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선전포고 (4)
신에 대한 선전포고.
의회에서 개전을 선언한 것치고는 왕국 본토의 분위기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전쟁을 선언했다곤 했지만 지구 반대편의 일이다.
하물며 연합왕국의 식민 제국에 털끝만한 손실도 줄 수 없는 나라를 공격하는 일이다보니 오히려 전쟁을 오락거리로 보는 시각들도 있었다.
각 지방 및 주마다 설치된 모병 소들마다 건장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신비로운 동양에 대한 여행을 겸하여 참전하겠다는 철없는 자들부터 ‘불타오르는 애국심’을 숨기지 못하는 자들까지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모병소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
상대가 강대국인 로망스나 여타 에우로페의 국가들이었다면 이 정도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나라들이 상대일 때는 모병 인원이 제대로 모이지 않아 ‘강제 모병(연합왕국은 모병 인원이 모이지 않으면 모병관과 군대를 풀어 선술집과 항구 등에서 보이는 사람은 모조리 잡아가는 제도를 갖고 있다)’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약해빠진 동양 국가가 상대라고 하니 모두가 용기백배한 듯 조국의 이름을 연호하며 모병소 앞에 줄을 섰다.
그 경향은 언론이 더욱 부채질한 감이 있었다. 대표적인 언론 매체 중 하나인 론디니움 타임스의 일면에는 이런 도발적인 제목이 걸려 있었다.
-제국을 정복하는 데 4천 명이면 충분하다-
육군의 모집 인원을 보고 뽑은 기사 제목이었지만 그 여파는 굉장했다. 겨우 4천 명으로 상대할 정도로 약한 나라라면 죽을 걱정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젊은이들의 머리에 박힌 생각이다.
물론 신을 격파하는데 겨우 4천 명만 동원되지는 않았다. 해군과 해병대, 육군만 따져도 2만 명이 넘는 인원이다. 거기에 상선의 선원들을 포함하면 전체 원정군 규모는 3만에 육박하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육군성이나 해군성은 여기에 대한 정정 보도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분위기야말로 국민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모병관 앞에 선 젊은이들은 모두 목소리가 크고 자신만만했다. 어딜 봐도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들이었다.
“다음.”
모병관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하자 다음 젊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사무적으로 종이 위에 펜을 가져간 채로 물었다.
“이름, 출신지, 거주지를 말하시오.”
“윌리엄 아서 필리프. 출신지는 샘튼. 현 거주지는 마리아 궁이요.”
“음, 윌리엄. 출신지는 샘튼. 거주지는 마리. 마리아 궁?”
모병관이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앞에 선 건장한 젊은이는 평범한 신분의 사내가 아니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지고한 신분, 왕가의 일원이다. 그것도 그냥 왕족이 아니라 장차 여왕의 부군이 될 사람이다. 말하자면 차기 대공의 자리가 약속된 남자다.
“거기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윌리엄은 그것이 뭔 대수냐는 듯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제야 모병관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레 종이 위에 이름과 출신지를 적었다.
“공작 전하께서 어찌 모병에 자원하신 것입니까? 신문에 나오기로는 육군 장교 모집에 이미 자원하신 걸로 나와 있었습니다만, 아니십니까?”
“어차피 육군에 들어갈 거라면 모병소를 거쳐서 가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가 많더군요. 어차피 군에 들어가면 임관을 받을 것이니 기초부터 닦고 올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교 임관은 뒤로 미루고 먼저 사병으로 입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물론 전하의 말씀이 틀리신 것은 아니지만.”
모병관은 왕족이 훈련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을 하려다 꾹 참았다. 명예 의식이 높은 육군은 출신을 봐주지 않고 굴리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장교라면 몰라도 사병에 대해서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것이 왕국 육군이다.
물론 그 신분이 신분인 만큼 모병소로 들어가더라도 곧 예우 차원에서 없는 자리라도 만들어 장교 자리를 주긴 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여왕의 부군이 될 사람을 일개 사병으로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윌리엄 전하시다.”
“왕족이 사병으로 지원을?”
뒷줄에 섰던 자들이 그제야 윌리엄을 알아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실은 공작이 의도한 것은 여기에 있었다. 전쟁에 솔선수범하는 왕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왕실의 입지를 다져 여왕에게 보다 안정된 정치적 입지를 주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바란 모든 것이었다.
“여기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지정된 날짜가 되면 궁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모병관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원칙대로라면 사람이 모일 때까지 모병소 뒤에 수용해 두었다가 훈련장으로 한꺼번에 끌고 가야 할 일이지만, 윌리엄을 그렇게 대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일단 높으신 분들의 마음이 상당히 불편할 것이다. 그분들의 마음이 불편하면 모병관은 생이 고달파진다.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절차를 잘 몰라서. 잘 부탁드립니다.”
