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9화 (39/425)

제39화. 음모 (3)

아문에서 남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연합왕국 섬’에는 연합왕국 대표부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섬의 이름이 연합왕국 섬인 이유는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이 연합왕국 사람들이라서 그렇다. 같은 이유로 이 섬의 동쪽 3리쯤에 있는 섬은 로망스 섬, 그 옆에는 로우랜드 섬. 이런 식으로 서역 국가들에게 임대된 섬들이 있다.

이 섬들은 비수기에 상관 거주가 금지된 서역 여인들을 위해 각국에 제공되었지만, 실제로 이곳을 가장 잘 이용해 먹고 있는 것은 여자들이 아니라 외교관들이었다.

신이 공식적으로 대등한 외교를 인정하지 않다보니 서역 국가들의 외교관들은 신의 행정권이 미치는 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러한 관행을 바꾸기 위해 연합왕국이 3차례, 로망스가 1차례 사절단을 보낸 바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사절단에게 황제에게 예를 표시할 것을 요구하는 신의 예법이 문제가 되어 사절단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여 서역 국가들은 눈 가리고 아웅 격으로 신에 주재시킨 회사들의 대반들을 통해 비공식적인 외교 활동을 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대반들에게 외교권을 행사할 권한이 있을 턱이 없었다. 따라서 중대한 사안은 각국 섬에 주재한 총영사들의 손에 의해 결정되었다.

섬에 주재한 외교관의 격이 총영사인 까닭은 정식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아 전권 특명 공사를 주재시킬 수 없다는 점, 둘째로 외국의 수도가 아닌 곳에 공사를 파견해 두기에는 국가의 위신이 상한다는 점 등이 있었다.

이 연합왕국 섬에 주재하고 있는 총영사 하워드는 근래에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한 논의를 위해 섬 남쪽에 있는 영사관의 집무실로 관계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에 출두한 것은 동방 무역 회사 대반과 동방 함대에서 보내온 제독, 두 사람이었다.

하워드는 성질이 급한 사내답게 담배부터 뻑뻑 피우며 제 앞에 불려온 자 앞에다 연기부터 불어냈다. 귀족적인 그의 아내가 옆에 있었다면 당장에 등짝을 맞았을 일이지만, 다행히 그의 부인은 7만 리는 족히 떨어진 본국의 론디니움에 있었다.

하워드는 그 사실에 감사하며 파이프를 내려놓고 말을 꺼냈다.

“본국 정부에서 일의 진척 상황을 수시로 물어오고 있소. 총선이 다가와 마음이 급해진 것 같은데 일은 아직도 굼벵이같이 진행되고 있으니, 수상 각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오.”

“그 문제는 시일이 좀 더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일을 서두르면 그나마 불충분한 명분조차 제대로 얻지 못합니다.”

윌리엄 백작이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리며 말했다. 그 말대로 연합왕국은 당장 전쟁을 벌일 입장이 아니었다. 행상에게 아편 거래를 제안하고 그 문제가 불거져 관이 아편을 전면 몰수해 심각한 상황에 이른 것도 아닌 국면에서 무력을 쓰자고 했다간, 당장 의회에서 소란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그런 죽도 밥도 안 될 명분을 내각에 올려 보냈다간 당장 하워드의 목이 날아갈 것이다.

총영사도 그 점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닦달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었다. 본국 정부는 정기적으로 도착하는 연락선 편으로 일을 빨리 하라고 재촉했고, 이권의 확대를 노린 자본가들의 압력도 거셌다.

생각 같아선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것이 중간 관리자의 고뇌라고 하워드는 생각했다.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문득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우 제독이 말문을 열었다. 반혁명 전쟁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하우는 해군에서도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그라면 뭔가 다른 식견이 있지 않을까 하여 하워드가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제독께선 무슨 고견이 있으십니까?”

“고견이랄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일을 드러내놓고 진행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백주대낮에 아편을 대놓고 강주에 운송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물론 서류에는 밀가루라고 써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하우의 말에 하워드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닙니다.”

“어차피 신의 이야기는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우리 정부의 말을 믿을 뿐입니다.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믿는 ‘진실’이 중요합니다.”

하우의 말에 윌리엄 백작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보다는 대중의 눈에 보이는 진실이 중요하다라.”

하워드도 그 말을 곱씹었다. 전쟁에서 흔히 인용되는 경구가 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라는 격언이다.

연합왕국의 명장 밀버러가 남긴 유명한 말로 군대뿐만 아니라 정치계에서도 널리 인용되는 말이었다.

