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각오 (3)
양주 부에 도착한 승도는 곧바로 임경문에게 접견 신청을 넣었다. 북경으로 소환 명령을 받아 사실상의 직위 해제 상태인 임경문 대신 양주 순무가 양주 부의 최고 권력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주 순무는 현재 부재중이라 여전히 임경문이 모든 업무를 주관하고 있었다. 승도는 임경문에게 넣은 접견 신청의 결과를 기다리기 위해 근처의 공소에 방을 빌리기로 했다.
대개 공소는 같은 연고를 둔 지역상인 혹은 공동의 상단을 운영하는 상인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이를 이용하는 자격도 대개 비슷했다.
다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었는데, 거래가 있는 상단의 상인이라면 손님 자격으로 받아주곤 했다. 행상에서 이름이 높은 오씨 상단 역시 ‘손님 자격’으로 지역 공소를 이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오승도가 선택한 지역 공소는 강상이 상경에 운영하고 있던 상경 공소로 상경의 거상인 남유택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이 공소에는 약 74개의 상단과 거대 물류 운송 조합인 청방이 가맹하고 있어 그 세는 남방 제일이라 할 수 있었다.
승도가 공소에 도착하자 청방의 상경 지회장과 남유택의 차남 남강문이 나와 그를 맞았다. 어지간한 손님이 방문했다면 그들이 나와 맞을 이유가 없었겠으나, 방문자는 오승도였고 그들이 맞이할 가치가 있었다.
오씨 가문의 전체 자산은 적게 잡아도 은화 2,000만 냥이고, 그들 상경 공소의 자산 총액은 800만 냥에도 못 미치니 남강문과 청방의 공손함은 상전을 대하는 고용인의 태도와 흡사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승도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 포권을 하자 남강문이 허리가 구부러지도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서른 줄에 접어든 중견 상인이라도 결국 상인의 힘을 결정하는 것은 돈이다.
천하에서 단일 가문으로 오씨보다 막대한 재부를 가진 것은 황실 하나뿐이다. 그러니 남강문으로서는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남강문과 포권을 나누자 옆에 서 있던 뱁새눈의 사내가 인사를 했다. 그는 청방으로, 요즘으로 말하면 화물 운송 노동조합의 지부장 격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그 역시 공손하기는 남강문에 비할 바 아니었다.
사실 오씨 가문이 내륙 물류에 매년 지불하는 운송료만 은자 백만 냥에 이르다 보니 운송 노동자들을 거느린 청방도 그 앞에서 굽실거릴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매한가지였다.
두 사람의 환대를 받으며 공소에 들어선 승도는 그 건물의 크기에 크게 놀랐다.
공소는 수십 개의 상회가 공동으로 출자하여 세운 곳답게 그 규모부터 압도적이었다. 도시 한가운데에 2만 평이 넘는 땅을 혼자 쓰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 전체를 성벽이나 다름없는 담으로 둘러친 것을 보니 숨이 막혔다.
건물의 높이는 행궁 때문에 제약을 받아 2층을 넘지 못했으나, 그 위세는 행궁보다 더 대단했다.
공소 내에는 상단의 유명한 창업주들을 모신 사당과 회의장, 상품을 보관해주는 창고, 임시로 부리는 노동자들의 대기실 등의 다양한 공간이 구획되어 있었다.
사실상의 내당에 해당되는 위치에는 사당과 회의장 등 내부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들이 배치되었고, 외당에 해당되는 곳에는 손님들의 접객실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승도가 안내된 것도 접객실이었다.
물론 그 규모는 여타 접객실들과 차원이 달랐다. 객실은 웬만한 공경대부들이나 쓸 법한 집기들로 가득했는데, 방 내부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도자기들을 전시한 찬장이었다. 그것을 보고 승도가 묻자 남강문이 기분 좋은지 미소를 지었다.
“저것은 황실에 주로 납품하는 진가 공방의 도자기들입니다. 모두 1년에 100개씩 납품받아 접객실에 새로 올리고 있습지요. 마음에 드십니까?”
“저걸 왜 접객실에.”
“주로 이 방에 드는 손님들은 고관대작들이신지라 빈손으로 돌려보내기는 뭣하고, 그렇다고 원하는 것을 알 수도 없으니 다양한 자기를 준비하여 보여드리는 셈입니다. 오 공자께서도 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자기가 있으시면 골라 보십시오.”
남강문은 자연스레 선물을 언급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지역의 고관, 거상들과 친분을 다지고 있는 듯했다. 뇌물의 방식을 수요자가 원하는 것을 골라가는 ‘선물’의 방식으로 접근한 그 참신함에 승도는 조금 놀랐다.
확실히 ‘뇌물’에 대한 세련됨에서 강주는 상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식사부터 하시지요.”
