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6화 (36/425)

제36화. 결의 (3)

배는 선진을 출발한 지 만 삼 주야가 지나 금포강으로 접어들었다. 운이 좋았는지 항해 기간 동안은 폭풍도, 해적도 만나지 않았다. 배 안에 설사 환자 몇 명이 발생한 것 외에는 특별한 문제도 없는 조용한 항해였다.

중도에 연하 하류의 염전에 들러 싣고 온 소금을 금포로 실어가는 뱃길이라 강주까지 바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승도는 금포 나루에서 배를 갈아타고 강주로 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시간이 꽤 지체되어 승도가 강주에 도착한 것은 북경을 출발한 지 한 달이 다 되어서였다.

오유도는 승도가 도착했다는 기별을 듣자마자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와 그를 맞았다. 승도는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리고는 그간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야기는 그간의 모험을 담고 있어 듣는 이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천지회 반란 부분에서는 오유도의 미간이 절로 꿈틀거렸다.

그는 진압 부분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승도를 꾸짖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네 어찌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위험한 전장에 발을 디딘 것이더냐. 일전에 홍모귀 건은 행상 전체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넘어갔다만, 이 일은 그것과 경우가 다르지 않더냐. 잊지 말거라. 너는 이 오유도의 하나뿐인 후계자다. 네가 잘못되면 내 어찌 가업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

승도는 아버지의 말에 변명을 하는 대신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오유도가 굳이 야단을 치려하기보단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탓이다.

승도는 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겠습니다.”

“약속할 수 있더냐?”

“그리하겠습니다.”

“좋다. 그건 그렇고, 네가 받아낸 특권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자꾸나.”

오유도는 역시 상인의 피를 숨길 수 없는지 냉큼 특권 이야기를 물었다. 승도는 고급 비단과 자기의 수출 물량을 더 배분받았다는 사실을 말했다.

오유도는 그것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연공 금 부분에서 혀를 끌끌 찼다.

“네가 거래를 잘못한 것이로구나.”

“소자가 거래를 잘못했다 하심은?”

“지나치게 네 패를 가벼이 보았다. 너는 임경문 대인을 수행하고 올라간 탓에 그 계파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큰 공을 세웠으니 리첸 입장에선 벼슬을 주지 않을 구실만을 찾을 터였다. 하니 재물을 받지 않더라도 네 거래에 상당히 구미를 느꼈을 게다. 거기서 네가 할 것은 처음부터 많은 것을 내놓지 않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상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이번에 네가 한 거래는 60점짜리로구나.”

아버지의 말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친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가볍게 여긴 부분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상재를 키워온 상인이기에 그 그릇에서는 오유도를 따를 수가 없었다.

승도는 뜰을 걸으며 아버지와 지난 일들을 말하다 선진에서 영호춘과 나눈 이야기가 생각나 말을 꺼냈다.

“그리고 아버님. 금포강의 철제 난간 공사는 어찌 되어가고 있습니까?”

“행상 기금에서 우선 은자 40만 냥을 투자하여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인부만 4천 명을 고용하여 진행하는 대사업이니 길어도 1년 안에는 공사가 끝날 거라 본다.”

“진척된 것은 어느 정도입니까?”

“협곡 양쪽에 지지대를 놓고 기반을 다지는 중이니 아직 난간을 설치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게다.”

아버지의 말에 승도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한 것보다 철제 난간 공사의 진척이 빨라서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 난간 공사만 끝나면 강주가 위협받을 일은 전혀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승도는 마음에 걸리던 것을 묻고 나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하옵고 소자가 이번에 북경에서 돌아오며 보고 느낀 것이 있어 사업을 하나 더 벌였으면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어냐?”

“해운(海運)입니다.”

“해운이라 함은 바다에서 배를 부려 운송해 보겠다는 말이 아니더냐?”

“그러하옵니다.”

“대관절 해운을 말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지금까지는 우리 행상이 찾아오는 외국 선박들에게 물건을 파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 수익률은 지나치게 낮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변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문이 낮아 원양 무역에 손을 대겠단 말이더냐?”

“그러하옵니다. 이미 해금 정책이 풀린 지 오래라 바다로 배를 띄워보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흐흠.”

