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지옥의 문턱 (2)
피로 얼룩진 금포 관아에 연합왕국의 국기가 내걸렸다. 겨우 하룻밤 사이에 금포강 최대의 소금 무역항이 점령당한 것이다. 수비대가 적은 것도 아니었고 성벽이 부실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결과는 부정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복자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두려워하며 숨을 죽였다.
마지막까지 싸움이 벌어진 관청 앞은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윌리엄은 그것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다 관청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곳곳에서 병사들이 시체들을 들어내 옮기고 있었지만 아직도 치우지 못한 시체들이 관청 안에 가득 널려 있었다.
동양인들을 자신들보다 한 수 아래의 열등한 인종으로 보고 있던 까닭에 자행된 전쟁 범죄의 흔적이다. 시체 중에는 여성과 아이들의 것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관료의 처첩과 딸, 시녀들로 보이는 여자들은 모두 하의가 벗겨진 채로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나이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겁탈한 듯 여자들은 하나같이 혀를 빼문 얼굴들이었다. 개중에 아직 월경도 시작하지 않았을 법한 어린 소녀의 얼굴을 본 윌리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명예로운 왕국 육군이 한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범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총검 돌격을 하며 피를 뒤집어쓴 병사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관청으로 돌입했고, 그 과정에서 이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야만인들이나 할 짓이다. 윌리엄은 혀를 차며 소녀의 시신에서 고개를 돌렸다.
“공작 전하. 기념품입니다. 마음에 드시면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윌리엄과 다소 사이가 좋은 편인 병사 하나가 관청에서 약탈해 온 듯한 도자기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여성의 방을 장식하는 화병인 듯 아담하고 작은 것이 문양도 예뻤다. 그의 경애하는 여왕에게 선물로 준다면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하지만 피 묻은 약탈품을 빅토리아에게 주는 것만큼 경멸스런 일은 없다. 윌리엄은 병사의 성의를 거절하며 회랑을 돌아 관료의 집무실이 있는 정청으로 향했다.
집무실 쪽의 풍경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기화요초들이 아름답게 우거졌을 뜰은 군홧발에 유린당해 엉망이었다. 파괴는 연못에도 이어져 있었다. 값비싼 관상어들은 연못가에 둘러앉아 모닥불을 피운 병사들의 한 끼 식사가 되어 그슬린 껍데기와 뼈만 남은 지 오래였다.
‘우리 왕국의 도덕성이 지탄받을 일이군.’
윌리엄이 막 정청에 도착하자 장교 한 무리가 그곳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그도 아는 얼굴들이었다. 그의 직속상관들로 이번 금포 공략의 첨병을 맡은 A중대와 그 상급 부대 지휘관들이다.
윌리엄은 모자를 벗고 거수경례를 했다. 그들도 가볍게 경례를 하며 인사를 받았다.
원래 경례는 상대에게 적의가 없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기사들이 아밋을 슬쩍 들어 올리는 행동에서 유래했다.
이것이 경의를 표시하는 의미를 담게 된 것은 기사들이 상호간에 예의를 표시하는 예식 행위로 바뀌면서부터였다. 대부분 귀족들이 태반인 육군 장교들에게 경례는 그런 이유에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중요한 행위였다.
“연대장 각하께 접견을 청하고 싶습니다.”
연대 부관에게 정식으로 절차를 요청하자 부관이 잠시 일정을 확인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윌리엄은 병사 몇이 근무를 서고 있는 집무실 앞으로 다가갔다.
과도한 예의를 차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군대인 터라, 복잡하게 신분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계급장이야 군복에 붙어 있는 것이고 자신을 호칭할 성 하나만 상급자에게 알려주면 족하다. 그것이 합리적인 연합왕국 육군의 전통이었다.
“각하. 윌리엄 소위입니다.”
윌리엄이 문 앞에서 절도 있는 목소리를 내자 안에서 대답이 들렸다.
“들어오게.”
윌리엄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짧은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사내가 보였다. 연대장인 헨들릭 중령이다.
헨들릭은 인상이 푸근한 클럽의 신사처럼 보였지만 그 내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열대의 정글에서부터 에우로페의 평원, 거친 신대륙의 사막 등 다양한 전장을 경험한 역전의 군인이 신사의 가면 속에 숨어 있었다.
연대장이 권한 자리에 윌리엄이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이자 헨들릭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그래. 무슨 일로 내게 찾아온 건가, 윌리엄 소위? 정찰을 나갔다고 자네 상관에게 보고를 받았는데 그 건 때문인가?”
