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응전하다 (2)
승도가 금포에 도착했을 때 분위기는 예전과 사뭇 달랐다. 금방이라도 난리가 일어날 것처럼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고, 관병들이 거리 곳곳에 쫙 깔려 있었다. 심지어 시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상인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금포에 체재하던 염상들은 모두 나루에 배를 묶어둔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서역인들이 자신들에게 해코지를 할까 두려운 탓이다. 염상이 상행위를 하지 않으니 금포 거리의 활력은 평상시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시전 거리를 둘러보고 여각에 여장을 푼 승도는 곧바로 정씨를 찾았다. 그렇지 않아도 도시의 분위기가 수상하여 그를 시켜 소식을 알아보라고 시켜둔 참이었다.
탐문을 하고 돌아온 정씨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서역 군선이 금포강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공자님.”
“우리가 아문을 지나올 때만 해도 서역 군함 이야기는 없었잖은가. 제아무리 서역 군함이 강하다고 하나 하루 이틀 만에 아문을 통과해 금포강을 올라갈 리는 없을 터인데.”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만, 사실이라고 합니다.”
정씨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승도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건은 간단히 듣고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군선이 확실하다던가?”
“그렇습니다. 대포 구멍이 몇 줄로 뚫려 있어 분명 서역 상선들과는 다른 외견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정씨의 말에 승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서역 군함의 출현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대 사건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서역 군함이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딱히 양국 간에 분쟁이 발생할 만한 이유는 없어보였다.
‘위해충과 윌리엄 백작이란 연합왕국인이 무언가를 꾸민 건가?’
문득 밀담을 나누던 그 둘이 생각났다. 흠차대신과 윌리엄 백작, 그 두 작자가 서역 군함 출현의 배후라면 아문을 단시간에 통과한 전열함 문제도 이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문 감독만 묵인해 준다면 아문 포대와 수군은 대포 한 발 쏘지 않을 것이고, 서역 전열함은 유유히 금포강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면 국적(國賊)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는 매국 행위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승도는 입맛이 썼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신의 썩어가는 고름이 악취를 풍기며 제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미 이 나라는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중환자나 다름없었다.
“아문으로 급히 사람을 보내야겠네.”
“하문하십시오.”
“아문으로 사람을 보내 아문 포대와 수군 진지가 무사한 것인지 직접 확인하고 돌아오라고 하게.”
“관을 염탐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승도는 낯빛을 굳혔다. 관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실력밖에 없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정보가 중요했다.
적시에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면 그릇된 판단을 내리기 쉽다는 것을 승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예.”
“당장 배편을 준비해. 지금 어물거리며 육로로 갈 시간이 없어. 한시가 급해.”
“알겠습니다.”
정씨를 내보내자 유하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아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서역 군선이라니. 신화 속의 용이나 봉황은 두렵지 않아도 ‘서역 군함’은 실존하는 괴물이다.
“공자님, 서역 군선이 나타났사온데 배를 타시려 하시와요?”
“급하니까 어쩔 수 없어. 지금은 한시가 급한 문제야.”
“소녀는 공자님께 혹여나 화가 미칠까 염려되어요.”
“알아. 하지만 이 문제는 그런 위험도 무릅쓸 수밖에 없는 급박한 사안이야. 썩은 관이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으니 내가 해결하는 수밖에.”
“공자님이 해결을 하셔요?”
“불가능하진 않아.”
승도는 그것만큼은 자신을 드러냈다. 서역인의 강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다.
사실 보이는 것만큼 서역인은 강자의 입장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뱃길로는 7만 리나 떨어진 곳에 본국을 두고 있어 동방에 투사할 수 있는 역량이 제한돼 있었다.
한정된 투사 역량으로는 신제국을 괴롭힐 순 있어도 정복할 수는 없다. 그 사실은 서역인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즉, 서역인들이 노린 것은 영토가 아니라 ‘이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이익을 줄 수 있는 상대인 ‘상인’이야말로 서역인을 상대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고지식한 정부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지만 승도는 그것을 통찰하고 있었다.
만약에 행상 전원이 서역과의 거래를 일시 중단하겠다는 ‘철시’ 위협을 가한다면 어떨까. 당장은 무력에서 앞선 서역인이 위협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능력은 제한적이다.
이익을 얻기 위해 무력시위를 한 자들이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다면 그 계획을 전면 재고할 수밖에 없을 터.
승도가 생각한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서역인을 움직이는 동기, 즉 이윤을 이용해 서역인을 상대로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그러자면 서둘러 강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13행 행상의 연판장을 받고 강주 상계의 중소 상인들의 서명까지 받자면 시간이 촉박했다. 서역인들이 일을 더 키우고 정부가 이 판에 말려들면 그땐 늦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님, 소녀는 공자님이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것을 원치 않사와요.”
“알아.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이건 싸움이야. 여기서 물러나면 우리 가문은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어.”
“네에.”
유하가 한숨을 내쉬자 승도는 손을 잡아주며 ‘잘 될 거야.’라고 타이르는 수밖에 없었다.
***
날이 밝자 승도는 금포 나루에 묶인 배 중 하나를 ‘샀다.’ 서역 대선이 출현한 후 그 어떤 선주도 금포강에 배를 띄우려 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배를 움직일 선원들은 모두 비싼 삯을 약속했다. 모두 하루 몸을 팔아 먹고사는 임노동자들로 익숙한 선원 출신들은 아니었다. 그것도 감지덕지다.
승도는 유하를 마차 편을 이용해 강주로 오게 조치했다. 호위로 무인 둘을 붙여준 터라 승도의 곁에 남은 자는 정씨를 포함해도 넷이 전부였다. 믿음이 가지 않는 뜨내기들과 배를 타는 터라 호위가 적은 상황은 적잖이 불안한 상황을 연출했다.
