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음모 (1)
1년 후 강주.
승도는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외형적인 생활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굳이 있다면 그 내면의 각오 정도일 것이다.
“대인. 이번 거래는 어떻게 해주실 참이십니까?”
서역인 사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승도는 서책을 들여다보다 냉랭한 어조로 답했다.
“귀하는 납기일보다 늦게 물건을 가져오셨으니 값을 3할은 제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대인. 그건 너무하신 처사가 아니십니까?”
“너무한 건 그쪽입니다. 우리는 자유 상인인 그대의 신용을 믿고 거래를 터주었건만 납기를 지키지 않아 상당한 손해를 본 입장입니다. 그런데 값을 깎는 것에 불만을 갖는다니요? 서역 같으면 보상금을 물려도 할 말이 없는 일 아닙니까?”
승도의 날카로운 일성에 서역 사내가 찔끔하여 고개를 숙인다. 그 옆에 선 호씨는 그런 공자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강주의 전통에 따라 성년 이후 관모를 쓸 수 있게 된 승도는 1년 전부터 서역인들에게 대인이라고 불렸다. 관의 관복과 관모를 쓰고 있는데다 당상관의 품계(정3품)를 갖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소 오호관, 그 아버지 오유도를 대 오호관이라 부르기도 했다. 순전히 서역의 편의에 따른 호칭이었다.
승도는 서역 사내 앞에 계약서를 흔들 필요도 없이 상대를 가지고 놀았다. 독점 거래자 지위를 가진 행상이 서역인 앞에서 꿀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대부분의 행상이 서역인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진 막대한 빚과 물려 있는 거래 대금 때문인데, 오씨 가문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재무 면에서 탄탄한데다 강주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했다.
“그, 그래도 그건 저보고 죽으라는 말씀이십니다.”
“면포는 일괄적으로 3할. 시계와 판화는 2할 5푼 깎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이상은 봐드릴 수 없습니다.”
승도의 냉정한 대꾸에 서역 사내는 더는 뭐라 말하지 못하고 물품 인수 계약서에 날인했다.
계약에 있어 철칙은 철저한 신뢰가 바탕인데, 이를 지키지 못한 자들에 대해 승도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다음 손님을 모시게.”
승도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하자 호씨가 얼른 문 밖으로 나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손님을 불렀다. 곧 말쑥한 옷차림의 중년 사내가 승도의 집무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훤칠하고 인상이 시원한 것이 호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그는 승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오 대인.”
“예, 반갑습니다. 이 공자님.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승도는 상대에게 자리를 권하며 방문 순서를 떠올렸다. 이번에 접견 신청을 한 자는 행상의 후계자 중 하나인 이영방이었다.
그는 잔뼈가 굵은 노회한 상인의 느낌을 풍겼다. 이영방이 자리에 앉자 승도는 상대를 탐색이라도 하듯 훑으며 가벼운 말을 던졌다. 거래를 하러 방문한 자들을 시험하는 것이 승도의 주특기였다.
하지만 상대는 좀처럼 꼬리를 보이지 않았다. 영양가 없는 말들이 오가기를 한참, 마침내 사내가 본론을 꺼냈다.
“제가 이번에 오 대인을 찾아뵙게 된 것은 중요한 거래를 하나 제안 받아섭니다.”
“중요한 거래요?”
사내의 말에 승도가 흥미를 보였다. 이영방이 중요한 거래라고 할 정도면 강주 상계에 큰 영향을 줄 만한 건수가 분명했다.
“예. 큰 이문이 남는 위험한 장사입니다.”
“무슨 위험한 장사이기에 큰 이문이 남는다는 것입니까?”
승도가 의아하여 물었다. 보통 행상이 큰 이문이라는 표현을 쓰면 마진율이 본전의 몇 배에 이르는 장사를 말했다.
행상에게 그런 큰 이문이 남을 만한 장사는 지금껏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이영방은 잠시 머뭇거리다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승도는 그 말을 듣고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편입니다.”
“아, 아편?”
승도는 그 말에 눈이 번뜩 커졌다. 이자가 무슨 의도로 아편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상이 아편을 취급하는 것은 곧 자살 행위였다. 막대한 부를 가진 행상은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은 얼간이나 하는 짓이었다.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 그들이 전 재산을 날릴지도 모르는 모 아니면 도의 도박을 왜 하겠는가?
“그렇습니다. 아편입니다.”
“아니, 아편 거래라면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 아닙니까?”
승도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편은 만악의 근원이며 불길한 까마귀다.
“예. 그렇긴 합니다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거래를 제안한 곳이 다름 아닌 동방 무역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뭐, 뭐라고요?”
승도는 그 말에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이자들이 강주를 얼마나 허투루 봤으면 행상에게 감히 아편 거래를 제안한단 말인가?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해 이를 갈았다.
“진정하시지요. 당장은 그에 응하겠다고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거절하지 않으신 것은 여지를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승도의 지적대로다. 여지를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이영방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맞습니다. 하나 우리 이광행의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동방 무역 회사가 우리 이광행에 가진 채무만 따져도 백은 백만 냥에 달합니다. 1년에 지불해야 하는 이자만 백은 십사만 냥이 넘는 우리로서는 그들의 뜻을 마냥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이영방의 입장은 승도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이 건은 단지 그렇구나 하며 이해하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행상 전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다.
