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각오 (4)
임경문은 시간을 지켰다. 흠차대신의 행차치고는 단출한 준비를 하고 나온 터라 수행인의 수도 몇 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승도는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패한 관료들은 외견으로 보이는 위세야말로 그 자신의 품격이라 여겨 황제의 행차도 부럽지 않은 거창한 준비를 하곤 하였는데, 임경문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차 안에 몸을 싣는 임경문을 배웅하기 위해 수십 명의 관리와 수백 명의 지방 명사들이 몰려나와 길가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따금 백성들의 ‘칭송’이 뒤섞여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 정도로 마차 주변은 시끌벅적했다.
임경문 자신은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을 껄끄럽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찬사를 들을 이유가 없다며 손사래부터 쳤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거인이 보이는 겸양이었다.
모두가 부패한 시대에 관료에게 요구되는 품목을 지키며 제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만에 하나는 될 것인가? 그마저 장담하긴 쉽지 않을 터였다.
임경문이 마차에 오르자 ‘대인’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임경문이 양강 총독으로 돌아오기를 간청했다.
때로는 원리원칙을 융통성 없이 밀어붙여 세인들의 욕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임경문을 사랑했다.
임경문은 자신을 바라보는 관료며 지방 명사들과 일일이 눈인사를 나누고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하자 임경문은 창에 내밀었던 고개를 거두었다. 비로소 임경문과 시선이 마주하자 오승도는 웃음을 보였다.
“대인께서 덕을 베푸심에 있어 활불과 같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신 듯합니다.”
“허명이지, 허명이야. 관리가 관리의 일을 했을 뿐인데 칭찬을 받음은 그만큼 나라가 썩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임경문은 혀를 끌끌 찼다. 임경문이 하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승도도 잘 알고 있었다. 고도의 개인주의, 합리주의가 발달한 서역에서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특별히 칭찬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는 의무를 넘어선 그 무엇을 해냈을 때다. 그곳에서는 도리어 제 의무도 다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을 죄악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그 말씀은 알 것 같습니다.”
“견문이 넓은가 보군. 젊은 친구가.”
“서역 상인들이 드나드는 강주에 있으니 천하의 견문을 앎에 있어 그보다 좋은 곳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틀리지 않군. 강주야말로 천하의 흐름을 알기에 가장 좋은 곳이지.”
승도는 문득 임경문의 견문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대인. 서역에서는 상류층에게 보다 많은 권리를 주는 대신, 그만큼 많은 의무를 지우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 관습에 따라 서역 상류층의 자제들은 어린 나이부터 군문에 들어 전장을 누비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이야기는 일전에 들어본 기억이 있네. 그 말을 들었을 때 오랑캐라 비웃던 양이들이 도리어 우리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었지. 어쩌면 도리어 성현의 말씀에 보다 더 충실한 것은 그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네. 자국의 백성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을 궁극의 치세라 본다면 그것을 구현한 것은 신이 아니라 양이들이지.”
임경문은 상당히 시니컬한 태도로 신과 서역을 비교했다. 관료로서는 쉽게 보이기 어려운 파격. 하지만 양강 총독이라는, 서역과 신을 비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거인에게는 도리어 그 말이 파격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서역이 궁극의 치세를 펼친다니. 뜻밖의 말씀입니다.”
“양이들의 장점을 인정하고 아국의 단점을 볼 때에야 비로소 고쳐나갈 점이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하옵니다.”
“내 서역에 대한 식견은 그리 깊지 않으나 몇 가지는 정확히 알고 있네. 뱃길로 7만 리나 떨어진 연합왕국이란 서역 양이들의 힘이 실은 우리 신을 침탈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말일세.”
“관직에 계신 분께서 양이를 그리 높게 보시는 것입니까?”
승도의 말에 임경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대가 직접 보고도 묻는 것을 보니 나를 시험하는 것 같군. 서역의 군선 한 척이면 우리 제국 수군 군선 수백 척을 모아도 당적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니, 그들이 기천의 군세에 군함 몇 척만 몰고 와도 우리 제국이 위험에 처하는 것은 불 보듯 적나라한 현실이 아니던가?”