윌리엄이 악수를 청하자 모병관은 황송스럽다는 표정으로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윌리엄은 인파를 헤치며 모병소를 나섰다.
그때마다 윌리엄 전하 만세와 여왕 폐하 만세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전쟁에 솔선수범하는 상류층만큼 대중의 지지를 얻기 쉬운 극적인 장면도 없다.
그것이면 족하다.
윌리엄은 만족하며 마차에 올랐다.
***
연합왕국 동방 원정군의 본진이 속속 그 진용을 갖추는 동안, 제국 정부도 아주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들도 연합왕국의 침공 가능성에 대해 준비를 갖출 필요성 자체는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연합왕국의 무력을 체감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조공 무역을 차단당한 동영(東獰)인들의 선례를 기억해서다. 10년에 3번 조공을 바치도록 허락된 동영 사람들에게 ‘조공’을 허락하지 않자 그들은 단번에 해적 집단으로 돌변하여 해안을 노략질하였다.
해적질은 조공이 재개되기까지 무려 1세기나 계속되었다. 이런 전례를 본 제국 정부로서는 홍모귀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 보지 않았다.
문제는 그 홍모귀들이 지금까지 제국이 겪어온 오랑캐들과는 차원이 다른 적이라는 데 있었다.
하지만 중앙 정부에서는 그들을 동영 오랑캐 수준으로 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오랑캐가 난리를 부린다고 해도 먼 남쪽 해안 지역에서 소란을 부리는 수준에 머물 것이라 여겼다. 현실 인식이 그 정도에 그치다보니 제대로 된 방비 명령이 내려질 턱이 없다.
정부가 내린 조치는 각 성과 부, 현, 혹은 개별 군진 단위에서 해안 방어 태세를 점검하고, 녹기와 단련의 동원에 대한 지방관들의 재량을 늘려준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하지 않았다면 손발이 묶인 상태로 두드려 맞았을 것이니 지방관들 입장에서는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했다.
“정세가 그러하니 자네에게 많은 것을 의지해야 할 것 같네.”
임경문의 말에 승도는 공손한 태도로 그 말을 받았다. 그가 임경문의 관저에 들게 된 것도 곧 닥칠 전란에 대비해 관과의 협조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한시적인 협조라고 하더라도 일단은 협력 관계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를 말씀이십니까? 저희도 곧 신의 백성. 나라를 지킴에 있어 상인과 관이 어찌 따로 있겠습니까. 그런 말씀을 내리시지 않으셔도 기꺼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승도의 대답에 임경문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 마디 물음을 던졌다. 사실 그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금포강의 철제 난간 공사를 하자고 했다는 말들이 행상들 사이에서 들려오던데, 어찌 일이 이리 돌아갈 줄 알고 그런 준비를 갖추자고 한 겐가?”
“전날 염화 포대에서 벌어졌던 전투 때문입니다.”
승도의 말에 임경문이 잠시 주름살을 만들며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다 무릎을 탁 쳤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통쾌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아, 그래. 자네가 참가한 그 염화 포대 전투. 이제야 생각이 났네. 홍모귀들을 아주 혼내줬다고 들은 싸움이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대인께서는 그 전투를 듣고 느끼신 것이 없으십니까?”
승도는 자못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것은 임경문이 가진 군사적 식견에 대한 시험이기도 했다. 만약 승도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그의 지휘를 받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느낀 점이라. 홍모귀들을 격파하였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던가? 혹여 진압군의 동원이 늦은 것이 문제인 것인가?”
아무래도 무인(武人)이 아니라 문인(文人)으로서 생애의 전 기간을 보낸 관료에게 군사적 안목을 요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지적한 부분도 문제가 되었지만 실은 그보다 중요한 것이 사건 안에 숨어 있었다.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문제는 홍모귀들이 마음만 먹으면 금포강을 거슬러 올라와 강주를 직격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염화 포대 하나를 군함 한 척으로 굴복시킨 홍모귀들입니다. 하물며 대규모 침공군이 온다면 포대가 제 기능을 하더라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니 강주가 무방비라는 뜻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부분이 걸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포대가 무용지물이다. 그 얘기로군.”
임경문의 말에 승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포대의 대포를 모두 쓸 수 있다고 한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열함을 동원할 수 없더라도 왕립 해군은 포함과 프리깃함을 상류까지 올려 보낼 수 있다.
