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역린 (3)
“그 손 치워라.”
뒤쪽에서 서늘한 음성이 들렸다. 이세명과 관병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자리에는 날이 잔뜩 선 사내들이 서 있었다. 모두가 기골이 장대하고 힘깨나 쓸 것 같은 자들이었다.
특히나 가운데에 선 ‘대도’를 찬 사내는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덜덜 떨고 있던 유하는 그제야 그들을 발견하고는 흐느끼는 목소리를 냈다.
겁에 질린 유하를 본 승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금방이라도 눈앞에 선 자들을 씹어 먹을 듯 살기가 충천한 눈빛이 번뜩였다. 승도가 품에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본 대도귀가 깜짝 놀랐다.
“고, 공자님. 총을 쓰시면 안 됩니다.”
총이라는 말에 관병들도 깜짝 놀랐다. 총이라니. 그런 무기는 소지 자체가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쥐고 다닌다는 것은 어지간히 힘이 있는 자라는 뜻이다.
잘못 건드린 건가?
무서운 게 없는 이세명조차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꿇어라.”
승도는 차갑게 일갈하며 권총을 꺼냈다. 그 차가운 쇠붙이를 본 관병들이 주춤거리다 이세명을 보았다.
꿇어야 할지 덤벼야 할지 결정해달라는 거다.
하지만 이세명은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관병에게도 서슴없이 총을 겨누는 상대의 신분을 가늠할 수 없어서다.
정씨는 공자가 총을 꺼내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살기가 충천한 눈빛으로 보건데 사람을 죽여도 이상하지 않은 기세였다. 이제껏 공자를 수행한 적은 몇 번 없었지만 이렇게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승도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화가 나 있었다. 유하는 어린 시절부터 그와 함께해온 가족이었고 또 풋풋한 추억을 공유한 이였다. 그런 그녀를 아문 행에 끌어들인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의 시선을 받게 했으니 스스로가 용서되지 않았다.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 일에 연루된 자들의 목을 모두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만금을 써도 아깝지 않은 심정이었다.
‘원수의 살을 씹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너희 덕분에 제대로 알게 됐다.’
승도는 관병들을 노려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승도가 유하의 위기를 알아챈 것은 경호 책임을 맡은 정의 보고 덕분이었다. 승도는 유하가 무인 둘만 데리고 외출했다는 걸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위들을 대동하고 급하게 마중을 나왔다. 그러지 않았다면 일은 수습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승도가 으르렁거리자 관병들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때 이세명이 소리를 높였다.
“감히 우리가 누군지 알고 경거망동하는 것이냐. 우리는 아문 해관에 속한 관인들이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세명이 상황을 묘면할 잔꾀를 생각해내곤 애써 호기를 부렸다.
일이 꼬였다고 해서 당장 겁을 먹을 이유는 없었다. 총이야 위협에 지나지 않았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조정의 관리에게 총을 쏠 순 없는 일이다. 오히려 이참에 뻔뻔하게 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총을 쏘면?
그건 역적이다.
아무리 잘난 집안의 인간이라 해도 그럴 순 없다. 이 상황만 모면하면 그 다음에 도망치든 어쩌든 수를 내면 된다.
“우리는 아편 밀매를 시도하는 자들을 현장에서 추포하려던 것인데, 어디서 공무수행을 방해하려 드느냐. 조정에 맞서다 목이 떨어지고 싶은 게로구나!”
그의 의도를 눈치챈 것인지 수하 하나가 배에 힘을 주고 뻔뻔하게 소리쳤다. 상황을 강간 미수에서 관병에 대한 무력행사로 바꿈으로써 주도권을 쥐어보려는 의도가 말투에 여실히 배어났다.
하긴 이런 경우가 없던 것도 아니다. 운 나쁘게 상인의 여식 하나를 건드리다 문제가 생겼을 때도 이렇게 을러대어 일을 덮은 적이 있었다.
관이라는, 국가의 공식 권위를 뒷배로 갖고 있다는 게 이렇게 유용했다.
찰칵.
승도는 그들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권총을 똑바로 겨누었다. 그 차가운 반응에 이세명은 침을 꼴깍 삼켰다. 호기롭게 말을 꺼내긴 했지만 상대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제, 제기랄.’
눈앞에 선 소년은 신분에 겁을 먹는 기색도 없었다. 사람 하나 쏴 죽이는 것이 문제될 것도 없다는 눈빛이다. 확실히 총을 가진 자다웠다. 신분이 낮지 않은 최상류층 인간이 틀림없었다.
최소한 관병을 쏴죽이고도 무마할 인맥과 배경이 있는 자다.
그렇다면 그가 건드리려 했던 여자는 저 소년의 약혼녀 혹은 누이 정도 되는 사람이란 말인가? 이세명은 입술에 침을 발랐다.
“다시 말하지 않겠다. 꿇어라.”
타앙!
승도는 차갑게 말하며 권총을 하늘로 겨누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날카로운 총성이 새파란 하늘을 떨어 울렸다. 갑자기 터진 총성에 놀란 이세명과 관병들은 겁에 질려 움찔했다.
개중에는 그대로 나자빠진 자도 있었고 오줌을 지린 자도 있었다. 여자를 농락할 줄이나 알았던 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에 맞설 용기가 있을 리 없었다. 관병 하나가 무릎을 꿇는 것을 시작으로 남은 자들도 눈치를 살피며 무릎을 꿇었다.
‘제, 제길.’
이세명도 눈치를 보며 수하들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승도는 대도귀에게 권총을 넘겨주고는 무인 셋을 데리고 사내들 사이를 성큼성큼 지나갔다.