하우가 한 말은 그 경구와 같은 함의를 품고 있었다. 대중을 적처럼 기만하라는 말이다. 하워드는 그 말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군인은 복잡한 외교 관계를 고려하지 않기에 단순명쾌하게 일을 풀어내는 힘이 있다.

하워드도 그 한마디에 머릿속에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그가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 것인지 몰랐다. 가능한 본국 정부에 해가 되지 않으면서 흠결이 없는 명분을 만들려 노력했는데, 그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우의 방식은 그런 논지를 밑바닥부터 뒤집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어리석은 법입니다. 직접 보지 않은 것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고 할까요. 언젠가 론디니움에서 있었던 소동을 기억하십니까? 필립 아우구스트 퐁퓌르가 6차 반혁명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헛소문이 퍼졌던 사건 말입니다.”

“유명한 사건이었지요.”

하우의 말을 하워드가 받았다. 론디니움 소동을 입에 담음으로써 하워드에게 이 옵션의 유효성을 강하게 각인시켰다.

론디니움 소동이란 필립 아우구스트 퐁퓌르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헛소문이 유포되면서 증권가에 대폭락이 발생한 일을 말한다.

당시 주식은 일시적으로 휴지 조각으로 변했고, 투자자들은 제 돈을 회수하려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정작 하루 뒤에 들어온 승전보로 증권가는 정반대의 기현상을 보였다. 론디니움 소동이 보여준 것은 사실이 아닌 정보로도 대중을 얼마든지 기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흠.”

하워드는 파이프를 다시 입에 물었다. 니코틴이 폐에 가득 들어차자 생각이 조금 정리되는 것 같았다. 하우의 제안은 뜻밖에 그가 생각지 못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에우로페에선 쓸 수 없는 방식이지만 동방이기에 가능한 방식이기도 했다. 대중들이 무슨 재주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전쟁이 끝난 뒤에나 알 일이다.

“하우 제독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시간이 급박하다면 이 옵션도 검토해볼 필요는 충분합니다.”

윌리엄 백작이 거들고 나서자 하워드는 더욱 고심에 빠졌다. 외교관은 아무리 달콤한 유혹이 있더라도 그것을 선뜻 집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더욱 고민이었다.

하우의 제안은 그의 고민을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완전한 방법이었지만, 그렇기에 쉽게 선택할 수만은 없었다. 하나 그 마음속에서는 절반 이상 하우의 옵션을 긍정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강주의 방비 태세는 어떻습니까?”

하워드가 고민하는 사이 하우가 윌리엄에게 물었다.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사실상 핵심이 될 수밖에 없는 동방 함대의 지휘관 중 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물음이다.

수시로 동방 회사의 보고를 입수하고 있긴 하지만 현지 사정을 잘 아는 백작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결코 손해나는 일이 아니다.

“최근 들어 방비가 제법 강화되었습니다. 신임 강주 관리사 임경문이 녹기의 기강을 잡아 유효한 동원 전력은 적게 잡아도 4천은 넘을 것입니다.”

“4천이라면 1개 여단은 간단히 넘는 전력이군요. 해군성에서 수송 가능한 육상 전력에 버금가는 규모이니 간단한 적수는 아니겠습니다.”

“그래봐야 오합지졸들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아니라 강주로 가는 길목에 설치된 철제 난간입니다.”

“철제 난간?”

하우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묻자 대반이 설명을 이었다.

“강주 행상들이 총 공사대금으로 은 60만 냥 이상을 쏟아부어 만든 건축물인데, 강주로 올라가는 좁은 협곡 위에 설치된 군사 시설물입니다. 그 위에 대형 화포를 배치하여 금포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든 군함을 공격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봐야 사정거리가 별로일 것 아닙니까? 우리 해군의 능력이라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200m 이상 고지대에 설치된 철제 난간까지 군함의 대포알이 올라갑니까?”

“협곡의 높이가 200m 이상이란 말입니까? 이런 낭패가.”

하우는 혀를 끌끌 찼다. 육상 포대는 통상적으로 해군 군함의 함포에 비해 3배의 위력을 갖는다고 평한다. 이는 오차 범위가 상대적으로 작을뿐더러 포탄의 장전 속도가 배로 빠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동급 대포를 비교했을 때 이야기이고 신과 연합왕국의 기술 격차를 감안하면 연합왕국 측이 화력 열세에 놓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문제는 포대가 점하고 있는 위치다. 강상 전체를 타격할 수 있는 요지에다 수백 미터 위의 높이까지 점하고 있다면 공격자 입장에선 어떻게 손써볼 여지조차 없는 난공불락의 성채나 다름없다.

이는 연사 속도와 사정거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영역. 해군이 그곳을 지나간다면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 일만 있을 뿐이다.

하우는 ‘흐음’ 소리를 내다 다시 물었다.