만에 하나 아편 문제로 이광행이 파산이라도 하는 날엔 그 빚을 행상 전체가 나누어 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편을 취급한 것이 들통 나면 이광행은 망합니다. 아니, 우리 행상 전체가 망할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 왜 거절하지 않으셨습니까?”
승도는 이영방을 책망했다. 아니,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압니다. 해서 오 대인을 찾아뵌 것 아니겠습니까?”
“으음.”
승도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편이란 말이 가진 그 충격적인 위험성 때문에 그는 아직도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우리 이광행의 입장은 취급 불가입니다. 하지만 동방 회사의 압력을 견딜 자금력이 되질 않습니다. 오 대인께서 어떻게 도와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백은 백만 냥이면 우리도 당장 융통할 수 없는 자금입니다. 당장 회전할 수 있는 여분의 자금을 백만 냥씩이나 쌓아두고 있는 상인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승도의 말에 이영방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모양이지만, 그 기대가 무너진 순간의 얼굴빛은 과히 좋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 기대는 말도 안 되었다. 백은 백만 냥은 어지간한 중소 국가의 삼년 치 재정에 해당되는 막대한 규모의 돈이다.
하니 그런 거금을 쌓아놓고 놀릴 여유가 되는 상인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씨 가문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만한 여유는 되었으나 사업이 확장되고 투자할 곳이 늘어나면서 여분의 자금이 백만 냥 아래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하면 우리는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승도는 그 말에 잠시 생각을 기울였다. 하지만 딱히 좋은 방법은 없어보였다.
“일단 관을 찾아가 임경문 대인과 상의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 대인을 말입니까?”
승도의 말에 이영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임경문은 북경으로 소환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강주 관리사로 좌천돼 왔다.
그러나 그 품계는 회수되지 않아 양강 총독이나 양주 부사, 아문 감독과 대등한 서열에서 일을 하는 희한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그러다보니 강주 상인들이 양강 총독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을 실컷 써두고도 강주 관청에 끌려가 곤장을 맞는 일이 더러 있었다.
“예. 이 문제는 임 대인과 논의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승도의 말에 이영방이 이맛살을 조금 찌푸렸다. 임경문은 그가 고려해보지 않은 선택지인 듯했다.
“임 대인과 논의하면 좋은 방책이 나오겠습니까?”
“물론 꺼려지시는 부분이 계신 줄 압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간단히 넘길 사안이 아닙니다. 우리끼리 쑥덕거려 해결하기에는 일이 너무 큽니다. 해결할 능력도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임경문 대인과 상의한다면 아편을 취급하더라도 정상 참작을 받을 여지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정상 참작이라. 하지만 그 어른이라면 아편을 받았다간 전부 내놓으라고 해서 불태울 위인이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괜히 다른 탐관들에게 이야기한다고 해봐야 전혀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이곳 강주에서 아편을 단속하는 사람은 임경문 대인 아닙니까?”
그 말에 이영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은 맞습니다. 하면 임 대인과 한 번 상의를 해보고 일간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이영방이 감사를 표하고 물러나자 승도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문제의 본질은 아편이 아니라 연합왕국의 의도였다.
‘아편 문제는 언젠가부터 상당히 위험한 뇌관이 되어 있었다. 막대한 이권이 얽힌 문제이니 이 나라와 연합왕국이 충돌한다면 계기가 되기에 충분한 사안이다.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큰 문제가. 하지만 이젠 문제의 성격이 전혀 달라졌다. 동방 무역 회사가 이영방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은 행상을 통해 아편을 팔아보려는 수작 정도로 볼 수 없었다. 행상의 특별한 지위를 생각하면 사실상 신에 대한 전면 도발 행위라 할 수 있었다. 소극적인 아편 밀매와 부녀자 소동 정도로는 신의 강경한 대응을 끌어내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수위를 높인 것일까? 만약 그렇다 한다면 연합왕국의 의중은 전쟁인가. 전쟁이 목표라면 이번 전쟁은 이길 수 있는 것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신이 연합왕국을 이긴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차라리 고양이가 호랑이를 이긴다는 말을 믿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 전쟁이 일어나면 가문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가능하면 강주를 전란에서 구하는 수단을 생각해야 한다. 돈의 힘을 빌린다면 불가능하진 않다. 둘, 전후에 대비해 손을 써두어야 한다. 신이 전쟁에 패한다고 해도 연합왕국이 이 나라를 집어삼킬 수단은 없다. 그러니 그 부분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정작 우려해야 하는 것은 행상의 독점적 지위가 사라질 거라는 부분이다. 하니 다른 돈벌이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준비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승도는 지금까지 준비한 것들을 떠올렸다. 철제 난간 공사를 해두었으니 강주로 연합왕국 군함이 직접 올라올 수는 없다. 올라온다면 육군이다.
그들을 상대할 무력이 있다면 적당한 협상을 통해 강주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또, 미리 발판을 놓아둔 해운업이 있다. 그것으로 거창하게 수출을 하고 자시고 할 것은 없다.
하지만 훗날에는 그것을 통해 신으로 침투해 올 서역의 해운업을 상대해야 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장치는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다 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비단과 도자기를 취급할 수 있는 막대한 특권. 그것이 걸렸다.
승도는 수출 특권을 떠올린 순간, 그것을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수출은 물 건너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행상의 지위가 무너진다면 수출 제한은 있으나 마나다. 그러니 특권은 지금 급매 처분하는 편이 유리했다.
승도는 재빨리 붓을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