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거래 (1)
연합왕국 외상 리튼 경이 탄 마차가 마리아 궁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외상이 마차에서 내리자 근위병들이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그는 손을 들어 가볍게 답례하고는 여왕의 만찬이 마련된 궁전으로 곧장 입장했다.
이날 만찬에 초대된 사람은 모두 다섯 사람으로, 그 면면은 다음과 같았다. 왕국 수상, 해군 장관, 육군 장관, 적색 함대 사령관, 외상. 한마디로 연합왕국의 안보를 책임진 실세들이다.
이 같은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일 일은 좀처럼 없다 할 수 있었다. 로망스 제국이 거꾸러진 이래 연합왕국에 대한 마땅한 도전도 없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외상은 역대 국왕들의 초상화가 장식된 ‘왕의 복도’를 지나 장미꽃이 수놓아진 화원에 발을 디뎠다. 유리 온실로 만들어진 거대한 정원에는 꽃이 활짝 만개해 있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이 나라 과학의 상징이자 문명의 힘을 현시한 위대한 공간이다. 그 한가운데 놓인 큰 테이블에 여왕과 다른 각료들이 배석해 있었다. 리튼은 그들에게 예의를 표시하고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자리에 가 앉았다.
식사는 왕실의 풍미에 어울리는 고급스런 요리들로 이루어졌다. 본국에서는 좀처럼 구하기 힘든 붉은 사슴의 훈제 고기부터 신선한 굴, 멀리 대륙에서 공수해온 철갑상어의 캐비아와 트러플, 살짝 구워낸 새끼 양 고기까지. 별의별 식재료가 다양한 요리 방식으로 조리되어 테이블이 부족할 만큼 올라 있었다.
하지만 정작 참석자들은 그 요리보다 다른 것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최근 론디니움 상공회의소가 제출해온 ‘대(對)신 무역 청원서’가 바로 이들이 모인 주된 이유라 할 수 있었다.
왕국 내에서 급성장한 부르주아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던 그들로서는 이에 대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문제는 그래서 여왕이 주도하는 만찬이란 형식으로 모여 논의하게 된 참이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식사에 열중하는 듯 보였지만, 느긋하게 나이프를 쥐고 양고기 스테이크를 자르던 여왕이 먼저 물꼬를 트자 금세 이야기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주로 이야기를 하는 쪽은 수상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를 듣는 모양새를 취했다.
“일전에 우리 왕립 해군은 신에서 일련의 무력시위를 단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있었던 위협은 별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만, 몇 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신이란 나라의 정규군은 우리가 내다본 것 이상으로 약체화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해병대를 상대한 것도 정규군이 아니라 민병이더군요.”
놀라운 이야기가 들리자 여왕이 조금 놀란 듯 나이프를 멈추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무력시위에 대한 명령이 내려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결과가 수상의 손에 들어왔다. 여왕은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소식이 벌써 들어왔었나요? 내가 알기에 신은 두 대양을 건너야 닿는 곳인데, 신기하네요.”
아직 어린 여왕으로서는 수상이 부린 마법이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법도 속임수도 아니었다. 연합왕국이란 위대한 나라가 이룩한 과학의 힘이다.
“대서양에 해저 케이블이 가설되어 있어 동방의 사정을 아는 것은 딱 두 달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이 벌써 개통되었나요?”
“개통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전에 관련 내용을 궁으로 보내드렸었는데, 읽어보시지 않으셨나 봅니다.”
수상의 지적에 여왕은 얼굴을 붉히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직 십 대인 여왕이 국정(國政) 현안에 대해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아 결국 그녀는 자연스레 대화에서 빠지고, 나머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 해병대를 상대한 민병이란 것에 흥미가 가는군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적색 함대 사령관 후드 경이 재미있다는 듯 포크를 내려놓고 이야기에 끼었다. 수상은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를 이었다.
“동방 회사의 말로는 강주 상인들이 모아 보낸 민병들이라고 하더군요.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상설 조직도 아니고, 그렇다고 총기에 능한 자들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거리의 부랑아들에게 무기를 들려주고 만든 얼치기 군대나 다름없는 작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해군이 물러선단 말입니까?”