오유도는 제 아들의 말에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무역의 이윤은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비록 행상이 세계 시장의 정보를 발 빠르게 입수하여 물량을 조절해가며 시가를 조절하는 입장이라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수익은 25%를 상회한 적이 드물었다.

반면, 바다를 건너온 서역인들의 이익률은 최고 3,000%에 달할 정도이니 배가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행상들은 이전부터 있어 왔다. 근거리 무역과 원양 무역의 이윤 차이를 인지한 순간부터 행상들은 그 수익에 숟가락을 얹고 싶어 했다. 발 빠르게 국제 시장의 동향까지 조사하는 이들이니 그저 손 놓고 구경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원양 무역이란 그리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항해술에 능한 선원과 원양 항해에 적합한 선원, 적당한 항구 설비가 모두 완비되어야 하고, 해도도 필요했다. 그 거대한 벽 앞에 행상들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들은 달랐다. 그 벽 앞에 좌절하는 대신 도전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소자가 서역 범선과 선원을 구하고 싶습니다.”

“서역 배와 선원을 구한다? 그건 또 무슨 소리더냐. 굳이 구하려면 싼값에 조운선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 않더냐?”

“그런 배로는 대양을 항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소자가 북경에서 강주로 배를 타고 오며 서역 범선과 정크선의 차이를 보았사온데,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나이다.”

“배는 그렇다 치자. 선원은 왜 서역인들을 구하려 하느냐? 그자들은 무뢰배들이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독과 같다는 사실을 잊었더냐?”

오유도는 온유한 음성으로 아들을 타일렀다. 서역인들이 무뢰한인 것은 행상이 아니라 신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대양을 건너온 뱃사람들의 흉포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술을 먹고 사람을 때려죽이는 자들도 허다하고 기분이 내키면 패싸움을 벌이기도 하는 거친 자들이다. 법이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사는 무법자들. 그런 자들을 부린다는 것은 폭약을 짊어지고 자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그는 여겼다.

“그 독이 필요합니다. 작금의 제국에 원양 항해를 할 만한 자들이 몇이나 되겠으며, 서역 범선을 다루어본 자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여 서역인들은 반드시 필요하옵니다.”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운업에 뛰어들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서역인들이 막대한 이윤을 남긴다고 해서 너도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상인은 얻을 것도 따져야 하지만 잃을 것도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오유도는 아들을 가르치는 심정으로 다시 타일렀다. 상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신중함이었다. 아들이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임에도 수익에 눈이 먼 것이 아닌지 오유도는 경계할 것을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입니다.”

승도가 의외로 단호하게 대답하자 오유도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럴 때는 제 자식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오유도는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이 죽으면 결국 하고도 남을 일이니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차라리 자신이 지켜봐줄 수 있을 때 하는 편이 나았다.

“좋다. 하면 범선은 어디서 구할 생각이더냐?”

“이곳 강주에서 구할 생각입니다.”

“여기서?”

오유도는 아들의 말에 흠칫 놀랐다. 제 상품을 싣고 가기 바쁜 서역 배를 이곳에서 어찌 구한다는 말일까. 오유도는 아들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게 편치 않겠습니까? 동방 회사 대반에게 위탁 계약을 제안하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승도의 말에 오유도는 입맛을 다셨다. 대반에게 부탁한다면 어중이떠중이에게 계약을 제안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안전성이 보증된다.

그리고 시기도 딱 알맞았다. 무역 철이 끝나지 않아 대반이 제 나라에 사람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하면 그 일은 내가 처리해주마. 배를 몇 척이나 구하려고 하느냐?”

오유도는 동방 회사 대반들과 잘 아는 사이였다. 무역 철이 지난 비수기에 자주 만나 거래 상품에 대한 인수 계약을 작성하고 대금 거래 방식에 합의하는 등, 만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1척입니다.”

“1척?”

오유도는 한 척이란 말에 흠칫 놀랐다. 아들이 거창하게 이야기하기에 여러 척을 요구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대답은 생각지 못했다.

“예.”

승도는 단단히 준비한 듯 이야기를 꺼냈다. 굳이 거창하게 해운에 뛰어들 거라면 수십 척의 배를 사서 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비된 인적 자원 없이 그런 큰일을 벌였다간 가업을 말아먹기 쉽다.

