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관망 (3)
“객가라면 우습게 볼 수 없는 일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승도가 대번에 핵심을 짚어내자 정씨 사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그것을 아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다. 사람과 재화의 이동에 민감한 상인이 ‘사람’의 이동을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듣지도 않고 바로 아십니까?”
“간단한 일이지 않은가. 근래에 들어와 뜨내기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 남방으로 수도 없이 내려오니 토착민들과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그러니 분쟁이 생긴다면 십중팔구는 객가 문제겠지.”
“영명하십니다. 해서 오늘 경호에 만전을 기하려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계투가 일어났다면 그래야겠지.”
승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계투는 신왕조 시대에 들어와 심화된 사회적 현상이었다.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토지의 생산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 제국 내에서는 ‘객가’라 불리는 어마어마한 이주민이 발생했다. 그들은 풍요로운 제국 남부로 몰려왔는데, 그 과정에서 토착민들과 잦은 분쟁을 일으켰다.
이주민들은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토루’라 불리는 거대한 집단 거주지를 구축했다. 그들은 토착민, 때로는 같은 객가를 상대로 생존권을 확립하기 위해 싸웠는데, 이를 계투라 하였다. 한 번의 싸움에 수십, 많으면 수백의 인원이 참가하여 말이 민간의 분쟁이지, 웬만한 전투 저리가라 할 수준의 참상을 보여줬다.
근래에 들어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심해지고 인심이 각박해지면서 이 같은 분쟁은 더욱 가속되었다. 이를 막아야 할 관리들은 촌락의 유력자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계투를 묵인함으로써 싸움은 더욱 치열하고 잔인해졌다.
관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계투에는 화약 병기까지 사용되었다. 이렇게 계투의 성격이 자본집약적인 특징을 띠면서 그 규모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대규모화되었다. 한 번 계투가 일어나면 그 지역 전체가 치안 공백에 빠진다 봐야 했다.
정씨의 염려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승도의 허락을 구한 정씨는 무인 여덟 사람을 좌우의 방에 묵게 하고 두 사람이 교대로 승도의 방 앞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경호의 효율성을 위해 유하를 승도의 방에 머물게 했다.
경호 책임자인 정씨의 말이었기에 승도로서는 그 말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2층 자체가 방이 3개밖에 없었고 유하에게 방을 하나 내주면 무인들 몇을 1층으로 내려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승도로부터 그 말을 들은 유하는 너무 놀라 말문을 잃은 듯했다. 그녀는 시녀라곤 해도 그 신분이 낮은 여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류층에 속하는 전형적인 규방 아가씨에 가까웠다. 승도의 모친인 이씨 부인의 눈에 들어 훈육을 받으려면 관료 집안 혹은 이름 있는 상인의 딸 정도라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유하는 당혹스런 얼굴로 승도를 보았다. 차마 규방의 처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승도는 그녀의 심경을 헤아리고는 침상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침상은 유하 네가 쓰도록 해.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달구경이나 하고 싶으니.”
그 말에 유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불편한 것은 공자도 마찬가지인데 너무 자신만 생각한 것 같아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다.
더구나 공자가 얼마나 잠이 많은 사람인지 뻔히 아는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침상을 양보하려는 그 말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승도는 유하를 다독여 침상에 뉘이고는 여각의 창을 활짝 열었다. 달은 밝고 바람은 잔잔했다. 그 푸른 밤하늘을 바라보며 옛 생각을 담아 노랫가락을 풀어냈다.
유하는 그 기이한 음색에 귀를 기울였다. 알 수 없는 말에 뜻 모를 노래 가사였건만, 왠지 공자의 마음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달밤은 저물었다.
***
다행히 간밤에 큰 소란은 없었다. 계투의 여파가 여각에 미치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승도는 마차에 올랐다. 왠지 조금 더 수줍어하는 얼굴을 감춘 유하가 뒤따라 마차에 올랐다. 일행이 모두 준비가 되자 마부가 말을 채찍으로 때렸다.
유하는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승도에게 주홍빛 과일을 쑥 내밀었다. 그것을 본 승도의 눈이 의아한 빛을 머금었다. 과일을 파는 상인이 근처에 보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웬 과일인가 싶었다.
“이건 어디서 난 거야?”
유하는 빙그레 웃으며 귤의 껍질을 까서 새콤한 속살을 내밀었다. 승도는 그 시큼한 과육을 꼴깍 삼키고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얼굴을 했다.
