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진압 (3)
행군의 속도를 좌우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부대에 대한 지휘관의 통제 능력과 도로의 사정, 그리고 병사들의 체력이다.
승도는 이 모든 요소에서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짧은 시간에 구축한 확고한 상벌 체계와 적절한 배급으로 승도의 병사들은 제 부대를 이탈할 이유가 거의 해소되어 있었다. 딱딱하게 열과 오를 맞추도록 시키지 않아도 탈영의 염려가 없으니, 지휘관도 병사도 그만큼 피로감 없이 행군할 수 있었다. 거기에 정주 자체가 번화한 중원의 중심에 있어 행군에 쓸 수 있는 좋은 도로는 얼마든지 있었다.
무엇보다 정주 북쪽에서 놀고먹는 동안에도 군량을 아끼지 않고 배식을 한 덕분에 승도의 병사들은 영양 상태가 좋았다.
이 모든 점에 힘입어 승도의 군대는 무서운 속도로 정주 부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승도는 행군 도중에 부대의 선두에 서서 행군을 감독했다. 지휘관이 선두에 서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 일로 적의 공격에 노출될 위험이 있을 때는 해선 안 되는 행위였다.
하지만 승도는 황제 시절에도 자주 그렇게 했었다. 적시에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서라면 그 스스로가 한 사람의 정찰병이 되어 현장을 정확히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적극적인 성향의 지휘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병사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승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휘관이 몸소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을 아는 만큼 병사들도 그를 신뢰할 수 있어서였다.
이런 노력들로 승도는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게 유지한 채로 정주 부에 도착했다.
“전군 정렬하라.”
승도는 요란하게 북을 치며 좌우로 군대를 넓게 퍼트릴 것을 명령했다. 실제 전투에는 부적합했지만 군세를 크게 보이게 하는 데는 이만한 수법도 달리 없었다. 승도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포정사 대인. 부대 전개가 끝났습니다.”
단련 지휘관으로 협력 중인 이 대인의 보고에 승도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반 시진도 흐르기 전에 길게 늘어진 선형진이 완성되자 그 위세는 십만 대군이라 해도 기함할 정도로 대단했다. 기치창검을 늘어트린 거대한 군대가 일렬로 늘어서 정주를 감싸다시피 압박하는 형상이니 빈집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정주를 지키던 천지회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깃발 하나를 들 때마다 부대를 열 걸음씩 전진시켜 주시겠습니까?”
“깃발 하나에 열 걸음을 말입니까? 그게 무슨 효과라도?”
승도는 뒷짐을 지고 그리해줄 것을 요구했다. 곧 깃발이 펄럭일 때마다 승도의 군대는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매우 느린 속도로 성을 향해 나아가는 모양새였지만 수성군이 받는 압박은 보통 큰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함성을 지르며 몰려왔다면 화살이라도 몇 번 쏘아보는 시늉을 했을 터인데, 그것도 아니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자신의 상상력이다. 천천히 다가오는 적을 보면서 무참하게 무너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생각해봐라. 얼마나 무섭겠는가?
마침내 반군은 다가오는 군세의 압박을 못 이겨 무너지기 시작했다. 깃발과 무기를 두고 하나둘 던지고 달아나는 자들이 나왔다. 진이 거의 와해되는 것을 본 승도가 깃발 여러 개를 동시에 세웠다.
사실상 돌격하라는 명령이었다. 그것을 본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정주 부로 몰려갔다.
그것으로 내전은 끝이 났다.
***
‘하늘은 왜 이 마석기를 내리고 오승도를 내리셨습니까?’
전란이 끝나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이 이야기가 떠돌았다. 고사(古事)에 빗댄 말로 천지회 반란 진압에 누가 가장 큰 공을 세웠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했다.
최후의 한 수를 던졌던 천지회는 평정군이 정주 부를 재점령한 순간 마지막 희망을 잃고 와해되어 전투다운 전투도 제대로 벌이지 못하고 그대로 패망하고 말았다.
군 조직이 붕괴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면 좀 나았겠지만, 서로를 믿지 못할 만큼 갈등이 증폭된 상태에서는 그런 것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잔병(殘兵)이라도 제대로 통솔하여 달아나기를 꾀했다면 기영의 군대가 망신창이인 호기를 이용해 달아날 기회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 천지회는 그렇게 끝장났다.
