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2화 (22/425)

제22화. 각오 (1)

서역 군함 소동은 우여곡절 끝에 일단락되었다. 사건의 해결은 전적으로 무능한 관이 아닌 상인들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졌지만, 포상은 매우 작았다.

승도는 황실로부터 정7품의 명예직과 은화 1만 냥의 금품을 하사받았는데 그가 이룬 공에 비하면 정말 티끌만한 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황실로부터 받은 포상금 전액을 염화 포대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 유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에 욕심을 부려본들 그보다 더 큰 무형의 손실이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승도가 얻은 가장 큰 이문은 바로 명예였다. 천하가 한 번은 그의 이름을 들어 보았다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그리고 온 강주 사람들이 그의 실력을 보았다. 만에 하나 이런 사건이 재발한다면 강주 사람들로부터 전폭적인 협력을 기대해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는 이에 자만하지 않았다. 자만이 얼마나 큰 화를 부르는지는 이미 지난 시간들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에우로페를 호령하며 연전연승한 군신, 세계 최강의 자리를 넘보았던 황제도 자만 한 번으로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날 수 있음을 보고 배웠다.

그러니 잠깐 얻은 명예에 자만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에서 그가 느낀 것은 무력감이었다. 전쟁의 신이라 자부하던 그였지만 정작 군략을 발휘할 수 있는 군대가 없었다. 오합지졸의 군대만으로는 한 줌도 안 되는 홍모귀조차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보고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군대를 만들었다간 역모로 몰려 목이 달아날 것이다.

그래서 승도가 구상한 것은 새로운 강주 방어 계획이었다. 상인들이 막대한 돈을 지출하는 한이 있더라도 방어 설비를 개선하여 홍모귀의 경거망동을 막는 것. 장기적으로는 그것이 가문에 이익이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승도가 붓을 들어 금포강과 강주 위에 이리저리 선을 그어보고 있는데, 방 밖에 인기척이 들렸다. 시비가 ‘공자님, 아버님이십니다.’라고 말을 하고서야 승도는 의관을 정제하고 문 앞에 서서 정중하게 머리를 굽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오유도는 아문에 가기 전보다 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다소 마음고생을 한 듯 초췌한 얼굴이라 승도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리에 앉자 오유도가 먼저 말을 꺼냈다.

“홍모귀 군함 문제로 양주 부에 소환된 차에 네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서역 군대를 네 손으로 물리쳤다 소문이 자자하던데, 어찌 된 일이더냐?”

“소문은 언제나 과장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소자는 홍모귀들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어찌 이기지 못한 것이더냐? 상인의 일을 보자면 이문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시장을 차지한 쪽이 승자인 것이다. 홍모귀들이 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탐심을 버렸다면 결국 네가 이긴 것이 아니더냐?”

“하오나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적지 않은 재화를 소비하였습니다.”

“돈이야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다. 홍모귀들을 내쫓고 액땜을 한 비용이라 생각하면 싼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편한 게다.”

오유도는 그리 말하며 승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하긴 오유도의 배포 하나 만큼은 승도가 감히 따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거래의 신용 하나를 지키기 위해 은자 7만 냥이 넘는 손해도 기꺼이 감수하는 그의 대범함은 서역인들 사이에서도 회자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보다 네게 관직이 내려진다는 말은 알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아버님.”

“그래서 네가 북경으로 올라가 황제 폐하를 알현해야 할 것이다.”

“황제 폐하를 친견한단 말입니까?”

“그래. 임경문 대인 말씀으로는 황제 폐하께서 네게 궁금증이 생기신 모양이다. 해서 정7품의 말직이라고 하나 네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으신 모양이다.”

승도는 조금 당황했다. 이 제국의 황제가 자신을 보겠다고 할 줄이야.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제도로 가는 일은 피할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의외의 말씀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그럴 게다. 나도 놀랐으니, 너는 오죽하겠느냐? 잘만 하면 우리 가문에서 관계에 정식으로 출사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니 나도 흡족하구나.”

