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폭풍전야 (3)
아문은 평소에도 많은 배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다. 짧은 시간 동안에 수십, 수백 척의 배가 지나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이 배들은 모두 아문의 해관에서 서류를 받고 강주로 올라가는 것이 보통이다.
한데, 뻔히 서류를 발급받지 않고 무단으로 강주로 향하는 배가 있었다. 서류를 발급받은 배들은 황색 깃발을 달고 운행하지만, 지금 올라가는 범선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황색 비슷한 것도 걸고 있지 않았다. 불법 선박이다.
건수를 잡은 아문 관료들이 그냥 있을 리 없다. 당장에 배를 정선시켜 귀한 물건을 벌금조로 홀딱 벗겨낼 절호의 기회이니 구경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그들은 아문 감독 위해충에게 보고할 것도 없이 즉각 군선을 출동시켰다.
이럴 때 신의 수군은 누구보다 빠르다. 남들보다 빠르게, 남들보다 먼저 뛰어 벌금을 챙기려는 탐관들의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돛을 편 군선들이 무서운 속도로 금포강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항행 중이던 선박들이 돛을 내렸다. 노를 저어 배를 견인하던 종선들도 마찬가지다. 군선이 뜬 이상 그렇게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신의 수군들은 목이 빠져라 노를 저으며 눈앞에 보이는 불법 선박을 쫓았다.
불법 선박 하나를 잡으면 그들에게 떨어지는 수당이 상당했다. 탐관들이 챙겨 준다기보다 배를 검색조로 둘러보며 훔쳐가는 개념에 가깝지만, 아무튼 좋은 벌이가 되는 일이다.
그러니 노를 젓는 그들의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봐, 이봐. 그래 가지고 오늘 청루에 가서 영월이하고 힘을 쓸 수 있겠나? 응?”
군관의 농에 수졸이 얼굴을 붉히며 ‘끄응’ 소리를 낸다. 힘껏 노를 저을 때마다 배는 빠른 속도로 쭉쭉 나아간다. 돛이 배의 속도를 보조해주긴 하지만 역시 강이나 근해에서는 돛보다는 노의 효율이 압도적이다.
수군들은 쉴 틈도 없이 노를 저으며 불법 선박을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저 배만 잡으면 오늘 기루에 올라 목에 기름칠을 좀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그들의 근육에서 한 올의 힘까지 쫙쫙 짜냈다.
마침내 군선들이 불법 선박을 포위하자 군관들이 갈고리를 던졌다. 불법 선박의 선원들은 당황한 듯 저항하지 않고 손을 들었다. 군관들이 먼저 도선하고 이어 수졸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제일 먼저 발을 디딘 군관이 먼저 언성을 높였다.
“이 배, 어디 있나? 선장. 응? 어디 있나? 선장.”
그는 어설픈 연합왕국어를 떠들었다. 주어와 동사, 목적어를 붙인 간단한 문장만 떠들었는데, 강주식 연합왕국어를 떠들다보니 배에 타고 있던 자들로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실 강주식 연합왕국어는 단시간에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변칙성 언어라 대단히 오류가 많았다.
예를 들어 쌀(rice)과 이(lice)의 발음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서역인들을 기겁하게 만든 일도 있었다. ‘쌀을 팝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을 발음을 이상하게 하여 ‘이를 팝니다.’라고 말한 해프닝이다.
이런 일들이 있을 만큼 문제가 많다보니 서역인과 신국인들의 의사소통은 혼선을 빗기 일쑤였다.
“제가 선장입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만국 공통의 눈짓, 발짓을 통한 의사소통에 서역인들이 그 말을 알아들었다. 곧 그들은 선장을 데려왔다. 다행히 그는 신국어를 조금 할 줄 알아 대화가 막히지는 않았다.
군관은 선장을 향해 윽박지르듯 말했다.
“당신, 통관 절차 없다. 벌금 문다. 불법 선박. 이 배 물품 압수. 벌금이다.”
군관은 혹시나 상대가 알아듣지 못할까 싶어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말을 되풀이했다. 선장은 그 말에 당황한 얼굴빛을 보이더니 제 선원들 중 누군가에게 말했다. 그제야 선원 하나가 나오더니 선장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그러자 선장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오해이십니다. 저희 배는 서류 절차를 마친 배입니다.”
선장이 제대로 신국어를 구사하자 군관은 안도하며 재빠르게 신국어로 물었다.
“통관 절차를 거쳤다고?”
“물론입니다.”
군관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장대를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그럼 황색 기, 왜 달지 않았나?”
“강주가 초행이라 잘 몰랐습니다. 깃발은 발급받은 상태입니다.”
