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동방 원정군 (2)
“…위와 같은 이유로 우리 연합왕국 정부와 의회는 신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요구 사항이 모두 수용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며, 여기에 따르는 책임과 피해는 전적으로 신의 정부와 관료들에게 있음을 명시합니다. 전쟁을 피하고 싶다면 우리의 3개조 요구 사항을 수락할 것을 권고합니다. 하나, 귀국의 아문을 연합왕국에 할양하여 화해와 배상의 의지를 분명히 할 것. 둘, 부당한 사법 행정 체계가 개선되었다고 우리 정부가 인정할 때까지 연합왕국의 선박에 대한 검문검색 일체를 중단할 것. 셋, 이번 사건에 관련된 왕국 정부의 비용 지출 전반에 대한 보상금조로 600만 파운드를 지불할 것. 이상의 조건을 수락하여 귀국과 아국이 불필요한 전쟁을 피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하는 바입니다. 우리 연합왕국 정부는 평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며, 귀국의 성의 있는 태도에 대해 성실한 협상을 대할 것을 약속하는 바입니다. 연합왕국 수상 S. A. 윌슨.”
연합왕국의 동방 원정군이 출발하기에 앞서 총영사 하워드의 손에 들어왔던 이 선전포고문은 원정군이 연합왕국 섬에 도착한 시점에서야 아문에 도착했다. 그것의 전문을 구경한 승도의 감상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되었다.
“연합왕국은 덩치 큰 유협과 다를 게 없다.”
유협이란 억지 구실을 부려 민간인의 재산을 빼앗는 거리의 건달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해 정당한 법과 상식을 부정하고 제힘만 믿고 날뛰는 유협이나 연합왕국이나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그 행태는 같다 할 수 있었다.
저희들끼리 의리를 챙기며 추켜세우는 것이나,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민주주의 국가라 자부심을 내세우며 애국심을 부르짖는 그 작태나 어찌 그리 닮아 있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하지만 유협은 결국 더 강한 유협의 무리나 관의 제재를 받아 일정한 선을 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하나 연합왕국은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유협인 이 나라를 제재할 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 자신 외에는 적수가 없다고 표현해도 무방했다. 몇 년 전 읽어본 론디니움 타임스의 기사를 인용하면 연합왕국의 국력은 다음과 같았다.
그 해군은 다섯 개의 대양을 아우르고 있었고, 그 제국의 판도는 여섯 개의 대륙에 뻗어 있다. 산업의 핵심인 철의 생산량은 나머지 국가들 전체를 합산한 것을 압도할 정도고 석탄의 생산량은 나머지 국가들을 합친 것의 배나 된다.
무지막지한 것은 대학의 숫자로 모든 경쟁국의 고등 교육 기관을 합친 것의 4배가 넘는 대학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이다. 교육, 산업, 문화, 철학, 군사력, 경제. 생각해볼 수 있는 전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타임스는 그런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그것도 몇 년 전의 일이니 현 시점에 와서는 얼마나 더 강대해졌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역인들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연합왕국의 1년은 타국의 10년과 같다.’ 그 말 그대로였다. 연합왕국은 매년 한 자리 수의 경제 성장을 구가했지만, 나머지 국가들의 경제 성장률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발전 속도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차이가 날 정도다.
‘물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당장 이 침공군을 어떻게 상대하느냐. 그게 문제야.’
승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연합왕국의 동방 원정군이 한눈에 보이는 곳, 아문이었다. 그에게 협조하기로 한 단련과 강주의 군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강주로 들어올 진입로에 진을 치고 있어 따로 더 준비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적정을 살필 겸하여 몇 주 전부터 아문에 체재하고 있던 차였다.
이곳 아문에서 얼핏 살핀 적의 진용은 승도가 당초 예상한 것보다 훨씬 거대한 것이었다. 함대의 규모만 따져도 에우로페에서 해전 한 번에 동원하던 규모를 간단히 뛰어넘고 있었고, 지상군의 규모도 생각보다 거대했다.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긴 했지만 연대 깃발만 4개나 되었다. 보병 연대 4개가 아니라 보병 연대 2~3개에 기병 연대 1~2개라고 해도 4천 명은 간단히 넘어가는 대규모 병력인 셈이다.
“저 정도의 적세라면 굳이 전 병력을 강주로 보낼 필요도 없겠구나. 일부만 온다고 해도 쉽지 않은 싸움이겠어.”
승도의 생각은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 그가 준비한 병력과 물자는 연합왕국의 일개 연대를 상대할 만한 전력은 되었으나, 전투가 그의 의도대로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단련과 녹기로는 지형의 이점을 등에 업고 싸운다고 해도 정강한 연합왕국의 정예 보병을 상대로 승산을 확신하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만에 하나 예기치 못하게 전열이라도 붕괴했다간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공자님. 마님께 출발을 준비하시라고 말씀을 올릴까요?”
