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5화 (35/425)

제35화. 결의 (2)

이틀 동안 선진 공소에 머물던 승도는 영호춘의 안내를 받아 포구로 나섰다.

포구에는 서역 범선 한 척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승도는 온통 동양의 정크들로 가득 찬 포구에 홀로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낸 배에 눈길을 주었다. 그 배의 주인은 바로 염상 장필량이었다.

신안 염상 장필량은 신에서도 손꼽히는 대부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높은 위험을 감수하면 그만큼 큰 이익을 얻을 기회가 보장된다는 상인들의 속설을 믿는 대담한 투자자였다. 여송에서 중고 서역 범선을 은자 이만 냥에 구입한 것도 그런 투자의 일부였다.

그가 사들인 범선은 여송과 강주를 오가며 향신료를 실어 나르던 자유상인 매킨스의 것으로 선령이 22년 된 것이었다. 나무가 물을 먹어 신형보다는 속도가 상당히 느린 편이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범선이라 속도는 여타 조운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의 범선에는 돛대가 세 개나 있어 바람만 잘 타면 동양식 범선이 낼 수 있는 속도의 두 배도 우습게 내었다. 제때 소금을 운송해야 하는 염상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배라는 것은 분명했다.

무엇보다 안전성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배수량이 커 어지간한 풍랑도 능히 견딜 뿐만 아니라 조무래기 해적들은 감히 올려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배의 높이가 높았다.

그래서 장필량의 배는 소금 운송뿐만 아니라 바닷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태워다주는 여객 업무도 부수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여객 업무 자체에서 수익은 크게 나지 않았으나 빈 배로 염전까지 배를 부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긴 장필량의 생각으로 여객업도 겸하게 됐다. 그는 사람을 태워다주는 삯은 그리 높게 받지 않았는데, 이는 전적으로 평판을 쌓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향후 큰 이문을 보겠다는 것이 바로 그의 생각이었다. 거상다운 생각이고 사람의 마음을 남기는 장사를 하란 옛 상인들의 철칙을 지킨 것이기도 했다. 덕분에 승도는 그리 비싼 삯을 내지 않고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승도는 시간에 맞추어 포구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배에 올랐다. 본디 범선은 항구에 좌현으로 접안하게 마련이어서 승도가 보게 된 것도 배의 좌현이었다.

배는 마침 연하 하구에서 실어온 소금 가마니를 내려놓는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소금가마를 내려놓고, 다른 쪽에서는 항해에 필요한 식수와 식료품을 싣고 있다 보니 번잡하다 못해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 공자님.”

영호춘으로부터 미리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배의 선장이 웃으며 승도를 맞았다. 그는 손수 승도를 선실로 안내했다. 대개 대부분의 탑승객들은 하 갑판에 태우는 것이 상례였지만, 거상의 아들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여 선장은 승도에게 괜찮은 선실 하나를 내주었다.

그 방은 원래 상선의 항해 계통 간부들이 공유하던 곳이었다. 서역과 달리 항해 계통 전문가들의 능력을 높게 평하지 않는 신이라 별도의 공간을 주지 않다보니 선실이 된 곳이다. 그래서 방은 상당히 깨끗하고 넓었다.

승도는 방을 둘러보고는 선장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서역 범선답게 아직 사물함에는 약간의 포도주가 실려 있었다. 문득 포도주를 보니 이전 생의 어린 시절에 농가에서 담그던 포도주가 생각났다.

그 시절에는 술을 담그는 것이 불법이라 사람만 나타나면 포도주가 든 오크나무 통을 헛간으로 숨기는 것이 일이었다.

옛날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짐이 모두 정리되었는지 밖에서 선장 이하 간부들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멍청이’부터 ‘자라새끼’까지 다양한 욕설이 화음을 이루어 다양하게 내뱉어지고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에 비속어가 잔뜩 배어 흡사 욕설 경연장을 방불케 했다. 악을 쓰는 선장이나 간부들도 사실 항해 경력은 그리 길지 못했다. 서역에서 제대로 된 항해 계통 간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족히 15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신에 그만한 범선 운용 경험을 가진 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제대로 된 승무원도 마찬가지였다. 범선에는 360개의 다양한 용도를 가진 로프가 있었는데, 이것들의 이름과 용도를 정확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비로소 한 사람의 승무원으로 대접받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이 배에는 로프를 모두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겨우 네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외려 대단하다고 볼 일이었다. 대양 항해 경험을 쌓는 것이 불가능한 신에서 이 정도의 경력이라도 가진 승무원들을 모으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승무원과 항해 계통 간부들의 태반은 신 사람이 아니라 동영인과 여송인들이었다.

