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역린 (2)
처음 유하가 끈적끈적한 시선을 느낀 것은 신선한 꽃사과와 배를 고르면서부터였다. 과일을 들고 살피다 자신의 뒤태를 훑는 눈길을 느끼고 흠칫하여 옷고름을 여몄지만 그 이상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강주에서도 가끔 있던 일이라 유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뒤편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던 수군 군관 이세명은 입맛을 다셨다. 그가 지켜보고 있는 여인은 처음부터 그의 눈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볕에 그슬린 아문 인근 농가의 여인들과 달리 슬쩍 드러난 목의 피부는 새하얗고 깨끗했다. 그리고 가린 듯 가리지 않은 듯 비치는 얼굴의 윤곽이 그를 더 자극했다.
갸름하고 작은 얼굴은 그의 주먹보다 작았고, 희미하게 비친 이목구비는 미녀의 상에 가까웠다.
유하가 돈을 꺼내기 위해 고개를 숙이느라 유려하고 섬세한 몸의 굴곡을 드러내자 이세명은 침을 꼴깍 삼켰다. 여자가 그리 많지 않은 아문에 부임하여 여자에 굶주린 지 오래된 차에 대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미녀를 보니 음심이 동했다.
더구나 어린 여성을 특별히 선호하는 그의 기호에 맞게 유하는 앳된 소녀의 풋풋함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뒤편에서 있던 수하를 불러 귀에 대고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는 마음에 든 여자는 반드시 품어야 직성이 풀리는 위인이었다. 지금까지 생각대로 되지 않은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저 여자는 꽤 신분이 있어 보이는 만큼 조금 신경을 쓰긴 해야 했지만 그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신분이 낮건 높건 제 몸뚱어리를 함부로 집밖으로 내돌린 계집이 잘못이다. 색을 탐하는 자들이 흔히 갖는 생각이었다.
수하가 부리나케 어디론가 사라지자 이세명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는 짙어졌다. 곧 희고 고운 몸뚱어리가 자신의 밑에 깔린 채로 교성을 내지른다고 생각하니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
유하는 과일을 고르고 나서 신이 나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과일을 담은 바구니를 무인에게 맡기고는 종이를 파는 상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종이를 사면 반은 승도가 쓸 것이고, 반은 유하 자신이 쓸 몫이었다.
그녀는 시, 서화에 능했고 글짓기에 능했다. 셈법도 할 줄 알았고 고리타분한 선비들의 전통 학문뿐만 아니라 서역에서 들어온 서학에도 익숙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취미가 있다면 바로 그림 그리기였다.
그 중에서도 난을 치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승도는 난을 그리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유하도 그것을 굳이 이해시켜 주려 하지 않았다. 천인천색이라 사람마다 그 생각과 취향이 달라 이해를 시키려는 노력이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유하는 종이를 파는 상점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종이 한 뭉치를 움켜쥐었다. 이리저리 빛이 투과되는 정도도 따져보고 굵기도 확인했다. 종이를 취급하는 상인은 아니었지만 그림 그리기에 익숙한 그녀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절차였다.
상인은 유하가 종이를 꼼꼼히 확인하는 것을 지켜보고 이것저것을 꺼내 권했다. 그때마다 유하는 까다롭게 이건 아니다, 저건 아니다, 라며 퇴짜를 놓았다.
상인이 진저리를 내며 종이가 더는 없다고 말할 때가 되어서야 유하는 빙그레 웃으며 종이 한 묶음을 골라냈다. 좋은 상품을 찾기 위해서라면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녀는 철두철미했다.
종이까지 사자 무인 둘 모두 물건을 한 아름씩 안게 되었다. 장삼은 과일, 현오는 종이였다. 그렇게 물건을 가득 지고 있다 보니 유하를 제대로 경호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물건이 시야를 가리고 팔의 자유를 빼앗는 판이니 어쩔 수 없긴 하였다.
“힘드셔요?”
“아닙니다, 아가씨.”
두 사내는 유하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마주 웃음을 지으며 씩씩하게 앞장을 섰다.
유하 일행이 시전을 벗어난 것을 확인한 이세명이 손짓을 했다. 그의 명령에 열 명의 건장한 사내가 모여들었다. 모두 평복 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관의 녹을 먹는 관병들이었다.