“여각에서 받아온 건 아닌 것 같은데.”
“공자님이 잠깐 졸고 계실 때 여각 주인 아들에게 동전을 주고 심부름을 시켰사와요.”
“그래.”
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과육을 한 점 삼켰다. 덜 익은 것인지 단맛보다는 새콤한 맛이 강했다. 유하가 건네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던 승도가 마침내 고개를 흔들었다.
“더는 못 먹겠다.”
덜컹이는 진동 때문에 잠을 청하기도 뭣해서 승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귤을 까서 한 점을 입에 넣던 유하의 시선도 승도를 따라갔다. 창밖에는 푸른 대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대나무를 보던 승도는 문득 장난기가 들었다.
“유하야, 저 대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대나무 말씀이어요?”
“그래.”
“음, 우선 죽간이 있지 않겠사와요?”
“그렇지.”
종이의 대용인 죽간은 종이를 구하기 힘든 벽촌에서 쏠쏠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유하가 그것을 말한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창이어요.”
“맞아. 창도 있지. 또 없을까?”
“가구도 대나무로 만드는 걸로 알고 있사와요.”
“다른 건 없을까.”
“더는 소녀의 견문이 짧아 모르겠어요.”
“날씨가 더운 아문에서 반도인들이 어떻게 밤을 나는지 아느냐?”
유하가 고개를 흔들자 승도의 입가에 장난기가 짙어졌다.
“대나무를 깎아 만든 부인을 안고 잔다고 하더구나.”
“공자님!”
유하가 소리를 빽 지르자 승도가 웃음을 터트렸다.
짧은 소란을 뒤로하고 승도가 피로를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졸 즈음, 마부가 외쳤다.
“공자님! 금포에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유하도 승도도 눈을 번쩍 뜨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압도적으로 거대한 성벽을 두른, 도시가 있었다.
도시는 높이 10m에 달하는 성벽을 빙 두른 전형적인 성시였지만, 그 모습을 처음 본 유하는 입을 딱 벌렸다. 강주가 번영한다곤 하지만 그곳에는 성벽이 없었다. 승도도 자못 놀란 얼굴로 성벽을 보았다. 그들의 놀람도 잠시, 일행은 성문을 통과해 도시로 들어섰다.
금포는 남방의 물산이 오가는 요충지였다.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였지만 현 ‘신’ 왕조에 의해 계획도시로 탈바꿈하여 도심을 가로지르는 도로만 해도 직선으로 곧게 쭉 뻗어 있었다. 도시 내의 구역인 ‘방’과 ‘방’을 나누는 경계도 네모반듯하게 구획되어 있어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금포에서 유명한 나루터는 도시의 좌측에 위치해 있어 이곳으로 향하려면 서문을 지나서 도시를 동서로 관통하는 중앙대로를 따라가야 했다. 이 중앙대로변에는 남방에서 제일 큰 시전이 있었는데 제국 내에서 보기 드문 상설 시장이었다.
이 시전에는 북쪽의 북호에서 생산된 용정차, 동쪽의 호강에서 생산된 담배, 남쪽의 금산에서 올라온 짐승 가죽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강주에서 구하기 쉽지 않은 품목들도 이곳에서는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없는 것이 있다면 아편 정도인데, 그것도 임경문이 순시를 다녀가기 전에는 시전에 넘쳐흘렀다고 했다.
승도는 마차를 탄 채로 시전을 구경했다. 값비싼 호피도 상점에 내걸려 있는 것이 과연 금포 상설 시전의 명성에 어울려 보였다. 제국 유일의 서역 개항장으로 지정된 강주의 상관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그 재화만큼은 부족함이 없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기에 여념이 없던 승도의 옆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유하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승도가 고개를 돌리자 유하가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자님, 사람들이 뭘 하는 모양이에요.”
“난리라도 난 건가. 가보자.”
승도는 마차를 세웠다. 마침 사람들이 잔뜩 모여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싸움 구경, 불구경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 심리이기에 저절로 그곳에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인파를 헤치고 고개를 내밀자 그곳에는 흰 무명천을 입은 남자들이 모여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바닥에 앉은 채로 그들이 그리는 것은 모두 난이었다.