동영은 오래 전부터 서역과 교류를 해온 섬나라이고, 여송은 연합왕국의 통치를 받는 섬나라라 예로부터 우수한 승무원들을 배출해온 지역들이었다.

신에서 무역에 종사하는 이들 중에 동영과 여송인들을 찾아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쨌거나 사정이 그렇다보니 배의 성능을 모두 끌어내는 것은 현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로프가 아니란 말이야! 이 머저리들. 3번 로프를 잡아당기란 말이다!”

새까만 얼굴의 오귀자가 악을 쓰며 길길이 날뛰자 겨우 돛이 천천히 펴지기 시작했다. 승도는 이 희한한 광경을 지켜보며 자신이 너무 배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주된 적으로 자리 잡은 연합왕국을 대적하자면 바다, 그리고 배에 대한 지식이 무엇보다 중요했었다.

과거 그는 제국의 황제로서 육상에만 관심을 가졌다. 물론 그에 걸맞은 전과를 수도 없이 거두었지만 뭍에서의 승리는 연합왕국에 대한 결정타로 연결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바다에 대한 관심이 충분했다면 연합왕국에게 호된 맛을 보여줄 수도 있었겠지. 해전을 벌인다면 백전백패이지만 굳이 해전을 하지 않고도 괴롭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연합왕국에 맞섰던 대륙군의 해군 지휘관 모리스가 채택한 통상 파괴전이 그런 전략의 범주에 속했다. 모리스는 겨우 6척의 함선을 가지고 70척이 넘는 군함을 해상 봉쇄에 투입한 연합왕국의 봉쇄망을 뚫고 나가 연합왕국의 무역을 교란한 희대의 위업을 세운 바 있었다.

사실 바다는 끝없이 넓어 마음만 먹는다면 약자도 얼마든지 강자의 뒤를 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승도는 지나간 일에 대한 상념을 떠올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배가 출발하자 범선은 금세 돛을 활짝 펴고 푸른 바다로 벗어났다. 전통적인 동양 범선들과 달리 돛대가 세 개나 되는 큰 범선이라 그 속도는 당연히 엄청나게 빨랐다. 삼각돛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자들이 배를 운용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푸른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동안 선장과 항해사를 맡은 자 둘이 매듭을 묶은 로프를 바다 위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승도는 뱃일에 대해 잘은 몰랐지만 그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대충 짐작했다.

보통 1분에 매듭 하나가 얼마나 풀려 나가는지를 보고 배의 속도를 재는 것이 범선의 방식이었다. 물론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니어서 파도가 치거나 혹은 해류가 흐를 때는 오차 범위가 꽤 커지곤 했다.

승도는 속도를 재는 걸 가만히 구경하다 생각난 것이 있어 선장에게 말을 걸었다.

“궁금한 것이 생겨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승도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자 선장은 잠시 풀려나가는 로프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말씀해 보시지요.”

“이 배에 혹여 대포가 실려 있습니까?”

대포라는 말에 선장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별로 대단한 문제도 아니라는 투였다. 화약과 화기를 개인이 함부로 소유할 수 없는 시대에 보이는 태도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물론 실려 있습니다.”

“관에서 그것을 허락하였습니까?”

승도는 조금 당황하여 물었다. 하지만 그다음 대답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이면 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선장이 너스레를 떨자 승도도 따라 웃음을 흘렸다.

“안 되는 것이 없는 것이 돈이라. 관에서 대포도 허락할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장필량 대인이 누구십니까? 이 신안 염상에서도 손꼽히는 분이 나서서 손을 쓰시니 간단히 처리되었습니다. 하여 이 배에는 서양 대포 4문이 실려 있습니다.”

대포 4문이라는 말에 승도는 흠칫했다. 말이 4문이지 서양 대포 4문이면 신의 대포 수십 문보다 월등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그 정도의 무장을 조정에서 쉽게 허락한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 같은 무장을 실은 연유가 더 궁금했다.

“대포를 굳이 실을 이유라도 있습니까?”