적어도 황제로서 국가라는 거대 조직을 운영해본 승도가 그런 멍청한 일을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크게 일을 벌이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차근차근 일을 해보려면 시작은 작은 규모로 해보는 것이 좋았다.

해서 승도가 1척을 주문한 것이었다. 오유도는 제 자식이 분별없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척이야 뭐 그리 큰 대수겠더냐. 기왕이면 큰 배로 하나 사거라.”

오유도는 그제야 안도하며 배포를 보였다. 은 몇 만 냥이 큰돈이기는 하지만 그에게 큰 부담이 될 정도로는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고의 거상이다. 그 정도의 돈 때문에 아들의 바람을 꺾을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그것은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 이곳 강주에 자주 드나드는 쾌속 범선을 사고 싶습니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

오유도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쾌속 범선은 강주와 에우로페를 불과 80일 만에 주파하는 이 시대 최고속의 선박으로, 로우랜드 공화국에서 주로 발주하는 선박이었다.

조선 기술만큼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로우랜드의 역작인 만큼 그 배의 우수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그 성능이 제대로 발휘되려면 숙련된 선원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선원 고용 계약도 대반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홍모귀들을 쓰려고 그러느냐?”

오유도는 당연한 듯 되물었지만 아들의 대답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아닙니다. 로망스 사람들을 쓰려 합니다.”

“로망스라면 연합왕국과 앙숙인 나라가 아니더냐? 그런 이들을 연합왕국 대반에게 고용해 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이냐?”

그 말에 승도는 미소를 지었다. 에우로페에서 국가 간의 적대 관계는 실제 개인 간의 거래나 계약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반혁명 전쟁으로 해당 전쟁 기간 동안 동방에서 발이 묶였던 로망스 상인들의 물건을 연합왕국 상인들이 대신 처리해준 것이 그 예였다. 동방이라면 이런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합리주의와 개인주의가 태동한 서방에서 국가와 개인은 완전히 등치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예. 그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어찌 그리 장담할 수 있는 게냐?”

“이문이 남는 장사에 국가가 없는 것이 서역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말에 오유도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말이 아주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일이 잘못될 가능성은 없었다.

대반은 한두 번 장사하고 안 볼 자유상인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보니, 그들이 돈을 떼먹고 달아날 가능성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오유도가 염려한 것은 어디까지나 고용이 잘 해결될까 여부였다.

“그래. 배를 사서 로망스 사람들을 태워 해운을 한다고 치면 그걸로 어떻게 이문을 낼 생각이더냐?”

“당장 이문을 낼 생각은 없습니다.”

당장 이문을 낼 생각이 없다는 말에 오유도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럼 아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투자를 한다는 말인가?

“하면?”

“장래를 내다본 투자입니다.”

“장래를 내다봐?”

“예. 외국과의 통상을 하지도 않는 염상조차 해운에 눈을 뜨고 서역 범선을 사서 쓰는 세상이니 어찌 그것을 보고 손을 놓고 있겠습니까?”

“그 말도 옳다만 상당 기간 동안은 아무 이문도 나오지 않는 일 같지 않느냐?”

“준비입니다. 아버님도 아시겠지만 숙련된 뱃사람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해서 그런 훈련된 자들을 길러내려 합니다. 십 년, 이십 년을 내다본 투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길게 보는 투자라. 아주 큰 장사를 할 모양이로구나.”

“그렇습니다.”

오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뜰을 다 가로지른 것 같았다. 오유도는 아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만 가서 쉬어라.”

“예.”

승도는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제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먼 거리를 다녀오며 보고 배운 것을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

그동안은 사실 애써 인지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누를 수 있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은 평정을 유지했지만, 별채로 움직인 순간부터는 그리할 수 없었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은 유하에 대한 생각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걸음은 조금씩 빨라지고 마음은 급해졌다. 아직 유하가 별채를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걸음을 재촉했다.

유하가 공을 들여 기른 화초들이 우거진 정원에 들어섰을 때 승도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자신도 모르게 불쑥 말이 튀어 나갔다.

“유하야.”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선 별채에는 이름 모를 시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녀는 난생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유하와 달리 까만 경장을 입은 여자였다. 그녀는 온유한 인상을 갖고 있었고 목소리도 그랬다.

