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0화 (30/425)

제30화. 진압 (2)

정주를 타격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반란군의 세는 눈에 띄게 감소했다. 금방이라도 상경까지 짓쳐 내려올 것만 같던 마석기의 십이만 대군은 짧은 시간 동안 반으로 쪼그라들었다.

변주로 회군할 때까지만 해도 그 힘을 유지하고 있던 천지회의 군세였지만, 정주 부가 초토화되고 보급이 사실상 마비되었다는 것을 안 순간 그 조직이 붕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뇌부가 동요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애초에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천지회의 적극적 가담자라 볼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대세에 따라, 혹은 한몫 챙기기 위해, 배를 곯지 않기 위해, 여자를 얻기 위해 천지회의 군세에 몸을 담은 자들이었다.

저마다의 욕망을 위해 참가한 자들에게 보급도 주지 못하는 군대가 탐심을 채워줄 리 없다. 그러니 군세가 날마다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겨우 며칠 사이 군세가 빠른 속도로 쪼그라들면서 천지회 내부에서는 책임을 놓고 논란이 이어졌다. 정주 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주인문 책임론’과 승산 없는 반란을 일으킨 마석기가 문제라는 ‘마석기 책임론’이 그것이었다.

두 세력의 대립으로 가뜩이나 약화되던 천지회의 사정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천지회가 쇠퇴의 길을 밟는 동안, 제국군은 그 세를 불려나가고 있었다.

승도의 승리에 고무된 녹기와 지방의 단련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이천 남짓한 숫자밖에 없던 제국 측 전력은 어느덧 1만을 넘어섰다.

쌍방의 명암이 이렇게 갈리자 승도는 대담하게도 정주 부 근처로 군세를 다시 남진시켰다.

이 때문에 천지회는 울며 겨자 먹기로 변주에 늘어져 있던 군대를 정주까지 이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탈영이 일어나 천지회의 군세는 변주에 있던 시절의 사분의 일 수준인 만 오천까지 떨어졌다.

승도는 이곳에서 반란군에 회전(會戰)을 허락하는 대신, 다시 정주 북쪽으로 후퇴해 버렸다. 결정적인 전투 한 번을 벌여 떨어진 기세를 만회하려던 천지회로서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쫓아가다간 그나마 남은 군세조차 공중 분해될 위험이 있었다.

승도가 반란군을 제 뜻대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그 힘을 빼놓는 동안, 조정도 손을 놓고 놀지만은 않았다. 그들도 중원의 물류가 지나가는 대동맥을 언제까지 무법천지의 상태로 방치할 수도 없던 터라, 군기대신 기영이 지휘하는 일만의 중앙군을 출동시켰다.

이 중앙군은 제국에서 보기 드물게 완전편제를 갖춘, 황실의 어림 군을 포함한 제국군의 최정예였다.

물론 껍데기만 그럴싸할 뿐 실 전력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의장 부대로 쓰이는 자들이라 전투력은 크게 기대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병력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차피 기세를 꺾어둔 반군을 위압하기 위해서는 머릿수가 필요했는데, 그 심리적 압박은 전투력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할 수 있었다.

군기대신 기영은 승도와 각지의 장수들에게 서신을 보내 지휘체계를 구축했다. 이렇게 전열을 갖춘 제국의 위협을 받게 된 천지회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쾅!

“빌어먹을.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우리는 상경을 접수하고 대업을 성취하겠다고 말할 힘이 있었소. 그런데 이게 뭐요?”

마석기가 울분을 터트리며 제자리에서 일갈하자 몇몇이 따가운 소리를 내뱉었다.

“그게 어디 마 지회장의 생각대로 된답니까? 신의 군대를 너무 얕잡아보고 거병한 것이 실수지요.”

“맞습니다. 지금이라도 조직을 흩어 형제들을 피신시킬 방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주인문을 대신해 입을 여는 자들의 모습에 마석기의 분통이 터졌다.

“허, 지금 피신할 방책이라 하셨소? 군마를 흩었다 황련교 꼴이 난다는 걸 몰라서 하시는 소리요?”

“언제는 우리가 관에 쫓기지 않은 적이 있소? 지난 백수십 년을 버텨온 방식이 마 지회장의 방식보단 훨씬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오만.”

“뭐요?”

마석기가 격분해 칼을 뽑으려 들자 주인문 편의 지회장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마석기 편의 참석자들도 칼을 뽑았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만 같은 흉흉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양측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랬다면 벌써 며칠 전에 사달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천지회 내부에 봉합할 수 없는 분열이 발생했다는 사실 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자자, 진정들 하십시다. 마 지회장. 앉으세요.”

주인문이 중재에 나서고서야 가까스로 지회장들이 제자리에 앉았다. 마석기도 제 부하들에게 칼을 집어넣을 것을 명령했다.

당장 제 코가 석 자인 천지회의 수뇌부가 이 지경이다 보니 전투에서 이겨본들 앞날은 어두컴컴했다.

“일단 진정하고 이 위기를 넘길 방법부터 강구합시다. 어떻소?”

“하지만 회주님, 이건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남북으로 압박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무슨 수로 이 위기를 벗어난단 말입니까?”