오유도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부로서 천하제일의 반열에 오른 거상도 상인을 천시하는 제국의 풍조 속에 겪어온 적지 않은 설움의 세월이 가슴에 응어리가 진 듯했다. 그는 아들이 관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눈치여서 승도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올라가는 길에 상경에 들러 임경문 대인을 모시고 북경으로 올라가도록 하거라.”

“대인을 모시고요?”

“그래. 이번에 임경문 대인이 양강 방어 문제 때문에 조정으로 소환된다고 하시더구나. 가시는 길에 벗이 되어드리는 것도 좋을 게다.”

임경문이 소환된다는 말에 승도는 한숨이 나왔다. 그제야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서역 군함을 금포강에 올려 보낸 자. 아문 감독 위해충은 처음부터 눈엣가시 같은 임경문을 낙마시키기 위해 서역인들과 일을 꾸몄을 것이다. 서역인들은 그들대로 꿍꿍이가 있어 일을 벌였겠지만, 위해충은 위해충대로 그들을 이용해 정적인 임경문을 쳐낸 것이다.

이것이 부패한 제국의 현실이었다. 능력이 있고 청렴한 자라도 부패한 시스템 하에서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도리어 탐관의 모함을 받고 탄핵된다. 그리고 탐관은 더욱 그 기세를 떨칠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자가 하나 생각해둔 것이 있는데 한 번 검토해 주시겠습니까?”

“그게 무엇이더냐?”

“금포강의 방어가 너무 취약하여 강을 가로지르는 철제 난간을 하나 건설하고자 합니다.”

“철제 난간?”

오유도가 의아한 눈으로 되묻자 승도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강주의 입술인 염화 포대는 이번에 너무도 형편없이 무너져 제 구실을 못 한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재건한다 해도 오합지졸의 군대가 지킬 바엔 없느니만 못하다 봅니다. 그보다 하류, 금포강을 관제할 수 있는 위치에 높은 벼랑이 있사온데 그곳은 강폭이 좁고 물살이 빠릅니다.”

“용문곡을 말하는 게로구나.”

“예. 그 위에 철제 난간을 만들고 대포를 배치했으면 합니다. 그리하면 강을 지나는 모든 배를 공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건은 오래전 강주 관리사로 재직한 용 대인이 검토한 바 있으나, 비용 문제로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해서 우리 상인들이 돈을 대어 난간 공사를 맡았으면 합니다.”

“그 공사는 은자만 100만 냥이 족히 드는 대사업이다. 이문을 생각하고 말한 것이더냐?”

오유도가 상인다운 눈으로 묻자 승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문이 남습니다. 아주 많은 이문이.”

“상인은 이문이 남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나를 설득하지 못하면 공사는 할 수 없다. 말해 보거라.”

“첫째는 우리 부를 지킬 수 있음입니다. 염화 포대가 종이 호랑이인 것을 알았으니 서역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강주를 넘볼 수 있음은 자명한 이치. 이쪽에서 포대 철거까지 약속했으니 저들이 조만간 도발을 해올 때에 대비한 안전책이 필요합니다. 주머니의 재물과 강주를 지킨다. 이것이 가장 큰 이문입니다.”

“그 말은 일리가 있다. 하나 이는 본디 관이 해야 할 일이다. 하니 절반의 이유로 쳐주마.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조정에 우리 상인들의 충심을 증명할 수 있음입니다. 적어도 이 같은 비용을 내어 생색을 내면 천재지변이니 황제의 생신 선물이니 하는 거창한 핑계로 돈을 뜯어내는 일을 잠시 멈출 수 있습니다. 난공불락의 철제 난간을 황제 폐하의 생신 선물이라 바친다면 어느 미친 탐관이 우리의 돈을 우려내겠습니까? 한 번에 은화 100만 냥을 바친 우리에게 말입니다.”

“기왕 쓸 돈, 한 번에 크게 써서 생색을 낸단 말이더냐? 그것 참 이 오유도의 아들다운 배포다. 그것도 반 만 쳐주마. 하나만 더 생각해 보거라.”

“세 번째는 강주의 인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철제 난간이 돈으로 저절로 되는 공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일거리가 없는 빈민들을 구제할 수 있으니 우리 상인의 공덕이 절로 쌓일 것입니다. 그러니 만에 하나 난리가 벌어져도 그들은 우리의 부를 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덕을 베푸니 그것이 셋이라.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인심이란 양날의 칼과 같아 군주의 경계를 살 수 있으니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니라.”