승도는 남강문과 방을 둘러보고 외부 손님을 위한 식당으로 향했다.
회랑을 돌아 도착한 식당 역시 상경의 호화로움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는데, 그 식탁의 길이가 장정 서른 명의 키보다 더 길어보였다. 백 명 이상이 앉아도 충분해 보이는 식탁 위로 과장을 조금 보태면 ‘만 가지’에 가까운 요리를 차려 내었는데, 신의 요리를 집대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이 엄청난 요리를 본 승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남강문은 승도가 감탄을 하는 줄 알고 어깨를 으쓱하며 제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떠십니까? 신의 모든 요리를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상경에서만 가능한 도락입니다.”
“대단하군요.”
“음식을 드실 때는 가능하면 한 점씩 맛보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그리하지 않으시면 정작 맛있는 요리는 맛을 보실 기회도 없으실 테니까요.”
남강문의 너스레를 들으며 승도는 접시를 들었다. 신도 서역과 비슷한 식사 문화를 갖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음식을 덜어서 먹는 식습관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필요한 만큼 만들어 먹는 서역인들과 달리 ‘남을 만큼’ 차려내는 것이 차이라 할 수 있었다. 신에서는 음식이 동이 날 정도로 ‘딱 맞추어’ 만들면 주인이 음식에 인색하다는 평을 받기 때문이었다.
승도는 접시를 여러 번 바꾸어가며 배를 채웠다. 음식의 이름을 모르는 승도가 손가락으로 음식을 가리키면 시비가 접시에 음식을 적당히 담아 가져다주었다.
음료 역시 서역에서 들어온 포도주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가 구비되어 있어 입이 심심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식사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탕전병해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한 조리법에 대한 견문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고, 그 풍미가 미각을 즐겁게 해주었다.
식도락이야말로 입고 자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신국 사람들의 철학에 걸맞은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자 남강문은 시비 몇을 불러 ‘공자님’을 모시라고 말했다. 소위 말하는 ‘목욕 시중’과 ‘침실 시중’을 말하는 눈치라 승도는 당혹감을 느꼈다. 목욕 시중이야 몇 번 받아본 적이 있었지만 침실 시중은 전혀 달랐다.
황제로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살다 죽은 몸이라 ‘색(色)’에 담백한 생을 살고 있던 그에게 가장 거리감이 있던 것이 바로 침실 시중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가 있었는데, 남강문은 승도가 ‘체면’ 때문에 고사하는 줄 알고 몇 번이나 강권했다.
그때마다 승도가 정색을 하며 말했고 그제야 남강문은 정말로 손님이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강문이 사과 아닌 사과를 건네자 승도는 침향이나 피워줄 것을 부탁했다.
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승도는 정씨를 불러 아무도 방에 들이지 말 것을 단단히 일렀다. 비로소 고요한 기분 속에 침상에 앉은 승도는 상경까지의 긴 일과를 정리하며 유하가 건네준 비단을 꺼냈다.
***
비단 위에는 유하가 공들여 쓴 글씨가 한 획 한 획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의 성품이 느껴지는 글씨를 쓸어보던 승도의 눈이 글자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공자님.
언젠가 공자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셨어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옵니다.
저는 그 답을 알지 못했지만 공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앞날을 내다보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하셨습니다.
소녀는 그 말씀대로 고민해 보았습니다.
만약 소녀가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을 꾼다면, 그리하여 그 꿈을 현실로 가져온다면 그것이 과연 공자님의 앞날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모자란 소녀는 결코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도 없고, 배경도 없으며, 학문도 짧은 소녀가 공자님의 도움이 되는 것이 어찌 쉽겠사옵니까?』
승도는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유하의 대답은 이미 비단에 확고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여 소녀는 생각하였습니다.
공자님께서 미련을 갖지 않으실 선택을 말이옵니다.
공자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저는 대부인 마님을 뵙고 제 결정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소녀가 야속하시겠지요?
하지만 소녀는 공자님께서 혼사를 입에 담으셨을 때부터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사옵니다.
그리해야만 대부인께 받은 은혜를 보답할 수 있다 여겼사옵니다.』
승도는 거기까지 읽었을 때 유하가 할 말을 짐작했다. 어쩌면 승도 자신은 유하의 대답을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내리기 어려운 고민을 유하에게 떠넘긴 꼴인지도 모르겠다.
승도는 침상에서 일어나 방 안을 오갔다. 그녀의 결정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유하 본인의 뜻이 확고한 이상 그것을 바꿀 수는 없었다. 아마 본가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유하가 모습을 감추었을 것이다.
승도는 답답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방문을 열었다. 정씨가 이제 나오셔도 되냐고 묻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씨를 뒤로하고 복도를 걸어 내려왔다.