밧줄과 여분의 돛, 노,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싣자 배는 돛을 올렸다. 천을 바늘로 기운 누더기 같은 돛이 활짝 펼쳐지자 사공들이 재빨리 뱃전으로 뛰어올랐다. 승도도 얼른 배 위로 올라탔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물살이 제법 거세긴 했으나 사공을 제법 많이 실은 터라 물살을 못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어잇’, ‘어잇’ 하는 구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노들이 물을 갈랐고 흰 포말을 일으켰다.
수부들의 노질이 이어질 때마다 배는 상류를 향해 꾸준히 나아갔다.
한참 노질을 이어가는 동안 승도의 눈은 강 하류 쪽을 유심히 훑고 있었다. 그때 옆에 서서 상류 쪽을 바라보고 있던 정씨가 ‘공자님’ 하고 그를 불렀다.
승도가 돌아보자 정씨의 손가락이 상류 방향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처음에 승도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러다 그것의 모습이 다소 이질적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 배에는 특이하게도 돛이 없었다. 10개의 노를 동력원으로 삼아 움직일 뿐이었다. 신제국의 배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돛이 다 달려 있다 보니 승도는 그것이 어디의 것인지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서역의 종선이었다. 대개 서역의 선박들은 작은 보트(종선)를 여럿 싣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독자적인 항행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원양 항해를 기준으로 배를 설계하는 서역인들의 입장에서 작은 종선은 노를 저어 ‘상륙’ 등을 지원하는 용도면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종선은 작게는 10명에서 많게는 30명까지 탑승이 가능했는데, 그 크기는 대체로 대동소이했다. 돛이 달리고 탑승 인원이 더 큰 종류의 것은 연안 해군용 건 보트로 분류되어 종선의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소형 함이라면 결국 모선이 근처에 있다는 의미였다. 서역 상선들이라면 금포강에서 굳이 종선을 내릴 이유가 없으니, 그 종선을 보낸 모선의 정체는 뻔했다. 정체불명의 서역 군함이 분명했다.
승도는 눈가에 힘을 주고 보트 쪽을 유심히 살폈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상대적으로 보트의 정경도 또렷하게 구분되었다. 보트에는 열 명을 조금 넘는 인원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남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국기를 게양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정체를 짐작하는데 무리는 없었다. 연합왕국의 군인들이다.
사실 의복으로 복장을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기억 덕분이었다. 일반인들, 특히 동양인이라면 서역 군인의 복장만으로 그 국가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연합왕국만 하더라도 동일한 군함에 타는 자들이 병종에 따라 다른 의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가령 해병들은 붉은색과 흰색이 섞인 ‘붉은 코트’를 입었지만 수병들은 남색과 흰색이 섞인 남색 코트를 입었다. 그러다 보니 푸른 코트를 입는 타국 군대와 종종 착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럴 때는 단추의 숫자나 옷의 재단 방식 등으로 구분을 해야 했다.
순전히 서역 군사 전문가였던 승도였기에 쉽게 알아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공자님, 양이들이 분명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서역 보트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장교처럼 보이는 자의 모습도 똑똑히 보였다. 그자는 어깨에 견장을 붙이지 않고 있었지만 2각모로 세로돛 스타일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 ‘고위급 장교’ 같은 인상을 풍겼다.
실제로도 제 부하들을 향해 고래고래 명령을 내리고 있었고, 똑같이 세로돛 모자를 쓴 자에게도 지시를 내리는 것이 범상치 않은 위치에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승도의 짐작은 맞았지만 사실 그것은 ‘오해’였다. 오해라기보다는 그가 살던 시대와 현 시대 사이 동안 바뀐 연합왕국 해군의 규정 때문에 벌어진 착각이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연합왕국 해군은 함장 혹은 준 함장 계급(영관급)의 고위 장교들에게만 세로돛 스타일로 모자를 쓰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사관후보생부터 제독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교 계급에 대해 세로돛 스타일로 모자를 쓸 걸 규정하는 ‘해군 규정’이 반포되면서 이 같은 ‘상식’으로 계급을 구분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게 되었다.
물론 승도가 짐작한 대로 그자가 고위 장교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가 본 장교는 수심 측량을 나온 전열함 선임 위관 앤더슨이었다.
선임 위관은 함 내 서열 2위의 위치로 부함장 격에 해당되는 자리였다. 그것도 왕국의 위상함에 속하는 1급 전열함의 선임 위관이라면 영관 승진이 예정된 인물이므로 웬만한 군함의 함장 격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홍모귀들이 무얼 하는 걸까요?”
“수심을 측량하는 거겠지.”
“수심 측량이라 하심은.”
정씨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승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유도 느끼지 못했다. 수심 측량이란 행위가 가지는 의미 때문이었다.
수심 측량은 배가 다닐 수 있는 길을 확인하고 ‘해도’를 작성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양해 없이 타국의 강이나 바다에서 이 같은 짓을 하는 것은 주권 침해에 해당되었다.
물론 그런 관념을 갖고 있지 않은 신에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승도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문제를 일으킬 의향이 없다면 수심 측량을 할 이유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150년간 수많은 서역 범선들이 오가며 정해진 항로의 수심 측량을 끝냈기 때문이다. 정해진 항로 바깥의 수심 측량은 금포강을 언제든 침공 루트로 쓰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다.
‘서둘러야겠어. 연합왕국은 그저 무력시위 정도로 일을 끝낼 생각이 아니었던 거야.’
승도는 심각한 표정으로 서역 종선을 노려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