거꾸로 기영은 기사회생했다. 승도가 없었다면 패자가 되었겠지만 그는 몹시 운이 좋았다. 좋은 아군을 만나는 것도 나름의 복이니 기영은 망할 팔자는 아니었던 셈이다. 기영은 군공을 얻기 위해 반란군을 추격하고 나섰다.
천지회의 수뇌부는 무너지는 군대에 뒤섞여 달아나려 했지만 승도가 그것을 손 놓고 구경하지만은 않았다. 승도는 반란군 수괴 한 명당 얼마의 은자와 밀을 포상금으로 내걸어 반군들이 스스로 제 수장들을 잡아 바치도록 유도했다. 그리하여 천지회의 군마가 무너진 지 사흘도 되지 않아 그 수뇌부는 단 한 사람도 승도의 덫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모조리 사로잡혔다.
그들을 대부분 잡아들인 것은 승도였지만 이에 대한 처결권은 결국 기영에게 있었다. 중앙의 말직을 가진 승도와 조정의 중신인 기영, 어느 쪽이 공을 차지할지는 처음부터 정해진 게임이나 다름없었다.
욕심이 목구멍까지 찬 기영은 승도가 잡아들인 포로를 몽땅 챙겼다. 알 만한 자들은 이를 두고 비웃었지만 기영은 충분히 얼굴 가죽이 두꺼워 비난을 능히 견딜 수 있었다.
기영은 곧장 이들을 정주 부로 압송하였다. 두릅 묶이듯 포승줄에 묶여 국청(鞫廳)에 끌려 나온 반군 수괴들에 대한 국문(鞠問)은 전적으로 그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는 제 앞에 끌려온 자들에 대해 잔혹한 형벌을 내렸다. 특히나 황실에 대해 도전한 행위에 대해서는 가혹한 벌을 내리는 것이 예부터 정해진 관례였다.
국청이 설치된 정주 부 관아의 상석에 앉은 기영은 준엄한 표정으로 역도들을 내려다보며 판결문을 읽었다. 그 모습은 실로 황실의 대신다운 풍모가 있었다.
하나 그 실상을 아는 자들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역도 주인문은 역적의 수장으로 그 죄가 매우 크다. 신의 천하를 부정하고 군세를 일으켜 위로는 천자께 대적하고, 아래로는 천하의 질서를 혼란케 하였으니, 그 죄는 그 육신을 찢어 살점을 씹어 마땅하다. 하여 죄인에게 능지처참(陵遲處斬: 사람을 수백, 수천 조각으로 토막 내어 죽이는 형벌)의 벌을 내린다. 그 고기를 씹어 만인은 그 같은 죄를 경계하라.”
능지처참은 실로 끔찍한 형벌로 역모의 수괴에 어울리는 형벌이라 할 수 있었다. 능지는 살점을 한 점 한 점 발라내어 그 고기를 만인이 씹게 하는 형벌이라, 이를 집행할 기술자의 솜씨에 따라 사람이 천 조각이 날 때까지 숨이 붙어 있기도 했다.
그러니 그 잔인함은 고금에 유래가 없다 할 수 있었다. 주인문은 그 형벌의 이름을 듣는 순간 얼굴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참수형을 당하면 당했지 능지처참이라니?
주인문이 덜덜 떠는 사이, 기영이 다음 판결을 내렸다. 어차피 반역 주동자들은 모두 사형이었으므로 그 판결의 결과는 이미 만인이 아는 바였다.
단지 그 죽음의 방식이 구경꾼들의 관심을 끈다 할 수 있었다.
“역적의 수괴 중 하나로 군마를 일으켜 여러 고을을 피폐하게 한 역도 마석기는 그 죄가 하늘에 닿아 마땅한 형벌을 찾기 어렵다. 하여 거열형(車裂刑: 수형자의 두 팔, 다리 및 머리를 각각 매단 수레를 달리게 하여 신체를 찢는 형벌)에 처한다. 그 머리는 정주 부에 두고 나머지 팔과 다리는 찢어 각 고을에 보내 이 같은 대죄를 저지르지 않는 경계의 초석으로 삼으라.”
거열형 역시 능지처참과 비교할 만한 것으로 오체분시(五體分屍)라는 말을 만들어낸 유명한 형벌이었다. 이러한 형벌은 서역에서 반역자들에게 선고하곤 하는 참수형이나 교수형에 비해 잔혹하기 그지없는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서역에서도 능지처참에 버금가는 형벌은 있었지만 로망스 공화국이 탄생하던 시점에서는 폐지된 지 오래였다.
