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동방 원정군 (1)
연합왕국의 동방 원정군이 에우로페를 출발한 것은 1816년 5월 14일의 일이었다.
그들은 세이비야 왕국에 들러 물과 식료품을 보충한 다음, 기나긴 대장정을 시작하여 6월 중순에는 케이프 식민지에 도달, 7월 하순에는 신제국으로부터 1,000해리 떨어진 지점까지 다가왔다.
기나긴 항해 기간 동안 비전투 손실(질병과 폭풍, 그 외의 문제를 가리킴)로 전투 인원의 5%를 잃긴 했지만, 원정군의 사기는 왕성했다.
마침내 긴 항해가 끝난 1816년 8월 11일, 연합왕국 섬에 주둔해 있던 제1진과 합류함으로써 원정군의 진용은 완성되었다.
섬 앞바다에 집결한 함정만 전열함 22척에 프리깃함이 21척, 박격포함 2척, 병력 수송 및 보급을 위한 상선만 60척에 육박했다.
말 그대로 수평선을 뒤덮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공할 만한 규모의 함대였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함정들 사이에 특이하게 생긴 군함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이 이번 전쟁에 처음으로 투입된 연합왕국의 신형 전투함, 네메시스였다.
네메시스는 전통적인 범선과 달리 증기기관도 채용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물론 다른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 배는 최초로 회전식 함포를 채택하고 있어 여타의 군함들과 화력의 차원이 달랐다. 웬만한 왕국 전열함 5척의 화력을 혼자서 낼 수 있는, 왕국 과학력의 총아라 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네메시스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신대륙 독립 전쟁과 에우로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남겨온 해군의 비밀 병기, 박격포함들도 있었다.
박격포함은 양각에 제한을 받는 일반적인 전투함들과 달리 곡사를 위해 개발된 왕국의 특수 목적 전투함이었다. 이 전투함들은 주로 지상 지원을 위한 포함 역할을 떠맡을 예정이었다.
이외에도 왕국이 자랑하는 각종 신병기들이 즐비하게 실려 온 터라 동방 원정군이 사용할 타격 수단은 그야말로 무진장하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정군 수뇌부가 믿는 회심의 카드는 해군이 싣고 온 각종 신병기가 아니라, 전통에 빛나는 왕국 육군이었다.
왕국 육군은 언제나 소수 정예를 지향해온 터라 그들을 지칭하는 말인 ‘붉은 코트’는 ‘정예’와 등치되는 말로 통할 정도였다.
그 붉은 코트들 중에서도 이름이 드높은 로열 노섬브랜드 연대와 로열 아크 연대가 원정군에 차출되었으니, 원정군 수뇌부가 이들을 비장의 카드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육군의 지휘관들도 원정군 수뇌부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했다. 반혁명 전쟁에 종군하고 이어 식민 제국 확대를 위해 전장에서 10여 년을 바친 에이번 대령과 헨들릭 중령 같은 쟁쟁한 베테랑 지휘관들이 연대 지휘관들로 앉아 있는 터라 그들의 지휘 능력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라면 수적으로 수십 배가 넘는 적이라도 능히 쳐부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원정군 수뇌부는 육군에 충분한 휴식을 주고 결정적인 기회에 이들을 사용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덕분에 육군 병사들은 뭍에서 쉬는 것이 금지된 해군과 달리, 긴 항해의 피로를 섬에서 풀라는 명령을 받았다.
뜻하지 않은 수뇌부의 배려에 감격한 병사들은 상륙하자마자 허겁지겁 천막을 치고 쉴 자리부터 마련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조용한 세계에 묻힌 남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휴식의 기쁨을 노래하는 이들의 사이에서 조용히 펜을 들었다. 그는 주변에 있는 거친 사내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는 어제 동방에 도착하여 새로운 세계를 목전에 두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장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오늘은 상륙이 허가되어 섬에서 쉴 모양이니까요. 이곳 날씨는 몹시 포근하고 좋습니다. 태양은 강렬하고 바람도 잔잔한 것이 휴양하기에 좋은 곳 같습니다. 당신과 함께 이곳에 와서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언제나 안개 낀 도시를 바라보며 좁은 새장에 갇혀 있을 당신을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떠나올 수밖에 없는 저를 이해해 주시길 청합니다. 저는 당신의 기사. 그렇기에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젠가 당신께서 나이를 먹고 진정 이 나라의 어머니가 되신다면 그때는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이해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날 이해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이상의 보상은 없습니다, 폐하. 제 건강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이렇게 무사히 동양에 도착했고 편지를 쓸 기력도 남아 있습니다. 저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건강이 걱정됩니다. 못난 약혼자를 염려하여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 같아 자꾸 염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식사는 꼭 제시간에 챙겨 드시고 눈물은 하루에 한 번만 흘리세요. 그것까지는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친애하는 공주님, 내가 받들어 모실 군주, 언제나 영광을 누리실 여왕이시여. 당신의 미소가 곧 나의 미소이며, 당신의 행복이 나의 행복임을 항상 잊지 마시고 나를 위해 항상 미소를 지어주시길 청합니다. 그 이상 저에게 힘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윌리엄은 부지런히 펜을 놀리다 잠시 손을 멈추었다. 바로 근처까지 다가온 누군가의 인기척 때문이었다. 윌리엄이 고개를 들자 빨간 코트를 입은 장교 하나가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상당한 고위 장교였다. 어깨에 견장을 단 것으로 보아 영관급 장교임이 분명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윌리엄에게 용건을 꺼냈다.