마침 둥근 달이 떠올라 조당 안을 비추고 있었다. 승도는 달을 쫓아 시선을 옮겨갔다. 눈부신 달빛을 받다보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월야(月夜)의 고독을 곱씹으며 떠나간 사랑의 비통함을 노래한 천재 음악가가 지은 광상곡(狂想曲).
한때는 그저 정신 나간 음악가의 연주라 여겼던 그 가사가 지금에 와서야 머릿속을 꽉 채웠다.
바로 그 음악가의 심경이 자신의 심경과 같은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다를진대, 어찌 그의 심경과 자신이 같다고 할까. 그저 달을 보고 슬픔을 나눈 동류라면 모를까.
하지만 실연의 아픔을 노래한 음악가와 승도 자신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다. 음악가는 슬픔을 음악으로 달랬지만 그의 심경을 달래줄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잃음. 전생에서 수없이 반복했음에도 익숙해질 수 없는 이 착잡함은 언제나 기억 저편으로 밀어낼 수 있을까?
승도는 가만히 뜰에 선 채로 복잡한 심경을 녹여냈다.
***
유하의 비단 편지 때문에 씁쓸한 마음으로 밤을 보낸 승도에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왔다. 임경문과의 접견 약속이 잡혔다는 것이었다.
그는 상경에 거주하는 외국인 의사에게 지병인 두통을 치료받기 위해 양주 부 관청을 나서는 길에 승도를 만나주기로 했다.
임경문이 치료를 받는 곳은 상경 유일의 외국인 치료 기관이나 다름없는 ‘상경 광혜원’으로 로망스 출신의 선교사 로잔띠끄 수사가 치료를 전담하고 있었다.
광혜원은 진료비가 싸고 타 의원에 비해 생존율이 높다고 명성이 자자하여 평상시에도 환자들이 잔뜩 모여들어 있었다.
승도는 환자가 아닌 터라 대기 순번표를 뽑는 대신, 보호자의 패찰을 걸고 광혜원에 들어섰다.
그러자 먼저 눈에 띈 것은 깨끗한 백의를 걸친 의원들이었다. 승도는 서역에서 살 때도 그런 광경을 본 기억이 없던 터라 적지 않게 놀랐다. 그것은 당연했다. 백의를 입는 것이 보편화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의사들의 복장이 정립된 것은 1804년 연합왕국 해군 장관 로우 경이 통과시킨 ‘해군 군의관 지위에 관한 포고’가 계기였는데, 이를 계기로 일반 의사들도 백의를 걸치기 시작했다. 그 영향은 선교사들도 받아 1811년부터는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병원에서도 백의를 걸치도록 하였으며, 1812년에는 교황의 칙령에 따라 종교 단체의 병원에서도 백의를 걸치도록 강제되었다.
이에 따라 광혜원도 1813년부터 백의를 입게 되었으니, 승도가 본 백의의 역사도 사실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백의를 걸친 의원들 뒤로 붉은 관복을 입은 관리 몇 사람이 얼핏 보였다. 그제야 승도는 바로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리들 주변에는 수행인으로 보이는 병졸 몇이 서 있었지만 흠차대신의 행차치고는 단출했다. 어쩌면 임경문은 서역인의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가능하면 숨기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승도는 관리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흠차대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야 파란 눈의 선교사가 방을 나오고, 뒤따라 흠차대신이 밖으로 나섰다.
처음 모습을 보인 흠차대신은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외모의 늙은이였다. 몸에 걸친 검은 관복과 관모가 아니었다면 그가 흠차대신이라는 것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라 승도는 잠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 척 단구에 볼품없는 체격, 자글자글한 주름살, 햇볕에 그을린 까만 피부. 모두 흠차대신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은 풍모였다. 하지만 그 눈. 강렬한 태양을 품은 눈만은 달랐다.
임경문이 마루에서 신발을 신고 내려서자 승도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엄밀히 말해 일개 상인이 흠차대신의 수행 관리들을 제치고 앞서 인사를 올리는 것은 상당한 무례였으나, 승도의 신분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승도는 황제로부터 벼슬을 받은 정7품의 관리였는데, 이 벼슬은 지방 직이 아니라 중앙 직의 품계였다. 대개 지방에서 받는 품계는 아무리 높은 벼슬이라도 그 값어치가 깎여서 평가되게 마련인데, 중앙에서 받는 품계는 그와 반대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중앙 직의 정7품 품계라면 지방에서는 정5품 이상으로 대접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거기에 천하제일 거상 오유도가 가진 정2품의 품계, 오씨 가문이 가진 거대한 재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지방 관료들을 제치고 먼저 인사를 올릴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임경문은 뜻밖에 불쑥 나타난 젊은이가 인사를 올리는 것에 눈을 크게 떴다가 자신에게 접견을 신청한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환자들이 있는 마당에서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선교사가 머무는 별채를 빌렸다. 상석에는 임경문이 앉고 그 바로 우측에 승도가 앉았다.