거열형이란 말에 마석기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렸다. 산 채로 제 몸이 다섯 토막이 나는 형벌이니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능지처참을 받을 주인문에 비하면 고통이 덜하다 할 수 있었다.
마석기와 주인문에게 내려진 형벌의 정도로 보건데, 남은 자들에게 내려질 형벌의 수준도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지극히 자명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기영은 잔혹한 선고를 내렸다.
“이 두 역도를 제외한 지회 간부들은 죄의 정도가 떨어지므로 관용을 베풀어 팽형(烹刑: 죄인을 산 채로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형벌)에 처한다. 그 고기와 국물을 돌려 그 사악한 탐심에 해를 입은 백성들을 위로할 것이다.”
팽형 역시 악명 높은 사형 수단 중 하나였다. 이 형벌은 죄인을 삶아 그 고기와 국물을 돌려 무덤을 쓸 시신을 남기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능지나 거열형보다 무서운 벌이다.
이처럼 기영이 내린 형벌은 하나같이 무자비하고 혹독한 것들이었다.
이미 장내는 기영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경악과 공포로 젖어들어 말문을 여는 자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오는 형벌들을 볼 때마다 승도의 표정은 과히 좋지 않았다.
그는 죄의 처벌에 있어 필요 이상의 고통을 주는 행위는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로망스 통령으로 집정하던 시절에 만들었던 법전만 해도 그랬다. 인간의 신체를 훼손하는 형벌이야말로 야만성의 극치가 아닌가? 승도는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줄줄 판결문을 읽던 기영이 이제 마지막 처벌을 읊었다.
“이외에 역도들의 구족(친족의 4대와 외가의 3대, 처가의 2대)을 모두 묵형(墨刑: 이마나 팔뚝에 낙인을 찍는 형벌)에 처하여 사내는 모두 노역장에서 일을 시킬 것이다. 계집은 관청에서 관노(官奴)로 쓸 것이며, 어린 동자(童子)들은 거세하여 궁으로 보낼 것이다. 이는 하해와 같은 황제 폐하의 은덕과 관용이니 죄인들은 관대한 처벌에 감읍할지어다.”
“황제 폐하 만세!!”
구경꾼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기영의 처벌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황실에 대한 충성을 보일 수 있어서였다. 수틀리면 반역자로 몰리는 세상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법이다.
그런데 기영의 처벌을 지켜보던 관리 하나가 초를 치고 나섰다.
“대인. 너무 관대하신 처사가 아니십니까? 예부터 역모를 꾀한 주동자들은 구족을 멸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물며 이 난도들은 그 죄가 기존의 역도들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십족(왕래가 있는 문하생들까지 처벌하는 것을 의미)을 멸해도 시원치 않을 자들이옵니다. 극형으로 다스려 주시옵소서.”
도망을 갔다가 이제야 얼굴을 내비친 정주 부의 포정사가 제 할 말을 다하자 기영은 인상부터 썼다.
관례는 언제나 바뀔 수 있는 법이었다. 이번 일에 대한 처리 권한을 가진 건 바로 군기대신인 기영이다. 황제의 뜻을 헤아려 역적들의 처벌 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권한이다.
물론 포정사가 기영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말을 꺼낸 이유는 있었다. 국청에서 강경한 주장을 내뱉음으로써 관아를 버리고 도망한 죄를 희석시키고, 한편으로는 황실에 제 충성심을 증명하려 한 의도다.
어찌 보면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는 희극적인 장면이었다. 도망간 자가 역적들의 치죄에 문제가 있다고 따지고, 패전지장이 문제가 없다고 하며 실랑이를 벌이는 꼴이다.
“극형이라니?”
“팽형도 좋고 참수형도 좋습니다. 역도들의 씨앗을 살려두고 어찌 일이 매듭지어졌다 하겠습니까?”
“지금 포정사가 나를 가르치려 드시는 건가?”
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기를 드러내자 포정사가 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황실에 충성심을 어필하는 것도 좋았지만 당장 기영의 심기를 너무 불편하게 하는 것도 좋지 않았다.
품계도 품계이려니와 권력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반란 진압의 공을 받을 그에게 내려질 품계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미운 털이라도 박혔다간 지방 포정사 따위는 훅 날아가는 수가 있었다.
“송구합니다.”
“앞으로 입을 조심하시오, 그 입을. 알겠소?”
“명심하겠습니다.”
