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음모 (2)
승도가 거래의 대상으로 떠올린 것은 두 곳이었다. 하나는 황실, 나머지 하나는 염상이다. 이중 자금력이 풍부한 곳을 들라면 역시 염상이다.
그렇지만 염상이라 하더라도 그 막대한 특권의 값을 한 번에 지불할 능력은 없었다. 따라서 가능한 제 값을 받으려면 황실과 거래하는 편이 유리했다. 어떤 대가를 받아내느냐.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해볼 만한 장사였다.
‘돈이나 특권으로 받아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특혜는 시책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그만한 돈은 조정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현물로 받는 것이 상책인데, 무엇을 거래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것이 유리할까?’
현물이라면 정부도 소유한 것이 아주 많았다. 특히 땅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를테면 광산이라든지 논밭이라든지. 생각하기에 따라 정부가 내놓을 것은 한없이 많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광산은 생각보다 벌이가 시원치 않은 사업이다. 세율이 상당히 높을뿐더러 광맥을 찾을 때까지 들어가는 초기 투자비용이 터무니없이 높다. 철도라도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고는 운송비용도 만만치 않다 할 수 있다. 그러니 광산은 어림도 없다.
‘논밭도 시원찮긴 마찬가지다. 소작료를 고리로 받아낸다면 모를까, 정부가 뜯어가는 명목의 세금이 많아 그러지 않고는 이윤이 크게 남질 않아. 그렇게 한다면 가문의 평판을 대가로 지불하는 셈이니 밑지는 장사다. 차라리 손을 대지 않느니만 못하다.’
승도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광산도 논밭도 안 된다. 하면 무엇이 좋단 말일까. 땅과 관련된 다른 이권. 다른 이권이 필요했다. 차밭을 더 사들일 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다. 차밭을 늘려본들 관리만 힘들어진다. 지금의 오씨 가문을 지탱하는 차의 힘은 엄격히 관리된 품질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양을 늘려 품질 저하를 감수할 필요는 없다.
‘면화를 심어볼 수 있는 땅이라면 어떨까.’
목면을 대량으로 재배할 수 있는 밭과 공장을 갖춘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면화라면 상당히 수지에 맞는 장사였다. 연합왕국인들도 해먹고 있는 장사다.
문제라면 역시 경쟁력이다. 당장은 면화를 심어 수익을 낼 수 있다 하더라도 나날이 싼 면포를 가져오는 연합왕국인들의 압도적인 경쟁력을 감당할 도리는 없을 것이다. 운송료라도 들지 않았다면 애초에 신의 시장 전체를 연합왕국산 면직물이 장악했을 것이다.
현재 연합왕국의 면포 생산에 대한 원가는 평균적으로 원료비 1.5 실링에 인건비가 3실링이다. 모두 기계 공업의 힘이다.
반면, 신에서 생산할 경우에는 원료비 3실링에 인건비는 8실링이다. 운송비로 6실링가량의 비용이 붙고 있지 않다면 도무지 경쟁이 되지 않는 압도적인 가격 차이가 나는 셈이다.
따라서 면포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승도의 생각에는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 할 수 있었다. 차라리 다른 쪽을 궁리하는 편이 옳았다.
‘면화를 심을 땅을 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다른 것이 필요해.’
다음 순간 승도는 무언가 생각이 나는 것이 있었다. 신이 연합왕국과 비교해 가장 압도적인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품.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자원은 바로 인간이다.
산업 혁명이 태동할 수 없게 만든 저렴한 인건비. 그 인건비로 승부를 볼 수 있는 사업을 한다면 연합왕국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기계로 만회할 수 없는 인간만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산업이라면.
‘일단 하나 있긴 하군. 용병 업인가.’
승도는 쓴웃음부터 지었다. 본업이 전쟁 전문가라 그런지 떠오르는 것도 결국 그쪽이었다. 용병 업은 예로부터 에우로페에서 유서 깊은 직종 중 하나였다.
심지어 일국의 왕이 제 나라 군대를 이끌고 다른 나라에 가서 용병대장 노릇을 한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혹은 나라 전체가 용병 업으로 먹고사는 경우도 있었으니 용병업의 수익성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한창 식민 제국을 건설 중인 일부 국가에 편승한다면 이권까지 따내볼 수 있을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걸리는 것이 있다. 이 부분을 해결하지 않고는 용병 업은 시작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관인데. 관에서 용병 업을 허락해 주느냐. 그것이 문제겠지.’
