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1화 (21/425)

제21화. 협상 (2)

남자의 양어깨에 붙은 견장으로 보아 그 신분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협상의 상대인 해군 장교, 빌리언트 대령이다.

빌리언트 대령의 곁에는 통역으로 보이는 신국인 한 사람이 있었다. 통역은 쥐 상의 얼굴에 몹시 교활하게 보이는 자였지만, 그자의 성품이야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통역을 하지 못해서 받는 불이익은 고스란히 그자가 뒤집어쓰게 될 테니까.

빌리언트 대령이 통역의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자 통역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신국에서 온 협상 사절단 분들께서는 함장실로 들어오시랍니다.”

“그러죠. 가시지요, 숙부님.”

승도와 반계관은 나란히 두 줄로 늘어선 수병과 해병들의 사이를 지나쳤다. 그들이 주는 날카로운 시선에 반계관이 조금 낯빛을 굳혔지만, 승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수십, 수백만의 죽음을 보았던 영웅에게 한 줌도 안 되는 자들이 가하는 위협 따위는 자장가만도 못 되었다.

승도가 함장실로 들어서자 빌리언트 대령이 자리를 권했다. 그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다는 말을 통역을 시켜 전하고는 자리를 비웠다. 필시 해병 위관 존 모리스로부터 몇 마디 동정을 염탐하려는 뜻이 틀림없었다.

승도는 평시에 함장의 식탁으로 쓰였을 테이블에 앉은 채로 방을 둘러보았다. 값비싼 가구와 책, 거대한 세계 지도. 신기하게 보이는 배 모형 따위가 보였다.

반계관도 별천지나 다름없는 홍모귀들의 방 안을 구경하긴 처음이라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기에 바빴다.

한참을 주변을 살피던 반계관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승도야.”

“예, 숙부님.”

“아까 보니 너는 홍모귀들의 총칼을 보고도 전혀 겁을 먹지 않은 것 같더구나. 이 늙은 숙부는 식은땀을 흘렸는데, 너는 어찌 된 아이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냐?”

“제가 간이 조금 큽니다, 숙부님.”

“허허. 배포가 크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 구부릴 땐 구부릴 줄도 알아야 하니, 그 점은 명심하도록 하거라.”

“그리하겠습니다.”

반계관과 승도가 몇 마디를 나누고 다시 침묵에 잠길 즈음, 함장실의 문이 열렸다. 세로로 쓴 이각모를 벗고 들어온 빌리언트 대령이 통역에게 가벼운 말을 전했다. 그러자 통역이 말했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대인들.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십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전해 주십시오.”

빌리언트 대령은 그 말을 전해 듣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대화를 이끄는 것이 보기에도 어이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모리스로부터 들은 말이 있어서인지 꺼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조심스러웠다.

협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연합왕국 해군 전통의 요리 중 하나인 염장 쇠고기에 맛없는 스튜, 약간의 라임 주스 등을 곁들인 가벼운 식사를 나누며 이야기는 진행되었다. 처음 이야기는 순조롭게 풀렸다.

“우리 연합왕국 해군성은 귀국과의 전쟁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귀측의 포트 헬리오트(염화 포대)에서 우리 측 상선의 안전한 통행에 위협을 가한다는 말이 있어 ‘약간의 자위적 조치’를 취했을 뿐이니,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국주의 국가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될 대로 되라 식의 명분이다. 하지만 힘이 없는 쪽에서는 그 개도 안 물어갈 명분을 듣고 넘길 수밖에 없다.

거기에 토를 다는 순간 실력으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피를 보는 쪽은 실력이 없는 쪽이기 때문이다.

“양해합니다. 우리 쪽도 그런 점에 대해서는 진즉부터 우려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염화 포대의 자진 철거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승도는 오히려 무장 해제를 꺼내어 빌리언트 대령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었다. 물론 이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한 일보 후퇴에 지나지 않았다. ‘더 강한 수단’이 준비되었다는 언질을 주면 그 미소는 금세 사그라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다행입니다. 대인께서 양해를 해주시다니. 그쪽의 포정사 대인께서 양해해주신 사안이시겠지요?”