“철제 난간을 공략할 방법은 없습니까?”

“그 좌우로 녹기의 군영이 있고 지세가 험합니다. 직접적으로 공략할 수단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겨우 1년 남짓한 사이에 강주가 철벽으로 변했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공사를 시킨 자가 누굽니까? 그 임경문이란 잡니까?”

하우는 임경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당연히 군제를 혁신시킬 정도로 방비 개선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니 당연히 그가 했으리라고 생각한 물음이다. 하지만 윌리엄 백작의 대답은 달랐다.

“오유도입니다.”

“오유도? 그자는 강주의 거상으로 알고 있는데. 그자가 무슨 이유로 아무 이득도 나지 않는 철제 난간 공사를 한단 말입니까?”

하우는 자본가가 나서서 국방을 준비했다는 말이 어이가 없어 반문했다. 윌리엄 백작도 그 부분이 의문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일의 주체는 그자입니다. 지난번에 강주 상가 군을 조직해 해병대를 쫓아낸 것이 그 아들 오승도이니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자들은 군사에 흥미가 많아 보였습니다.”

백작의 말에 하우는 묘한 흥미를 느꼈다. 철제 난간도 모자라 또 군사력에 흥미를 보이다니. 모르긴 몰라도 강주를 공격한다면 신의 관군 못지않은 위협 요소가 될 가능성이 보였다.

“동방인답지 않군요. 그자들이 무엇에 또 흥미를 갖고 있답니까?”

“우리 회사에 범선 구입을 위탁했습니다.”

“범선을 말입니까?”

하우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원양 무역은 생각도 하지 않던 멍청한 신에 범선 구입을 생각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랄 일이었다. 물론 승도가 최초의 구입자는 아니었지만, 하우가 아는 한 최초는 승도였다.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상선은 약간의 개조만으로도 무장 상선으로 만들 수 있는데, 우리 입장에선 꽤 거슬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양 항해가 가능한 무장 상선을 취역시킨다. 만약 일이 그렇게 풀린다면 우리 해군 입장에선 꽤 귀찮아지겠습니다.”

하우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해군력을 갖고 있다 해서 바다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무장 상선이 바다에 떠서 돌아다닌다면 그 한 척을 잡기 위해 얼마의 배를 보내야 할지 가늠조차 잡히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실제 신대륙 독립 전쟁 당시에 그런 전례가 있으니 무장 상선 한 척이라고 우습게 볼 일은 아니었다.

“물론입니다. 일단 대반이 계약대로 위탁 주문을 넣어 주었습니다만, 인도일은 전쟁 후로 할 생각입니다.”

“그리하셔야지요. 괜히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하워드는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을 했는지 다소 지친 표정이었다.

총영사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딱딱 두드리다 말을 꺼냈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제독의 말씀대로 일을 진행한다면 해군은 언제쯤 출발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동방 원정군이 편성되어 론디니움을 출발한다면 6개월은 족히 소요될 겁니다. 물론 선전포고가 떨어지면 동방 함대는 언제든 작전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총영사께서 결정하진 않으시겠지요?”

“그야 본국의 지침에 따라야지요. 6개월이면, 이쪽의 의도를 적당히 감추는 것도 일이겠습니다.”

하워드가 입맛을 다셨다. 원정군 주력이 온 다음에 전쟁을 시작하는 게 합리적이다.

가능한 한 자본가들의 이익을 지켜주려면 개전 전야의 시간 동안은 장사를 할 수 있게 두는 것이 상책이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군요.”

“전쟁을 시작하기에 적기인 시기는 언제이겠습니까?”

“굳이 한다면 원정군이 무역풍을 탈 수 있는 시기가 유리합니다.”

“5월에 출발해야 한다면 늦어도 1월까지는 전쟁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하워드는 수염을 매만졌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1월까지 전쟁을 시작할 구실을 얻어낼 수 없다.

정석대로 하자면 몇 달이 더 걸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하워드의 말대로 하면 일정을 딱 맞출 수 있다.

그는 이리저리 주판알을 튕겨보다 무거운 결심을 내렸다.

“좋습니다. 하우 제독의 방법을 써봅시다. 백작께서 제반 준비를 진행해 주시겠습니까?”

하워드가 결정을 내리자 윌리엄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입장에서도 이 방법이 편했다.

뒤로 꼼수를 부려가며 도발을 유도해내는 일은 생각보다 머리가 아픈 작업이라, 이렇게 대놓고 일처리를 하는 편이 총영사에게 닦달도 받지 않고 좋았다.

대반까지 동의하자 일은 순식간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바야흐로 전쟁의 공기가 물씬 달아오른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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