승도가 언덕에서 뒷짐을 지고 돌아서서 내려오자 정씨가 물었다. 승도의 아내 반은비도 아문에 함께 내려와 있었다. 신혼이라 아내를 때어놓고 움직일 수 없었던 탓이다. 그 말에 승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 채비를 할 필요는 없어. 그보다 아문 감독은?”
승도가 묻자 정씨가 조소가 담긴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위해충 대인은 오늘 아침에 짐을 싸들고 북쪽으로 달아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승도는 혀를 찼다. 결국 상인들에게 큰 소리를 치며 돈을 뜯어낼 줄만 알았지 국방상의 요지를 지킬 능력이 안 되는 함량 미달의 인사다.
따지고 보면 이런 자들이 정관계의 실력자로 앉아 있기에 이 나라가 이 모양으로 망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연합왕국 정도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책임은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서역이라고 해서 상류층이 모두 솔선수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 직무를 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럴 경우에는 그만한 사회적 지탄과 망신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신은 적전도주만 해도 뇌물만 잘 쓰면 제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풍토가 있어 위해충 같은 자들이 얼마든지 나올 여지가 있었다. 이것이 연합왕국과 신의 진정한 차이인지도 모른다.
“감독도 달아난 마당에 아문에 더 볼 일이라도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구경은 하고 가야지.”
승도의 말에 정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끔 영문 모를 소리를 할 때면 무슨 말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공자가 이유 없는 말을 하지는 않기에 그 의도를 묻는 대신,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승도는 느릿느릿 아문 포구 쪽을 향해 걸어 내려오다 자색 비단을 걸친 채 급히 산마루를 올라오는 젊은 여자를 보았다. 그의 부인 반은비였다. 그녀가 창백한 얼굴을 하며 급히 뛰어오다 승도를 발견하고는 얼른 말을 꺼냈다.
“서방님. 아문 감독도 달아났다고 하는데 어찌하시려고 이 위험한 곳을 어슬렁거리시는 것입니까? 당장 아문을 떠나셔야지요.”
그녀도 위해충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듯했다. 그녀는 그 소식에 불안해하다 숙소를 급히 나선 모양인지 제대로 머리도 묶지 못한 모양새였다. 평소라면 삼단같이 긴 머리카락에 꽂혀 있어야 할 비녀도 보이지 않았다.
“많이 놀란 모양이시군요.”
승도가 손을 잡아주며 여유를 보이자 반은비는 갑갑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방어 책임자가 적전도주한 마당에 무슨 용을 뺄 재주가 있어 아문에 머무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다. 하지만 승도가 아무 이유도 없이 아문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연합왕국은 공격에 앞서 몇 가지 특징을 보이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33발의 예포를 쏘아 개전(開戰)을 알리고 군악대를 동원해 자국의 국가를 연주하는 것이다. 침공 시간을 다 알려주고 싸우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볼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연합왕국 사람들은 이를 자신감의 표현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해도 될 만큼 그들은 충분히 강했다.
그 덕에 공격 징후를 보고 달아날 시간 정도는 충분히 있었다. 승도는 바로 이 공격의 준비 시간 동안 갖추어지는 적의 진용 변화를 보고 강주로 몰려올 적의 규모를 가늠할 작정이었다.
지상군이야 얼마나 올지 당장 가늠할 수 없겠지만 전투 배치될 함정의 규모를 보면 해군과 해병대의 침공 규모는 파악이 가능했다. 그 정도는 미리 알아두면 향후 전투 전개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놀란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서방님은 저를 청상과부로 만드실 작정이십니까? 저를 동반자로 생각하신다면 그러시면 아니 되시지 않습니까?”
반은비의 말에 승도가 웃음을 보였다. 아내의 불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승도는 자신이 아는 것을 설명했다. 그러자 반은비가 볼을 부풀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하면 소첩이 불안에 떠는 동안 혼자 여유를 부리고 계신 것입니까?”
“그건 아니었습니다. 위해충 대인이 달아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터라.”
위해충이란 말에 반은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운 이마에 주름이 절로 만들어졌다.
“위 대인은 받아먹을 것만 받아먹고 이럴 때는 정말 날래게 도망가는 분이십니다. 정작 나라에 받은 것도 없는 서방님이 이리 고생하시는데.”
“고생이랄 것은 없습니다. 그보다 서역 배들을 보았습니까?”
“서역 배들이라 하심은.”
