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협상 (1)
연합왕국 해병대의 철수가 사건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누구보다 승도가 잘 알고 있는 문제였다.
이제 사건의 해결은 겨우 첫 단추를 꿰었을 뿐이다. 상인들에게 진정 어려운 ‘협상’이라는 두 번째 전투가 남아 있었다.
승도가 처음부터 협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연합왕국 해군의 전열함 때문이었다. 신제국의 군사력으로 이 함정을 격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제국군의 대포는 전열함의 두꺼운 압축 티크 목재에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사거리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전열함이 스스로 물러나기 전에는 금포강 사건이 종결될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승도는 그나마 ‘상대’할 수 있는 연합왕국 해병대를 상대로 좋은 성과를 거두고자 했고, 그들을 괴멸시킴으로써 협상력을 높이려 했다.
결과적으로 염화 포대는 되찾았지만 연합왕국 측을 두렵게 할 정도의 성과는 거둘 수 없었다.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결과물을 가지고 협상해야 하는 승도의 표정은 아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을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쉬워한들 그의 손을 빠져나간 해병대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돌아온다고 한들 이미 잡을 능력도 없었다.
강주 상가군은 이미 전력의 절반을 잃은 상태였고, 남은 자들의 사기도 꺾여 있었다. 해병대가 보다 과감한 판단을 내렸다면 애초에 협상을 할 거리도 남지 않았을지 몰랐다.
“공자님, 반 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이쪽으로 모셔오도록 해.”
승도는 반 대인이라는 말에 반색하며 그를 모셔오라고 했다. 반 대인은 행상 서열 2위의 거상으로 한때 행상의 영수를 지낸 거인이었다. 그 품계도 정3품에 달해 어지간한 지방관들보다 그 격이 높다고 할 수 있었다.
반계관이 직접 협상에 나서준다면 승도도 한결 편했다. 어느 나라의 협상이든 비슷한 처지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는 쪽은 대개 ‘격’이 높은 대표를 모셔온 쪽이었다.
연합왕국이 정3품에 해당하는 신분의 대표를 내놓으려면 최소한 장관 격의 해군 제독 혹은 총영사 이상의 고위 외교관을 보내야 했는데, 전열함에 그런 사람이 타고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연합왕국이 현재 동방에 주재시킨 장관 격의 고위 인사는 백색 함대(동방 수역 함대) 사령관과 그 예하의 전대 장들, 그리고 식민 제국의 총독 및 부왕들이다.
하지만 이들 중 신제국 본토까지 올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함대라도 파견한다면 모를까. 외교관도 다를 것은 없었다. 정식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동방에는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이라고 해봐야 영사나 대반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영사는 격이 안 맞고 대반은 동방 무역회사의 대리인이다. 대반이 이 협상의 전면에 서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 될 텐데, 앞에 나와서 떠들 이유가 없다.
그러니 협상에 나올 사람은 뻔했다. 전열함 함장 빌리언트 대령이다. 대개 해군 함장은 타국의 관료 혹은 외교관들과의 협상에 대한 기본 소양 교육도 받는 터라, 그 이상의 적임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봐야 대령은 정3품의 고위직 인사에 비하면 격이 떨어졌다. 그러니 애써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려 한 것인데 일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연합왕국 쪽으로서는 입장이 상당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반계관이 얼굴을 비치자 승도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사적으로는 ‘숙부’라고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라 과례를 표한다고 해서 흠이 될 것은 없었다. 그를 자리로 안내한 다음, 직접 달인 차를 따라주며 승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반 숙부님, 원로에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뭘 먼 길씩이나 되겠느냐. 그보다 염화 포대를 되찾았으니 곧 조정에서 상이 내려질 게다.”
“상이요?”
“암, 공을 세웠으면 상을 받아야지. 우리 상인들이 공동으로 표문을 올렸으니 임경문 대인께서 서찰을 보시고 황제 폐하께 주청을 드릴 게다.”
반계관이 꺼낸 뜻밖의 말에 승도의 눈이 커졌다. 처참한 패배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상이라고 하니 어색하기도 했다. 물론 조정에서 상을 준다고 해봐야 거창한 것일 리는 없었다.