승도는 생각을 정리했다. 땅을 생각하다 인건비를 떠올렸고, 용병까지 왔다. 용병 업을 하려면 역시 관의 무장 승인이 필요하다.
돈만 들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상설 무장 단체가 자국을 드나들며 활동하는 것까지 용납할지는 미지수다. 자칫 잘못하면 역모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는 사안이니 함부로 추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수익성 하나만큼은 행상의 평균 수익을 몇 곱절이나 능가할 것이다.
‘용병 업을 뒤로 제쳐두면 뭐가 있을까?’
전생의 경험까지 쥐어짜 흐릿해진 기억을 하나둘 떠올리던 그의 머릿속에 다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건설업이다. 공화국 통령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그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루테티아 정비 사업을 생각하니 금세 답이 나왔다.
건설업만큼 인력이 중요한 사업은 달리 없다. 그 규모는 크고 수익성도 상당하다.
더구나 이 나라는 정비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물론 정부가 가진 예산은 없으니 대규모 건설업을 밀어붙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일이다.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승전국인 연합왕국에서 차관부터 들이밀겠지. 그게 연합왕국의 수법 아닌가.’
에우로페 역사에서 연합왕국은 패전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면서, 차관을 제공했다. 패전국들은 독이 든 성배라는 것을 알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것을 받아먹어야 했다.
그리고 연합왕국의 이익을 위한 사업을 국내에 벌여야만 했다. 따지고 보면 연합왕국이 맨손으로 공사를 할 것도 아니니 인력 파견 사업만 벌여도 그에 편승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자면 사람을 합법적으로 모아 부릴 수 있는 일을 하는 쪽이 유리했다.
‘결국 원점이군. 하면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광산업을 선택해야 하나?’
광산 자체에서 큰 수익을 기대하기보다 임노동자들을 대량으로 모아들일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그들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한 다음 연합왕국 측과 계약하는 것이 목적. 그렇게 하면 일은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정부로부터 광산을 대충 100군데 정도 받아내고 거기에 노동자를 10만 이상 모은다면 건설업계는 충분히 장악할 수 있다. 그가 경험이 없다면 모르되 거대한 규모의 근대적 도시의 건설을 직접 지켜보고 그 경과를 매일 보고받은 경험이 있다.
아주 승산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 서역인 전문가도 몇 초빙한다면 해볼 만한 일이다.
‘나쁘진 않아. 일은 이렇게 처리하고 구실은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특권은 황실이 내려준 것이니 함부로 처리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따라서 적당한 구실을 붙여 처분하는 것이 뒤처리에도 좋다.
물론 표면적인 면피용 구실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가문이 사업을 지나치게 벌여 자금이 모자란다. 그래서 같은 행상인 이광행을 도와줄 약간의 자금도 내기 어려우니 조정에서 양해를 해 달라 정도인 셈이다. 행상이 공동 운명체임을 아는 조정으로서는 그 말을 의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 정도 명분만 생각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좀 더 설득력이 있는 말이 필요하다. 그리고 리첸에게도 연 오만 냥에 대한 보장을 해주어야 한다.
‘황실에 연공을 한다는 명분으로 싸게 처분한다는 말을 붙이는 것이 낫겠군. 그러면 인사를 하는 줄 알고 덜컥 물겠지.’
승도는 거기까지 생각하자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멍청한 관료들은 희희낙락하며 특권을 반납 받아 다시 다른 상인들에게 그 권리를 팔아넘길 생각에 미소를 지을 것이다.
하지만 곧 전쟁이 터지면 상인들은 아무도 그 권리를 사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이 문제는 이렇게 처리해야겠군.’
유려한 필체로 적어 내려가던 붓이 멈춘다. 결정을 내린 이상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었다. 빼곡하게 관에 올릴 내용으로 채워진 서찰을 비단 꾸러미 속에 넣어 봉한 승도는 시녀를 불렀다.
곧 여자가 모습을 보이자 승도는 비단 서찰을 전해주며 말했다.
“지금 아버님께 가서 이 서찰을 전해드리고 오너라.”
“예, 공자님.”
“아, 그리고 하나.”
“예, 공자님.”