외상이 다소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전적인 해군이 그런 자들의 허세 정도에 물러났을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수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신을 믿는다면 그럴 것입니다. 현지의 보고를 인용하면 그 얼치기 놈들이 우리 해병대를 상대로 감히 싸움을 걸어왔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패하진 않았겠지요?”
“물론 지지 않았습니다만, 진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훈련도 받지 못한 야만인들에게 격퇴를 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지휘한 자가 의외로 뛰어난 자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군요.”
육군 장관의 말에 수상이 긍정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나 민병 지휘관은 결국 전쟁에선 별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건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다들 아실 겁니다. 군에 한 번은 몸을 담아보신 분들이시니. 아, 여왕 폐하는 실례.”
“명예직이지만 연대장 직함은 갖고 있어요.”
수상의 농담에 여왕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분위기를 가볍게 바꾼 수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역 청원 문제에 대해 무력을 써도 큰 문제는 나지 않을 거란 겁니다. 일전의 교훈으로 보건데 신의 정규군이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 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무력을 써서라도 무역 청원을 수락하게 만든다. 그것이 수상 각하의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신에 보낸 사절단은 제국 황제를 만난 자리에서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 야만인들이 우리더러 천조에 조공을 바치는 예 운운하는 판에 무슨 협상이 되겠습니까?”
수상이 강경한 어조를 내자 해군 장관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반대 입장을 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쉽게 생각할 사안이 아닙니다. 당장 동방 원정군을 편성하려면 모병 소부터 세워야 하는데, 예산은 둘째치더라도 의회에서 이를 가만두고 볼 리 없습니다.”
“그놈의 자유당 놈들이 그런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겠습니까?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론디니움 상공회의소의 지지를 잃으면 우리는 다음 선거를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명분이 더 필요해요. 그저 무역 청원 하나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자유당에 정권을 헌납하는 짓입니다.”
외상이 끼어들자 수상은 마지못해 논조를 죽였다.
“동감합니다. 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안 될 겁니다. 오래 전부터 동방 무역 회사에서 지속적으로 강주 시내에 여자를 보내고 있고, 아편도 부지런히 팔아치우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신이 과민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일들이라 그쪽에서 상관을 폐쇄하고 우리를 추방하거나 아편을 몰수하면 이를 구실로 삼을 생각입니다.”
“아편과 여자를 구실로 삼는다. 자유당에서 우리더러 야만인이라고 욕하지 않겠습니까?”
귀족적인 성품을 가진 육군 장관이 좀 보기 안 좋은 모양새가 나온다는 말을 돌려 꺼냈다. 수상은 고개부터 저었다.
“전쟁에 좋은 구실, 나쁜 구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전에 우리 왕국은 단지 안보에 잠재적 위협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무장 중립 동맹을 선언한 중립국들을 한 번에 때려 부순 전례가 있습니다. 강대한 로망스 편을 들 우려가 있다는 지극히 간단한 구실을 들어서 말이지요. 어디 그땐 ‘제대로 된’ 명분이 있어 그랬습니까?”
“하지만 그땐 국가 존망의 위기였고, 지금은 다르다 생각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권이 위기니까요.”
수상이 눈빛을 빛내며 말하자 육군 장관은 입을 다물었다. 수상은 다소 시니컬하게 말을 이었다.
“정권의 안위를 위한 전쟁. 훗날 사가들이 본다면 추악한 제국주의 전쟁의 전형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역사가 현재를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그때는 흘러간 과거일 뿐입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익을 추구하기 위함입니다. 위선적인 자유당처럼 남의 사정이나 봐주자고 각료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우리들의 왕국이 계속해서 군림하게 하기 위해 감투를 쓰고 있는 겁니다.”
후드 경이 한마디를 거들자 수상은 힘을 얻었다. 그래서 그의 어조는 조금 전보다 더 강경해졌다.
“해서, 여기 계신 분들께서 전쟁 쪽으로 미리 당론을 모아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보수당이 차돌처럼 하나로 뭉쳐 목소리를 낸다면 그깟 자유당 놈들을 누르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너무 성급한 생각이 아닌가요?”
여왕이 이야기를 지켜보다 한마디 끼어들었다. 그녀는 세계 최강국의 왕족으로 태어나 왕좌에 오르는 동안 전쟁을 지켜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도 명예직이나마 연대장 직함을 갖고 있어 전쟁에 대해 약간의 상식은 갖고 있었다. 함부로 벌여선 안 될 도박이란 사실 말이다.