약간의 돈푼에 미관말직의 품계 하나 던져주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따위 벼슬이야 돈만 주면 고위 품계도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없어도 그리 대단할 것이 없는 상이지만 ‘공’을 치하한다는 의미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관에서는 네가 한 일을 보고 상당히 고무된 듯싶더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양이들의 군세라고 해봐야 기백이 고작일 터인데, 백만 대군을 가진 대국이 어찌 그깟 오랑캐들과 협상을 하겠느냐는 강경론이 득세하는 모양이다. 양이들을 직접 보고 느끼는 강주 관청에서 그 정도이니 황실이나 총독부는 그보다 더할 게다.”
반계관의 말에 승도의 낯빛이 굳어졌다. 정말 터무니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정작 연합왕국이 보낸 전열함 한 척 어찌할 수 없는 나라가 전쟁을 하겠다고 떠든다는 생각 자체가 어처구니없었다.
지금 나타난 전열함 한 척은 연합왕국이 보낸 ‘인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열함이 소속된 백색 함대만 동원되더라도 신은 건국 초에 했던 해안 방기 정책 ‘해금령’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협상을 서둘러야 합니다.”
“전쟁을 근심하는 게로구나. 그 생각은 나도 동의한다. 그러니 이리 달려온 것이 아니겠느냐.”
확실히 상인은 현실을 보는 눈이 정확했다. 상대의 강약과 허실을 제대로 볼 줄 모르면 ‘장사’를 할 수 없다. 쓸데없는 체면과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실리 위주의 사고야말로 상인들이 가진 최대의 무기였다.
“숙부님께서 협상을 도와주시면 제가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켜 보겠습니다. 괜히 관이 나설 기회를 주면 우리 강주는 끝장입니다.”
“그리하마. 협상을 말했으니 뭔가 생각은 있는 게냐?”
“일단은 연판장을 무기로 쓸 생각입니다.”
“연판장도 무기는 되겠지. 하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게다.”
“어째서입니까?”
“양이들은 탐욕스럽다. 약간의 이익을 잃더라도 장기적으로 큰 이문을 남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손해를 감수할 수도 있는 자들이다. 비록 우리와 거래가 끊긴다 하더라도 저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만 남아 있다면 그 손실은 능히 감당할 수 있다. 내가 직접 보고 배운 교훈이 그렇다. 삼십 년 전이었던가. 홍모귀 상인 하나가 아편을 강주로 가지고 왔던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조정은 아편을 철저히 엄금하던 터라 아편 밀수는 저들의 기반을 다 까먹을 수 있는 짓이었지. 하나 그들은 철퇴를 맞으면서도 아편을 계속 가지고 왔다. 그래서 지금은 어찌되었느냐. 온 세상이 아편천지가 아니더냐. 저들은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면 능히 당장의 손실도 무릅쓸 수 있는 자들이니 연판장을 너무 믿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숙부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승도는 반계관의 말에 자신이 너무 유리한 쪽으로 생각한 것이 아닌지 되돌아볼 수 있었다.
확실히 연판장은 연합왕국에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는 무기였지만, 거꾸로 손실만 무릅쓴다면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종잇장이기도 했다. 즉, 상대의 결심 여하에 따라 조커가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패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너는 총명한 젊은이다. 장차 행상을 짊어지고 나갈 아이지. 그러니 이번 일도 잘 풀어낼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게다. 연판장이 아니라도.”
승도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잔 표면에 얕게 맺힌 이슬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숙부님.”
“말해 보거라.”
“우선 염화 포대를 철거해야 합니다.”
“포대를? 하지만 그런 일은 관의 권한에 속한다. 자칫 그런 조건을 내걸었다가 꼬투리라도 잡히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저들이 포대를 건드렸다는 건 이번 기회에 저걸 치워두겠단 뜻입니다.”
“강주 관리들에게 돈푼 꽤나 먹여야겠구나.”
“죄송합니다.”
“아니다. 행상 전체의 명운이 걸린 일인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또 해줘야 할 게 있느냐?”
