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폭풍전야 (2)
승도는 혼사에 앞서 반씨의 장원을 찾아 단자를 건네는 것으로 예의를 표시했다.
뜻밖에 그가 직접 방문하자 반진유는 기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반진유는 대외적으로 반계관이라 불렸는데, 이는 그가 받은 벼슬을 이름에 포함시킨 존칭으로 실제 이름은 아니었다. 오유도가 오호관으로 불리는 것과 같았다.
반씨의 장원은 오씨 장원보다 규모가 컸는데 이는 반씨 가문의 역사가 오씨보다 오래된 데서 유래했다.
강주 13행이 처음 시작될 당시부터 자리를 잡았던 반씨는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성세를 누렸다. 그 역사는 자그마치 150년에 이른다.
사실 강주의 행상들은 13행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지만 그 명칭처럼 언제나 13개의 상단이 있어온 것은 아니었다.
최초에 13행으로 시작한 행상은 번영이 극에 달했던 50년 전에는 무려 18개의 상단이 있었고, 행상의 폐업이 줄을 이었던 70년 전에는 겨우 4개의 상단이 존립했었다. 13행은 행상을 나타내는 일종의 별칭일 뿐 행상의 숫자 그 자체를 정확히 나타내진 않았다.
그러니 그 기나긴 13행의 역사에서 끝까지 이름을 지켜내며 그 성세를 유지했다는 실로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역사의 산물이 바로 이 장원이었다.
그래서 오씨의 장원이 화려한 궁중을 연상시킨다면, 반씨는 단아한 인상을 주었다. 거창하게 화려한 것들로 장식하진 않았지만 기둥 하나, 지붕의 기와 한 장에서 세월의 힘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오씨와 반씨의 차이, 풍파를 이겨내며 13행과 역사를 함께한 가문이 주는 아우라다.
반진유와 함께 내당으로 들자 금세 보이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여자를 멀리하는 반진유의 성품상 내당에 있는 여자라고 해봐야 그의 딸과 그녀를 시중드는 시녀 몇이 고작이었다.
거기다 내당이 금남의 구역이란 특성을 갖다보니 사람이 많을 수 없었다.
“이쪽으로 드시게.”
“예. 그럼.”
반진유는 연못이 한눈에 보이는 정자로 승도를 안내했다. 정자 안에는 미리 준비해 둔 약간의 요리와 차, 술이 차려져 있었다.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비단 방석을 보던 승도가 먼저 신을 벗고 정자에 올랐다. 바람은 선선하고 습기도 적어 술을 나누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승도를 자리에 앉힌 반진유가 술을 한 잔 따라주며 물었다.
“이번에 혼사를 받아들여 나로서는 상당히 기쁘네만, 갑자기 결정을 내린 이유가 무언지 알아도 되겠는가?”
“반 숙부님의 따님이라면 저의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여겨서입니다.”
“동반자?”
반진유는 생소한 말에 되물었다. 서역에서는 관습적으로 아내를 동반자의 의미로 불렀는데, 이는 여성에게도 작위가 세습되는 풍토에 기인했다. 결혼을 하더라도 여자는 그 작위와 영지, 재산을 뜻대로 할 수 있어 남편은 아내의 지위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즉, 승도가 말한 동반자란 상호간의 결합으로 그 힘을 극대화할 수 있는 동맹의 함의를 품고 있었다.
“예. 저는 조력자가 아니라 제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우군을 원합니다.”
“우군을 원해서 혼인을 한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라 조금 놀랐네.”
반진유는 승도의 대답에 약간 놀라면서도 나쁘지 않은 말이라고 여겼다. 사실 혼약에서 연정이 개입되는 경우는 극히 적었다. 특히나 이번처럼 서로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혼사가 진행되는 경우라면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본들 거짓부렁일 수밖에 없다.
“실망스런 대답이십니까?”
“아니. 대단히 마음에 들었네. 입에 발린 소리보단 그쪽이 훨씬 마음에 드는군. 그럼 내 딸아이를 동반자로 대접해 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필요하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게 둘 생각입니다.”
승도의 말에 반진유는 만족했다. 보수적인 학문의 발달로 상류층에서조차 여성 인권이 바닥을 기고 있는 동방에서 여성은 혼인 이후에는 남편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곤 했다. 그 그릇이 좁다면 그 삶은 팍팍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 점에서 반진유는 승도가 내놓은 대답이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면 딸이 편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는 그에게 만점짜리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미리 이야기해 두겠네. 내 딸아이는 서역 학문에 관심이 많다네. 지금은 집으로 서역 선교사를 불러 수업도 받고 있네. 혼인 후에도 그리해줄 수 있는가?”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그녀가 원한다면 선교사가 아니라 정식 교육을 받은 서역 학자를 초빙해올 수도 있습니다.”
