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3화 (13/425)

제13화. 역린 (4)

비가 추적추적 오는 늦은 밤에야 일행은 근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각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겨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뜨끈한 물을 머리에 다시 끼얹고는 고개를 뒤로 젖히자 시원한 느낌이 꼬리뼈부터 정수리까지 치밀어 올랐다.

“우, 살 것 같다.”

원래 그는 정말 씻지 않고 살았다. 롤모델이었던 프리지아의 절대 군주 프레드릭이 평생에 세 번만 씻었다고 해서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품격 없는 짓이다. 여자가 정색을 하고 침대에서 내쫓을 때만 마지못해 목욕을 했는데 정말 ‘야만인’이 따로 없었다.

물론 그가 특별히 더러웠던 것은 아니다. 물을 몸에 대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던 에우로페 상류층 인사들은 한 달에 한 번 목욕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오자 깨끗한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찬은 생각보다 훌륭했다. 갓 잡은 닭으로 끓인 탕국에 닭고기 볶음, 신선한 산채와 잘 쪄낸 농어 한 마리가 상에 놓여 있었다.

승도는 수저를 들려다 유하가 생각이 났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멍한 눈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불러다 앉혔다.

그제야 유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얼떨떨한 눈을 하고 있는 그녀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자 단호한 투로 말했다.

“먹어.”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그리고 더 고집이 센 승도가 이겼다. 유하는 조심스레 뜯어놓은 닭고기 살점을 잘라 아주 조금 입에 넣었다. 병아리 눈물만큼 고기를 먹는 모습에 수저를 뺏어 입에 넣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식사량이 적었다.

수저를 조심스레 놀리던 유하가 잠시 손을 늦추었다.

“공자님.”

“응?”

밥이 입에 들어 있어 목소리가 조금 어색하게 나왔다. 유하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자들은 어떻게 처벌을 받았나요?”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리긴 힘들 거야. 정씨가 뼈를 분질러 놓긴 했지만 관직을 삭탈하거나 옥에 가두는 건 아문 감독 위해충의 마음에 달린 거니까.”

승도는 그 말을 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위해충이 그런 처벌을 내릴 가능성은 희박했다. 수군이라면 그 손발이 되어 아편밀매를 하는 자들일 터다. 위해충이 제 돈줄이나 다름없는 자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리어 제 수하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영업’에 더 충실하도록 해준다면 모를까.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어요. 그자들은.”

유하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승도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그녀가 바라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맞아.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신제국은 이미 상식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황실은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여 국가 재정의 사분의 일을 낭비했다. 부패한 관료들은 세금의 절반 이상을 중간에 가로채었다. 지주들은 농민들을 수탈했고 상인들과 공인들은 임노동자들을 쥐어짰다.

그 어디에도 법치는 남아 있지 않았다. 제국을 지배하는 것은 부패한 금력과 권력이 만들어낸 약육강식의 법칙이었다.

승도는 풀이 죽은 유하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위해충의 처벌이지, 내가 내리는 처벌은 아니야. 언젠가 그자들을 처벌해줄게. 내 이름을 걸고.”

“네.”

유하는 겨우 그 말에 힘을 얻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상을 물리고 유하를 건넛방에 데려다주려는 차에 정씨가 뛰어 올라왔다.

“공자님.”

“무슨 일인가?”

“공자님 생각이 맞았습니다. 아까 마차에서 말씀드린 총상 입은 시체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그게 왜?”

“서역 도적들이랍니다.”

정씨의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도적은 도적인데, 서역 도적이라니?

“뭐?”

승도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서야 겨우 말이 나왔다.

“서역 도적들이라니, 그게 무슨?”

“여각 주인에게 듣자하니 서역에서 온 도굴꾼들이 이 근방을 돌며 무덤을 판다고 합니다. 그러다 마주친 사람은 모두 죽인다고 해서 말들이 많습니다. 해적보다 무섭고 승냥이만큼 사나운 자들이라 하니 각별히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문이 돌 정도면 관에서도 알지 않던가?”

“어림도 없답니다. 배에 기름이 낀 관병들이 총포를 가진 서역인들을 뭐 하러 쫓겠습니까? 이문은 생기지도 않고 목숨만 위태로우니 나서지 않는답니다.”

정씨의 말에 승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녹을 먹는 자들이 기본적인 치안조차 포기한 작태는 한심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관도를 따라 이동하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겠군. 아니 그런가?”

“그렇습니다. 서역 도굴꾼들의 수효는 알 수 없으나 석관묘를 팔 정도면 적어도 열 이상은 돌아다닌다고 봐야 할 겁니다.”

“총을 든 서역인 열이라.”

승도는 여정에 끼어든 뜻밖의 장애물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공자님, 길을 조금 지체하더라도 안전을 도모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어떻게?”

“관의 지현에 협조를 구하시는 것이.”

정씨의 말에 승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치안도 돈을 주어야 제공받는 이 나라의 작태는 도무지 적응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유하의 얼굴을 보고 ‘흐음’ 하고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일행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돈을 쓰는 편이 낫다 싶었다.

승도가 결심을 내리고는 서찰 하나에 글씨를 빼곡히 채워 무인 하나의 손에 들려주었다. 이곳을 관장하는 중양현의 지부대인에게 주는 편지였다. 적당한 돈을 함께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서역인이 얽힌 도굴 사건은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일어나곤 하는 일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발트슈타인의 한왕 아이신 무쿠(Aisin Mukyu) 웅리묘 도굴 시도다.

이 사건은 제국 황족에 대한 도굴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제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희대의 대사건이었다.