“공작 전하, 연대장님께서 저녁 식사를 마련하실 생각이신데, 자리에 참석해 주시겠습니까? 초대에 응해주신다면 연대장님께 큰 영광이 될 것이라고 전하셨습니다.”
장교의 말에 윌리엄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정식 계급은 왕국 육군이 약식으로 만들어준 소위. 대령 급 장교의 식사 초대를 거절하기에는 마뜩찮은 신분이다.
물론 사적으로는 왕국 왕실의 일원이자 공작의 작위를 가진 고위 귀족이기에 남작 작위도 없는 연대장과는 격이 다른 부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곳은 사교 클럽이 아니라 군대다. 윌리엄은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그리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전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초대를 수락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장교가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고 물러가자 윌리엄은 다시 놓았던 펜을 잡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편지를 더 쓰긴 어려울 것 같았다. 중간에 한 번 감정의 흐름이 끊어지자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대충 생각나는 감정의 편린으로 글을 쓰기엔 빅토리아에 대한 그의 감정이 너무 컸다. 몇 번을 고쳐 써도 모자랄 편지를 날림으로 쓸 수야 없는 노릇이다.
“하는 수 없군.”
윌리엄은 편지를 곱게 접어 품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을 다시 정리하려면 조금 산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막 천막을 나서자 무기와 보급품을 육지로 옮기는 해군 장교들의 고함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배에 그대로 적재해둘 수도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보급 기지로부터 주기적으로 신선한 식량과 식수, 탄약을 공급받으려면 이 섬에 물자를 하역해두는 것도 중요했다.
그래서 육군이 편히 쉬는 동안 수병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물자의 하선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만 해도 휑하니 비어 있던 해안가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복잡해져 있었다.
탄약 상자며 무기 상자, 물을 담은 오크 통, 럼주를 담은 통 따위가 뒤섞여 사람이 지나갈 길을 막기 일쑤였다.
윌리엄은 보급품의 산을 피해가려다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쌉니다, 싸요. 럼주 1병에 1파운드입니다.”
그 아수라장 속에 술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술을 마련해서 팔 것을 마련했는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배에는 살림을 책임진 보급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기적으로 수병들에게 일정한 분량의 그뢰그를 배급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문제는 이 그뢰그가 럼주와 물을 섞어 만드는 배급용 술이라는 점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부정부패를 좋아하는 상당수의 보급관들은 이 술을 횡령의 수단으로 삼았다. 지나치게 많은 물을 럼주와 타서 맹물이나 다름없는 그뢰그를 배급하고 여분의 럼주를 챙겼다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보급관들과 결탁한 군종 상인들은 언제나 몇은 있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사정을 알면서도 병사들은 고달픈 전장의 피로를 잊기 위해 그 군종 상인들이 파는 럼주를 사서 마실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라고 자부하는 연합왕국의 치부 중 하나인 셈이다.
윌리엄도 처음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제독을 찾아가 따진 적이 있었다. 그때 제독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방적기에서 톱니바퀴 하나는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적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해군에 만연한, 관례화된 부정이니 당신이 나서서 한마디 한다고 바꿀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윌리엄이 얼마나 분노했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푸른 피의 명예를 아는 자에게 부정을 눈감으란 말은 용납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현실이란 결국 냉정한 법이다.
그나마 해군보다는 육군의 부패가 덜했다. 사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육군의 매관매직 전통 때문이었다. 연합왕국은 전통적으로 육군 장교 자리를 귀족들에게 돈을 주고 파는 제도가 있었다.