“공자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요즘 세상은 해적들이 들끓습니다. 여송과 동영은 물론이고 저 남방 해역까지 해적 없는 바다를 찾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다못해 금포강에도 해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금포강 해적 이야기에 승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금포강 해적 사건은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었고, 하도 황당한 사건 경과를 가지고 있어 승도도 또렷하게 알고 있는 일이었다.

선장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요즘은 기존에 주로 활동하던 남방 해적과 여송, 동영 해적에 더해 서역 해적들까지 더해졌습니다. 저 동남쪽에 죽산이라 불리는 섬이 있는데 그곳이 서역 해적들의 근거지입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무장을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느린 조운선들조차 대포를 달고 다닐 정도이니 말 다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느린 정크들이 대포를 싣는단 말입니까?”

“요즘은 그렇습니다. 물론 그 배들은 포의 반동력을 이기기에 지나치게 약해 대포 한두 문을 설치하기도 버겁습니다.”

포의 반동 문제는 포병 전문가인 승도에게 대번에 와 닿았다. 대포는 포탄을 쏘며 뒤로 밀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반동력은 배의 복원력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복원력이란 배가 기울어졌다가 균형을 회복하는 힘을 말하는데, 포의 반동력이 크면 클수록 이 복원력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커졌다. 애초에 복원력이 매우 미약한 조운선이라면 대포의 반동력을 이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이 복원력 문제를 간단히 생각하면 ‘대참사’가 발생한다.

예전에 스와질란드에서 세계 최강의 군함을 만들겠답시고 4층 포 갑판을 가진 엄청난 거함을 건조한 적이 있었다. 선박은 계획대로 건조되어 바다로 나섰지만 시험 삼아 일제 포격을 실시한 순간 반동력을 이기지 못한 배가 그대로 전복되었다. 이 때문에 복원력 문제를 가볍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도는 선박 전문가가 아닌 터라 복원력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반동 문제에 대해서는 숙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염상에서 범선을 구매한 것입니까?”

“그런 면도 없잖아 있습니다. 장 대인께서는 앞으로도 여송에서 틈나는 대로 범선을 사들이실 계획이라 하십니다.”

“하나 여송에서 사오는 배들은 모두 중고가 아닙니까?”

승도가 반문하자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선령이 10년 전후의 것이 가장 좋고, 20년이 지나도 그럭저럭 쓸 만합니다. 밸러스트까지 말끔하게 미세 조정이 끝난 배가 오히려 운항하기에 좋습니다.”

“수명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목재 선박인지라.”

“그렇습니다. 서역인들 말로는 드라이 도크라는 것을 만들어 배를 말리고 배 바닥의 따개비 따위를 긁어내어 수명을 연장하는 작업을 하면 좀 더 오래 쓸 수 있다고 합니다.”

드라이 도크는 승도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로망스 해군 제독이 그에게 해군의 드라이 도크 건설 예산을 내달라고 요구하며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드라이 도크 건설은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어가는 사업이었다. 신에서 그만한 시설물을 갖추자면 은자 수십만 냥은 훅 들어간다고 볼 수 있었다.

승도는 드라이 도크 얘기를 하다 자연스레 범선 구입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처음에 대포 얘기를 꺼낸 것은 더 민감한 주제에 선장이 쉬이 대답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범선 구입 이야기를 꺼내기 위함이었다.

“여송 외에는 범선을 구할 수 있는 곳이 달리 없겠습니까?”

승도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선장은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다 의아한 투로 반문했다.

“여송 이외에서 말입니까? 굳이 구하자면 강주에서 구하시는 편이 낫지 않으십니까?”

선장의 말은 승도도 생각해본 터였다. 그래서 그는 그것이 어려운 이유를 꺼냈다.

“강주는 무역선들이라 제 상품을 팔고 이윤을 낼 상품을 실어가기에 바쁜 터이니, 배를 팔려 들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선장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계약을 해서 사오시면 되지 않으십니까?”

“계약이라.”

위탁 계약은 사실 행상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대리인을 해외에 두고 그들에게 서역 물건 및 자산의 구입을 부탁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해외에 투자한 자산의 운용을 맡기기도 했다.

이는 전적으로 계약 관계에 의한 것으로 승도가 이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승도는 그것을 떠올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당장 배를 산다고 해도 그것을 온전히 운용할 방법은 없었다. 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속은 결국 숙련된 승무원들이기 때문이다. 강주의 뱃사람들이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범선은 그들이 경험을 가진 배와 전혀 다른 종류였다.

