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9화 (19/425)

제19화. 응전하다 (5)

포병의 싸움에서 고지를 점한 쪽이 얼마나 우세한지는 조금의 상식만 있어도 알 수 있다. 그것도 모를 정도면 군복을 입을 이유가 없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우리 왕립 해병대가 저따위 야만인들에게!”

모리스가 탄식을 내뱉기도 전에 구릉 쪽에서 첫 포탄이 날아왔다. 뒤늦게 겨우 끌어온 대포가 응사했지만 사정거리에서 상대가 되질 않았다. 위치 에너지 때문이었다.

수십 번의 포격을 주고받은 끝에 이쪽 대포가 강력한 아이언 볼을 두드려 맞고 침묵해 버렸다. 그다음부터는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씌이이이잉.

대포알이 낙탄, 바닥을 튕길 때마다 해병대원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일방적인 포격을 받는 상태에서는 정예로 이름 높은 해병도 별수 없었다. 그 당당하고 긍지 있던 붉은 코트들이 손도 쓸 수 없는 상태에 내몰리다니. 차라리 라인 배틀을 했다면 제 위치를 지키고 서서 적을 향해 전진했을 것이다. 이건 악몽이다, 악몽!

“모리스 경!”

준사관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대로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다간 정말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끝장날 수도 있었다.

정확도가 낮은 대포나마 매일같이 포탄을 때려 붓는다면 해병대 전력의 약화는 불가피했다. 사상자가 생기지 않더라도 휴식을 취할 수 없으니 피로는 쌓일 것이다. 그 기회를 노려 신국의 군대가 공격을 가해오면 전멸!

냉정한 판단력을 갖고 있다면 그런 간단한 사실 정도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제기랄. 포대를 포기한다.”

모리스가 이를 갈며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 입장은 정반대가 되어 탈출하려는 해병대가 공격자의 입장이 되고, 입구를 틀어막은 신국 인들이 방어자의 입장이 되었다. 어느 쪽이 유리한 입장인지는 이 상황을 만들어낸 자가 가장 잘 알 수밖에 없었다.

***

승도는 뒷짐을 진 채로 염화 포대를 내려다보았다. 구릉 아래로 보이는 포대는 불이 난 호떡집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정예로 이름 높은 붉은 코트들이 당황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물론 연합왕국 군대가 겨우 대포 한 문에 무너질 리는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굳건한 기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명령만 있다면 세계 최강의 군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저력도 남아 있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붉은 코트들을 통제하는 지휘관들도 인상적이었다. 포탄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가능한 병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걸어 다녔고, 표적이 될 수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자국의 깃발을 그대로 게양해두는 배포를 보였다. 확실히 신제국의 무능한 지휘관들과는 비교가 되는 모습이었다.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적을 보자니 승도는 입맛이 썼다. 신제국 군대가 같은 처지에 빠졌다면 항복을 했을지, 아니면 개미 새끼처럼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을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승도가 물끄러미 포대를 내려다보는 동안, 정씨가 다가와 승도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공자님, 명령하신 대로 사람들을 배치했습니다.”

“반발은 없던가?”

“홍모귀들을 단번에 궁지로 몰아넣으신 공자님께 누가 감히 군말을 달겠습니까?”

“다행이군.”

승도는 그 점에서는 몹시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군사 관계자와 거리가 먼 행상의 후계자로서 사병을 모아 ‘염화 포대’를 탈환하겠다고 나설 때만 해도 시선들이 좋지 않았다. 그저 오유도의 이름값에 ‘면’이나 세워주자는 심산으로 협력해주는 듯한 모습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인식이 대포 한 문 옮겨와 적을 궁지에 몰아넣는 한 수로 바뀐 셈이다. 서역 문물에 익숙한 강주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현실을 모르는 얼치기들이라면 그깟 오랑캐들을 잠시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 뭔 대수냐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승도는 정씨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염화 포대 쪽을 바라보는 채로 물었다.

“정은 이 싸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쉽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홍모귀들이 얼마나 강한 놈들인지는 서역 도굴단만 봐도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공자님 말씀대로라면 그자들은 민간 상선의 민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흉험하기 그지없을 겁니다. 하물며 서역에서 강병으로 이름이 높은 홍모귀들의 정규군이라면 어려운 상대라고 생각합니다.”

“맞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군대지. 쉬운 상대가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강한 군대란 말씀이십니까?”

“그런 셈이지.”

승도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연합왕국 군대의 강함은 병사 개개인의 자질보다는 압도적인 자본에 기인한 것이었다. 타국의 20배 이상에 달하는 훈련 비용, 새로운 장비에 대한 우선적인 도입까지.

그렇게 훈련시킨 군대를 상비군으로 유지할 수 있는 막대한 재정적 지원도 있다. 모든 면에서 연합왕국은 세계 제일을 달리고 있었다.

그 장교단의 수준 또한 낮지 않았다. 군사 국가로 이름이 높은 프리지아의 장교단 정도는 아니지만, 기본에 충실한 장교들을 길러내는 시스템은 신제국 따위가 감히 범접할 바가 아니다.

