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선전포고 (3)
연합왕국의 의회는 양원제를 취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귀족들이 장악해온 상원과 부르주아들이 참정권을 확대하여 장악한 하원이 그것이다.
이중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것은 하원이었다. 징세부터 선전포고에 대한 가부까지 중요한 핵심 사안은 모두 하원에서 결정되었다.
오늘 하원에 올라온 안건 하나도 이곳에서만 처리가 가능한 것이었다. 바로 신과의 전쟁에 대한 ‘전쟁 결의안’이 그것이었다. 안건의 제출자는 보수당의 당수이자 내각의 수반인 수상이다.
그는 기조연설을 마치며 이 안건을 정식으로 제안했고, 그로써 전쟁의 불씨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안건 자체는 이미 몇 주 전부터 그 내용이 파다하게 알려진 터라 안건의 제출은 이제 이 문제를 의회에서 논의해 가부를 정하자는 의미가 강했다.
잠시 정회를 한 동안, 자유당의 젊은 의원들이 의원 휴게실에 모여 이 제안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이 전쟁 결의안에 대해 가장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20대 후반의 젊은 귀족 사내, 브루스였다.
브루스는 가문의 정치적 후광을 등에 업고 손쉽게 정계에 입문한 인물로 고생을 해보지 않은 엘리트에 속했다. 그렇기에 세파에 때 묻지 않은 면모를 가지고 있어 ‘명예’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노련한 정치가들이라면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소리를 한다고 하겠지만 브루스는 그런 시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수상 각하의 연설은 상당히 부당한 것이었습니다. 밀가루든 아편이든 그것을 수입하는 국가는 어디서든 단속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물며 그것이 통관될 당시부터 ‘아편’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왕국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이 추잡한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동의해선 안 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보수당 쪽이 아주 명분도 없이 꺼낸 말이 아니라는 점이 걸립니다. 정식 통관 절차를 밟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나서면 우리 입장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전쟁 결의안을 통과시켜 주는 것이, 우리 당과 왕국의 양심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당장은 창피를 당하더라도 앞장을 서서 전쟁을 막는 것이 최선입니다.”
“경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우리 자유당 내부에서도 동조하는 목소리가 많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될 겁니다. 당장 우리 지지기반인 소상공업자들만 하더라도 이번 전쟁에 대해 찬성하는 목소리가 없잖아 있을 겁니다. 선거를 생각하면 보수당 쪽의 결의안에 마냥 반대해서도 안 됩니다.”
브루스는 대의와 명예를 부르짖었지만 사실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기는 바로 이익이다. 대의를 따라 왕국의 양심을 지킨다는 ‘자기만족’은 얻을지 몰라도 선거에 패해 의원 자리를 잃으면 남는 것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전쟁 결의안은 대세나 다름없었다. 보수당뿐만 아니라 자유당 내에서도 동조자들이 많아 이 흐름에 맞선다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그 부담을 무릅쓰기엔 브루스의 친구들은 용기가 부족했다.
한참 젊은 의원들을 설득하던 브루스는 마침내 그들이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으로는 자신에게 어느 정도 동조하는 듯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눈은 이미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다. 브루스는 씁쓸한 마음으로 설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의원들이 회의장으로 돌아오자 전쟁 결의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의원들은 차례로 발언권을 허락받아 연단에 서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신과의 전쟁을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당과 계파의 차이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은 대세.
의회의 분위기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연합왕국이,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란 나라가 어째서 부도덕한 전쟁을 입에 담으려 든단 말인가?”
브루스는 탄식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세 번째로 연단에 오른 자의 말은 실로 가관이었다.
그는 수상보다 더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다. 실로 보수당의 강경파다운 언사였다.
“…우리 정부와 의회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위해 존재합니다. 잘난 철학자들의 사회 계약론 따위를 빌려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 사실을 부정하시는 분들은 이 자리에 계시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번 일에 대한 처리는 명약관화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국민이 정당한 무역을 위해 방문한 곳에서 ‘믿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채 그 재산과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일에 대해 대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해야 그 야만인들과 미개한 나라에 교훈을 내리고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쟁이다!”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이자 연단에 선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더욱 힘을 주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바로 우리 왕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서 존립하기 위해 필요한, 성전인 것입니다. 국민의 이름으로 이 전쟁을 가결해 주시길 청합니다.”
연단에 선 자가 물러가자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연설을 한 자는 반혁명 전쟁의 전쟁 영웅으로 이름이 높은 알링턴 공작이었다.
하원에서도 명망이 높은 보수당의 거물이 내뱉은 연설에 분위기는 단번에 전쟁 쪽으로 달아올랐다.
알링턴 공작이 연단에서 내려가자 자유당 쪽의 연설 순서가 되었다. 자유당의 당수, 리브 백작이 고개를 흔들며 차례를 고사하자 브루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래도 할 말을 해야겠다는 듯 눈빛을 빛내는 브루스의 태도에 리브는 턱을 매만지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보수당 쪽이 지나치게 주도권을 잡는 국면에는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브루스가 앞으로 나서자 보수당 의원들 사이에서 비아냥거리는 듯 수군거림이 들렸다. 한마디, 한마디 호의적인 언사는 찾아볼 수조차 없다.
운 좋은 애송이. 주제도 모르는 정치 초년생. 가문의 후광만 믿고 입만 산 핏덩이.
그런 말들을 뒤로하고 브루스는 심호흡을 하며 연단에 올랐다.