모두 이세명과 동류인 자들로 그간 아문에서 여러 여자들을 납치해 제 욕심을 실컷 채운 악당들이었다. 모두 새로운 목표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신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는 여성의 정조를 중요시했다. 그 때문에 사내들에게 윤간당한 여성들은 제 입을 다물거나 자결을 택했다.
해서 이세명 일당은 지금까지 꼬리를 밟히지 않을 수 있었다. 설령 관에 발고한다고 해도 평범한 여성이 어찌할 길이 없긴 했다. 상류층 여성이라도 가문의 체면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할 것이고.
‘일전에 잡았던 년도 그랬지.’
뭐 일이 꼬인다 싶으면 도망가면 그만이다. 천하는 넓고 일할 곳은 많다. 악당들에게 지상천국과 같은 곳이 바로 신제국이다.
신에는 이렇게 이세명처럼 되는대로 사는 인간들이 많았다.
“앵속은 가져왔나?”
이세명의 말에 수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앵속은 그들이 납치한 여자의 정신을 흐리게 만들어 윤간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도구였다.
그것을 적당히 먹이면 여자는 망신창이가 되어 자신을 윤간한 상대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되니, 이중의 안전장치라 할 수 있다. 그 값이 싸다고 할 수는 없으나 애초 아편 밀수를 담당하던 이들이 아편 값을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가자.”
사내들은 두 패로 갈라져 뛰었다. 이곳 지리에 익숙한 터라 여자를 놓칠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동선을 확인한다면 앞질러가는 것 자체도 어렵지 않았다.
눈 감고도 일을 벌이던 앞마당에서 지름길 하나 못 찾겠는가?
일을 치를 장소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시전과 여각 사이에 늘어선 해관 소유의 창고와 직조장 중 한 군데를 고르면 된다.
관병이 해관 건물 좀 쓰겠다는데 토를 달 인간이 있을 리가.
여자만 잡아오면 그만이다.
이세명은 충직한 수하 한 패와 함께 창고 사이의 샛길로 움직였다. 숨이 차도록 뛰었지만 곧 다가올 쾌락을 생각하면 가벼운 지출이었다. 행복한 상상에 마음마저 가벼워진 이세명이 샛길 끝에 도착했다.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자 막 여자와 하인처럼 보이는 남자 둘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남자 두 놈의 체격이 다부져 보이는 게 걸렸지만 숫자에 장사는 없는 법이다. 이세명이 부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준비 다 되었나?”
“물론입니다, 형님. 장사 한두 번 하시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리 물으십니까?”
“놓치면 안 되니까 그렇지.”
이세명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수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곧 여자의 달콤한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지자 그는 수하들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무, 무슨 일이셔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유하는 갑자기 길을 막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때까지 그녀는 심각함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곧 음탕한 웃음을 짓는 사내들의 얼굴을 보고 위협을 느꼈다.
“흐흐흐.”
호위를 맡은 무인이 종이를 땅에 내려놓고는 앞으로 나섰다.
“웬 놈들이냐?”
“네 아가씨 서방 되시는 분들이다.”
“뭣? 이 자라 새끼들이 감히!”
현오는 크게 화를 내며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쓸어갔다. 그런데 아무것도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그제야 시전에 나오며 무기를 놓고 온 것을 깨닫고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실수했다. 해관이 코앞이라 무뢰배가 없을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다니.’
작금의 제국을 생각하면 관부 코앞이 아니라 관청 안이라도 위험할 수 있단 걸 감안해야 했다.
“아가씨, 피하셔야 합니다.”
장삼은 유하를 자신의 뒤로 옮기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유하가 ‘꺅’ 소리를 냈다. 어느새 뒤편에서도 한 무리의 사내가 나타나 길을 막고 있었다.
“저,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것이어요?”
유하가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이세명이 능글거리는 웃음을 던졌다.
“그야 아가씨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 아니겠소? 더도 말고 딱 두 시진만 놀아주시오. 그러면 몸 상하지 않고 돌아가실 수 있을 거요.”
“그, 그것이 규중의 여자에게 하실 말씀이셔요?”