“하하. 좋네, 아주 좋아.”
반진유는 기꺼워하며 승도의 잔에 술을 더 따라주려 했다. 그제야 승도는 완곡히 거절하며 자신이 반진유에게 술을 따라 올렸다. 술이 한 순배 돌자 반진유는 흥이 올랐는지 일전의 이야기도 꺼냈다.
“내 일전에 승도 네가 홍모귀를 물리칠 적에 배포가 크다는 것은 알았다만, 가정사에도 배포가 클 줄은 몰랐구나.”
“과찬이십니다.”
승도는 반진유의 말을 웃으며 받았다. 동방이라면 이 정도의 약속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서역에서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었다. 여자가 하려는 것을 못하게 구속했다간 바로 이혼을 당하고 만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백 년 전, 로망스의 왕비였던 엘레노오르다. 엘레노오르가 이혼을 하며 왕국의 절반에 이르는 영지를 들고 이웃 왕국의 국왕과 재혼해 버렸다. 그 바람에 로망스는 무려 이백 년간 그 후폭풍을 감내해야 했다. 그 교훈을 본 서역 귀족들이 집안에서 어떻게 처신을 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반진유가 기분 좋게 술잔을 다시 기울이던 차에 승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옵고 숙부님.”
“이젠 장인어른이라 부르도록 해라. 어차피 날을 잡았으니 호칭이야 좀 일찍 부른들 어떠하냐?”
반진유가 호칭을 정정해주자 승도도 재빨리 호칭을 바꾸었다.
“예, 장인어른.”
“그래. 할 말이 무엇이더냐?”
“이번에 제가 특권을 반납한 소식은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가 강주 상계에 쫙 퍼졌더구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오승도가 버렸다고 말들이 많아. 하지만 그건 한 치 앞도 못 보는 어리석은 것들의 생각이라고 여긴다. 네게 무슨 생각이 있어 그리한 것이 아니더냐?”
“그러하옵니다.”
“전쟁이라도 날 것 같으냐?”
반진유가 지나가듯 한마디를 던지자 승도도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전쟁 이야기에 대해 크게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이미 거상들은 전쟁의 공기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서역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고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감을 잡지 못하여 손을 놓고 있을 뿐이었다.
“장인어른께서도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상인으로 산 세월이 수십 년이다. 수상한 공기 정도를 읽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느냐? 모르긴 몰라도 행상들이라면 미심쩍은 낌새 정도는 다들 맡고 있을 게다. 거기에 네가 특권까지 처분했으니 이젠 좀 더 의구심을 갖고 있겠지.”
“하면 장인어른께서는 전후에 어찌 대처하실 것입니까?”
“당장 대비할 것은 없다.”
“어째서입니까?”
승도의 물음에 반진유가 수염을 매만지며 답했다.
“오씨와 반씨는 취급하는 물목이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많다. 알고 있느냐?”
“물론 알고 있습니다.”
“우리 반씨가 취급하는 주력 물목은 모두 대체 불가능한 품목들이다. 용설 차와 사향, 수제 주문으로 만드는 찻잔 세트. 모두 서역 왕실 납품용으로 소량 생산하여 공급하는 것들이지. 설사 강주의 독점이 깨진다고 한들 서역인들이 내 손을 거치지 않고 이것을 가져갈 수 있겠더냐?”
반진유의 말에 승도는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기에 제품의 고급화를 추진할 수 있었고, 그에 맞추어 생산 지역도 완전히 통제할 준비를 마쳤으니 반씨는 어지간해서는 흔들릴 일이 없었다.
그것이 제국을 혼란에 몰아넣는 전쟁이더라도 말이다. 이런 저력이 있기에 반씨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13행에서 살아남았을 터였다.
“그렇다면 장인어른께서는 특별히 준비하실 필요가 없으시다는 말씀이시군요.”
“준비할 필요가 없지는 않다. 단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아직 감이 오지 않았을 뿐이다.”
“하오면 저를 도와주십시오.”
“무엇을 하려하기에 오씨의 자산도 모자라 도움을 청하는 것이더냐?”
반진유의 물음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도입니다. 철도를 깔려 합니다.”
“철도라면 쇠로 된 마차가 달린다는 것을 말하더냐? 서역인들의 이야기는 들었다만 그것이 필요한지는 모르겠구나.”
반진유의 생각은 그리 틀린 것이 아니었다. 동양에 전해진 증기 기관차에 대한 이야기 대부분을 종합하면 아직 마차만도 못한 것이 철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도는 그 가능성을 높이 보고 있었다. 그가 중시한 부분은 운송비용의 절감이었다.