“예. 상급 지휘관들이 각하께 직접 보고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윌리엄은 그 부분이 조금 의아했지만 명령받은 대로 왔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것은 그에 대한 상급 지휘관들의 배려이기도 했다. 가능한 한 최고 지휘관과 독대할 자리를 자주 만들어 그 이름을 각인시키는 것만큼 차후 논공행상에서 유리한 일은 또 없는 법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왕실 인사인 윌리엄에게 편의를 좀 봐주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가? 그럼 말해보게.”
윌리엄은 지형과 전투 후의 상황에 대한 상세 보고를 늘어놓았다. 윌리엄이 속한 A중대가 금포를 넘어 퇴각하는 적 부대의 추격에 가담한 터라 상황 보고 자체는 매우 상세했다.
“…적 패잔병들은 산등성이를 향해 집단적으로 움직였는데, 우리가 목격한 바로는 산자락을 따라 곳곳에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짐작하건데 적은 패전을 염두에 두고 취사장을 미리 마련해둔 것이 틀림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취사장을 마련해? 패전을 염두에 두고?”
헨들릭은 깍지를 낀 채 호박색 눈으로 지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애초부터 패배를 염두에 두고 싸우는 전략가는 없다. 기본적으로 대국을 위해 혹은 의도된 전략의 일부로써 패배를 꾸미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금포에서 벌어진 대패가 신의 의도된 작전인 것인가?
헨들릭의 본능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만약 그랬다면 여단 규모, 아니 반편 사단 규모의 전력을 아군의 먹이로 내던져주는 무리한 작전을 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만한 전력이라면 강주 이남에 있는 적 주력 병력의 절반에 달하는 대병이다. 병력의 반을 내던지는 작전이라니, 도무지 상식 밖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취사장은 패잔병들이 달아날 수 있는 루트마다 정확하게 설치되어 최대한 많은 잔병을 수습할 수 있도록 계산되어 있었습니다.”
“흠. 그렇다면 의도된 작전의 일부라는 건 분명한데.”
헨들릭은 적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잔병들을 최대한 모을 수 있도록 취사장을 배치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적의 역량은 결코 낮다 할 수 없었다.
다양한 패잔병의 이동 루트를 미리 계산하여 취사장을 마련하려면 지형에 대한 이해, 풍부한 전쟁 경험이 필요했다. 이는 적이 상당한 역량을 가진 전략가의 지휘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전략가라면 한 명의 병사도 귀하다는 걸 뻔히 알 것이다. 그러니 잔병을 모았을 것이고. 그런 자가 자군을 방치한 이유, 그것이 궁금해졌다.
헨들릭은 깍지를 푼 손으로 지도를 탁탁 두드렸다. 적이 패전 이후를 이 정도나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기병 연대의 협조를 얻었어야 했다.
“의도된 작전이라 하시면.”
“자군 전력의 반을 제물로 던져서 우리를 방심시키려는 걸 수도 있다, 이거네. 이해는 가지 않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그렇다면 여문으로 가는 길에 적이 병력을 매복시켰을 수도 있겠지.”
헨들릭의 말에 윌리엄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아무 이득도 없이 자군의 절반을 미끼로 던지는 전략가는 없다.
무언가 이익이 있기에 그런 작전을 세웠을 것이 틀림없다. 그 이익은 꼭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진 않는다. 방심 혹은 의도적으로 조장된 전장 유도 등의 형태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네, 핸드북 가지고 있나?”
“예. 가지고 있습니다.”
“적 지휘관들에 대한 자료를 살펴주게.”
연대장의 말에 윌리엄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핸드북을 꺼냈다. 핸드북은 연합왕국 섬에서 지급받은 것으로 동방 무역 회사 및 왕국 정부가 신에 대해 수집한 거의 모든 정보가 수록된 참고서와 같았다.
짤막한 신 국어에서부터 적 지휘관들에 대한 신상명세, 신의 풍습, 군대의 무장 상태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가 기입되어 있어 적당한 참고 자료로 쓰기엔 더없이 좋았다.
페이지를 넘기던 윌리엄이 지휘관들이 기록된 페이지를 찾았다. 그는 날렵하게 글자를 읽다 이름 몇 개를 발견했다.
“아문 감독은 위해충이고, 금포 방어사는 혁리란 잡니다.”
“그건 이미 필요가 없어진 자료이고, 다른 자들은?”
“강주에는 강주 관리사 임경문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 휘하에 오승도란 자가 종군 중이란 사실입니다.”