“신의 영토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그 법률에 따르지 않는 외국인에 대해 신 당국이 적절한 조치를 취한 것이 어째서 그들의 죄가 되는지 본인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전쟁이 얼마나 오래갈지, 그 수행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판단할 능력이 없지만,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큼 부도덕한, 왕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이제껏 보지도 못했고, 책에서 읽어본 적도 없었노라고. 이미 국가의 명예는 더럽혀졌습니다. 국가의 불의는 국가의 몰락을 앞당기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입니다. 이 전쟁의 승리와 그 이득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득이 아무리 크더라도 국민과 왕국이 입을 명예, 위신,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알링턴 공작께서는 조금 전 유려한 연설로 밀가루 문제가 충분히 전쟁 구실이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도 우리의 깃발과 위엄을 모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선원들 마음속에 불러일으킬 웅심에 대해 떠드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왕국 인들이 왜 국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고 영혼이 고양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국기가 항상 정의의 편, 압제의 적, 민족의 영광, 공명정대한 상업을 위해 싸워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고귀한 우리 정부의 원조 하에 그 깃발은 추악한 아편 밀수를 보호하기 위해 나부끼고 있습니다. 밀가루라고 말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밀가루가 아니라 아편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실 겁니다. 신의 잘못된 행정 조치는 분명 실수입니다. 하지만 양심에 대고 묻는다면 그것을 밀가루라고 신 앞에서 맹세하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 우리의 국기는 더럽혀졌습니다. 오래전 우리의 적들이 우리의 깃발을 끌어내리고 우리의 배를 불태울 때, 우리는 분노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왕국의 국기가 펄럭이는 것을 보아도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도 없으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격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신의 해안에 게양되어 있는 국기를 내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는 그 깃발을 보고 소름끼쳐하며 뒷걸음치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우리의 국기를 보며 느껴온 감동을 다시 느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정의는 그들 편에 있습니다. 이교도이며 반쯤만 문명화된 민족인 그들이 정의를 가진 반면, 계몽되고 문명화된 우리는 정의와 신앙으로부터 벗어난 목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우리 왕국의 정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우리가 정의의 편에 서서 전쟁을 한다고 확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브루스는 정제된 어조로 말했다. 처음에는 그의 말에 냉소를 짓던 보수당 의원들도 조금은 표정이 바뀌었다.
명예. 한때는 그것이 가장 귀한 가치인 시절도 있었다.
적어도 푸른 피의 명예를 기억하고 있던 이들에게 이 일갈이 던진 충격은 작지 않았다. 자신을 속이며 정의인 척 합리화하지 말라고. 무엇이 진정 명예인지를.
브루스가 연설을 마치고 연단을 내려가자 회의장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알링턴 공작의 연설 때만 해도 열기에 휩싸여 있었지만 지금은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표결을 기다리던 로스실트 남작의 미간이 굳어졌다.
“저 애송이가 산통을 깨트리는군.”
“걱정 마십시오. 표결은 우리가 이길 겁니다.”
로스실트를 수행해온 보좌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차갑게 식은 분위기에 알링턴 공작의 입술이 뒤틀렸다. 그는 막 자신의 옆을 지나던 브루스에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궤변을 잘 늘어놓더군. 하지만 잘 들어라, 애송아. 나는 네가 핏덩이이던 시절부터 로망스를 비롯한 적들을 물리치며 이 나라를 지켜왔다. 무엇이 국익인지 천지분간도 못 하는 주제에 감히 왕국의 명예와 이익을 입에 담아? 웃기는군.”
공작의 말에 브루스도 고개를 돌리고 똑바로 그 얼굴을 보고 말했다. 전쟁 영웅으로 명망이 높은 공작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겠다는 듯 그 목소리는 단호했다.
“명예는, 한 번 구정물을 뒤집어쓰면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법입니다. 저는 조국이 역사의 심판 앞에 섰을 때 당당한 모습이길 바랍니다. 공작께서 말하시는 ‘위대함’은 가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상론이지. 전쟁에 선악을 들먹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다고 생각하나? 명예 따윈 어린애 장난 같은 것이다.”
“정말 명예가 장난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공작께선 지금 당장 아편을 파는 장사치가 되셔도 되겠군요.”
“뭐야?”
공작이 언성을 높이자 그 주변에 있던 의원들이 인상을 썼다.
“무례하군. 말을 가려서 하시게. 이분이 누구이신 줄 알고 감히 그따위 망동을 늘어놓는 것인가?”
“조국을 구정물 통에 빠트리려는 늙은 너구리로 보입니다.”
브루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몸을 돌려 알링턴의 의원석을 지나쳤다.
세 시간 후, 의원들의 발언이 모두 끝나자 의장은 직권으로 전쟁 결의안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시작했다. 자유당과 보수당 의원들이 차례로 투표함에 종이를 적어 넣는 동안, 브루스는 신을 향해 수없이 빌었다. 제발 이 전쟁을 막아달라고.
“투표 시간 5분 남았습니다.”
아직 투표하지 않은 젊은 의원들은 마음을 정하지 못한 듯 팔짱을 낀 채로 투표함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분 자유당 의원들이었다. 결국 그들은 투표 시간이 종료될 때까지 투표를 하지 않았다.
투표가 끝나자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투표함이 개봉되었다. 모두가 당연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집계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깨트린 것이었다. 찬성 273표, 반대 266표, 기권 5표. 압도적인 전쟁 대세론이 자리하고 있던 분위기라곤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로스실트는 모든 것을 뜻대로 좌지우지하다 한 방 먹을 뻔한 상황에 불쾌감을 느꼈는지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브루스 경, 자네 연설이 인상 깊었네. 이 정도면 충분히 선전한 걸세.”
자유당 당수 리브 경이 흡족한 얼굴로 브루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지만, 브루스는 굳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투표 결과에 따라 연합왕국 의회는 전쟁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신’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