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4화 (34/425)

제34화. 결의 (1)

승도는 제도에서 볼 일을 마치고 선진에 있는 공소로 향했다. 이곳은 북경으로 자주 물목을 실어 보내는 행상의 몇 안 되는 공소 중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공소의 장은 오씨 가문이 임명한 영호춘이란 자로, 승도가 오는 것을 알고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한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자님.”

영호춘은 키가 크고 훤칠한 중년의 사내로 승도와 같이 서자 상대적으로 그를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 승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영호춘의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넸다.

“고생은 먼 타지에서 일하시는 아저씨가 더 크시지 않습니까?”

“하하. 소인이 무슨 고생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자, 안으로 드시지요.”

영호춘의 안내를 받아 공소에 들어서자 여느 공소들과 다르게 큼직한 창고들이 눈에 띄었다. 언뜻 보기에 온갖 사치품들이 쌓여 있는 듯했다. 서역에서 들어온 기계식 완구와 시계, 금을 덧칠한 판화 등이 보였다.

모두 강주를 통해 들어온 것들로 황실에서 소비될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적게는 은자 수백 냥에서 많게는 금자로 수천 냥을 헤아리는 기물들이라 창고 앞에는 공소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조당에 들자 영호춘과 승도는 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북경에서 최근 유행하는 서구 기물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는데, 그러다 철도 이야기가 스치듯 나왔다.

승도는 여기서 철도 이야기를 들을 줄은 생각도 못 한 터라 놀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북경에서 철도 부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단 말입니까?”

“그렇습지요. 몇몇 하급 관료들과 서역인 선교사들 사이에서 말이 나오는 수준이긴 하지만, 조정에서 아주 관심이 없진 않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대운하는 관리도 까다롭고 갈수기에는 배를 띄우기도 불편하지 않습니까?”

승도는 영호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운하의 관리는 어려운 면이 많았다. 그 관리 문제에 왕조의 명운이 달라지는 경우도 왕왕 있어 조정이 이를 대체할 철도에 관심을 갖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철도의 부설은 관심을 가지는 것과는 역시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철도 부설의 첫 번째 장애는 바로 묘지였다. 산이 막으면 터널을 뚫어서라도 직선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철도인데, 전국 각지에 수도 없이 늘어선 수많은 묘들은 그러한 건설에 가장 큰 장애였다.

여기에 조상을 신성시하는 동양의 전통이 겹쳐 사실상 철도 건설을 막는 최대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승도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세부적인 내용을 물었다.

“실제로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안 같은 것이 나오고는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지요. 그랬다면 당장 우리에게 돈을 각출하라느니 말이 있었을 것인데 아직 그런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황실에 영향력이 강한 애덤스 신부가 나서고 있긴 하지만 애초에 그리 쉽게 진행될 일은 아닙지요.”

“하지만 말이 나오고 있다는 건 조정에서도 서역의 기물에 대해 아주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군요. 사치품만 관심을 갖는 줄 알았습니다.”

승도의 말에 영호춘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서역 기물에 관심이나마 없었으면 편하겠습니다. 이 공소를 통해 올라가는 황실의 사치품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승도는 오씨 가문에서 보내는 선물 등의 규모는 알았지만 행상 전체에서 이 공소로 보내는 물량은 아직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어림짐작으로 물었다.

“은자로 한 오십만 냥은 됩니까?”

“백만 냥입니다.”

“백만 냥이라고요? 아니 우리 가문에서 황실에 인사하는 액수가 은으로 십만 냥, 반 대인이 그보다 조금 내실 터인데 어째서 백만 냥이 나온다는 것입니까?”

“다른 행상들도 오호관에 견줄 만큼 내고 있기 때문입지요.”

승도는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13행상 중 재무 상태가 건전한 것은 오씨와 반씨, 두 거상뿐이었다. 이 두 가문은 전통도 깊고 사업의 폭도 넓을 뿐만 아니라, 서역 상인들로부터 받는 신뢰도 커서 어지간한 규모의 적자는 충분히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행상들은 달랐다.

특히 지나칠 정도로 많은 세금과 탐관들의 수탈로 자본 잠식 상태에 들어간 일부 행상들은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연합왕국 동인도 회사로부터 고리의 이율로 돈을 빌려 쓰며 자금을 회전시키는 처지였다.

그런 행상들이 연간 십만 냥에 달하는 선물을 바치고 있었다면 망하지 않은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승도는 어이가 없어 반문했다.

“아무리 조정이라 해도 그건 도가 지나친 것 아닙니까?”