그러면서 선장이 손짓하자 선원이 깃발을 가져왔다. 정말 통관 절차를 밟은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군관은 그것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불법 선박인 줄 알고 신나게 쫓아왔는데 허탕을 친 모양이었다. 그로서는 이보다 기분이 나쁜 일이 또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그를 고생시킨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트집이라도 잡아서 돈푼을 뜯어내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군관이 눈짓을 하자 수졸들이 배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행동에 선장이 ‘어어’ 하는 표정을 짓다 항의했다.
“우리 배는 불법이 아닙니다. 왜 검문을 하시는 겁니까?”
“통관은 밟았지만 불법 화물이 실렸는지 검색하는 건 우리 고유 권한이지.”
군관이 씨익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 검색 과정에서 물건 몇 훔쳐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서역인들이 달리 검색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할까.
수졸들이 배를 뒤지는 동안 군관은 포구로 돌아가 상관에게 뭐라 보고를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불법 선박도 아닌데 크게 난리를 부렸으니 한 소리 들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불법 선박인데 뇌물을 자기가 받아먹고 입을 씻는다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골치 아픈 일이다. 그는 뒤처리를 할 생각에 인상부터 찌푸렸다. 당연히 이 배에 트집을 잡아서라도 돈푼을 뜯고 말겠다는 결심도 더욱 확고해졌다.
그때 한참 배를 뒤지던 수졸들 중 하나가 급히 군관에게 달려왔다. 그는 군관의 귀에 대고 뭐라 소곤거렸다. 그 말을 듣던 군관의 표정이 점차 기이하게 변했다. 수졸의 말이 끝나자 군관은 입술을 비틀었다.
“당신, 지금 이 배에 뭘 싣고 있는 거지?”
“뭘 싣고 있다니요? 우리 상관에 공급할 밀가루를 가져갈 뿐입니다.”
선장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이 밀가루라면 수졸이 그리 놀라 뛰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밀가루? 지금 감히 우리를 능멸하려 드는 것인가?”
군관은 버럭 화를 냈다. 아무리 아편 밀수를 공공연히 눈감아 준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백주대낮에 수군의 코앞을 지나 아편 밀수를 하는 꼴을 방관했다가 임경문의 눈에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그는 제사상을 받아놓았다고 해도 좋다. 그러니 목숨이 달린 그로서는 뇌물이 아니라 뇌물 할아비라도 받을 수 없다.
“아니. 서류에 밀가루라고 적고 통관한 배입니다. 이제 와서 밀가루가 아니라고 우기는 저의가 뭡니까? 뇌물이 적은 겁니까?”
선장이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들자 군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자가 지금 상황 파악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언성이 높아지고 과격한 행동이 나오게 된다.
“이 미친 자가 상황을 모르는 모양이다. 뭣들 하느냐. 당장 이자들을 포박하고 배를 나포하라. 아편은 증거품으로 모두 몰수다.”
“아편이라니요! 밀가루라니까요.”
선장이 버럭버럭 대들자 군관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수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선원들을 차례로 제압했다. 하나둘 선원들이 무릎이 꿇려지는 동안, 군관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선장을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군관의 고개가 돌려진 순간 선장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승리자의 미소였다.
***
아편 밀수는 신제국 내에서 심각한 중죄로 간주된다. 여기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다. 하지만 신은 외국인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 규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을 감옥에 수용해 두었을 뿐,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방침은 좀처럼 세우지 못했다.
또 압수한 아편도 문제가 되었다. 그 이유는 신제국 측의 부패한 행정 체제 때문이었다. 통관 절차에서 밀가루라고 인정해놓고, 뒤에 와서 아편이라고 단속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는 신의 행정 능력이 신뢰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연합왕국 측은 날이면 날마다 이 문제를 놓고 신제국에 자신들의 입장을 설파했다. 신의 사법 제도와 부패한 행정을 믿을 수 없으니 자신들이 영사 재판권을 행사하여 연합왕국의 법률에 따른 ‘공정한 재판’을 하겠다는 것이 그들 주장의 요지였다.
당연히 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연합왕국 측에서 신에 대한 적의가 고조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일부에서는 신의 관리들이 뇌물을 적게 주어 앙심을 품고 밀가루를 아편으로 바꿔치기를 하고 누명을 씌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여론이 조성되자 정치가들은 물론이고 이윤을 노리는 자본가들이 일제히 합세하여 기름에 불을 붙이려 들었다.
“신은 야만적인 국가다. 그곳의 관리들은 최소한의 원칙조차 저버린 짐승 같은 것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우리 국민의 목숨을 내맡기고 애국심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일부 정치가들은 공공연히 신의 주권을 무시하고 무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론디니움 타임스의 기사 일면에는 ‘야만국과 문명국의 차이’라는 공격적인 논조의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바야흐로 연합왕국의 여론이 가마솥 안의 기름처럼 끓어오르면서 몇몇 정치가들의 머릿속에서 구상되었던 신과의 전쟁은 점차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하하하하. 이거 일이 아주 잘 풀렸습니다.”