그 정도의 군함이 가진 화력만으로도 포대를 압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겨우 해병대에게도 무너진 포대가 군함까지 동원된 공격을 견디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철제 난간이 필요했습니다. 포대가 무용지물인 이상 강주를 지킬 새로운 방어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가는군. 납득했네. 덕분에 홍모귀 해군이 직접 강주를 타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아도 좋겠어.”
승도도 해군은 문제가 없다 생각했다.
“문제는 적의 지상군입니다. 난간이 해군을 막아줄 수 있지만 적의 육군을 막아줄 보루가 되어주지는 못합니다. 우리 신과 홍모귀들의 전력 차이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동수라면 필패. 열 배라면 해볼 만하지 않겠나?”
임경문의 대답에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감당이 되는 질적 격차라면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 정도가 되지 않으니 문제인 것이다. 지난 염화포대 사건 때 승도는 제국군의 실력을 뼈저리게 느꼈다.
“잘 봐줘도 30배는 필요합니다. 지금의 우리 군대라면 그 정도의 머릿수가 있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겁니다.”
“30배로도 어렵다니.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고사가 있듯 대군에게는 나름의 유리함이 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임경문은 새삼 홍모귀의 강대함을 느끼며 물었다. 그러자 승도는 그 물음을 긍정했다.
“대군이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조직이 건실할 때에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신의 군대가 정강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물론 문제가 없진 않네만, 그래도 30배라면 할 만한 싸움이 아닌가?”
“전혀 상대가 안 됩니다. 무엇보다 그 30배의 수적 우세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이 큰 나라에서 대양을 건너오는 홍모귀 한 줌의 30배도 모으기 어렵단 말인가?”
임경문의 말에 승도는 기본적인 군사 지식 하나를 꺼냈다. 아무리 군대가 많더라도 실제 결정적인 전장에서 쓸 수 있는 전력이 적다면 수적 우세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장에서 진정 중요한 수량의 우위는 원하는 장소, 원하는 시간에 가장 많은 병력을 집중시켜 달성하는 전술적 우세에서 결정되었다.
이는 기동력과 조직력, 주도권에서 앞선 군대가 누리는 이점이기에 느리고 제해권이 없는 신에게는 가망이 없는 부분이었다.
“적은 원하는 때를 골라 병력을 상륙시켜 공격하고, 아군의 전력이 많으면 전투를 회피하고 다른 곳을 칠 수 있으니 우리 병력이 적의 백배라 하더라도 실제로 수적 우세를 누릴 기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은 결코 바보가 아니니까요.”
“수적 우세를 누릴 기회가 없다면 필패가 아닌가?”
“그래서 적 지상군을 감당키 어렵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전장에 홍모귀 침공군의 세 배만 집결시킬 수 있어도 다행일 것입니다.”
승도는 신의 병력 동원 체계 및 연합왕국의 전술적 역량을 비교하여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세 배 정도의 병력을 모으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정도의 수적 격차로는 홍모귀 군대를 당적해낼 방법이 없다. 신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최초 동원된 병력으로 홍모귀 주력을 가능한 오래 잡아두며 더 많은 전력을 집결할 시간을 버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제해권을 쥔 홍모귀들이 전투를 회피하고 물러나 다른 곳을 치면 전혀 소용이 없어지겠지만.
“자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해서 대비한 방책은 있는가?”
“방책이랄 것은 없습니다. 단지 단 한 번의 교전에서 홍모귀 육군에게 쓴맛을 보여주고 강주에 발을 디딜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하는 정도. 그 정도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조금 전까지 자네가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 배도 모으기 어려운 숫자의 오합지졸로 상대해야 하는 강적일 터인데.”
임경문의 말에 승도는 탁자에 펼쳐진 지도를 가리켰다.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그로서는 연합왕국의 전략에 대해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해볼 여지가 있었다.
육군의 경우에는 병참 수송이 가장 큰 문제이기에 아무래도 강을 끼고 전진해올 가능성이 높았다. 해군의 지원이 불가능한 철제 난간 구간부터 육로로 틀어 내륙으로 전진하는 루트를 취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었는데, 그 경우에는 들어올 길이 세 갈래밖에 되지 않았다.
이 세 갈래 길 가운데 2곳은 대군이 사용하기에 좋지 않은 협소한 길이었다. 홍모귀 육군이 규모가 크지 않다곤 하지만 막대한 양의 장비와 탄약을 끌고 올 수밖에 없어 그런 좁은 길을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침공 루트 자체는 눈에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강주를 침공한다면 올 길은 하나. 그 루트에 정해진 시간표대로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준비한 것이 콩그리브 로켓과 1개 보병연대를 무장시킬 장비였다.