그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군대는 평범한 지휘관의 범용한 지휘가 있어도 세상 어느 강군 못지않은 막강한 전쟁 기계가 된다.

그 강함은 전생에 이미 뼈저리게 느껴보았다.

“하면 공자님께서는 저들을 어찌 상대하실 생각이십니까?”

“다른 뾰족한 계략을 쓸 여지는 없네. 장원의 무인들이라고 해봐야 ‘통일된 군대’로서 훈련된 사람들은 아니니 복잡한 전술을 쓸 수는 없지. 정공법밖에는. 화공을 써 볼 여지는 있겠지만 큰 효과는 없겠지.”

“기책도 쓰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잔 수가 통할 상대가 아니야. 준비해둔 것만으로 싸우는 수밖에. 이만 내려가 보게.”

승도의 말에 정씨가 포권을 하고 물러났다. 승도는 적진의 동정을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적이 탈출하리라는 것은 예상된 바였다. 완전히 엄폐된 요새라면 몰라도 군데군데 허물어진 성벽을 낀 포대에서 피로도가 높아진 소수의 병력으로 농성하는 것은 자살 행위.

전쟁 경험이 풍부한 연합왕국 장교들이 그 정도도 모를 리가 없으니, 탈출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문제는 탈출 방향이었다. 두 군데의 길 중 어디로 병력을 집중해서 탈출할지는 확신할 수 없다 보니, 승도는 전 병력을 사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구릉에서 적의 움직임을 본다고 해도 대응하는 시점에서는 이미 탈출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 무인의 절반 정도로 연합왕국 해병대를 상대해야 했다.

절반이라고 해도 수적으로는 5배였지만 화력 면에서는 오히려 연합왕국이 우세했다. 화승총의 분당 사격 속도는 기껏해야 40초에 1발. 활은 그보다 연사 속도가 빠르지만 숙련된 궁사가 아닌 이상 총보다 뛰어나다고 보긴 어렵다. 대부분의 무인은 근접전에 적합한 칼과 창을 다룬다.

반면 연합왕국 해병대는 숙련된 사수들로 분당 6발 이상의 실탄을 쏠 수 있다. 거기에 총에 단검을 끼우면 웬만한 검보다 긴 총검을 휘두를 수 있다.

훈련에 막대한 시간을 할애하는 연합왕국의 전통을 고려한다면 근접전 능력도 무인들에 비해 그리 떨어진다고 보긴 어려웠다.

이 같은 점을 생각한다면 집중된 화망을 형성하여 밀고 나올 연합왕국 해병대를 상대하는 일은 철저한 준비를 갖추었음에도 간단한 일이라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적을 놓아주어야 하나.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일은 해결될 수 없어. 적어도 적의 반은 죽여 놓아야 연합왕국은 물러난다.”

연합왕국이 얼마나 끈질기고 강한 적인지 잘 아는 승도로서는 약한 소리를 하려다 삼킬 수밖에 없었다.

***

연합왕국 군대는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제 위치를 고수했다. 승도는 적의 공격 시점을 어렴풋이 예측하고 있었지만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강렬한 태양이 떠오르자, 그 눈부신 햇빛을 배경으로 삼아 붉은 코트들이 남쪽 통로로 몰려나왔다.

전술적으로 태양을 등지고 공격하는 쪽은 눈부신 햇빛 덕분에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햇빛을 우군으로 삼은 붉은 코트들이 열과 오를 맞추어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모습은 퍼레이드를 연상시켰다. 손을 높게 들고 무릎을 직각으로 세운 홍모귀들의 모습에 무인들도 다소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으로서의 무력과 집단으로서 완성되는 무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하나의 완성된 군대로서의 모범을 보여주는 해병대의 모습은 무인들에게 상당한 위압감을 주었다. 구령 소리에 맞추어 힘차게 앞으로 나아오는 붉은 코트들의 진군에 무인들은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그러다 선두의 궁사들이 먼저 활시위를 당겼다. 비교적 숙련된 궁사들의 사정거리는 전열 전투에서 표준적으로 이야기되는 사거리보다 좀 더 길었다.

그래서 붉은 코트들은 화살 비를 맞으며 전진해야 했다. 몇몇이 화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했지만 붉은 코트들은 조금도 대오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동료의 비명 소리에도 냉정하게 제 위치를 지키며 묵묵히 나아올 뿐이다.

두려움도 공포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붉은 코트들의 진군에 궁사들도 기가 질렸다. 다음 차례로 수십 명의 무인들이 화승총을 들었다. 빨라야 40초, 늦으면 1분에 1발밖에 쏘지 못하는 화승총이 일제히 격발음을 내며 총탄을 뱉어냈다.

하지만 최초의 사격은 모조리 빗나갔다. 전장식 소총보다 훨씬 정밀성도 떨어지고 화력도 떨어지는 아퀘부스의 한계였다.

붉은 코트들은 무인들을 향해 전진하는 3분 동안 6차례의 화살 비와 3차례의 화승총 사격을 뒤집어썼다. 그 피해는 사상자 10명.