신성불가침의 할라(Hala: 성)로 존중받아 온 아이신 무쿠 혈족의 묘에 대한 도굴 사건인 탓에 ‘특별히’ 알려졌을 뿐, 그 외에 알려지지 않은 도굴 사건의 횟수는 적지 않았다. 연해에 접한 지방이라면 서역인 모험가에 의한 도굴 시도가 한 번쯤은 있었다.

무덤에 막대한 부장품을 매장하는 풍습을 이용한 것이다. 도굴 사건의 동기를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신제국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죽은 자들을 모욕하는 것은 잔악무도한 살인자들도 꺼리는 금기에 가까운 행위!

도굴범에 대한 제국 사람들의 증오는 서역인들이 생각하는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잡히는 즉시 능지처참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목을 효수하여 백골이 될 때까지 장대에 걸어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 보니 도굴을 하는 서역인들은 잔인해질 수밖에 없었다. 잡히면 끔찍한 죽음을 당하게 되니 목격자들까지 모두 죽여 버리는 것이다.

정씨가 관의 경호를 권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다. 서역 강도들과 마주칠 경우 타협점은 있을 수 없었다. 살인멸구가 원칙인 자들과 타협할 수 없는 노릇이니, 가능하면 그들을 상대해 이길 만큼의 숫자를 갖추는 쪽이 나았다.

승도도 거기에 동의하여 뇌물을 제공했다. 하지만 관병의 전력을 믿어서 그런 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심리를 믿어서다.

대체로 인간은 수적으로 우세한 상대를 보면 기세가 꺾이고 공격을 망설였다. 낯선 타지에서 활동하는 서역 강도들의 경우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물론 이것은 그의 추측이다. 강도질도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하다 보면 없던 배짱도 생기게 마련이다. 관병의 호위를 얻는다 하더라도 100% 안전을 단정 짓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날이 밝자 서찰을 보낸 무인이 돌아왔다. 그는 관청으로 가면 지현이 관병을 준비해 주기로 약속했다는 말을 꺼냈다. 인사조로 보낸 몇 푼의 돈이 탐관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몇 푼만 더 찔러주면 아예 관청을 바칠지 몰랐다.

관청으로 가자 위해충 못지않게 비대한 체구를 가진 장년인이 관복을 걸친 채로 승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 두꺼비처럼 통통한 얼굴. 쭉 찢어진 메기입. 얼굴만 봐도 탐욕스럽게 생겼다. 그 고깃덩어리와 별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무인을 시켜 돈 주머니를 건넸다.

정청에서 대놓고 돈을 건넸지만 지부대인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얼굴로 돈을 날름 받아 챙겼다. 두꺼비가 파리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잡아당기듯 그 손은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두꺼비는 돈을 받고는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승도 공자라 하셨습니까? 내 평소에 풍월로 들어온 강주 오유도 어른을 존경하여 그분께 뭘 해드리고 싶었는데, 이리 공자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 몹시 기쁩니다.”

‘먹은 만큼이나 해주면 다행이겠지.’

승도는 혀를 차며 겸양의 인사를 건넸다. 유하는 애초에 마차에 두고 나온 터라 지현에게 인사시킬 생각도 없었다. 몇 마디의 덕담을 건네자 지현은 웃으며 물러갈 것을 허락했다. 어차피 현의 실무를 책임진 자는 지부대인이 아니라 현승이다.

현승은 오늘날로 말하면 현의 ‘국무총리’쯤 되는 사람으로 웃전에 뇌물 바치고 인사하러 다니기 바쁜 현령을 대신해 실무 전반을 책임진 인물이었다.

공식 서열도 현에서 두 번째로 승도를 배웅하기에 적당한 신분이라 할 수 있었다. 현승은 현위를 불러 어디까지 호송을 하고 어디서 돌아올 것인지를 상세히 지시했다. 물론 그 이야기는 모두 승도 앞에서 했다. 아무래도 돈을 지불한 ‘고객’이니 만큼 그런 점에서 배려를 했다고 할 수 있었다.

현위는 현승에게 포권하고는 관병들을 지휘해 마차 앞으로 몰아왔다. 훈련 상태나 무장 수준은 빈말로도 좋다고 말하기 어려운 자들이다. 꼭 허수아비처럼 생긴 것들이 마차 앞에 도열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창을 들고 있었는데 화약 무기가 보편화된 시대상에 전혀 맞지 않는 무장이었다.

공식적으로 현은 치안 유지 목적으로 보유한 관병도 화약 무기를 보유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는 말뿐인 규정이었다. 실제로 인가된 기준을 지키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지비가 비싸고 고도의 훈련이 필요한 화약 무기를 유지할 만큼 ‘애국적’인 지방 관리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창을 든 자세도 어설펐다. 보통 창을 징집병 최고의 무기라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틀린 말이다. 기본적인 자세를 익히는 시간은 짧다지만 고도의 숙련도를 발휘하려면 칼보다 숙달이 어려운 병기가 바로 창이다.

길이가 긴만큼 수발이 어렵고 집단으로서의 훈련도 필요한 병기다 보니 어떤 면에서는 도검보다 기본 병기로 나쁘다 할 수 있었다.

오합지졸에 무장은 창뿐인 관병들을 보니 승도는 어이가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자들은 백을 뭉쳐놓아도 정강한 서역인 하나를 감당할 수 없었다. 화약 무기의 총성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자들이라면 서역인의 공포 한 번에 달아나고도 남았다. 하지만 현령이 내줄 수 있는 병사는 이것이 전부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쨌거나 승도는 여정을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기다린다고 호위를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중양현의 관병과 무술인들을 합치니 마차를 둘러싼 경호원은 자그마치 서른이나 되었다.

이만하면 어지간한 관부 인사의 행차에 비교할 만한 위세였다. 서역인들이 신중하다면 숫자를 보고 공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승도는 서역 도굴꾼들에 대한 염려를 접고 마차에 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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