하나같이 난을 그리는 모습이 신기하여 승도가 하인을 시켜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곧 돌아온 사내의 이야기는 꽤 재밌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난을 그리는 대회를 열었다 이 얘기인 거네?”
“그렇습니다. 신안 염상 이 대인이 사재를 털어 대회를 주최했습니다. 상금이 상금인지라 근방에 그림 좀 그린다는 자들은 모두 참가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서역인들도 구경을 왔다고 합니다.”
“상재가 대단한 분이야.”
승도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물을 쓰는 것은 일견 손해인 것처럼 보이는 일이었지만 ‘난’을 그리는 대회를 열어 이 대인이 챙긴 이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라는 상인을 주변에 널리 알리고 ‘고급스런 취미’를 후원한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지방 유지들의 호감을 샀다. 무엇보다 서역인들과도 안면을 만들 기회를 만들었으니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승도가 그 상재에 감탄하고 있는 차에 유하가 소맷자락을 당겼다. ‘왜’ 하고 의아한 시선을 주자 유하가 난을 쿡쿡 가리켰다. 자신도 그것을 그려볼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유하도 난을 잘 그린다고 했다.
밑져야 본전인 터라 승도는 참가 신청을 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의 뒤에 섰다.
줄 맨 앞에는 서기가 서서 민원인들로부터 참가비를 건네받고 있었는데,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부패한 관청에서 찾아보기 힘든 성실한 모습이었다. 승도는 차례를 기다렸다 서기에게 유하의 이름을 적어 건네주었다.
그는 글월을 보고 분류를 한 다음 유하의 신분을 물었다. 승도는 얼버무리는 대신 자신의 신분을 대신 댔다.
“나는 강주 오호관의 장남 오승도입니다. 그녀의 보호자는 나이니 내 신분을 기재하면 될 겁니다.”
비록 상인이라곤 하나 돈으로 명예직의 정2품관 벼슬을 산 오유도가 부친이다. 따지고 보면 그의 신분은 그저 그런 사람으로 폄하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 말에 서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절차에 따라 분류해 놓으려던 서류를 맨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접수가 끝났습니다. 드시지요.”
그때 유하가 서기에게 말을 건넸다.
“실례되는 줄 아오나 소녀 하나 여쭐 것이 있사와요.”
서기는 유하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볼품없는 차림새의 평민 여자였다면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겠지만 그에게 말을 건 여자는 거물(?)을 뒷배로 두고 있었다.
“말해보시오.”
“참가 시간에 제한은 있는 것이어요?”
“참가가 늦은 사람들에게는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심사하는 분들도 사정이 있으시니 반 시진 안에 끝내야 하네.”
“알겠사와요.”
서기는 뒤늦게 참가한 이 소녀가 그려낼 그림이 궁금했다. 그녀에게 여분의 종이와 문방사우를 내주고는 참가 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유하는 알맞은 자리를 골라 종이를 내려놓고는 조심스럽게 먹을 갈았다. 먹물이 지나치게 검어지지 않도록 먹을 갈아낸 다음 붓을 잡았다. 먹물은 붓끝의 1/3만 적셨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그녀가 그려볼 수 있는 그림의 장수는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참가자가 백 장 이상을 그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내는 것과는 비교되는 수치였다.
하지만 유하는 그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듯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오직 한 장에만 집중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붓을 종이 위로 휙 그었다. 붓은 제비처럼 날렵하고 섬세했다. 서기는 그 경쾌한 움직임에서 도무지 눈을 때지 못했다. 붓은 멈춤 없이 선을 그리고 나아갔다. 때로는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일필휘지로 나아간 붓이 마침내 멈추었다.
붓이 멈추자 그림이 완성되었다. 유하는 완성된 난을 펼쳐 옆에 두고는 승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감독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붓을 멈추시오.”
아쉬움에 붓을 쥐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붓을 내려놓았다. 괜히 붓을 쥐고 있다가 실격되는 것보다는 그린 그림으로 승부를 보는 편이 나아서였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완성된 난 중 하나만 골라 서기에게 제출했다. 유하는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다 난을 들고 일어섰다.
“이걸로 된 것 같아요.”
“으, 음.”
서기는 그녀의 놀라운 그림 솜씨에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승도도 그녀가 난을 치는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었다. 완성된 그림을 보는 것과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을 보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자신은 있어?”
“자신이 있진 않지만 참가비는 돌려받아야죠.”
유하의 대답에 승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