정식으로 승도가 자신의 출신과 이름 등을 밝히자 임경문은 웃음을 지으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자네가 강주 오씨 가문의 오승도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대인.”
승도가 자세를 바로하고 인사를 올리자 임경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내게 접견을 신청했던데 무슨 연유인가? 나는 이제 북경으로 송환될 처지라 청탁을 받아줄 처지도 아니네만.”
“대인을 모시고 북경으로 가기 위함입니다.”
“나와 함께 북경으로 간다? 내 알기론 자네는 이번에 처음 벼슬자리를 받은 것으로 아네만, 나와 함께 북경으로 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임경문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승도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른의 당파로 간주될 수도 있는 일입지요.”
“상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겐가?”
임경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승도는 자세를 바로 하고 답했다.
“맞습니다. 저는 상인입니다.”
“한데 상인이 왜 불필요한 위험을 무릅쓰려는 건가?”
“관직은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관직이 아무 의미가 없다? 대단하군. 젊은 혈기라면 공명에 눈이 멀 법도 한데, 벼슬자리를 마다하다니.”
임경문은 승도를 시험하듯 툭 던졌다. 그 한마디를 듣고도 승도는 표정의 변화를 내비치지 않았다. 어쩌면 어젯밤 유하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며 내면을 차갑고 단단하게 만든 탓이 아닐까.
승도는 쓰게 웃으며 임경문의 물음에 답했다.
“재물을 가진 상인에게 벼슬자리는 앵속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공명을 탐하다보면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게 되고, 이미 가진 것도 잃게 됩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저로서는 벼슬자리에 연연할 필요가 없을 수밖에요.”
“상인보다는 관리가 나은 것이 사실이 아닌가?”
“물론 낫다고 할 수도 있사오나 불안정한 것도 사실입니다. 권력은 십년을 성하기 어려우나, 금력은 백년을 성하게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위험한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나? 하나 그런 것치고는 지금까지 자네가 보인 행보는 그 말과 전혀 다르다네. 알고 있는가?”
임경문은 승도의 내심을 뚫어본다는 듯 다시 한마디를 던져왔다. 그 말에 승도는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공명심. 황제로서 가졌던 야심이 그 영혼의 기저에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상인이라 선을 그었다면 연합왕국과 일전을 벌이지 않았을 터.
하지만 그런 생각을 조정의 대신 앞에서 긍정할 필요는 없다.
“말씀대로 저는 그런 행보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문을 지키기 위한 상인의 행보일 뿐입니다.”
“상인의 행보라. 그 말도 틀리진 않으나, 이런 생각도 든다네. 이 시대에 누가 있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자들을 모아 홍모귀들을 간단히 물리칠 수 있을지. 그런 재능을 가진 자가 일개 상인이라면 이 나라의 장수들은 모두 목을 매달아야겠지.”
임경문은 그리 말하며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그는 한 모금을 길게 빨아들인 후에 다시 한마디를 꺼냈다.
“정녕 관직에 뜻이 없는 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애석하군. 양이들이 강성한 시대에 재능이 있는 이가 관문에 뜻이 없다니. 하나 이 또한 신의 운세가 거기까지라는 말이겠지.”
흠차대신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지독히 염세적인 말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지식인들 모두가 신제국의 흥망에 대해 비관론을 쏟아내고 있으니 그리 놀랄 만한 말은 아니다. 이 자리에 동석한 관료들은 모두 임경문의 심복들이니 말을 함부로 옮길 리가 없다고 믿기에 할 만한 말이다. 염려가 된다면 승도가 말을 옮기는 정도인데, 상인이 이문이 안 되는 일을 할 이유가 없으니 임경문이 말을 아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운세라 하심은.”
“신이 비록 대국이라 하나 그 빛이 꺾인 지 벌써 반백년이 지났네. 끝없는 팽창의 시대는 가고 제국은 현실에 안주한 채로 곪아 들어간 지 오래. 황실은 의욕을 잃었고 백성은 불만에 찼으며 관리는 탐욕스럽다. 외적은 강하고 기강은 무너졌으니 신의 운세가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 흠차대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의아스러운가?”
“그렇습니다.”
“현실이 그러하니 흠차대신이 아니라 아문의 장이라도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네. 뭐 그런 쓸데없는 흰소리는 그만하기로 하지. 자네 생각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는가? 나와 동행하는 것 말일세.”
“그렇습니다, 대인.”
“나는 젊은이의 앞길을 막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네. 하나 자네가 원한다면 막을 생각은 없지. 내일 북경으로 함께 출발하도록 함세.”
임경문은 쓴웃음을 지으며 승낙의 뜻을 던졌다. 그에 승도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