“물론입니다, 아버님.”

오유도는 잠시 말을 멈춘 채로 생각에 잠긴 듯했다. 분주하게 주판알을 튕겨보는 듯한 부친의 모습에 승도는 침묵을 지켰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오유도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네가 그 정도까지 생각하여 결정한 일을 어찌 내가 밀어주지 않겠더냐? 네 뜻대로 행상의 중지를 모아 난간 공사를 해주마.”

“감사합니다, 아버님.”

오유도가 기꺼운 얼굴로 동의를 해주니 승도도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차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무거운 화제는 모두 정리되었다. 두 부자는 무거운 이야기 대신 일상의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았다. 가끔은 평범한 부자로 돌아가는 것도 좋다 싶어 승도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오유도가 불쑥 꺼낸 몇 마디에 승도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 상경에서 돌아오며 곰곰이 생각해본 일이 있다.”

“생각해보신 것이라 하심은.”

“너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혼사를 치러야 하지 않겠더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말문이 탁 막혔다.

“하오나.”

“일단 나는 반 대인의 여식을 네 신붓감으로 생각하고 있단다. 인물도 좋고 행실도 나쁘지 않은데다 반계관이 장인이 되니 네 앞날에 큰 도움이 될 게다.”

오유도의 말대로 반계관의 딸에 대한 소문은 좋았다. 승도와 혼사가 거론될 만한 사람이라면 반계관 정실 소생의 무남독녀 반은비뿐이다. 그녀는 강주는 물론 장강 동쪽에서도 경국지색의 미녀로 소문이 자자했다. 인품도 고아해서 아랫사람들에게 잘 해준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

“물론 네게 내 의사를 일방적으로 강요할 생각은 없다. 어찌 되었건 너는 내 하나뿐인 후계자가 아니더냐. 한 번 잘 생각해 보거라.”

승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자신이 개인의 몸이 아니라 수천 가솔을 거느린 오씨 가문의 차기 가주라는 위치에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바였다. 가문 대 가문의 결합으로 이해되는 혼사에 개인적인 감정이 끼어들 자리는 많지 않았다. 특히 동방에서는.

오유도는 승도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뒷짐을 지고 방을 휘적휘적 나섰다. 현명한 아들이니만큼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잘 알아들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오유도가 방을 나가고 홀로 남겨진 승도는 손가락으로 애꿎은 탁자만 두드렸다. 왠지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열린 창을 바라보니 푸른 달이 씁쓸한 표정을 던지고 있었다.

인간은 자유롭기 위해 구속되고, 구속됨으로써 진정한 인간이 된다. 구속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 구속 없는 자유는 결국 방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승도는 몬테스키외 백작의 말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억눌렀다.

하지만 사람은 자유를 갈망하기에 진정 자유로워진다는 철학자의 말도 있다.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사회와 조직에 건전한 행복을 함양한다는 그 주장 역시 틀리진 않았다. 승도가 그 어떤 선택을 하든 이론가들은 그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었다.

가문이냐, 정이냐.

야망이냐, 안주냐.

반은비와 정유하로 대표되는 두 가치가 승도의 가슴속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 황제로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대로 성취하며 살았던 그에게 이보다 더 고통스럽고 힘든 선택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정해야만 했다.

***

세상은 언제나 원하는 대로 살기 어렵다. 그것은 오승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승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뜰을 서성거렸다. 찬바람이 불 때면 고민도 깊어졌다.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면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날의 고민은 그의 앞날을 위한 분기점과도 같았다.

승도는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그는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 마음은 단지 이성적인 판단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결정을 미루어둘 수는 없었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서찰을 썼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서찰을 비단 주머니에 넣어 수납장에 넣고 단단히 봉했다. 북경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 주머니를 아버지에게 건넬 참이었다.

승도는 부친에게 먼저 문안 인사를 올리고, 어머니 이씨 부인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이름도 일일이 기억할 수 없는 아버지의 첩들과 여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니 겨우 유하를 볼 짬이 났다.