“물론 지나치지요. 하나 아문 감독이 누굽니까? 위해충이 아니옵니까? 그자는 행상의 경영 상태는 전혀 봐주질 않습니다. 그자가 황실에 올리는 선물을 감독하는 이상, 울며 겨자 먹기로 다 내는 수밖에요.”

위해충이란 말에 승도는 인상부터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자는 연합왕국과 결탁해 강주를 위험에 빠트린 작자였다.

“황실이 썩은 줄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나 해먹고 있는 줄은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러운 것이 이쪽 생리입니다.”

영호춘은 씁쓸한 대답을 내놓으며 찻잔을 들었다. 승도는 비취빛 찻잔의 색을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그래도 선이란 것이 있을진대, 위해충이란 자도 총리대신 리첸 만큼이나 썩은 자로군요.”

그 말에 영호춘이 찻잔을 내려놓고 웃었다.

“그리 말씀하시면 듣는 리첸이 섭섭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나라 탐관들의 제왕이라 불리는 리첸이 한낱 위해충 따위에게 비교될 그릇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자와 거래를 텄습니다.”

“공자께서 리첸과 거래를 트셨단 말씀이십니까?”

“탐관과 거래를 트는 일이 무에 대단할 것이 있을까요.”

승도의 말에 영호춘은 조금 놀랐다. 우스갯소리로 탐관들의 제왕이니 어쩌니 해도 리첸은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권력자였다. 그런 자와 거래를 텄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영호춘은 승도가 무슨 패를 들고 협상을 했을지 곰곰이 생각하다 무언가를 떠올렸다.

“설마 공을 그자에게 모두 바치신 겁니까?”

“필요도 없는 명예이고 공적입니다.”

“하지만 그자는 탐욕스러워 부스러기 하나 나눠주는 것도 아쉬워할 위인인데.”

“포상을 특권으로 받고 그 대신 그자에게 연공 금을 찔러주기로 했습니다.”

“연공 금이요?”

영호춘은 대번에 일이 돌아간 사정을 눈치챘다. 연공 금이라 함은 매년 주는 돈을 의미하니, 리첸으로부터 돈이 되는 권리를 받아 그 몫을 배분해주는 거래를 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거래에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백오십 년 전, 대륙 제일의 부자였던 신안 염상의 거두 구도관이 전쟁 중이었던 신왕조의 병량을 계속해서 지원해주는 대가로 양강 지역의 소금 전매권을 독점한 ‘거래’가 있었다. 이 경우는 왕조와 개인이 한 거래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긴 했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승도가 한 거래도 이 형태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납세라 해야겠지요. 연 오만 냥을 주는 조건으로 특혜를 받아냈습니다. 수출 물량이 제한된 것들이라 장사하기에 따라 이문은 은 백만 냥도 내다볼 수 있겠지요.”

“하오나 공자님. 벼슬도 받을 수 있으신 공을 마다하고 어찌 재물을 받으셨습니까?”

“벼슬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니 그저 신분치레할 정도면 족합니다. 아버님이 연납으로 정2품, 이제 저도 정3품의 반열에 올랐으니 어지간한 지방관들은 감히 우리 가문의 일에 토를 달기 어려울 겁니다. 그거면 족합니다.”

“허, 모두가 입신양명을 꿈꾸는데 공자께서는 거꾸로 가시는 것 같습니다.”

“입신양명을 할 세상도 아니지 않습니까?”

승도가 씁쓸하게 반문하자 영호춘도 혀를 끌끌 찼다. 재능이 있는 자가 조정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된 것도 벌써 반백년이 지났다.

재능이 있는 자라도 임경문처럼 대쪽 같은 성정을 지키면 한평생을 고생해야 한다. 운이 나쁘면 중도에 목이 떨어질 것이고. 그러니 썩은 탐관들의 손발이 되지 않고선 버틸 수 없는 것이 관료 사회였다.

그런 오물에 몸을 묻고 관료입네 목에 힘을 주는 것도 웃긴 일이다.

“참, 공자님이 흥미로워하실 만한 소식이 강주에서 올라와 있습니다.”

“무슨 소식입니까?”

“요즘 강주에 서역 부녀자들이 출몰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고 하더군요. 일전에는 관에서 강하게 대처하였는데 요즘은 관에서도 함부로 제지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승도는 그럴 만하다 여겼다. 서역의 힘을 눈앞에서 본 양강의 관리들이 일을 키우려고 하지 않으려 들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 문제가 커질 것이 뻔했다. 누구든 이 문제에 강경한 관료 하나가 나서거나 혹은 여론이 달라진다면 일은 그렇게 진행될 터였다.

“강주가 많이 소란스럽겠군요.”