기세가 꺾인 자들은 감히 덤벼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몇몇이 그럴 생각을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을 부라리는 대도귀의 기세에 눌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승도가 가까이 다가오자 비로소 유하가 울음을 삼키며 와락 안겼다. 승도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이젠 괜찮아. 내가 왔으니까 걱정할 건 없다.”
유하는 흐느끼며 승도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따뜻한 눈물방울이 옷자락을 적셨다. 축축한 느낌이 얇은 천을 넘어 가슴에 닿았다. 승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위로했다.
그동안 무인 셋은 쓰러진 장삼과 현오의 상세를 살폈다. 대도귀는 부하들의 상태를 힐끗 보더니 무릎을 꿇고 있던 관병들에게 다가가 한 사람씩 발길질을 가했다. ‘퍽’ 소리가 날 때마다 ‘억’ 소리가 나며 관병들이 뒤로 나자빠졌다.
그때마다 대도귀는 ‘개새끼들, 일어나’를 연발하며 다시 발길질을 가하길 반복했다. 승도의 심기를 고려한 듯 미리 처벌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 마음 씀씀이에 승도는 살심을 버렸다.
“본가로 돌아간다.”
승도는 아문에서 통관세 관련 업무를 지켜보려던 생각을 버렸다. 관병들과 부딪친 이야기를 설명하려면 유하를 아문 감독 위해충 앞에 보여야 했는데, 그건 일을 악화시킬 가능성만 컸다.
차라리 약간의 돈을 찔러주고 저자들의 처벌을 부탁하는 편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현명한 해결책일 것이다.
승도는 유하를 데리고 사내들 사이를 지나쳤다. 이세명 일당은 이미 대도귀에게 묵사발이 나도록 두드려 맞고 있던 터라 반항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승도는 대도귀를 지나치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처벌은 네게 일임하겠다. 놈들이 피눈물을 쏟을 만큼 쓴맛을 보여줘라. 처리에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다. 나와 아버지의 이름, 가문의 위신까지 끌어다 쓸 수 있는 건 다 동원해.”
“예, 공자님.”
“한 시진 후에 출발할 테니 늦지 않게 돌아오도록 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승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하를 데리고 여각으로 향했다. 이것으로 아문행의 모든 여정은 끝났다.
***
승도는 지체하지 않고 강주로 출발했다. 아문 감독 위해충에게 양해를 구하는 편지와 함께 돈푼을 남긴 터라 큰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특별히 인사를 하고 가지 않는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는 순전히 아문 감독인 위해충의 사정 때문이다. 서역배가 들어오면 직접 배에 올라 진기한 물건을 뇌물로 챙기고, 관세를 흥정해 또 돈을 챙기는 그 희한한 손버릇 때문에 ‘배’가 드나드는 아문 해관에서 위해충이 시간을 정해놓고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흥정은 언제나 길어지기 십상이고, 배는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탓이었다.
어쨌든 승도는 모든 짐을 내려놓은 기분으로 귀경에 올랐다. 배편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이세명 일당이 수군이라는 것을 알고도 배를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권총으로 그들의 기세를 꺾어두긴 했으나 물 위에서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아편 밀수에 능한 그들이라면 어떤 구실이든 만들어 없는 ‘아편 밀매죄’도 뒤집어씌울 능력이 있었다. 돈으로 해결 못 할 일은 아니지만 뻔히 보이는 위험은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 유하의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보니 승도 자신도 조금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 창밖을 보니 해가 기울어가는 것 같아 마부에게 물었다.
“숙박이 가능한 곳까지 얼마나 가면 되겠나?”
“족히 50리는 더 가야 하옵니다.”
육상 교통은 수상 교통에 비해 거리도 멀고 길도 험했다. 천연의 수로인 금포강이야 관리하지 않아도 배가 떠다니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지만 관도는 달랐다. 꾸준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도로 사정은 금세 나빠지기 때문이다.
물론 금포와 아문을 잇는 도로가 제대로 관리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 보수비용은 아문 감독 위해충의 용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알겠다.”
승도는 실망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유하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공자님!”
그때 무인 정씨의 외침이 상념을 깨트렸다. 그 목소리는 다소 다급하고 흥분된 어조였다. 대도귀가 놀라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라 승도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시선을 주자 정씨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시체입니다.”
“무슨 시체이기에 날 부른 겁니까?”
승도는 그리 놀라지 않고 응대했다. 시체를 보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굶어 죽은 자들이 부지기수인 시대이고 역병에 죽는 자들도 많았다. 더구나 계투가 벌어지면 사람 몇 죽어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시체를 보고 놀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정씨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정황에 약간의 견해를 덧붙이며 위험성을 설파했다.
“이상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제가 경계하던 숲 가장자리에 버려진 시신이었는데, 검상과 달리 앞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이 아무리 봐도 총상을 입은 것 같았습니다.”
“총상이라고요?”
승도는 정씨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았다. 총격으로 죽은 시체는 칼을 맞아 죽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계투에서 총을 사용하는 일이 드물다 보니 서역인이나 관이 얽힌 문제일지 몰랐다.
“그렇습니다. 소인의 안목으로는 총상 외에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정씨의 말대로 총상을 입은 시체가 확실하다면 문제는 꽤 고약하다고 할 수 있었다. 계투가 아니라 서역인들이 연루된 사건이라면 예상치 못한 문제가 될 수 있어서였다.
“계투일 가능성보다는 서역인들이 얽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렇습니다. 계투라면 토루나 농지도 없는 관도에서 싸울 이유가 없습지요.”
정씨의 말에 승도도 수긍했다. 계투일 가능성은 극히 낮았으니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냄새가 풍겼다.
“서역인들이라.”
승도는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마침 태양이 산 어귀로 넘어가며 불그스름한 빛깔을 내뿜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