“어서 오시옵소서. 목욕물부터 데워 올릴까요?”

당연한 듯 물어오는 시녀의 음성에 승도는 나지막이 물었다. 조금은 단호하게 느껴지는 어투로.

“유하는 어디에 있느냐?”

“유하라 하심은 전에 이 별채에 있던 전임 시녀를 말씀하시는 것이온지요?”

“그래.”

시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새를 참지 못한 승도가 대답을 채근했다. 어서 대답하라는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전임 시녀라면 이미 장원을 떠난 걸로 알고 있사옵니다.”

“…….”

승도는 유하가 정말 떠났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머리가 좋은 그는 비단 천을 펼친 순간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단지 가슴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후우.”

미련이 무너져 내리며 차가운 현실을 맨살 그대로 승도의 앞에 펼쳐놓았다.

‘이미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 한데 왜 이제 와서 다시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승도는 황제였고 한 사람의 상인이었으며, 위대한 전략가였다. 하지만 한 길 제 가슴속도 들여다볼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기도 했다.

직접 눈으로 본 순간에야 이별을 자각하고 고통을 몇 배로 인지하는 허망한 인간. 환생을 하여 남들보다 많은 지식과 견문을 가졌지만 결국 그뿐이다.

그것은 별수 없으리라. 몇 번의 삶을 거친다 하더라도 신이 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니까.

‘결국 그런 것이었다. 냉정한 척 머리로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나를 잡아주고 어린 시절의 꿈이 계속되게 해주길 바랐던 거였다. 이다지도 모순된 것이 나란 인간이었을까.’

승도는 탄식하며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다.

***

밤이 가고 낮이 왔다.

승도는 평소와 달리 아침 해가 떠오르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시녀가 세숫물을 가져와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늘어져 있을 순 없었다.

유하가 떠난 건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녀의 무거운 결정을 헛되지 않게 해야 했다.

너무나 명석했기에 감정에 굴복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승도는 눈을 감은 채 스스로를 움직일 동기를 부여하려 애썼다.

‘유하가 날 떠난 건 내가 성공하길 바라서다. 하지만 내가 무얼 해야 그녀의 결정에 답할 수 있을까.’

공화국의 창과 방패로서 살던 순수한 군인으로 돌아가 신의 방패가 되어주어야 할까? 명예욕을 충족시키기엔 더없이 좋은 삶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어울리는 길이 아니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 불꽃을 태우다간 지키려 맹세한 가문과 자신이 거꾸러질 것이다. 유하도 그런 삶을 살길 원친 않겠지.

그렇다면 이 나라 신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세워볼까? 하지만 그것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왕조 시대에 딱 맞는 사회 시스템과 민중의 의식을 바꾸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압도적인 무게의 시간.

개인이 공화국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승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까마득한 이전 생의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살던 그때의 순수한 소년이었다면 야망 따위는 생각하지 않을지 모른다.

오히려 거대한 운명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려 했을 것이다.

‘유하. 네가 바란 성공이 무엇인지 난 모르겠다. 나는 그저 네가 내 옆에 서 있길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함께하길 원했던 네가 나의 성공을 바란다면.’

승도는 마음을 굳혔다.

‘그래. 나는 황제였던 사내다. 제국을 호령하고 세계의 패권을 꿈꾼 패왕이며 공화국의 이상을 가슴에 담고 달렸던 시대의 상징이었다. 평범한 일상 따윈 애초부터 이룰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수도 없는 인간을 내 손으로 죽이고, 또 죽게 만든 악인이 아닌가? 그러니 고뇌하며 시련에 맞서는 쪽이 그 업에 걸맞은 일일 것이다. 일어서 죄업을 받고 시련을 물리쳐 거인이 되는 것. 그 길이 네 결정에 보답하는 길이 되겠지. 유하야.’

자조 어린 웃음이 지어진다. 아득한 기억에서 유하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과거의 자신이 보인다. 당과를 입에 문 소년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그 표정을 대가로 지불했다. 결코 싼 대가는 아니다. 그러니 운명이여, 날 시험한 대가를 준비하는 게 좋을 거다.

승도는 창을 열고 차가워진 세숫물을 얼굴에 묻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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