빌리언트가 말한 포정사란 바로 반계관을 칭하는 말로 연합왕국 사람들은 정3품의 관리를 일률적으로 포정사라고 칭했다. 이는 신제국의 관제에 무지한 탓이었지만, 어찌 됐건 협상을 하는 쪽에선 아무래도 좋은 착각이다.

“물론입니다. 염화 포대가 철거되면 귀측의 전열함도 사태 해결을 위해 물러나시겠지요?”

“철수라.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함은 본국 해군성으로부터 받은 명령에 따라 금포강을 항행하는 우리 상선들의 안전을 보호할 책무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독으로 결정할 사안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저희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빌리언트는 냉소를 지으며 승도를 비웃었다. 패를 내놓고 협상을 하는 머저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철수에서 해군성 재가 운운한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가 내놓을 공격을 차단하기 위한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승도는 여기까지 밀려줄 생각이었다. 이제 바닥을 보여 주었으니 슬슬 치고 나갈 일만 남은 셈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전열함이 강상에 떠 있는 문제 때문에 강주 상인들의 여론이 심상치 않습니다. 물론 저희 아버님을 위시한 행상 전원이 그러십니다.”

“여론이야 그저 말뿐이지 않습니까?”

“연판장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연판장이라면.”

“강주 상계 전체의 연판장이요.”

반계관이 한마디를 거들자 무게감이 달라졌다. 빌리언트는 그 말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역의 말을 듣고서야 그 위험성을 깨닫자 능글능글한 여유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무, 무슨 연판장이란 말입니까?”

“귀측의 전열함이 금포강에서 철퇴하지 않으면 강주는 연합왕국과의 거래를 모두 중단할 거란 연판장입니다.”

철시! 상점의 문을 닫고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생소한 위협에 빌리언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포대만 장악하고 있었다면 신제국 정부의 발등에 불이 떨어져 연판장 따위에 겁을 먹지 않아도 되었을 것인데, 포대를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 보니 문제는 전혀 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서 간단히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동방 무역 회사 측의 양해도 구한 터라, 연판장은 빌리언트의 각오만 있다면 무시할 수 있었다.

“그거야 귀국 상인들의 뜻이지요. 그래도 우리는 상선들의 보호를 지속할 생각입니다.”

빌리언트가 이를 악물고 어려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협상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연판장을 애써 무시한 것이다. 연합왕국도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결정인 만큼, 이런 상황을 초래한 빌리언트 개인에 대한 해군성의 평가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쪽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주는 무력으로라도 귀함을 철퇴시키는 수밖에요.”

“무력이라고요? 하, 신제국이 무슨 힘이 있어 본 함을 물리치겠단 말입니까?”

빌리언트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기껏해야 백오십 톤 남짓한 정크선 수백 척을 돌진시켜 포술 훈련이라도 시켜줄 작정이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깟 신제국 해군 따위는 이 군함에 찰과상도 입힐 수 없었다.

“가능합니다.”

승도가 태연하게 말하자 빌리언트는 코웃음을 쳤다.

“귀국의 대포로 티크 목 압축 목재 1인치를 뚫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하물며 본 함은 8인치가 넘는 두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재주로 우리를 공격하겠단 겁니까?”

티크 압축 목재는 연합 왕국이 자랑하는 선박 자재다. 확실히 신의 대포는 그것을 뚫을 능력이 없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여기 있을까?

하지만 뻔한 얘기를 하자고 여기 앉아 있는 게 아니다.

승도는 태연한 표정으로 할 말을 툭 던졌다.

“우리는 통나무 1만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통나무가 뭘 어쨌단 겁니까?”

통나무는 그저 통나무다. 설마 하니 그걸로 뗏목이나 만들어 덤비겠단 말인가?

빌리언트 대령은 실소를 머금었다. 이래서 노랑 원숭이들이란.

정크선도 소용없는데 땟목을 이야기해서 뭘 한단 말인가? 협상의 기본도 모르는 친구들이다.

그때 승도가 놀라운 말을 꺼냈다.

“프리지아의 명장은 통나무를 아주 잘 써먹었더군요. 우리도 그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괜찮더군요. 그 물건은.”

‘호르. 호르스트!’