“폐하. 국익을 놓고 다룸에 있어 전쟁은 하나의 수단입니다. 말로 해서 안 될 때는 무력으로 결정하는 것이 국제 사회의 룰입니다.”
“그 명분이란 게 남들 눈에 불충분하다면 그건 그대로 우리 왕국의 위신에 문제되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폐하의 개인 영지인 에이버만 하더라도 우리 연합왕국의 힘이 약했다면 프리지아나 로망스에게 병합 당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구상 최강의 국가이기에 그들은 아무 힘도 없는 에이버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힘이 곧 선이고, 유일한 법칙입니다. 명분이 다소 남들 눈에 모자라 부도덕한 싸움이라는 욕을 먹더라도 그건 그때뿐입니다. 양떼가 모여 웅얼거린다고 늑대가 식사를 멈추는 일이 있었습니까?”
“음.”
여왕은 뭐라 말을 하려다 입술을 오므렸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보수당의 편에 선 그녀로서는 수상의 견해를 무조건 반박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물론 폐하의 말씀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전쟁을 위한 밑 작업을 진행하는 것보다는 보다 차근차근 명분을 쌓아가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론디니움 상공회의소에 우리의 입장을 잘 설명하는 것도 잊어선 안 될 겁니다.”
외상이 개입하자 수상도 하는 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
“그럼 일단 이 건은 유보하는 것으로 합시다. 대신, 명분이 생기면 제 입장을 지지해 주시는 걸로 믿어도 되겠습니까?”
“어느 정도의 명분이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수상의 입가에 야만적인 미소가 번졌다.
“전쟁을 하기엔 충분한 명분이 될 겁니다. 그 점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당론을 모으는데 힘을 실어드리겠습니다.”
각료들이 차례로 동의를 표시하자 수상은 흡족한 얼굴을 만들었다. 처음 시작은 단순한 무역 청원이었지만, 식사가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는 어느덧 그 주제는 신과의 전쟁으로 옮아가 있었다.
***
화려한 샹들리에가 있는 거실에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왕국의 최고 권력자 수상 윌슨, 다른 한 사람은 금융계의 황제라 불리는 실력자 로스실트 남작이다.
수상 윌슨이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이야기를 꺼냈다.
“내각의 각료들은 전쟁에 동의하기로 하였습니다. 의원님께서 바라신 대로 일이 진행될 것 같습니다.”
“잘됐군요.”
로스실트가 웃으며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었다.
“문제는 로망스 쪽의 움직임입니다. 우리가 출병하는 틈을 타 저들이 검은 대륙에서 이권을 확대하려 든다면 꽤나 곤란한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요.”
로스실트가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실로 광오한 말이다.
국가의 행동을 개인이 통제할 수 있다니?
다른 사람이 했다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내, 로스실트가 꺼낸 말이기에 수상은 그 약속을 믿었다.
황금의 지배자 로스실트.
세계 금 시세를 통제하고 은행들의 대출을 좌우하는 그라면 타국의 군사 행동조차 뜻대로 막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그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열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장막 뒤의 제왕.
그런 자이기에 세계 최강국의 수상 윌슨과도 마주 앉아 정책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아, 그리고 이번에 치를 선거 자금 말인데, 상공회의소 이름으로 보내드릴까 합니다. 일전의 두 배 정도면 충분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수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선거를 실시하는 국가가 다 그렇듯 연합왕국의 선거도 돈이 많이 든다.
인기 관리도 하고 표밭도 다지려면 웬만한 장교 월급 30년 치가 날아간다.
돈이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 익숙해지면 부유한 은행가들의 후원을 받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수상은 행운아였다.
왕국 최고의 명문 귀족으로 태어난 덕에 은행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로스실트와 안면을 텄으니까.
물론 그의 후원은 공짜가 아니었다. 받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윌슨은 로스실트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약소국에 압력을 넣는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다.
양심적인 정치가들이 이런 수상의 모습을 보고 비난을 쏟아냈지만, 그런 거야 지나가는 장대비나 마찬가지다.
윌슨이 머릿속으로 후원금을 계산하는 동안, 로스실트는 차가운 포도주를 입에 머금었다.
‘전쟁이라. 달콤한 수확의 계절이 머지않았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