“오승도?”
헨들릭이 처음 듣는 이름에 반응을 보였다. 임경문은 원정 이전부터 자주 들어온 유명한 이름이었다. 탐관으로 가득 찬 신에서 유일하게 뇌물을 받지 않는 관료라는 점뿐만 아니라, 아편에 대한 강경대응을 주장하는 인물이란 점에서도 연합왕국의 눈길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예. 기록된 바에 따르면 포트 헬리오트 전투에서 우리 해병대를 고전시킨 자라고 합니다.”
“그 경위는 나도 알고 있네. 그 지휘관이 오승도란 자라고? 그자의 신분은 뭐지?”
“오승도는 거상의 아들로 현재 조정의 벼슬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명예직으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품계가 제법 높아 제국의 귀족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헨들릭이 호박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 많은 제국 귀족이라. 아무튼 그자가 이번 작전을 주도한 인물일 수도 있겠군.”
헨들릭은 임경문이 그런 비정한 계획을 세우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문관들은 책상머리에 앉아 지휘를 하는 까닭에 숫자 놀음을 좋아했다. 그런 자들은 제 전력의 반을 뚝 잘라 미끼로 던지는 짓은 못했다.
“그리고 그자는 금포강 사건의 종식에서도 직접 협상에 나서서 우리 측을 퇴거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호르스트의 통나무 어뢰도 아는 자라고 하더군요. 에우로페에 대한 견문이 밝은 자라고 여겨집니다.”
“우리 전쟁사에 흥미가 많은 자라면 신의 얼치기들과는 격이 다른 자란 말인가?”
헨들릭은 오승도란 자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그런 자라면 싸울 가치도 없는 신의 머저리 지휘관들과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절반의 전력을 가지고 동방 원정군에 대항할 수 없는 노릇이다.
로열 노섬브랜드 연대가 보유한 1,360명의 장병만 해도 여문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4,000 남짓한 적보다 막강한 전력이다. 거기에 근위 기병 연대 550명의 지원이 더해질 것이니 전력상으로 보자면 오승도는 게임이 되지 않는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여문 쪽입니다. 패잔병을 쫓다 여문 입구까지 살피고 돌아왔는데, 지형이 상당히 좋지 않았습니다. 우리 측의 전력을 염두에 둔 것 같은 방어적 포진입니다.”
“방어적 포진이라. 지형이 어느 정도나 불리하단 거지?”
“방자의 이점을 최소 2배는 평해야 할 것입니다. 논두렁이 차폐물이 되어 우리 전열 보병의 일제 사격에 대한 효율성을 반감시킬 거라 예상합니다.”
“논두렁이 있다면 그럴 수 있지.”
열대 지방에서 종군해본 헨들릭은 논두렁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두 번째로 입구가 좁습니다. 플라스크 구조를 하고 있는데 적의 화력은 극대화되고 우리 측은 일개 중대 병력씩 투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병 연대의 투입도 상당히 지연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일개 중대라. 이해가 가는군. 우회할 여지는 보였나?”
“양쪽은 벼랑으로 막혀 있고, 그 지반은 상당히 약해 보였습니다. 연대의 박격포를 몇 문 올리는 정도도 버거울 것 같았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후 포병 장교로부터 설명을 들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 외에 적이 누릴 만한 이점은 또 없었나?”
“여문 안쪽으로는 구릉이 있었는데, 포병이 자리 잡기에 좋아 보였습니다. 적에게 상당한 성능의 대포가 있다면 우리 지상군의 돌입에 매우 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신이 가진 무기야 빤하지 않나. 그래도 무기 수입을 하지 않는 자들은 아니니 경계할 필요는 있겠지. 다른 점은 없나?”
헨들릭의 물음에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누릴 만한 이점은 그게 전부입니다. 멀리서 관측하긴 했지만 여문 뒤로는 별다른 장애물이 없어 보였습니다. 지도로 보아도 그 같은 점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지도야 언제나 믿지 못할 자료지. 직접 발로 밟아보고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은 말일세. 수고했네.”
헨들릭은 윌리엄의 보고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오승도가 포진한 여문을 보았다.
여문.
그의 예감은 이곳이 강주 공략의 결정적인 전장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마 신에서 맛볼 수 있을 몇 없는 짜릿한 전장이 될 것이다. 헨들릭은 엄지손가락으로 여문을 꾹 눌렀다. 그 손가락 아래에서 오승도를 상징하는 깃발이 짜부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