빌리언트의 눈이 번뜩하고 커졌다. 이 미개한 놈이 호르스트를 알다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르스트는 연합왕국에 악몽과도 같은 기억을 남겨준 괴물이었다. 기나긴 10년 전쟁에서 루시와 오스티아, 연합왕국의 삼국 연합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되풀이하고, 수도가 포위되었을 때 통나무 어뢰로 강상 전단을 쓸어버린 명장. 그놈이 쓴 통나무를 안다면 ‘통나무 1만 개’는 정말 무지막지한 병기가 아닐 수 없었다.

“아시겠지요. 함장님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연합왕국 해군 장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전훈에 포함된 것이 호르스트의 통나무다. 강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는 반드시 물살이 잔잔하고 기동할 공간이 있는 곳을 골라 올라가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바로 그놈 때문이 아니던가.

함장이 눈짓을 하자 동석해 있던 장교가 급히 함장실을 나섰다. 정말 통나무가 쌓여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놈의 말이 허세가 아니라면?

빌리언트의 심중에 묘한 불안감이 싹텄다. 대 연합왕국을 대표해 미개인들을 상대하면서 맛볼 거라 생각지 않은 감정이다.

‘아닐 거다.’

대령이 고개를 젓는 동안, 승도는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통나무는 분명히 쌓아뒀다. 아마 만 개는 훨씬 넘을 거다. 쓸모는 없지만.

곧, 장교가 돌아와 함장의 귀에 귓속말을 했다.

‘정말 통나무를 몇 만 개나 쌓아놨다고? 농담이 아니란 말인가?’

진짜 통나무 1만 개 이상이 상대라면 물살이 잔잔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수면을 뒤덮으며 내려올 텐데, 무슨 재주로 그걸 피한단 말인가. 그러니 상대의 공갈은 공갈이 아니라 협박이다. 여기서 엉덩이를 깔고 있으면 통나무로 수장시켜 주겠다는.

“당신들이 통나무를 갖고 있다고 해도 호르스트처럼 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

빌리언트가 애써 강한 척해 보았다.

“물론 없습니다. 그래서 해보시겠습니까? 가능할지 말지.”

빌리언트는 침을 삼켰다. 될지 안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1만 개의 통나무가 쏟아졌을 때, 빅토리아가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100%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만에 하나 호르스트의 통나무 어뢰에 맞았다간 빅토리아는 끝장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없는 것이 동방을 드나드는 상인 놈들은 뭐든 갖다 판다. 호르스트의 통나무가 아니라 호르스트 본인이라도 가격이 맞으면 갖다 팔 놈들이다.

‘모 아니면 도인 허세다. 1만 개의 통나무가 전부 진짜일 리 없어. 오히려 가짜만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빌리언트는 상대의 눈에서 진실을 읽어보려 했지만, 승도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건 당당함뿐이었다.

자신이 있단 얘기다.

‘빌어먹을.’

가짜든 진짜든 몸으로 맞기 전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도박은 너무 위험하다.

“우리에게 뭘 원하는 거지?”

한참 만에 대령은 자신의 약세를 인정했다.

“금포강에서 조용히 나가주시는 겁니다. 그리하면 원정 비용까지는 우리가 정산해 드리겠습니다.”

승도는 상대가 발을 뺄 여지를 주었다. 괜히 깊게 고민할 여지를 주면 ‘허세’가 들통 날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아량’을 베푸는 시늉을 해서 상대에게 ‘손해’보지 않고 물러난다는 인식을 주는 것. 그것이 그가 선택한 최선책이었다.

“원정 비용을 정산하고 포대를 철거해 준다는 게 그쪽의 최종 조건이요?”

“그렇습니다. 덤으로 은 1만 5천 냥. 어떠십니까?”

승도의 한마디에 빌리언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호르스트의 통나무까지 있다면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그리고 상대는 마음 놓고 물러설 여지까지 주었다. 이래서야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참 만에 빌리언트는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리합시다.”

빌리언트의 항복이나 다름없는 선언을 받아내자 승도가 숙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반계관은 그 이야기를 듣고 웃으며 은 1만 5천 냥을 내주기로 한 지급 증서에 날인해서 빌리언트 쪽으로 내밀었다. 협상은 그것으로 무사히 끝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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