그녀는 마침 수를 놓고 있었다. 승도가 제 방을 찾아오자 유하는 살짝 놀란 눈치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자님, 여긴 어쩐 일로.”

“응. 북경으로 떠나기 전에 한 번 들르려고.”

“네에.”

유하는 조금 수척한 목소리를 냈다. 생각해보면 그녀와 떨어져 지낸 시간은 몹시 짧았다. 우여곡절 끝에 보낸 아문 여정도 결국 그녀와 함께였다.

전쟁이나 다름없던 염화 포대 전투를 제외하면 최근까지도 거의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여동생들보다는 훨씬 가까운 사이였다.

승도는 무슨 말로 서두를 꺼낼지 몰라 망설였다.

“차를 드시겠어요?”

유하가 먼저 말을 꺼내자 승도는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고개를 끄덕이자 유하가 뜨거운 물을 가져와 찻잎을 조심스럽게 주전자에 넣었다. 찻물이 우려지는 동안 승도는 자신이 할 말을 대충 정리했다.

“사실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

“네.”

“실은 이번에 아버님께 혼사 이야기를 들었는데.”

유하는 혼사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그리 놀란 눈빛이 아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 승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서역에서는 시녀와 혼례를 치르는 귀족들이 꽤 많았다.

물론 그 시녀들은 평범한 시녀가 아니라 귀족 출신들이었지만 그 점은 유하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관료 집안 출신의 딸이었으니.

그렇지만 가문 대 가문의 혼사로 이해되는 강주 상계에선 신분만큼 중요한 것이 가문의 이익이다. 이익이 된다면 미천한 점원과 혼사를 치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유하에게 상인 가문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가문이 건재하다면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그랬다면 귀한 딸을 시녀 노릇이나 시키고 있지는 않았을 터다.

“유하는 어떻게 생각해?”

“제가 뭘 아는 게 있겠어요?”

“그냥 유하가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줬으면 해서.”

승도는 애써 유하의 마음을 캐물었다.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은 확실히 듣고 싶었다.

“잘 모르겠어요.”

“정말로?”

유하는 대답을 회피하는 듯 말끝을 흐렸다. 내심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승도로서는 갑갑한 노릇이었다. 확신 없이 생각을 밀어붙일 수는 없다.

“북경으로 떠나면 정말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하오나.”

“나는 네 생각을 알고 싶어.”

승도가 진중한 목소리로 묻자 유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처음부터 규방 처녀나 다름없는 그녀의 입에서 대답을 듣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짐작한 터라 승도는 다른 선택지를 내주었다.

“말이 어렵다면 글로 써줘. 그걸로 충분해.”

그 말에 비로소 유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도는 그녀에게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쓸 시간을 주기로 했다. 유하의 방에서 나와 뒷짐을 진 채로 뜰을 서성거리며.

바람은 잔잔하고 꽃들은 화사했다. 햇빛조차 부드럽고 푸근했건만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유하가 어떤 글을 써줄지 고민도 되었다.

한참 만에 유하가 잘 갈무리된 비단을 고이 접어 가지고 나왔다. 먹물이 번지지 않게 비단 위에 써서 가져온 모양이었다. 유하는 승도에게 비단을 건네주었다.

“북경으로 가시는 길에 읽어주셔요.”

“지금은 안 된다는 말이야?”

유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하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정문으로 나오니 오유도가 준비한 마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유도가 지난 서역인 도굴단 사건을 들은 것인지 경호 인원도 상당했다.

마차 주위에 선 무인은 모두 스물. 그 중에는 서역의 총포와 검을 든 자들도 있었다. 모두 서역인 도굴단으로부터 뺏은 무기들이다.

무인 정씨뿐만 아니라 호씨를 비롯해 실력 있는 사내들도 여럿 눈에 보였다. 장원에서도 힘깨나 쓰는 자들은 모두 마차 호송에 매달린 눈치라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래도 승도는 그 경호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먼 길을 보내는 아버지의 배려를 느꼈기 때문이다.

마차에 막 오르려던 차에 정문을 바라보니 아버지와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편 한구석에 유하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왠지 다시 바라볼 수 없는 얼굴이 될 것 같아 승도는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승도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마차에 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