“그러셔요. 킥킥킥.”
사내 하나가 유하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그녀를 희롱했다. 유하는 입술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 겪어보는 사내들의 거친 위협에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여기서 윤간을 당하는 거야? 그녀는 그 생각에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자라 새끼들아, 아가씨를 희롱하지 마라.”
장삼은 으르렁거리면서도 함부로 손을 쓰지 못했다. 그 혼자였다면 주먹을 휘둘렀겠으나 그에게는 보호해야 할 유하가 있었다. 괜스레 싸움을 재촉하여 유하를 더 위협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일단 하인들부터 치우고 보자. 쳐라!”
이세명의 명령이 떨어지자 장정 열이 달려들었다. 장삼은 유하를 벽 쪽으로 밀어냈다. 그는 사내 셋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자세를 낮추어 그들의 공격을 흘리고는 재차 주먹을 뻗었다.
어린 시절부터 단련한 철사권의 강맹한 힘이 실린 주먹이 관병의 배를 두드리자 마른 북어 때리는 소리가 났다. ‘억’ 소리를 내며 관병 하나가 토사물을 쏟아내며 넘어졌다.
“덤벼라.”
장삼이 주먹을 들어보이며 으르렁거렸다.
“개새끼가.”
관병들이 일제히 달려들자 장삼의 주먹이 호쾌한 선을 그렸다.
그러나 수에 장사가 없다고 장삼도 두 대나 맞았다. 단련된 무술인이 아니었다면 금세 균형이 무너진 채로 두드려 맞았을 테지만 장삼은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장삼이 싸우는 동안 현오도 사내들 사이에 포위된 채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이름도 퇴색해버린 표국에서 한 세월을 바친 무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수련해온 비천검공을 발휘할 수는 없었지만 도산검림을 지나온 경험마저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적을 벽으로 삼아 공격을 최소화하며 주먹을 휘두르는 그의 전투는 교묘하고 능수능란했다.
검만 있었다면 상대가 열이라도 능히 감당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술인 둘이서 맨 손으로 감당하기에 관병 열은 너무 많았다. 허황된 전설 속 무림 고수였다면 혼자서 일당백을 능히 상대하겠지만 그런 건 이야기 속에나 있을 뿐이다. 무예를 갈고닦아도 손이 늘어나진 않았다.
하물며 습격자는 관병이다. 외적을 상대하는 데는 나약해도 조직으로 싸우는 방법은 알고 있는 자들. 거기에 유하라는 짐까지 있었으니 둘이 아무리 잘 싸운들 이길 방법은 처음부터 없었다.
안다.
아는데.
도망칠 순 없지 않은가?
현오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쓱 닦아냈다.
“헉. 헉.”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장삼의 체력이 먼저 떨어졌다. 호흡을 고를 틈도 없이 몸을 움직이다 보니 한계점이 금방 찾아온 것이다. 현오처럼 공수의 수발을 자유로이 하는 고수였다면 조금 더 견딜 수 있었겠지만 그뿐이었다.
-퍽.
갑자기 끼어든 이세명이 돌로 내려치자 장삼이 그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새빨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돌을 든 이세명이 차갑게 말했다.
“머저리 같은 것들. 겨우 두 놈을 상대로 뭘 이리 꾸물대는 거야. 오늘은 하기 싫다 이거야?”
“아닙니다, 형님.”
이세명의 개입으로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홀로 남은 현오가 최선을 다했으나 유하를 지키려면 그가 움직여야 하는 최소한의 동선이란 것이 있었다.
현오는 거친 숨을 토해내다 주먹을 맞고 그 자리에 넘어졌다. 무수하게 쏟아지는 발길질 속에 잠시 꿈틀거렸으나 이내 그도 축 늘어지고 말았다.
천하의 고수도 피륙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두 무인을 모두 처리하자 이세명이 가볍게 박수를 치며 음충맞은 웃음을 흘렸다.
“그럼, 아가씨. 우리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자고.”
서서히 다가오는 이세명을 본 유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치욕을 당할 바에 혀를 깨물어 버리는 게 나을지도.
그녀는 작고 고른 치아 사이로 분홍빛 혀를 살짝 올리고는 턱을 가늘게 떨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