“여기. 강주와 금포 사이의 관도 상에 좁은 평야가 하나 있습니다. 좁은 논두렁이 이어져 있어 이곳에 진을 치면 홍모귀 육군을 상대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논두렁이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아주 큽니다.”
승도는 단언했다. 전장식 소총으로 벌이는 라인 배틀에서 사람 어깨 높이까지 오는 논두렁들은 매우 좋은 엄폐물이 되었다. 대부분 소총탄을 재장전하는 동안 상대의 사격을 받는 터라, 재장전 시간 동안 총탄에 덜 노출되면 그만큼 전투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훈련이 덜된 신의 병사들에게 몸을 숨길 수 있는 엄폐물은 그만큼 안정감을 가져다주어 군의 붕괴를 막는 좋은 지원군이 되어줄 수 있었다.
더 큰 장점은 평야로 들어오는 입구가 아예 엄폐물 하나 없는 개활지라는 사실이다.
일부 논두렁이 입구 쪽으로 있긴 했지만 그거야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뭉개버리면 그만이다. 이쪽은 엄폐가 가능하고 상대는 노출된 상태라면 아무리 훈련도의 차이가 크더라도 할 만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강주는 그렇다 치고 다른 곳은 어찌 되겠는가?”
“다른 곳은 어려울 겁니다. 이곳은 그나마 지세의 도움도 얻을 수 있고 임 대인께서 손을 써주신 부분이 많지만, 다른 곳은 어찌해볼 방법이 없습니다.”
임경문은 그 말에 수염을 쓰다듬었다. 생각한 것보다 전쟁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그는 막연하게 지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을 가졌으나, 사실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희미한 허상이라는 것이 조금 전의 대화로 증명되고 말았다.
홍모귀들이 자유자재로 군사를 부리며 저들의 이점을 살린다면 신은 힘도 제대로 못 써보고 패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만약 자네가 신의 전군을 통수할 권한이 있다면 홍모귀들을 상대할 자신이 있는가?”
문득 임경문이 던진 말에 승도는 잠시 놀랐다. 하지만 곧 표정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천하의 그 누가 지휘한다 해도 상황을 바꿀 순 없습니다.”
승도는 사실대로 말했다. 세계적인 강군으로 이름 높은 로망스 제국군을 거느리고도 끝내 패한 상대가 연합왕국이다. 그들이 가진 무한한 자금력과 압도적인 해군력을 생각하면 무슨 수를 써도 이길 방법은 전무하다.
천하의 명장이라 해도 전쟁을 질질 끌어 홍모귀 쪽에서 보다 나은 강화 조건을 제시하게 만드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가. 홍모귀를 물리친 자네조차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정말 어려운 전쟁이 되겠어.”
“싸우는 것 하나 만큼은 저 홍모귀들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자들입니다. 쉬운 싸움이 된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내 관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자네에게 묻겠네.”
“하문하시옵소서.”
임경문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이 나라가 홍모귀들에게 패한다면 어떤 꼴을 당하리라 보는가?”
승도는 그 말에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이 거인, 임경문은 부패하고 중병이 든 이 나라 신을 아끼는 관료였다. 그런 사람에게 잔혹한 말을 꺼내야만 하는 것인가. 하지만 망설임은 짧았다.
“반(半)식민지가 될 것입니다.”
“반(半)식민지? 그건 무슨 소린가.”
승도의 말에 임경문이 반문했다. 당연히 그 단어의 의미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보다 자세한 대답을 요구하는 물음이었다. 승도는 한숨을 내쉬고 적나라한 미래를 펼쳐냈다.
“이 나라의 골수를 연합왕국에 모조리 빨리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라는 있으되 그 이익은 모두 양이들이 가져가게 될 터이니, 곧 양이의 세상이 되겠지요. 하나 수만 리 바깥에 본국을 둔 양이가 제국 그 자체를 탐하지는 않을 것이니 종묘와 사직은 보존될 것입니다.”
“자네 말대로 된다면 존엄한 황실의 권위도 땅에 떨어지겠지.”
사실 승도가 이 전쟁이 가져올 결과물 중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황실의 권위가 추락한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를 의미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난세의 시작을 의미한다. 야심이 있는 자들이라면 난을 일으킬 것이고, 국가는 도탄에 빠지게 될 것이다. 승도 또한 야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혼란에 휩싸인 제국에서 뜻을 펴는 것은 위험 부담도 그만큼 크다.
“그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하나 자네의 말대로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겠군. 어찌하다 존엄한 천조가 양이들의 침공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인지 실로 허탈한 일이야.”
임경문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이들의 시름은 그렇게 깊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