반계관이 묻자 승도가 손바닥을 문질렀다.
“숙부님, 이 근방에서 통나무를 대량으로 구할 수 있겠습니까?”
“통나무를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게다. 목재상을 하는 유씨가 있으니 말만 해두면 통나무 만 개 정도는 금세 내어올 수 있겠지.”
“그것을 강변에 쌓아달라고 하십시오.”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반계관은 승도의 말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통나무가 지금 왜 필요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그는 승도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것이 제 무기입니다.”
승도는 거기까지만 말했다.
승도가 떠올린 것은 오래전 프리지아의 명장 호르스트가 쓴 전술이었다.
당시 연합왕국 강상 전단이 강을 거슬러 올라와 수도를 위협하는 위기에서 호르스트는 잘 깎은 통나무의 끝에 홈을 파고 화약을 넣고 봉한 다음, 강물을 따라 수천 개를 띄워 보내는 공격을 감행했다. 시대를 앞선 어뢰 개념에 가까운 공격을 받은 연합왕국 군함들은 엄청난 손실을 입고 후퇴해야만 했다.
그 무기를 제대로 쓰려면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폭발하는 고성능 화약이 먼저 조달되어야 했다. 물론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통나무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방수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강물의 유속과 흐름을 정확하게 읽을 줄 알아야 했다. 이 모든 요소가 갖추어져야 쓸 수 있는 것이 ‘호르스트의 통나무’다.
승도가 하려는 것은 호르스트가 했던 짓의 흉내였다. 강주 상인들이 호르스트가 사용한 것만큼 많은 양의 고성능 화약을 조달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통나무를 그렇게 손질할 시간도 없었다.
그저 통나무를 대량으로 쌓아놓고 허장성세를 보여주는 정도로 ‘위협’을 가하는 것이 그의 주목적이었다.
호르스트에게 쓴 맛을 본 연합왕국이라면 이 공격을 결코 허세라고 생각할 수 없을 터였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맞아본 놈’이야말로 그 위력을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래서 써먹는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뭔가 생각이 있는 게로구나. 알았다. 내 그리 일을 처리하도록 서신을 써주마.”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협상을 하실 때는 반드시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 주십시오.”
“이유가 무엇이냐?”
상인은 실리를 중시하기에 필요 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따라서 반계관은 굳이 상대를 자극할 수 있는 행동을 하라는 말에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누가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지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말씀은 많이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대화는 전적으로 제가 주도하겠습니다.”
“기선을 제압하고 네 뜻대로 상대를 끌어가겠다는 게로구나. 하나 일이 쉽진 않을 게다. 장사에서도 예기치 않은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게 마련인데, 국가 간의 일은 오죽하겠느냐?”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서 가능한 한 빨리 일을 매듭짓고 싶습니다.”
“그 말이 옳다.”
반계관은 남은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약간은 미지근한 온도가 협상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 찝찝한 끝 맛을 주었다.
***
협상은 논란 끝에 연합왕국 전열함 ‘빅토리아’ 호의 함상 위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연합왕국 해군은 타국의 영토에서 협상을 할 때는 ‘반드시’ 자국 군함의 함상에서 하려 했고, 그 고집을 꺾을 힘이 없던 승도로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연합왕국 쪽이 심리적 홈그라운드에서 협상을 진행하게 된 것이니 승도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빅토리아 호가 보낸 종선에 탄 승도와 반계관, 그리고 수행원 몇 사람이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는 동안, 종선 끄트머리에 선 채로 이쪽을 관찰하듯 보는 자가 있었다. 빅토리아의 해병 위관 존 모리스였다.
그는 다소 의외라는 얼굴로 한참을 바라보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상대한 자들이 정규군이 아니었나? 어째 협상을 한다고 나선 자들이 신의 정규군 장교들 같진 않아 보이는데.”
“정규군은 아닙니다. 그저 민병일 뿐입니다.”
승도가 그 말을 알아듣고 대답하자 모리스가 당황한 빛을 띠었다.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가?”
“물론입니다.”
