 모직물이 대량으로 들어온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납기일에 도착한 배가 연합왕국의 상선뿐이기 때문이옵니다.”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어렴풋이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연합왕국 해적 놈들이 세이비아 배를 중간에 털어 버렸구나. 경쟁이 안 되면 해적질을 해서 강탈하고, 무역은 독식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 날강도 놈들 때문에 좋지 않은 상품만 들어왔어.’

뭐 지금 모직물 거래를 보러 온 건 아니다.

승도는 생각을 접고 포목상을 찾은 진짜 이유를 꺼냈다.

“이번에 서역인들이 어음으로 거래하자던가요?”

“예. 일전에 공자님께서 언질을 주신대로 백지어음 거래를 하자고 말이 나왔습니다.”

백지어음은 은이 아니라 상인이 발행한 종이 증서였다. 막대한 양의 금은을 싣고 먼 원양 무역에 나서야 했던 서역인들이 항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개발해낸 새로운 금융 기법의 일환이다. 에우로페에서는 이미 상용화된 지 오래다.

“흠.”

승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에우로페의 무역 관행을 알다보니 은으로 대금을 결제하는 무역 관행 대신 백지어음 거래가 등장할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고 있었다.

백지어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신제국 내부의 거래에서는 쓸 데가 없다는 점이다. 자금의 순환이 중요한 상인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문제였다.

“알겠어요. 아버님께는 잘 말씀드릴 테니 가능하면 어음이 들어오지 않게 현물로 거래하세요.”

“알겠습니다, 공자님.”

“참. 예쁜 비단 한 필 있으면 보여주세요.”

“비단이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관에 뇌물로 바치려고 빼둔 최고급 비단이 안쪽에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이 점주님이 하나만 골라주세요.”

“알겠습니다.”

소년은 그리 말하며 뻣뻣해진 목을 돌렸다. 유하는 조금 놀라 물었다.

“공자님, 갑자기 비단이라뇨? 집안 창고에 쌓인 비단만 해도 몇 필인지 아셔요?”

“나중에 말해줄게.”

승도는 거기까지만 말하고는 이춘식이 골라준 비단을 받아들었다. 이리저리 색깔과 문양을 유심히 살핀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요, 이 점주님.”

“아닙니다. 살펴 가시지요.”

이춘식의 전송을 받으며 거리로 돌아오자 호씨가 급히 다가섰다. 그 행동에 승도는 의아함을 느꼈다.

“호,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조금 전 거리에 싸움이 있었습니다.”

“무슨 싸움?”

“홍모귀들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연합왕국 해적 놈들이?’

홍모귀란 말에 승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홍모귀라 불리는 자들은 연합왕국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국민성부터 온순하지 않을뿐더러 이곳에 있는 자들은 거친 대양을 넘어온 자들. 그러니 그 흉포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불과 몇 년 전, 홍모귀 하나가 술을 먹고 길 가던 행인을 때려죽인 사건도 있었다. 무능한 관청은 홍모귀들이 건넨 뇌물을 날름 받아먹고 장 몇 대로 일을 무마했고,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홍모귀의 횡포가 훨씬 더 심해졌다. 그래서 이 상관 거리에서 홍모귀라고 하면 ‘역병’과도 같은 존재로 인식했다.

“예. 이유 없이 길 가던 처자를 희롱하여 싸움이 났사온데, 상인 하나가 그만 싸움에 휘말려 팔이 부러진 모양입니다.”

“그자들은?”

“광리관 소유의 여각에 방금 올라갔습니다. 또 술을 마시려는 모양인지 모릅니다. 공자님. 사정이 이러니 서둘러 돌아가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호가 그렇게 얘기하면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

승도는 흔쾌히 그 청을 받아들였다. 비록 자유분방함을 좋아한다지만 괜히 피해갈 소란까지 찾아다니는 취향은 아니었다. 도리어 해도 될 일과 해선 안 될 일의 범위를 누구보다 엄격하게 구분할 줄 알았다. 그것도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저 망나니에 지나지 않았다.

승도는 호의 말대로 귀가를 서둘렀다. 유하도 불안을 느낀 것인지 그 옆에 바싹 다가섰다. 그래도 점잖은 걸음으로 걷다 보니 상관 거리를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상황에 체면을 따지는 것은 좀 이상했지만 신분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하를 챙길 때는 다소 체면이 망가지는 것을 감수했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이었다.

호는 평소보다 훨씬 긴장한 기색으로 승도와 유하의 뒤에 선 채로 경계했다. 그도 그런 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유하의 손을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 바람에 애꿎은 유하의 얼굴만 한 번 더 붉어졌다.

둘이 손을 잡은 채로 걸음 속도를 높일 때였다. 무언가 알아듣기 힘든 거친 음성이 들렸다.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유하와 호는 고개만 한 번 돌렸을 뿐이지만, 승도는 그것을 똑똑히 알아들었다.

제국어와 전혀 다른 체계의 음색을 가진 말, 연합왕국어였다.

“거기 서라. 노랑 원숭이들.”

