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7화 (17/425)

제17화. 응전하다 (3)

승도는 강주에 도착하자마자 상인들의 연판장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연합왕국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라 연합왕국의 편일지도 몰랐다. 더구나 이 중요한 시점에 오유도는 양주 부로 소환되어 장원을 비운 상태였다.

아마 흠차대신 임경문이 서역에 대한 신제국 최고의 전문가인 오유도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판단하려는 목적에서 그를 소환한 듯했다.

승도는 촌각을 다투며 움직였다. 연판장을 모으는 일은 천하제일 거상 오유도의 이름값을 등에 업고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유도와 뜻을 함께하는 반계관 등의 거상 등이 연판장에 기꺼이 서명을 해주었고, 가솔들도 수십 명의 중소 상인들에게 서명을 받아왔다. 하지만 강주 상계의 중지를 모으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렇게 촌각을 다투며 연판장을 모으던 오승도의 귀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절망적인 표정이 된 채로 정씨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승도가 강주에 갓 도착하여 연판장을 모으기 위해 움직이던 시각, 연합왕국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해병 위관 존 모리스가 지휘하는 84명의 해병을 상륙시켜 강주 항구를 관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염화 포대’를 공격했다고 했다.

염화 포대는 원래 상주 인원 3,000명에 보유 포문 수만 64문에 이르는 강력한 요새로, 연합왕국인들도 ‘포트 헬리오트’라고 부를 만큼 경계심을 보인 바 있었다.

문제는 실제 염화 포대에는 군적에 오른 인원의 1/4도 안 되는 600명의 병사가 주둔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병사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근무를 면제시켜 준 중간 지휘관들 때문이었다.

대포 역시 유지 보수 비용이 내려왔음에도 이를 자신의 호주머니로 챙겨 넣는 자들 때문에 전혀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사용 가능한 대포는 3문도 되지 않았다.

요새의 외벽도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역시 보수 비용의 횡령이 가장 큰 몫을 차지했다.

더욱 큰 문제는 훈련 비용조차 횡령하여 명색이 포대임에도 불구하고 대포 한 번 쏴보지 못한 자들이 태반이란 점이었다.

최고 지휘관은 더욱 한심하여 자기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강주 시내 기루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두 꿰고 있는 판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종이호랑이’ 포대를 공격 목표로 고려하지 않았던 연합왕국 장교들도 이곳을 공격 목표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해병 위관 존 모리스가 직접 포트 헬리오트를 정찰한 다음 이곳을 목표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선임 위관과 함장의 동의하에 요새 공격을 결정했다.

그리고 공격 개시 30분 만에 오합지졸의 제국군은 대포 한 번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강주의 입술이나 다름없는 염화 포대를 내주고 패주해 버렸다.

이상이 승도가 들은 이야기의 전부였다. 거기까지 듣고 보니 너무 한심하여 말이 나오질 않았다.

“염화 포대를 내줬다면 당장 강주 관청에선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군.”

“그렇습니다, 공자님.”

“양주 부까지 보고가 올라간 다음 본격적으로 움직이겠지만, 관에서는 협상을 하려 할지도 몰라.”

승도는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강주의 목줄이나 다름없는 염화 포대를 내준 상태에서 협상을 하게 된다면 결과는 보나 마나였다.

연합왕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신제국 관료와의 협상을 이끌어낸 다음, 원하는 대로 제 몫을 챙기려들 것이 뻔했다.

“공자님, 이렇게 되면 연판장은.”

“소용없어. 관이 협상하려는 생각을 가진 상황에서 연판장이 무슨 소용이겠나. 염화 포대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은.”

“설마, 염화 포대를 직접 탈환하시려는 생각이십니까?”

“관이 못한다면 내가 직접 하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공자님, 상대는 홍모귀 정규군입니다. 썩어빠진 관병을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여기서 협상을 하게 되면 우리 행상은 앉은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게 돼. 통상 항구를 늘리는 결정이라도 하게 해봐. 그러면 강주는 끝장이야.”