“그렇습니다. 오 대인께서도 그 문제 때문에 양이들이 다시 소란을 부릴까 염려하셨습니다.”

“설마.”

승도는 불현듯 스친 생각이 있어 이맛살을 구겼다. 서역에서는 전쟁 전에 명분을 만드는 것이 통례였다. 왕정들이 제 잇속을 채우기 위해 벌이던 전쟁의 경우도 그랬다. 자국민들에게 공포할 수 있는 구실이 없다면 그들은 가급적 전쟁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에 명분을 만드는 일은 곧 전쟁을 하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단정 지을 수만은 없었다. 서역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만리타향까지 와서 여자도 없이 밤을 지새우는 시간은 대단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상관에 돌아가면 여자를 볼 수 있다지만 그것은 거래가 끝난 후의 일이다. 물목을 거래하고 상품을 팔아치우는 동안은 제 나라 상관에 발을 붙이고 싶어도 그럴 여가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여자들의 강주 출입 문제를 당연히 얻어야 할 권리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를 전쟁 구실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생각인지 몰랐다.

더구나 여자의 출입 문제를 전쟁 구실로 삼기에는 지나치게 미약했다. 굳이 하려고 한다면 큰 이문이 걸린 상관 폐쇄 정도의 일이 벌어져야 하는데, 작금의 강주 관청에서 그런 일을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짚이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짚이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서역인들이 허튼 생각을 품는 것이 아닌지 조금 우려했을 뿐입니다.”

“양이들이 또 금포강에서 난리를 부릴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럴 개연성은 충분할 겁니다.”

승도는 그 점에서는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세상 어느 일이든 그렇지만 입장이 바뀌면 관계도 바뀌게 마련이다. 지금까지는 지구 반대편에 그 힘을 제대로 투사하기 어려워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을 취한 서역인들이라도, 그 힘을 오롯이 쓸 수 있게 된다면 강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려 들 가능성이 컸다.

멀리 갈 것 없이 지난 금포강 사건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허허. 양이들이 난리를 부린다니 걱정스럽습니다.”

“물론 금포강에서는 큰 난리를 부리지 못할 겁니다.”

“그건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건은 북경으로 오기 전에 아버님과 논의해 두었습니다. 금포강 위로 철제 난간을 건설하여 강주를 공격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도록 공사를 시작했으니, 양이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난간 공사만 끝나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적지 않은 돈이 들 것 같은데, 어찌 그리 큰 공사를 결심하셨습니까?”

“비록 드는 돈은 크나 집안의 가산을 모두 잃는 것보다는 싼값이니 해볼 수밖에요.”

“역시 오호관의 명성은 천하제일입니다, 공자님.”

영호춘의 말에 승도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내일 배편을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예. 신안 염상의 배가 있어 강주로 가는 배편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한데 왜 안전한 운하를 타지 않고 바다로 가시려 하십니까?”

“운하는 너무 느립니다. 염상의 배를 타면 길어도 한 달이면 강주에 닿을 수 있을 터이니 그편이 훨씬 빠르지 않습니까?”

“그 말씀은 맞습니다. 하면 하루 더 지체하셨다가 서역 범선을 타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서역 범선을 말입니까?”

승도는 지난 생에서도 범선을 타본 적이 없어 그 말에 적지 않게 놀랐다. 하지만 선진은 제국 수도 북경의 코앞에 있는 도시인지라 이곳에 서역 선박의 통항은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곳에 서역 범선이라니?

승도의 놀람을 이해한 듯 영호춘이 재빨리 설명을 이었다.

“예. 신안 염상이 여송에서 서역 범선 한 척을 은 2만 냥을 주고 구입해서 쓴다고 하더군요. 아시다시피 뱃길은 해적도 있고 풍랑도 거세 기존의 조운선으로는 사고 위험이 상당합니다. 해서 보다 튼튼하고 안전한 서역 범선을 사서 쓰고 있습지요. 공자님께서 일정을 지체하시면 이틀 후에 출항하는 범선에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아마 그쪽이 조운선보다 훨씬 빠를 겁니다.”

영호춘의 말은 상당한 놀라움을 주었다.

‘확실히 상인들은 빨라.’

둔한 조정보다 상인들이 세계의 변화에 적응이 빨랐다. 그 큰돈을 주고라도 서역의 기물을 기꺼이 사들인 염상의 행동력은 나름 깨어 있다고 자부하는 행상에 뒤지지 않았다. 승도는 영호춘의 제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저씨께서 알아서 잘 처리해 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승도는 영호춘과 밤이 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선진에서 보낸 밤은 저물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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