“하나 배를 구입하셔도 거의 삼사 년은 죽은 배나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그걸 쓸 선원을 모으셔야 할 겁니다. 물론 그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요즘 여송이나 동영에서도 쓸 만한 선원은 동이 났습니다.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보니 서역 상선들에서 너도 나도 그곳 사람들을 뽑아 쓴 탓입지요.”

승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려다 번뜩하고 생각 하나가 스쳤다.

‘로망스. 로망스가 있다.’

그의 옛 조국.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있는 제2의 강대국. 그 나라에는 범선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무진장한 인적 자원이 있었다. 후한 삯을 지불한다고 하면 수만 명의 자원자들 중 가려 뽑아 쓸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을 온전히 승도가 믿고 쓰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래도 그들을 교관으로 데려온다면 강주의 젊은이들을 숙련된 승무원들로 기르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말씀 감사합니다.”

승도는 선장에게 목례를 하고는 선실로 돌아왔다. 마침 정씨가 배를 꼼꼼히 돌아보고 선실에 돌아와 있던 참이었다. 그는 승도를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공자님. 이 배에 뒷간을 보셨습니까?”

“뒷간이 무슨 문제라도.”

“제가 용변을 보기 위해 뒷간을 물었더니 배 뒤에 있다고 하지 뭡니까? 해서 배 뒤로 갔더니 뒷간은 보이지 않고 구멍 하나만 뻥 뚫려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변을 살펴보아도 뒷간이 없어 물었더니 그 구멍이 뒷간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무식한 뱃놈들이라지만 이거 너무한 것 아닌지요.”

정씨는 제 상식이 부정 당하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범선에서 별도의 화장실을 두는 것은 사실 쉽지 않았다. 이는 청소의 용이성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흔들리는 배 위에서 용변을 보면 구멍 주위로 이물질이 묻기 쉬운데, 밀폐된 구조로 만들면 그 안은 전염병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어느 범선이든 화장실은 개방형 구멍에 의존하는 것이 상례였다.

물론 서역의 화장실이 몹시 후진적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기실 서역의 화장실은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정화조를 파묻어두는 구조인데, 그마저도 제때 퍼낸다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아 넘치기 일쑤였다.

그런 원시적인 화장실을 사용하는 이들로서는 바다로 용변이 바로 투하될 수 있고 청소도 쉬운 ‘구멍’ 하나로 화장실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승도는 바로 그 서역에서 살던 사람이었기에 정씨의 말에 동조해줄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 설명을 붙여주었다.

“그건 자네가 오해를 하는 것이지. 배에서는 청결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 청소의 용이성을 위해 칸막이를 두지 않은 것이네. 그 점에 대해서는 무식함을 운운할 필요가 없네.”

“하지만 공자님. 어찌 당당한 사내로 태어나 남 앞에 거시기를 드러낸단 말씀이십니까?”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한 정씨로서는 그 같은 일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기호를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현실에 맞추어 수정해 나가야 하는 쪽은 환경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보지 않게 뒤로 돌아서서 누면 될 일이 아닌가?”

“하, 하오나.”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네. 그리고 선미 쪽은 변소가 있어 볼 일을 보는 사람이 아니면 드나들지도 않잖은가?”

승도의 말에 정씨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자님. 중요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뒤를 닦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해면입니다.”

“해면?”

승도는 해면이란 말에 잠시 기억의 한구석을 훑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신국어로 된 낱말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정씨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무명천 대용으로 뒤를 닦는 것인데 물에 적셨다가 쓰는 것입니다.”

그 말에 승도는 생각이 번뜩 났다. 서역에서 자주 쓰던 그것이다. 해면은 일종의 천연 스펀지로 뒤를 닦기에 몹시 좋은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소금물에 불려 재사용한다는 점이었다.

승도가 동양에서 다시 태어나 가장 기꺼워한 것이 해면 대신 무명천으로 뒤를 닦게 된 것일 정도이니 해면의 악몽이 금세 그의 전신을 휘감기에 충분했다.

“설마 소금물에 적셔서 계속 재활용한다는 말인가?”

승도는 아니기를 바라며 물었다. 하지만 정씨의 대답은 그 기대를 산산이 부수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으음.”

승도는 왠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뱃놈들을 옹호해주던 마음이 180도 달라졌다. 재활용하는 해면이라니.

승도는 입맛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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