승도는 바다 저편의 연합왕국 섬을 가리켰다. 탁 트인 정상에서 보는 것처럼 시야가 좋지는 않았지만 산더미처럼 큰 거함들의 윤곽을 구분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승도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겨가던 반은비가 그것을 보고 답했다.
“소첩도 아문에 있으니 서역 배들을 본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 배들이 얼마나 큰지는 아십니까?”
승도가 묻자 반은비가 잠시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대고 생각에 잠긴다. 고민을 하는 그녀 나름의 자세다. 조금 생각을 해보던 그녀가 어렵게 자신의 정답을 꺼냈다.
“아무래도 무역을 오는 범선들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천 톤을 조금 넘는 정도.”
승도는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기 보이는 배들은 삼천 톤 이상의 거함들입니다. 특히나 저 중앙의 거함은 오천 톤도 넘겠군요.”
승도가 가리킨 배는 연합왕국이 보낸 신형 전투함 네메시스였다. 말 그대로 작은 산을 옮긴 것 같은 배다. 그 말에 반은비가 흠칫 놀랐다.
“그런 큰 배들이라면 사람도 엄청나게 타는 배들이 아닙니까? 그런 배들이 수평선을 덮을 정도로 몰려왔으니 소첩의 눈으로 보기에도 예사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예사 일이 아닙니다. 하여 이 아문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승도는 반은비와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 보시기에 이 아문이 홍모귀들의 공격을 받으면 얼마나 견딜 것 같으십니까?”
“서방님의 말씀만 들으면 하루도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루보단 오래 걸릴 겁니다.”
승도의 말에 반은비가 반문했다.
“어째서 하루보다 더 걸린다고 장담하시는 것입니까?”
“그건 저들이 지나치게 먼 거리를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본디 상륙에 있어 침공군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 요소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적의 방어 태세, 둘째는 상륙이 가능한 지리의 인식, 셋째는 양륙이다.
이중 첫째 요소는 연합왕국이 전혀 근심할 필요가 없었다. 막강한 해군의 엄호를 받는 이상, 신이 수만 단위의 대군을 아문에 깔아놓고 있어도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요소 역시 문제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수도 없이 금포강을 들락거린 범선들이 아문 해관에 들른 터라 어디로 배를 대야 할지, 수심은 얼마나 되는지는 눈에 훤할 정도로 알고 있다.
문제는 다름 아닌 양륙의 문제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온 동방 원정군은 긴 항해로 인해 상당히 지쳐 있었다. 거기에 더해 몇 달의 항해를 거치느라 식료품을 소모하고 보충하는 과정을 거치다보니 배에 적재된 물자의 배치가 흐트러진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육군에 휴식을 주기 위해 하선을 허락하다 보니 가뜩이나 혼잡스럽던 보급품 적재가 더 혼란스러워진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일이 그렇게 돌아가다 보니 최초 침공의 주력을 맡게 된 해병대 중에서는 제 장비가 육군의 하선 과정에 딸려 가버려 총조차 없는 자가 나올 정도였다.
이는 연합왕국의 역량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너무 장대한 규모의 원정을 하다 보니 피치 못하게 증폭된 문제라 할 수 있었다.
행정 상륙이나 다름없는 무혈 상륙을 하더라도 양륙 문제 때문에 아문에 연합왕국 군대가 제대로 전개되려면 하루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불문가지다.
이 같은 사실을 눈치챈 것은 승도가 연합왕국 섬에 하선한 육군의 연대기들을 본 덕분이었다. 과거 황제로서 연합왕국 침공을 준비하며 숱한 상륙 작전을 세워보고 연습해본 승도에게 그 같은 사실을 간파하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오나 서방님. 만사가 사람의 생각대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소첩의 생각으로는 슬슬 자리를 피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여깁니다.”
그녀의 말에 승도도 꼭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가 완전에 가깝게 세웠던 전략도 ‘한 인간’, 그가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 부하 지휘관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와해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신이 아닌 이상 100% 자신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승도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전략가로서의 입장에 취해 과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부인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승도는 연합왕국의 동정을 좀 더 살펴보려던 마음을 접었다. 앞으로의 전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긴 했지만 반은비의 말처럼 적이 뜻밖의 행동을 보일 경우, 큰 위험에 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이익을 보려다 아예 전투를 할 기회조차 잃어버린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이 될 것인가.
“하면 아문을 떠나기로 생각을 굳히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부인 말씀대로 하지요.”
승도는 반은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은 몹시 따스했다. 그 온기가 있는 이상 그는 질 수도 없고, 져서도 안 되었다. 승도는 결의를 굳히며 아내의 손을 쥔 채로 아문을 떠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