수가 적은 해병 입장에서 작은 피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치명적인 수준의 피해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붉은 코트들의 첫 번째 대열이 제자리에 멈췄다.

‘사격’이라는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20명에 가까운 붉은 코트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무시무시한 총성과 함께 무인들 쪽에서 네다섯 명이 피를 뿌리며 넘어졌다. 몇 번의 총성이 오가는 동안 무인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쓰러졌다.

자신을 사격대에 세운 채, 상대의 총격을 기다려야 하는 전열 전투의 무지막지한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무인 중 일부가 대열에서 벗어나 칼을 쥐고 해병들을 향해 돌격했다. 다음 순간, 첫 번째 대열이 뒤로 물러나고, 제2열이 일제 사격을 가했다.

거리가 가까워진 상태에서 가해진 총격에 예닐곱 명의 무인이 피를 뿌리며 바닥을 굴렀다. 남은 자들이 좀 더 접근하는 동안, 제3열과 제4열이 교대하듯 나서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어 재장전을 마친 1열과 2열이 다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그것으로 대열을 이탈하여 해병대를 향해 돌격한 사십여 명의 무인들은 모두 몰살당했다.

승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전투 지휘를 맡아야 할 무인들은 애초부터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적이 없던 터라, 지휘 체계를 통일하여 행동한다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승도가 배치한 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지만, 연합왕국 해병대가 본격적인 전투력을 발휘한 시점부터는 거의 일방적인 피해를 보며 슬슬 밀렸다.

고슴도치처럼 단단히 뭉친 해병대는 능수능란한 화력의 운용을 통해 가뜩이나 압도적인 전투력을 극대화했다. 수적으로는 무인들의 20%에 불과했으나, 실제 발휘하는 화력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효율적으로 화력을 사용하며 전진해오는 해병대를 물리치기엔 무인들의 전투 역량이 너무 모자랐다.

하지만 이것은 승도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단시간에 급조한 집단을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만드는 것은 전쟁의 신이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를 보좌하여 전투를 이끌어야 할 무인들은 ‘전쟁’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들이었다. 개인의 용맹과 전투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 또 한 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홍모귀들은 진정 귀신들이란 말인가?”

“서역 귀신들은 겁도 없어. 승산이 없다고!”

일부 무인들은 겁을 먹고 수군거리다 달아나기까지 했다. 제 한 목숨 내놓으면서 충성할 의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달아날 때마다 대열은 조금씩 흔들렸다. 해병대는 상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자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좁힌 다음, 파멸적인 일제 사격을 재차 퍼부었다. 그 압도적인 공격력을 견디지 못한 무인들이 분위기에 휩쓸려 하나둘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늦게 승도가 구릉에서 도착했지만 전세는 절망적이다 못해 파국에 치달은 형국이었다. 승도는 입을 벌린 채,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고 탄식했다. 남쪽과 북쪽, 양쪽 어디든 적이 오면 대응하기 위해 구릉에서 대기한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그마치 400명이 넘는 무인이 80여 명의 홍모귀를 상대로 30분도 버티지 못할 줄이야. 오합지졸의 신국군이 그러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행상들이 아끼고 아끼던 무인들까지 그럴 줄은 생각도 못 한 일이다.

“공자님, 피하셔야 합니다. 홍모귀들이 다가옵니다.”

혼란 속에 화공조차 써보지 못하고 붕괴되어 가는 양상이 확실했다. 홍모귀들이 공격을 무릅쓰고 거리를 좁힌 다음, 일제 사격을 가할 때마다 무인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미 제 위치를 지키는 자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이게 현실이구나. 궁지에 몰아넣은 적조차 감당할 수 없다니.”

승도는 고개를 흔들고는 전장을 벗어났다.

포트 헬리오트(염화 포대) 남쪽 입구에서 벌어진 교전은 불과 40분 만에 결판이 났다. 연합왕국 해병대는 겨우 17명의 사상자를 내고 행상들이 조직하여 보낸 ‘강주 상가군’에 사상자 230명의 피해를 강요하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개미 새끼처럼 흩어져 달아났다. 해병대에 그럴 의지만 있었다면 북쪽 입구의 무인들을 공격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병 위관 존 모리스는 적을 물리치고 염화 포대의 안전을 확보한 채 버티는 대신, 그대로 물러나는 쪽을 선택했다.

그로서는 해군성과 동방 무역 회사의 정보를 믿고 머물다간 또 공격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번에 나타난 신의 군대는 비록 패하긴 했으되 해병대도 놀랄 만한 전술적 역량을 보여주었고, 제대로 된 교전 후에 패퇴했다는 점에서 위험한 ‘적’으로 인식되었다.

만약 신이 이런 수준의 군대를 또 한 번 동원한다면 이미 적지 않은 피해를 본 해병대가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연합왕국 해병대는 어려운 싸움을 이기고도 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아쉬움을 느낀 것은 승도도 마찬가지였다. 해병대를 괴멸시켜 연합왕국에 쓰디쓴 교훈을 주고, 강주의 평화를 보다 오래 유지하고 싶었던 그로서는 안타까운 결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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