주인문이 끄응 소리를 냈다.

“교병계(驕兵計: 적을 교만하게 만드는 술책).”

그때 마석기가 씹어 내뱉듯 한마디를 던졌다. 그 한마디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확실히 이 자리에서 그나마 전략이라도 세워볼 수 있는 자는 마석기가 유일했다. 그 말에 주인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해보시오, 마 지회장.”

“우리 적은 크게 셋으로 볼 수 있소. 북쪽과 동쪽, 남쪽의 적. 이 중 북쪽의 적은 우리와의 전투를 철저히 피하며 우리를 농락하는 자들로 그 심계가 간단치 않은 적이라 할 수 있소. 하나 동쪽과 남쪽의 적은 다르오. 동쪽에 흩어진 것들이야 한 줌 병력들로 이뤄진 단련과 녹기들이니 기세를 타지 않으면 덤벼들지 못할 것들이요. 중요한 건 남쪽인데, 이 방면엔 제국 중앙군이 있소. 황실에서 나온 군기대신 기영이 수장인데, 기영은 내가 군문에 있을 적에 부정부패로 악명을 떨친 자요. 군략은 말할 것도 없이 형편없는 인물이니 이자를 교병계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한 가닥 희망은 있소.”

“그게 쉽겠소?”

“쉽지 않아도 해야 하외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자리에서 고사당할 수밖에 없소. 교병계로 남쪽의 기영을 교만케 만든 다음, 전력으로 그자를 쳐서 남쪽의 적을 쳐 없애야 하오.”

“북쪽의 적이 불구경을 할 것 같소?”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요.”

“마 지회장은 적을 너무 간단히 보는 것이 아니요?”

“북쪽 적의 병략을 높이 보기에 허허실실의 계를 생각했소. 이 방법 외에 달리 무슨 수가 있겠소? 전 병력을 동원하지 않고는 기영을 단 시간 내에 격파할 방법이 없소이다.”

“으음.”

다른 지회장들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냥 반대만 하기에는 작금의 위기가 너무 컸다. 달아나든 대업을 노리든 일단 포위부터 끝내야 무얼 할 수 있었다. 침묵 끝에 지회장 하나가 손을 들었다.

“하면 병권(兵權)을 쪼개주시오. 마 지회장의 통솔 능력을 마냥 신뢰할 수 없어서요.”

“뭐요?”

“아니 그렇지 않소이까. 마 지회장은 십만 대군을 갖고 한 줌의 적을 놓쳐 그 전력을 팔분의 일로 줄인 장수요. 옛 국법대로라면 이미 능지처참을 당해도 시원찮은 패전지장임을 모르시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하자 주인문이 인상을 썼다. 그 눈빛에 주인문 측 지지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주인문은 애써 표정을 펴며 마석기에게 말했다.

“마 지회장에게 전권을 양보하겠소. 그러니 기영을 치는 일을 해내 주시오.”

“그리하지요.”

마석기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막사를 나가 버렸다.

***

군기대신 기영은 마석기가 말한 것처럼 무능함의 극을 달리는 인물이었다.

황실의 인척이자 고귀한 귀족 혈통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고위직에 오를 능력도 없었을, 그저 그런 사내였다.

그가 잘 하는 것이라곤 말과 여자를 타는 것. 부하들의 공을 가로채는 일이다.

이번 토벌도 그랬다. 돌아가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면 없던 병이 생겨서라도 제 저택에 처박혀 있었을 것인데, 승도가 거의 반란군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을 알자 일세의 명장이라도 된 양 어전에 나서 군마를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 재능은 기영의 욕심을 받쳐줄 수 없었다. 병졸 하나도 제대로 지휘해 본 경험이 없다보니 군대는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진창의 상태였다. 가장 단순한 행군 하나를 실행하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사정이 이러니 기영의 무리를 군대라 할지, 우연히 모인 자들의 집단이라 할지 모를 지경이다.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 것은 어림군의 장수들이다. 부정부패가 생활화된 이들은 전쟁을 한몫 단단히 챙길 기회로 여겼다. 보급품이 도착하면 제일 먼저 양곡부터 착복한 다음, 상인들에게 뒷거래로 팔아치우는 것이 이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기영의 군대는 반란 진압에 나서기도 전에 굶주리고 있었다. 이것이 제국군 최정예 중앙군이란 작자들의 현실이었다.

꼴이 이렇다 보니 처음부터 전투를 벌일 능력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기영의 군대는 물산이 풍부한 성시에 진주한 채로 그저 시간만 축낼 뿐이었다.

하지만 거저 공이 들어오는 것 같은 기회가 찾아왔을 때는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마석기가 바로 이 점을 찔렀다.

천지회는 고의로 자신들의 계획을 관군 포로들에게 소문의 형태로 흘린 후, 적당한 기회를 보아 덜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그들이 탈출할 틈을 만들어 주었다.

당연히 관군 포로들은 이 기회를 보아 탈주했다.

탈주한 포로들로부터 정보를 얻은 기영은 당연히 ‘멋진 계략’을 세워 마석기를 박살내고 전공을 독식하고 싶은 욕망에 빠졌다.