승도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자 임경문은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양강 총독으로 재임하며 해안의 방비 강화에 힘을 쏟았다네. 아문의 봉화도 내가 손을 보았고 염화 포대에도 새로 대포를 몇 문 내려 보냈지. 녹기군도 손을 보아 동원 시간을 단축하고 지휘관도 몇 갈아치웠네. 하나 그래봐야 약졸은 약졸. 드러난 현실은 결국 바뀌지 않았네.”
“대인께서 미리 군사에 손을 쓰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헛일이었지. 하나 장차 이 나라가 양이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불문가지. 아편의 해독이 제국을 뒤덮으면 황상께서도 더는 눈을 감고 계시지는 못할 것이네. 그리된다면 어찌되겠는가?”
임경문의 말에 승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문을 탐하는 양이들과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네. 그래서 그 전에 제국의 국방을 다져둘 필요가 있었지. 어제 로망스 선교사가 운영하는 광혜원을 둘러본 기억이 나는가?”
“기억이 납니다.”
“비록 비루하나 이 임경문이 흠차대신 겸 양강 총독의 직분을 가진 대신임에도 서역인의 치료소를 들른 연유가 궁금하지 않던가?”
“사실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승도는 그 부분이 미심쩍던 참이었다. 임경문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양이의 의술이 탁월하다 하더라도 세인의 눈을 의식한다면 그곳을 방문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일세.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로망스와의 연수일세.”
“로망스와의 연수라면 그들과 손을 잡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승도는 의외의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상인으로서 개방된 사고를 가진 자들조차 양이들과 손을 잡는다는 생각은 쉬이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제국 관료의 정점인 임경문이 그런 발상을 하다니. 확실히 양강 총독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다운 정세 판단이었다.
“북경에 가면 황제 폐하께 그리 주청을 올릴 생각이네. 연합왕국이라 불리는 홍모귀들의 폐해는 이미 아편 하나만으로도 그 해악이 극에 달했으니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하는 방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하오나 로망스는.”
“잘 알고 있네. 공화국이라지?”
승도는 씁쓸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자신, 필립 아우구스트 퐁퓌르의 목을 자르고 복원된 왕정은 겨우 10여 년을 버티지 못하고 도로 붕괴되었다.
그리고 다시 세워진 것이 로망스 제2공화국. 국민의 뜻을 받들고 탐욕스런 귀족과 왕가의 통치를 재현하지 않겠다는 이상으로 세웠던 공화국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물론 그것을 무너뜨린 것도 자신이었지만.
“공화정이 제정을 표방하고 있는 아국과 대화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니 될 것은 무에 있겠나? 아편을 팔아 치우는 금수 같은 홍모귀들과도 거래를 하는 아국이 아니던가?”
임경문의 직설적인 말에 승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몰라서 해본 소리는 당연히 아니었다. 관료로서 임경문이 견지하고 있을 최소한의 입장을 고려하여 적당히 돌아가는 말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하여 로망스와 연수한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로망스 공화국이 서역에서 두 번째 가는 강국이라 하니 그들과 아국이 손을 잡는다면 홍모귀들을 어찌 당적하지 못하겠는가?”
승도는 임경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역시 제국에 앉은 관료가 가질 수 있는 정보의 폭은 제한적이었다. 승도가 서역에 살던 시절만 하더라도 연합왕국은 로망스가 손을 대기 힘든 강국이었다. 그 압도적인 해군력을 생각한다면 로망스가 도움이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물며 지금의 연합왕국은 곧 세계라 칭해도 과언이 아닌 이 시대의 패권국이다. 로망스 하나와 손을 잡는다고 상대가 가능할 수준이었다면 신대륙 독립 전쟁 때 연합왕국은 패배했을 것이다.
“로망스 공화국의 국력을 알고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자네는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대인께서 알고 계신 것보다는 조금 더 견문을 갖고 있습니다. 로망스 공화국은 현재 석탄 생산 능력이 연합왕국의 10분의 일, 철강 생산 능력은 5분의 1에 불과합니다. 에우로페 유수의 강국들을 모두 합쳐도 연합왕국 하나의 국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나이다.”
“홍모귀들이 그리 강성하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 해군은 강하여 5대양을 지배하기에 족하고 그 식민제국은 여섯 대륙에 걸쳐 있습니다. 아국의 국력은 연합왕국의 터럭에도 미치기 어려울 것이니 그 강함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허. 인구 3억이 넘는 대국이 그 국력의 터럭도 되지 않는단 말인가?”