그 모욕적인 말을 승도는 똑똑히 알아들었다. 시건방진 연합왕국의 뱃놈들이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하지만 시비를 받아줄 순 없다. 가릴 것 없는 거친 자들과 잘못 엮였다간 크게 손해를 보기 십상이다.

이럴 때는 그냥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다. 승도가 걸음을 재촉하자 홍모귀가 다시 윽박질렀다. 그는 벌겋게 취한 얼굴인 것이 맨 정신으로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거기, 원숭이. 서라고 말했다.”

“가자.”

승도는 애써 화를 억눌렀다. 하지만 홍모귀는 그들을 보내줄 생각이 없는 듯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비틀거리며 승도 쪽을 향해 그것을 툭 던졌다.

녹이 슬어 파랗게 변한 구리 동전이다. 승도는 동전이 자신의 앞을 굴러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제야 설 맘이 생겼나. 원숭이들아. 거기 재롱 값을 받고 서커스나 보여 봐라.”

어느새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무리 상인이 이익이 나지 않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저자의 무례함은 용납되지 않았다.

“고, 공자님. 저 홍모귀 놈이 공자님을 모욕했습니다. 제가 놈의 목을 따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호가 분노한 음색으로 말하자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호의 실력은 믿으나 홍모귀의 목을 따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외국인을 건드렸다간 부패한 관료들이 가문의 돈을 우려내는 구실로 삼을 것이다.

“서커스라고?”

“우리말을 알아듣는 원숭이로군.”

승도의 대답에 홍모귀 사내가 입술을 비틀었다. 이곳 상관 거리에서 왕국어를 구사하는 동양 원숭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쓸 줄 아는 자들도 조악한 단어와 문법으로 이루어진 괴상한 문장을 쓰는 게 고작이다.

“알다 뿐인가. 너희보다 가진 것도 많다.”

“동전 몇 닢짜리 목숨 주제에 가진 게 많다고?”

홍모귀 사내가 비웃었다.

연합왕국 사람들이 제국인들을 비웃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돈 몇 푼이면 사람을 죽여도 무마되는 곳이니, 제국 사람들이 우습게 보여도 무리는 아니었다.

“눈이 있다면 봐라.”

승도는 옷깃을 털었다. 그의 옷깃에서 새하얀 전표가 흘러내렸다.

홍모귀 사내의 눈길도 자연스레 전표를 따라갔다.

‘저건.’

잠시 흐리멍덩하던 홍모귀 사내의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졌다.

전표의 겉면엔 동방 회사의 사인이 박혀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극히 간단했다. 동방 회사의 전표를 받을 만큼 대규모 거래를 하는 자다!

‘13행!’

홍모귀 사내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13행은 한낱 동방의 노랭이로 치부할 존재가 아니었다. 황금으로 바다를 메우고 제국 정부를 대신해 동방 무역을 책임진 정부 대리인들이다.

동방 회사의 대반조차 어렵게 여기는 자들을 일개 선원이 우습게 볼 수 있을까?

홍모귀 사내가 얼어붙어 있는데 승도가 말했다.

“대충 알아본 것 같은데 너희 책임자는 누구냐?”

홍모귀 사내가 침을 삼키는데 여각에 올라가 있던 선원들이 황급히 따라 내려왔다.

그들은 이 소동을 보며 껄껄 웃으려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알아차리고 온 듯했다.

“제, 제가 책임자입니다.”

갈색 머리의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당신들의 보증인이 누구요?”

“오, 오유도 대인입니다.”

“아하, 우리 아버님이 보증인이라.”

승도의 말에 모두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동방 무역은 원칙적으로 13행의 보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오씨 가문이 보증을 철회한다면?

등골이 서늘해진 갈색 머리가 고개를 조아렸다.

“저, 저희 선원이 무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부, 부디 관용을.”

승도는 웃으며 발로 전표를 밟았다.

“일개 선원이 정2품의 지위를 가진 우리 오씨 가문을 우습게보고 모욕을 했다. 그대들의 나라에선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귀족이 모욕을 당하면 어떻게 처리하지?”

“그건.”

“이 일은 정식으로 대반에게 따지겠다.”

승도는 차갑고 딱딱하게 격식 있는 왕국어를 구사했다. 뜻밖에 들려온 정확한 발음의 고국어에 압도당했는지, 아니면 상황의 심각성에 당황했는지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벌벌 떨었다.

“용무가 없다면 우리는 이만 가보겠다.”

거친 홍모귀를 간단히 순한 양으로 만든 승도의 모습에 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마치 소년 영웅의 탄생이라도 본 듯한 얼굴들이었다.

승도는 ‘쳇’ 하고 혀를 차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하는 사람들의 이목이 멀어지고 나서야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고, 공자님. 언제 홍모귀들의 말을 배우신 것이어요?”

“글쎄. 기억이 잘 안 나는구나.”

승도는 가벼운 한마디로 얼버무렸다. 무성의한 대답에 골이 난 유하가 홱 고개를 돌리자 승도가 웃음을 지으며 ‘참’ 하고 말을 붙였다. 유하는 볼을 부풀리고는 말을 안 듣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단은 널 주려고 산 것이니 예쁘게 지어 입어야 한다.”

그 말에 유하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상관 거리에서 벌어진 홍모귀 소동은 이것으로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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