멍청한 지휘관일수록 ‘한 방’에 대한 욕망이 큰 만큼, 기영은 일격에 적을 박살내고 총리아문의 수장이 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멋진 미래까지 그린 이상 기영은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당장에 천지회의 역도들을 도륙할 욕심에 기영의 군대는 안전한 변주 부를 벗어나 정주 남쪽까지 북상했다. 마석기의 군대가 반드시 통과할 좁은 호리병 구조의 길을 선점하고 그 계곡에 매복하려는 속셈에서였다.

작전만 놓고 보면 틀린 선택은 아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적이 모를 때의 일이었다.

당연히 일을 꾸민 마석기는 제국군의 이동을 손에 읽듯 뻔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관군이 계곡으로 들어가 매복을 하자 마석기는 기다렸다는 듯 계곡의 앞뒤로 군대를 보내 관군을 가두어 버렸다.

이런 이유에서 입구가 좁은 지형에 들어설 때는 매복에 유의해야 했다. 들어오는 적을 막기는 쉽지만, 반대로 자신이 나가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기영은 꼼짝없이 계곡에 갇혔다. 가뜩이나 허약한 그의 군대는 포위를 당하자마자 절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며칠만 흐르면 기영의 중앙군은 그대로 공중 분해될지도 몰랐다.

마석기는 기영의 군대가 서신을 보낼 틈도 주지 않고 물샐틈없는 포위를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정주 부에는 자신들의 깃발을 그대로 올려두어 주위의 적들을 기만하려 들었다. 하지만 마석기의 불운은 그 상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단수가 높은 자라는 데 있었다.

“평정사 대인. 천지회는 여전히 정주 부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정보가 확실한가?”

“마석기와 주인문 등 천지회 수장들의 깃발이 모두 걸려 있습니다. 근처 단련들이나 녹기들이 제자리를 지키는 것만 봐도 역도들이 제 위치에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성벽에 서 있는 병졸들은 살폈나?”

“평소보다 수는 적어보이나,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피로해하는 기색은?”

승도가 꼼꼼하게 물어오자 척후를 맡았던 단련 병사가 머리를 긁적였다.

“멀리서 보아 그것까진 확실치 않습니다.”

“흠. 일단 알겠으니 물러가시오.”

승도는 탐문 정보를 가져온 자를 물리고 생각에 잠겼다. 적이 움직일 여지가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이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 자체가 수상했다. 앉은 자리에서 버티고 있어 봐야 파멸밖에 없다는 걸 생각하면 뭔가 행동이 있어야 정상이다.

물론 겁을 먹고 움츠려 있을 수도 있겠지만, 경우의 수는 꼼꼼하게 따져봐야 했다.

‘정주에 틀어박힌 적에게서 동향에 대한 정보를 더 탐문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군이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자연스레 도망병이 발생하는 천지회의 상황을 생각하면 탈주자와 군마의 이동을 확인하긴 어렵다. 군대가 빠져나간 것이 사실이라도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일전에 정주 부에 박힌 적을 탐문할 때는 경계하지 않는 적 사이로 탐보꾼을 보내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얻어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어찌하면 좋을까.’

머릿속에서 완성된 작전의 형태를 다듬어 순식간에 놀라운 계략을 만들어내는 승도였지만, 정보가 제한된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직감과 판단력이 그것을 보충해준다 하더라도 아무 때나 임기응변으로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불리한 상황이라면 몰라도 유리한 입장에서 도박을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일이 이렇다면 웬만한 지휘관들은 상황을 단정할 정보의 획득을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승도는 그런 부분에서는 집요한 면이 있었다. 사소한 단서 하나에서 결정적인 실마리가 나온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궁리 끝에 한 가지 철칙을 떠올렸다. 사실 전쟁에서 살펴야 할 것은 적뿐만이 아니다. 아군의 움직임을 살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더라도 적에게 각개격파의 기회를 제공할 뿐이었다.

‘아군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면 단서를 잡을 수 있을까.’

승도는 아군에 생각이 미쳤다. 실제로 그가 황제로서 대군을 지휘하던 제6차 반혁명 전쟁에서는 전투에 다 이겨놓고 패한 전례가 있었다.

바로 아군의 움직임을 놓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멍청하게 적을 놓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린 베르티에 원수 때문에 전장에 가세한 프리지아 군대에 전열이 무너진 끔찍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승도는 입술을 쥐어뜯었다.

‘기우일지 모르지만 혹시 단서가 나올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란 것이 있으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승도는 사람 하나를 불러 남쪽 변주 부로 가 기영의 군대에 대한 소식을 탐문하도록 했다. 멍청하고 엉덩이가 무거운 기영이 움직였을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전쟁에서 속단은 금물이었다.

주기적으로라도 아군의 소식을 알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 이 판단이 마석기의 도박을 끝장냈다.

불과 이틀 만에 남쪽으로부터 돌아온 사내는 기영의 군대가 정주 쪽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보고해왔다. 그 소식을 들은 승도는 기다릴 것도 없이 전군을 동원해 남쪽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승부는 이것으로 결정지어지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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