수상 관저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총선에서 승산이 없다고 여기던 차에 때맞추어 일이 전개되니 이보다 기쁠 수는 없는 일이다. 수상이 흡족한 미소를 짓자 해군성 장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아주 매끄럽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워드, 그 친구가 생각보다 능력이 있는 모양입니다. 다음번에는 사교 클럽에도 한 번 불러주시고, 자리도 하나 마련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의 일등 공신을 내가 모른 척하겠습니까? 다음 인사 때 하워드 그 친구에게 신임 공사 자리를 줄 생각입니다.”
수상은 논공행상을 잊지 않는다는 듯 그 부분을 힘주어 말했다. 아닌 말로 총선에서 패배가 예정된 그들을 구원해준 하워드이니 그 정도의 포상은 당연했다. 수상의 말대로만 된다면 하워드는 총영사에서 전권 특명 공사로 영전하게 될 것이니, 그 포상은 작지 않다 할 수 있었다.
“그럼 슬슬 모병을 준비해야겠군요?”
육군성 장관이 말을 받자 수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지않아 하원에서 전쟁 결의안이 제출될 거요. 길어도 몇 주 안에 모병소 설치를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수상의 대답에 육군성 장관은 만족했다. 연합왕국은 전통적으로 육군이 매우 약한 나라였다. 섬나라라 육군이 필요 없기도 했거니와 의회가 체질적으로 상비군을 싫어한 탓이기도 했다.
그래서 평시에 유지되는 연합왕국 육군의 숫자는 3만에 불과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국에서 유지되는 전력이고, 광대한 식민 제국을 지탱하는 치안 유지군 및 현지인 출신의 보조 부대를 합하면 수십만 단위는 된다.
아무튼 육군의 규모가 크지 않다보니 전쟁을 하려면 모병은 필수적이었다. 개전이 선언되면 1~2주 내에 모병소가 설치되고 젊은이들을 소집하게 마련인데, 이번 전쟁에서 육군이 필요로 하는 소요 인원은 약 4,000명이었다. 육군 입장에서는 그 이상의 인원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 병력은 소집된 후 3개월에 걸쳐 훈련을 받게 되므로 선전 포고가 선언되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원정군이 출발하게 된다 할 수 있었다.
“우리 해군도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해군성 장관도 한마디 끼었다.
해군은 신의 수운을 차단하고 육군의 수송 및 보급을 전담하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이중 해군 본연의 역할인 제해권 장악과 수운 차단은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육군의 수송과 보급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가까운 나라라면 몰라도 지구 반대편의 국가를 공격하는 원대한 침공이기 때문이다.
해군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소수의 상선으로는 이 원정을 지원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해군이 사용할 식량과 탄약을 수송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버거울 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민간의 상선을 대량으로 징발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해군성 장관이 말한 준비란 이것을 의미했다.
전통적으로 연합왕국의 해운은 세계 최강을 자랑해온 터라 민간 상선은 넘쳐났다. 해군이 원정에 소요될 것이라고 산출한 최소 수치인 60척의 100배에 달하는 5,800척의 상선을 가진 것이 연합왕국의 해운업이다. 그러니 상선의 징발 자체에 문제가 생길 소지는 없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징발 과정에 필요한 계약서의 작성과 예산 처리다. 모두 행정적인 문제다. 이 서류 처리 작업은 짧게 잡으면 1개월, 길게 잡으면 3~4달도 우습게 잡아먹는 일이라 지금부터 준비해야 원정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준비를 진행하시면 특별 예산을 편성해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수상은 해군이 왜 지금부터 준비를 시작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도 한때는 해군성에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장관들이 한마디씩 꺼낼 때마다 전쟁의 윤곽이 분명해졌다. 실무야 장관 아래의 관료들이 할 일이지만 큰 틀에서 ‘할 일’을 정하는 것은 장관의 몫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틀을 세운다는 건 그만큼 이 나라가 전쟁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후 처리를 지금 논의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전후는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일단은 통상 제한부터 철폐시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외무성 장관의 말에 수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공회의소의 입장을 감안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아문도 할양받아야 합니다.”
해군성 장관의 말에 수상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아문은 왜 필요하단 겁니까? 다른 땅을 받아도 좋을 것 같은데.”
“다른 곳보다 아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곳은 머지않아 우리 제국이 가진 땅 중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될 겁니다. 아문을 가지면 우리는 동방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장관의 말에 수상이 되물었다.
“해군의 기착지로 필요하다, 그 말씀이십니까?”
“현재 우리가 동방에 가진 전진 기지들은 지나치게 서남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우리의 영향력을 확장하기엔 썩 좋은 입지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아문은 꼭 필요한 땅입니다.”
“지리적 입지라.”
아문. 하긴 그곳을 못 탐낼 것도 없다. 승전국의 입지가 있다면. 수상의 눈이 테이블 위에 깔린 신의 지도를 날카롭게 훑었다. 그 눈이 가 닿은 곳에 불길한 잉크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