임경문은 생각한 것보다 거대한 연합왕국의 국력 이야기에 조금 당황한 듯했다.
물론 그가 아는 것만으로도 연합왕국은 충분히 강한 나라였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연합왕국은 신과 비교하는 자체가 미안한 초강대국이다.
그 육지 면적은 3,700만 제곱킬로미터를 상회하였고, 5대양에 걸쳐 막대한 숫자의 섬들을 점하고 있었으며, 그 공업 능력은 여타 국가들을 모두 합친 것을 능가하였다.
그들의 경제력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였는데, 신대륙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 힘입어 연간 4% 이상의 경제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체되거나 0.5% 내외의 경제 성장률을 보이는 여타 국가들과 차원이 다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격차는 해마다 급속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신대륙과 남방 대륙의 무한한 자원, 힌디아 대륙의 거대한 시장, 독점이나 다름없는 동방 무역의 이익 등이 더해져 그 자본 축적 속도를 배가시키고 있었다.
철도의 건설 역시 선구자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신대륙과 연합왕국 본토에 건설된 철도의 총연장만 벌써 1만 9천 킬로미터를 넘어설 정도. 이미 연합왕국은 산업 혁명의 제1단계를 거의 마무리 짓고 있는 상태였다.
승도의 이야기가 끝나자 임경문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승도도 서역 상인들을 통해 풍월로 들은 이야기라 이것이 정확한 이야기인지 보증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입을 모아 그렇다고 하니 ‘대강’은 그럴 것이라 짐작할 수는 있었다.
어차피 서역으로부터 들어오는 이야기란 것이 모두 입으로 전해지는 것들이다. 신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양인이 서역 신문사의 신문을 돈을 주고 구독한다는 것부터 쉽지 않다.
“홍모귀들이 그리 강하다면 더욱 로망스와 손을 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홍모귀들은 탐욕스러워 제 이익이 침해받는다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전쟁을 거는 자들입니다. 로망스와 손을 잡는다는 말은 저들의 이익에 도전한다는 말로 이해할 터이니, 그것은 저들에게 선전포고와 같은 말일 것입니다.”
“허. 호랑이를 앞에 두고 그를 자극할 것이 두려워 칼도 잡지 말란 소리가 아닌가.”
“현실이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으로는 이 난국을 어찌 해결해야 하겠는가?”
“전쟁으로는 승산이 없으니 경제적으로 힘을 길러야 합니다.”
“경제로 힘을 기른다?”
“서역에서는 보호 무역이라 하여 자국의 산업은 보호하고 외국의 산업에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수출은 장려하고 수입은 억제하여 자국 상업이 클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이지요.”
“그것이 홍모귀를 상대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임경문의 물음에 승도가 눈을 빛내며 답했다.
“돈입니다.”
“돈?”
임경문은 상업으로 홍모귀를 대적한다는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였다. 그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 관료들의 고정 관념 때문에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돈만 있다면 강군을 기를 수 있습니다. 강한 군대가 있다면 능히 양이를 대적할 수 있으니 결국 모든 문제의 근원은 돈입니다.”
“하나 천하의 근간은 농업이 아니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 조그만 섬나라 연합왕국이 어찌하여 저리 강성해졌는지 아십니까? 상업입니다. 양털을 가공하여 팔아 그 부를 불려 저리 강성해진 것입니다.”
“농업이 아니라 상업이 강국의 초석이 된단 말인가?”
“그러합니다.”
“그대의 말이 옳다 하더라도 이 나라에서 그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네.”
임경문의 말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홍모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길 수 없다. 그 말은 틀리지 않네. 하나 서역도 아국을 정복할 수는 없네. 그렇지 않은가?”
“아직까진 그렇습니다.”
승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래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하루가 다르고 서역의 발전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미 승도가 살던 시대에는 없던 쾌속 범선이 등장하여 서역과 신의 상대적 거리를 50%나 단축한 세상이다. 장차 또 어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여 그 거리를 좁힐지 누구도 예단할 수 없다.
그리하여 서역과 신의 상대적인 거리가 좁혀진다면, 지금의 불안한 관계도 끝장날 수밖에 없다.
승도는 흠차대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 나라의 ‘개혁가’라 불리는 이도 무엇을 바꿀 힘이 없다는 사실만을 절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