승도의 말에 정씨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협상이 이루어지면 행상은 앉은 자리에서 말라죽을 위험마저 있었다.

이 위기는 직접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염화 포대의 탈환을 통해서.

“우선, 반 대인과 금 대인께 사람을 보내서 장정들을 빌려달라고 하게. 그리고 두 분의 협력이 확고하다면 나머지 행상들에게도 사람을 보내서 같은 말을 전하게. 우리 가문이 이백의 장정을 모아둔 상태이니 행상들이 50명씩만 보태주어도 800명은 만들 수 있어. 800명이면 홍모귀 한 줌을 어찌 못 당하겠나?”

“관이 역모로 보지 않겠습니까?”

“뇌물을 써야지. 문 집사에게 가서 은자 1만 냥을 준비해 강주 관리사의 아가리에 쑤셔 넣으라고 말해두게. 1만 냥이면 적어도 열흘은 눈감아줄 거야.”

“알겠습니다, 공자님.”

정씨가 읍을 하고 물러나자 승도는 표정을 굳혔다. 그나마 서역 도굴단 사건 덕분에 장정들을 모아두어 마지막 한 수를 던져볼 여지는 남아 있었다.

***

강주의 오씨 장원에는 기본적으로 삼천 명에 육박하는 고용인이 있다. 하지만 많은 수가 여성이고, 또 남성의 다수가 전혀 전투와 동떨어진 비전투 인원이라 실제 전투에 쓸 수 있는 상주 인원은 백도 되지 않는다.

물론 오씨 가문이 부릴 수 있는 장정의 수가 고작 그 정도라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은 오씨 가문 소유의 차밭, 창고 등 다양한 자산의 경비에 분산되어 있었다.

유사시에 이들을 모두 소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인원은 동원 가능했으므로 오씨 가문이 최대로 모을 수 있는 인원은 약 삼백에 달한다.

승도의 명령으로 장원에 집결한 인원은 모두 이백. 그들은 모두 오씨 가문의 녹을 먹는 가병 성격의 무인들로 오합지졸의 관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역으로부터 들어온 화약 무기에 능하고 나름의 호신술로 육체를 단련한 데다 엄격한 가법의 적용을 받고 있어 정강한 조직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관이 동원 가능한 군대란 것은 오씨가 동원할 수 있는 사병에 비해 수만 많을 뿐 그 실상은 형편없다 할 수 있었다. 명목상의 제국 중앙군에 해당되는 팔기는 소집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조직이었다.

설령 겨우 소집을 하더라도 전장에 투입되는 군대는 아니었다. 지난 황련 반란 진압에서도 반란군의 백 리 바깥에서 구경만 하다가 돌아갔을 정도다.

제국의 지방군에 해당되는 녹기군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녹기는 지휘관들의 부패가 극에 달한 조직이라 명부상의 인원도 채우지 못한 반신불수의 군대였다. 화기는 전혀 운용할 줄도 모르고 고색창연한 창칼조차 녹이 슨 것을 지급하는 마당이다.

이러다 보니 백전백패의 군대로 명성이 드높았다. 팔기와 다르게 그나마 전장이라도 나가니 백패라도 한다는 소리를 듣는 군대다.

결과적으로 제국이 진정 믿을 수 있는 군대는 지방의 명사가 개별적으로 소집하는 향군 혹은 계투로 다져진 민간 군사 조직 단련이다. 무장 수준은 몰라도 훈련 정도나 조직의 기강에서는 제국 중앙군이나 지방군보다 월등히 나았다.

하나 오씨의 사병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안정된 급료를 지급받고 엄격한 훈련을 상시적으로 받는 ‘상비군’과 다름없는 자들과 비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행상들도 오씨 가문처럼 상당한 무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업장과 차밭 등을 관리하기 위한 인원을 포함한다면 오씨 가문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그러나 그들은 승도처럼 무인을 집결시켜 둔 상태는 아니어서 장원에 모인 전력은 고작해야 백도 되지 않았다. 그 세가 큰 반계관 같은 자가 그 정도이고, 대부분은 장원에 50명 남짓한 인원이 고작이었다.