충분한 부를 가진 귀족들이 장교 자리에 앉다보니 상대적으로 부정부패에 대한 유혹이 덜한 셈. 단순히 돈이 많은 부르주아가 장교 자리를 샀다면 본전 생각을 했겠지만,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이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다.
물론 매관매직을 한다고 해서 육군 장교들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수준의 소양 교육을 거친 다음 장교 자리를 주기 때문이다.
아예 장교 직이 신분처럼 세습화되는 프리지아의 토지 귀족(융커)들만 보더라도 특정 신분이 장교 자리를 독점한다고 해서 군의 역량이 ‘저하’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무래도 사회 여건상 귀족 계급이 평민 계급보다 우수한 인재를 배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명예도 모르는 자들.”
윌리엄은 혀를 차고 상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명예를 모른다는 말은 귀족들이 부르주아들을 천시할 때 자주 사용하는 경구였다.
사회적으로는 부르주아의 지위가 귀족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렀지만, 정통 귀족들은 그런 부분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윌리엄 같은 왕족은 그런 부분에서 더 엄격했다.
흔히 법복 귀족이라 칭해지는 상층 부르주아들과 검을 패용한다 해서 대검 귀족이라 불리는 정통 귀족은 같은 자리에 서는 것조차 불쾌해 한다는 말이 있다.
요즘 세태에 그 정도까지 신분 차이를 따지는 귀족은 드물었지만 윌리엄은 조금 달랐다. 특히나 천한 장사치들이 ‘천박한 짓’을 할 때면 더욱 그랬다.
이런 천박한 자들을 볼 때면 더욱 그녀가 생각났다. 고결하고 아름다우며 귀족적인 기품을 갖춘 그의 군주. 고귀한 그녀의 왕국에 저런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몹시 불쾌했다.
윌리엄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괜히 나와서 못 볼꼴만 보았구나. 그냥 편지를 쓰고 있을 것을.”
“윌리엄 전하!”
윌리엄이 인상을 찌푸리며 걷던 차에 에버튼 백작이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 에버튼도 윌리엄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앞세워 이 전쟁에 끼어든 젊은 귀족이었다.
왕국 전통의 7대 백작가의 일원으로서 고난을 함께하겠다는 푸른 피의 명예를 가진 사람인지라 윌리엄과의 친분이 상당히 깊었다.
“이쪽으로 어서 오시게.”
에버튼이 손짓을 하자 윌리엄도 반색하며 그쪽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천박한 자들의 불쾌한 짓거리를 본 터라 귀를 청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윌리엄은 에버튼이 앉아 있던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에는 역시 자원한 귀족 사내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윌리엄을 보고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시했다. 군에서 계급을 따지는 것도 좋았지만 역시 그들은 정통 귀족이기에 작위에 민감했다.
윌리엄도 모자를 벗어 예를 표시하고는 에버튼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한창 번잡해진 참에 어딜 그리 오가는 건가?”
에버튼이 묻자 윌리엄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에게 편지를 좀 쓰려다 생각이 막혀서 산책을 하려고 했다네.”
“여왕 폐하께 편지를 쓴다니, 낭만적이군. 하지만 어차피 편지가 가려면 몇 달은 걸릴 터인데, 나중에 써도 될 일 아닌가? 나는 내 약혼녀에게 그럴 생각이네.”
“그래서 자네가 엘리자베스에게 뺨이나 맞는 것이네. 지금부터 천천히 편지나 한 통 써보게. 그러면 돌아갔을 때 손이 아니라 입술로 얻어맞게 될 테니까.”
윌리엄의 말에 에버튼이 킥킥 웃음소리를 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에버튼은 제 약혼녀에게 잡혀 사는 인간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눈에 들어오는 사치품이 보이면 보이는 족족 집어다 배에 실어 그럴듯한 편지와 동봉하여 약혼녀의 집에 보내고도 남았다.
“시간이 날 때 편지를 쓴다라.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구석에 있던 귀족 사내가 말을 꺼내자 또 한 사내가 말을 받았다.
“유서가 될 수도 있으니 써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그 말에 분위기가 살짝 무거워졌다.
“유서.”
윌리엄은 그 무거운 의미를 곱씹었다. 만약 이 땅에서 그가 산화하게 된다면. 그리하여 그의 소중한 약혼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쓰러진다면.
여유를 잃지 않던 그의 표정에도 그늘이 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