포정사를 간단히 침묵시킨 기영은 다시 처벌 수위를 결정했다. 구족을 멸하지 못할 것도 없으나 기영이 그리할 이유는 없었다.
적당히 기회를 봐서 국적(國賊)의 처첩과 딸들 중 반반한 것들은 노리개로 빼돌리고, 사내들도 빼돌려 노예로 팔아먹으면 부수입이 쏠쏠할 것이다. 그런 것들을 왜 몰살시킨단 말인가?
판결이 끝나자 형을 집행할 기술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주 부에서도 이름이 높은 자로 능지처참을 시행해본 경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능지는 보통 사람의 혈관을 가능한 건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살점을 얇게 발라내는 기술에 따라 형의 연속성이 결정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기술자의 기량에 달린 문제였다.
주인문에게는 몹시 불행하게도 능지 기술자는 사람을 천오백 조각까지 내본 경험이 있는 노련한 자였다. 이 끔찍한 형벌 집행을 지켜볼 생각이 없던 승도는 고개를 흔들고는 관아를 나섰다.
어차피 그로서는 이룰 것을 다 이룬 싸움이었다. 가문의 재산을 반란 진압 명목으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시작한 것치고는 거창할 정도로 많은 것을 해버렸다.
그 공이야 기영 같은 자들이 부지런히 훔쳐가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주 공을 모른 척할 수는 없을 터였다.
금포강 사건에서도 명목상의 포상은 내려 주었으니 이 건에 대해서도 그럴 공산이 컸다.
승도로서는 가능하면 중앙 직보다는 명예직의 포상이 내려지는 편이 좋았다. 중앙 정계에 발을 디딜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배경도 인맥도 부족한 상인의 아들이 품계 하나만 믿고 무얼 할 수 있는 조정이 아니었다.
‘벼슬 따위는 처음부터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차라리 재물이나 내려 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벼슬. 명예를 탐하는 자라면 몰라도 황제의 기억과 실력을 가진 승도에게 그것은 족쇄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상인의 아들로서 부귀를 꿈꾸는 편이 손쉽고 가능성이 높았다.
형벌이 집행되자 군기대신 기영에 의해 난의 종료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승도는 그간 자신에게 협력해준 단련의 이 대인에게 돈푼이나 쥐어주고, 청방의 노동자들에게도 약속했던 것보다 후한 상급을 나누어 주었다.
단순한 장사치라면 재물을 아까워하여 이렇게 할 수는 없었지만 오씨 가문의 가르침은 그를 큰 상인으로 길렀다. 거상은 재물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장사를 한다.
승도는 이 한 번의 투자로 말 한마디면 달려올 충성스런 협력자들을 얻었다.
그 덕분에 그의 명성은 정주를 넘어 청방 사람들이 있던 연하까지 중원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였다. 이는 승도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논공행상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썩은 조정이라도 그만한 공명을 얻은 자에게 엉터리 상을 내릴 수는 없었다.
승도는 자신을 배웅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화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군기대신 기영에게도 깍듯이 예의를 지켰다.
이는 가능한 한 적을 만들지 말라는 ‘상인의 철칙’을 따른 것이었다. 그가 올릴 장계에도 ‘기영의 공’을 두둑하게 써두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조정에 있을 기영의 계파에서 승도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었다.
‘진즉에 이것을 깨달았다면 로망스 제국은 무너지지 않았을 테지. 결국 그들의 말은 옳았다. 그들은 배덕했지만 나를 배신하지는 않았다. 배신을 할 믿음과 영광을 나누어 주지 않았으니까.’
승도는 독불장군(獨不將軍)으로 오만하게 군림하며 부하 원수들의 제대로 된 신망을 받지 못했던 황제 시절의 실수를 곱씹었다. 부하들에게 권력은 주었으나 제대로 된 전공은 나누어주지 않고 독식하며 한껏 영광을 누린 결과는 부하들의 이반과 제국의 멸망이었다.
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달라질 것이다. 배덕을 욕하기 전에 배신이라도 할 수 있는 믿음과 공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내가 되겠다.’
승도는 자신을 배웅하러 나온 기영에게 고개를 굽혀 예를 표하고는 마차에 올랐다. 기나긴 길을 돌아왔지만 전혀 의미가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 시간만큼 귀중한 깨달음과 명예, 그리고 사람을 얻었다. 승도가 출발하라는 말을 꺼내자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이제 그가 향할 곳은 이 나라의 심장, 제국의 수도 북경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