승도가 생각한 것은 각 행상들이 장원에 보유한 무인 전부를 모아 홍모귀와 일전을 겨뤄보는 것이다. 무인 800명이면 해병대 수십을 상대한다는 가정 하에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열함의 화력이 가세한다면 800명이 아니라 8,000명을 모아도 어렵겠지만 염화 포대의 지리 조건이 그런 염려를 덜어주었다.

포대는 대개 강상에 위치한 군함이 포격하기 쉽지 않은 위치에 설치되는 것이 상례. 더욱이 전열함 정도의 거함이 염화 포대가 있는 강 상류까지 올라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따라서 군함의 직접적인 포격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우려할 것은 해병대 자체의 화력과 염화 포대 자체의 방어 설비였다.

포대는 강변을 향해 대부분의 방어력을 집중한 형태이긴 하지만 육지로부터의 공격에 대해서도 상당한 방어력을 할애하고 있었다.

독수리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돌출된 두 개의 성곽이 뭍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고, 그 성곽은 모두 높이가 5m였다. 군데군데 허물어진 곳이 있다곤 하지만 그 방어력 자체는 무시할 수 없었다.

성곽의 앞으로는 해자와 목책이 세워져 있고, 육지 쪽을 겨냥한 구식 대포도 10문이나 있었다.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포문이 몇이나 될지는 의심스럽지만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곳을 점령한 해병대의 실 전력은 80여 명이었지만 그 화력은 동등한 숫자의 육군보다 월등히 강력했다. 해병대는 장루에서 적함의 갑판을 저격할 수 있도록 훈련된 저격병들도 갖고 있어서 원거리에서부터 정밀한 공격을 가해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돈 많기로 유명한 연합왕국 해군이라 연간 2,000발 이상의 실탄 사격을 하여 사격의 정확도나 재장전 속도 하나만큼은 세계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자들을 단지 수가 적다고 얕보는 것은 미친 짓이다.

단순한 정면 공격은 희생도 크고 패배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승도는 지도를 펼쳐놓고 강주와 염화 포대의 지리를 유심히 살폈다. 포대 자체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대단히 협소하고 길도 두 갈래뿐이었다.

우회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었고, 앞서 상기한 방어물을 돌파해야 한다는 단점도 안고 있었다. 이런 천혜의 요새를 갖고도 30분 만에 박살난 제국군의 한심함만 더 돋보였다.

승도가 손가락을 지도 위에 두드리는 동안, 정씨가 급히 들어와 읍했다.

“공자님, 반 대인과 금 대인께서 흔쾌히 무인들을 빌려 주시겠답니다. 반 대인께서 80명, 금 대인께서 60명을 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두 분 대인이 그 정도 내주신다면 나머지 행상들도 50명은 준다고 봐야겠지. 그러면 이쪽 전력은 기본적으로 840명은 되는데. 그래도 정면 공격은 어렵겠어.”

무인들이 화약 무기를 다루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에우로페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단련된 연합왕국 해병대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것도 구식의 화승총 정도를 갖고서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넓은 평지라면 수적 우세를 살려 보겠지만 좁은 병목 지점에서 800여 명의 무인의 화력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관이 개입하기 전에 포대를 탈환해야 한다는 ‘시간적 제한’까지 달고 있는 입장에선 ‘포위’ 같은 옵션은 고려해볼 수조차 없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좋은 방법이.’

승도가 손가락을 두드리는 차에 정씨가 몸을 움직이다 찻잔을 떨어트렸다. 와장창 깨진 찻잔을 보고 당황한 정씨가 부서진 찻잔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순간 번뜩하고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거로군, 그거야.’

승도는 뒤늦게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이것이라면 연합왕국 왕립 해병대를 물리칠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될지도 몰랐다.

“고맙네.”

“예?”

정씨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 동안, 승도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밖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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