“하, 신을 외부 사정에 어두운 우물 안 개구리라 생각했건만, 아직 어린 그대도 우리말을 알아듣다니 놀랍군.”
“신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미개국이 아닙니다. 본래는 훨씬 더 발전된 나라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해적들과 유목 민족 사이에 끼어 이천 년을 항쟁하고도 이만큼 문명을 발전시킨 나라인데, 당신들이 얕볼 자격이나 있습니까?”
“이천 년?”
존 모리스는 조금 당황했다.
사실 신제국의 군사력과 제반 경제 사정, 약간의 역사 상식 정도나 파악하고 있던 해병 장교로서는 본격적인 신의 역사 이야기가 나오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모르는 것으로 논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니 모리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신들의 조국 연합왕국은 해적들에게 겨우 오백 년 시달린 것이 고작이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신과 같은 입장에 섰다면 우리를 비웃을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끄응.”
모리스는 괜히 군말을 붙였다가 어린 상대에게 톡톡히 면박을 당했다. 얼굴이 화끈거려 괜히 성질이 났다. 그는 승도에게 더는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로 노를 젓는 부하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고래고래 부하들에게 언성을 높이는 모리스를 보던 반계관이 승도에게 물었다.
“저자에게 무어라고 한 것이더냐?”
“저자가 신을 가볍게 보기에 한마디 해주었을 뿐입니다. 사실 저들은 신에 대해 그리 오만할 자격을 갖고 있지도 않은 자들입니다.
겨우 몇백 년 전만 해도 해적질로 국가 수입의 사분의 일을 충당하던 해적 떼 같은 나라가 무슨 염치로 신을 미개하다 욕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이치를 일러주었을 뿐입니다.”
“과연 이 반계관의 조카다운 기백이다. 하나 저자에게 굳이 면박을 줄 필요가 있더냐?”
“있습니다. 저자의 지위는 해병 위관, 연합왕국 군함 안에서 서열 3위의 장교입니다. 저자가 굳이 이 작은 보트에 탄 것은 협상에 앞서 우리를 살펴보려는 속셈입니다. 그러니 저자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면 당연히 그 이야기를 전해들을 함장도 기가 꺾일 것이 뻔합니다.”
“심리전이구나. 묘책이다.”
“하지만 연합왕국 장교들은 백전을 거친 노련한 자들입니다. 해서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야 당연하지 않으냐. 상인은 물건을 파는 순간까지 물건이 ‘팔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그 같은 이치를 모르고 어찌 강주 바닥에서 행상의 이름을 걸고 있겠느냐?”
승도는 반계관의 말에 적지 않게 안심이 되었다. 역시 근대적인 협상에 대한 지식이 조금 모자랄 뿐, 수십 년 간 상계에서 잔뼈가 굵은 반계관이란 거인은 간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상대를 다룰 수 있는 언변과 상황을 인식하는 감각이 평범한 인간과 전혀 달랐다. 이런 거인이라면 충분히 협상을 끌어갈 힘이 있었다.
포말을 가르고 나아간 보트가 어느덧 거대한 서역 대선의 옆에 멈추었다. 배 위에서 밧줄 사다리가 내려오자 승도가 먼저 사다리를 잡고 올랐다. 밧줄 사다리를 쓸 줄 모르는 반계관에게 오르는 동작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능숙하게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모습을 본 모리스가 놀랐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지간한 전각 사층 높이만큼이나 높은 전열함의 상갑판에 오르자 높다란 마스트와 절도 있게 두 줄로 늘어서 정렬한 수병들과 해병들이 보였다. 남색과 붉은 코트들의 대비된 색채가 주는 느낌은 강렬했다.
일렬에 선 준사관들과 사관후보생들이 검을 갑판에 짚고 선 자세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어 그랬던지 반계관의 입에서 ‘으음’하는 소리가 나왔다.
승도는 연합왕국 해군 병사들을 훑던 시선을 선실 쪽으로 돌렸다. 깔끔하게 잘 닦인 갑판의 끄트머리에 해군 위관들에 둘러싸인 채로 백발의 가발을 눌러쓴 장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저자가.’
승도는 남자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