철도와 기존 육상 운송 수단의 가장 큰 차이는 대량 수송을 통한 운송비 절감에 있다. 그것은 철도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격차가 압도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증기 기관차의 발전 속도 역시 눈부신 것이어서 가까운 장래에 산업용으로 제대로 쓸 만한 수준의 기차가 나올 것이니, 승도는 철도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운송비용의 절감은 단순히 산업에 직결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철도는 군사적 목적으로도 활용될 수 있었다. 수레와 보병의 발을 이용한 군대의 이동은 일일 30km를 상회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지만, 기차를 이용하면 그것의 몇 배는 되는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에우로페에서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철도 부설을 장려하기도 했다.
철도의 이점은 이처럼 커서 단기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손해더라도 나중에는 무궁무진한 이익을 안겨다줄 수 있었다.
“마차보다 효용이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장인어른께서 도와주시면 전후에 한 번 시도해볼 작정입니다.”
“철도라. 투자비는 얼마나 되느냐?”
“그것이 관계에 적당히 뇌물을 먹여야 하니 적게 잡아도 은 백만 냥은 들어가는 사업입니다.”
“백만 냥이나 든다면 부설 거리를 얼마나 잡고 있는 것이더냐?”
반진유가 백만 냥이란 액수에 기함하며 물었다. 말이 백만 냥이지 그 액수면 연합왕국이 자랑하는 전열함 전대를 통째로 사고도 남을 액수였다. 그만큼 그 돈은 거금이었다.
“아문 주위의 광산에서 아문까지 약 50km 길이로 3개. 강주에서 아문까지 70km 길이로 하나 놓으려 합니다.”
“광산용으로 3개에 강주 아문 노선을 하나 쓰겠단 게로구나.”
“그러하옵니다.”
“광산은 그렇다 치자. 강주와 아문은 왜 철도가 필요한 것이냐?”
“전쟁이 끝나면 서역인들은 강주 대신 다른 통상장을 찾을 것입니다. 장인어른도 아시겠지만 강주가 통상 항구가 된 것은 순전히 방어에 유리한 입지 때문이 아니옵니까?”
“그 말이 맞다. 하면 서역인들이 양강에서 사용할 항구가 강주가 아니라 아문이 된다는 뜻이더냐?”
“그렇습니다. 서역인들의 입장에선 굳이 금포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하는 것보다는 아문 반도에서 일을 처리하고 가는 편이 수월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물목을 아문까지 실어 내리는 것부터 큰 문제가 됩니다.”
승도의 말에 반진유는 지극히 당연한 물음을 던졌다.
“배가 있지 않느냐?”
“배는 문제가 됩니다.”
“배가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이더냐?”
“아문은 항구가 작습니다. 확장을 한다고 해도 수용 능력은 그리 커지기 어렵습니다. 항구가 번잡하다면 효율성이 크게 떨어집니다. 거기에 강주에서 아문까지 내려오는 물량을 전부 배로 실어다 나르면 항구는 마비되고 말 겁니다. 해서 철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승도가 교통의 문제를 지적하자 반진유는 수긍했다. 수운의 편리함을 떠올리다 항구의 번잡함을 잠시 잊었던 탓이다.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같은 부분을 놓치지 않은 승도의 안목에 감탄했다.
물론 승도가 그런 부분에 주목한 것은 상인이 아니라 군인으로서의 경험 덕분이었다. 흔히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들의 역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고 따질 때, 의외로 전략이나 전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부분은 행정 능력인데 이 행정 능력이란 적재적소에 군대가 소비할 물자를 준비하고 적시에 옮길 수 있는 것인가로 판가름이 났다.
그렇기에 일류의 지휘관을 자부하는 오승도가 교통 문제에 관심이 없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좋구나. 하면 네 생각대로 철도에 힘을 실어주마. 전쟁 후라고 했으니 자금은 천천히 준비해도 되겠느냐?”
“예. 2~3년 정도는 여유를 두고 지켜보려 합니다.”
“2~3년이라.”
반진유는 수염을 쓰다듬다 승도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전쟁이 2년 정도는 갈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더냐?”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연합왕국이 침공해 온다면 필시 이 나라의 동맥인 수운을 차단하려 들 것인데, 그리하면 정부는 육로 수송으로 버티며 장기전으로 넘어가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같은 방책으로는 결국 2년을 넘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 수운이 없다면 이 나라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2년이나 보고 있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구나.”
“대국의 자존심을 생각해서입니다. 적어도 조정이 현실을 인식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승도의 말에 반진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옳구나. 아무쪼록 이 전란을 편히 넘겼으면 싶구나.”
“그리될 것입니다.”
승도는 반진유와 이야기를 나누며 오래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혼사는 한 달 후로 약속을 잡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