“다녀오는 길에 주방에 들러 요기 거리를 조금 내어 오너라.”
“요기 거리를 말씀이시옵니까? 간단히 드실 것으로 준비할까요?”
“그리 많이 먹을 생각은 없으니 입가심할 정도만 가져오너라.”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물러나자 승도는 붓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종일 생각만 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반쯤 식은 차를 찻잔에 따라 밍밍한 물을 한 모금 마셨을 때,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는 참으로 따스했던 시간이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리하고 싶은 시간.
어머니 이씨 부인이 차를 따라주던 옛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그때 어머니는 승도를 앞에 앉혀두고 찻주전자를 보여주며 물었었다.
“승도야.”
“예, 어머니.”
“차를 왜 반드시 따뜻한 물에 데워서 주는지 아느냐?”
이씨 부인이 묻자 승도는 원론적인 대답을 꺼냈다. 차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여겨서다.
“찻잎을 잘 우려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승도의 대답에 어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찻주전자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 찻잎을 잘 우려내기 위함이란다. 사람도 물과 같다. 따스한 온기를 품은 이에게는 상대도 찻잎처럼 자신의 것을 스스로 우려내어 나누어주는 법이란다. 반대로 차가운 냉기를 품은 이에게는 아무것도 나누어 주지 않으려 한단다. 그렇지 않느냐?”
그녀의 말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자체는 그릇된 것이 없었다.
“그러하옵니다.”
“하면 너는 뜨거운 찻물이 되고 싶은 것이냐? 식은 찻물이 되고 싶은 것이냐?”
뜻하지 않게 어머니가 인생론을 물어오자 승도는 대답을 망설였다. 가족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은 생각에 그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한참을 궁리해야 했다.
그런 승도를 어머니는 온유한 표정으로 지켜봐 주었다.
“그것은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인 듯하옵니다.”
황제로서 단맛 쓴맛을 맛보았던 승도는 그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 말에 간단히 따뜻한 찻물입니다, 라고 대답하기엔 그는 지나치게 이성적이었다. 아들의 그런 모습에 이씨 부인은 머리를 매만지며 타이르듯 말했다.
“나는 네가 몹시 영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어쩌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되어 우리 오씨 가문에서 생각할 수조차 없는 위치에 오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이 어미가 바라는 것은 네가 입신양명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저 타인에게 온기를 나누어주고, 그만큼 돌려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단다. 네 품 안의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고,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단다. 너는 그리될 수 있겠느냐?”
승도는 그제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어머니가 말한 인생론에 대해 그도 공감하고 있던 바였다. 야망보다는 가족이, 정이 중요했다.
그렇게 말해주었던 그 시절의 어머니는 이미 없었다. 수많은 오유도의 첩들과 신경전을 벌이며 집안을 단속하는 와중에 그녀는 단아한 성품을 잃어버리고 변해버렸다. 조금도 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여자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유하를 떠나보내는 결정도 내렸다.
지금의 그는 뜨거운 찻물이 아니라 입에 담은 식은 찻물과 같다. 어머니에게 따뜻한 찻물이 되기로 다짐했던 소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새로운 인생을 살며 평범한 삶을 살겠다 다짐했던 그는 없다.
남은 것은 타인으로부터 진실한 정을 우려낼 수 없는 식은 찻물. 가진 것이라곤 허망한 야망밖에 남지 않은 사내, 황제 오승도뿐이다. 씁쓸한 여운이 입 안을 맴돌았다.
승도는 찻잔을 내려놓고 공허한 허공을 향해 말했다.
“어머니. 소자는 말입니다. 이미 식어버린 찻물입니다. 야망을 불태우며 타인을 밟으려는 인간이 어떻게 타인에게 따스한 찻물이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지난 생처럼 수십, 수백만의 사람을 죽일지도 모릅니다.”
비어버린 찻잔에 다시 찻물을 따르며 승도는 또 중얼거렸다.
“하지만 소자가 잊지 않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식어버린 찻물이라도 그것을 마시는 사람이 만족하면 충분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제가 선택한 길입니다, 어머니.”
승도는 찻잔을 마저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떠나가는 그의 뒤로 흐릿한 초상화 속 금발 소녀의 시선이 희미하게 내리쬐었다.
유난히 그녀와 함께 선 금발 소년의 얼굴이 행복하게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