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지옥의 문턱 (4)
붉은 코트들은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갖추어 나타났다. 온통 새빨간 군복 일색으로 통일된 그들을 보자면 붉은 용암을 연상시켰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재앙. 입구가 좁아 열을 넓게 세울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힘이 있었다.
“부대 정렬!”
장교가 구령을 외치는 동안 보병들이 내준 좁은 통로로 포병들이 대포를 끌고 왔다. 포가가 있음에도 사람이 끌기엔 무리가 있어 말과 노새 따위의 힘을 빌려야 했다.
포병이 앞서 자리를 잡는 동안, 보병들은 돌격을 위한 편성에 들어갔다. 각 공격제대는 중대 단위로 끊어졌다. 지나치게 협소한 공간에 병력이 다수 밀집되는 것을 가능한 한 피하기 위함이었다.
각 제대별로 미리 전개할 공간을 지정한 터라 명령만 떨어지면 대대 하나를 완전히 전장에 펼치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도 10분이면 충분했다.
그 10분이 전장에서 얼마나 위험한지 경험 많은 장교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백린에 희망을 걸었다. 포병은 백린을 쏟아붓기에 앞서 백린과 무게가 비슷한 유산탄을 골라 초탄을 쏠 준비를 했다. 초탄을 쏘아 포탄의 낙하지점을 정확히 계산하고 이어 백린을 퍼부을 작정이었다.
포탄이 보급 수레에서 부지런히 내려지는 동안, 보병들은 단단히 긴장한 채로 준비했다. 백린이 발사되기 시작하면 그들은 즉시 그것의 보호를 받으며 적의 코앞에 전개를 시작해야 했다.
말을 탄 장교들은 분주하게 오가며 준비 상태를 점검했다. 제때 부대가 전개되지 못하면 후속 제대들의 전개가 차례로 꼬여 작전이 엉망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전개되지 못한 병력은 쓸 수 없는 병력으로 간주하라.’라는 유명한 금언도 있지 않던가. 그들은 그 가르침을 망각하지 않았다.
포병대가 방열을 마치자 포병 장교들이 급히 포탄의 수량과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점검했다. 백린의 20차례 사격과 그에 이은 유산탄 포격 1회가 그들에게 주어진 첫 포격 임무였다.
10여 분의 시간 동안 해낼 수 있을 정도의 포격 일정처럼 보였지만 방열 지역이 너무 좁고 포탄의 분배도 마뜩잖게 이루어져 과업을 달성할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그럼에도 임무는 임무다. 장교는 고민을 밀어버리고 칼을 뽑아들었다.
“발사!”
최초로 장전된 유산탄이 탄도 계산을 위해 논두렁 위로 발사됐다. 자신들의 머리 위로 포탄이 쏟아지자 녹기들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몸을 움츠렸다.
폭발이 이어질 때마다 논두렁 위로 포연이 흩날렸다. 정확하지 못한 1차 사격인데다 논두렁 사이로 작은 호를 파둔 탓에 제대로 피해를 주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포격을 받은 녹기들은 우선 겁부터 먹었다. 아는 것과 체감해보는 것이 천지 차이이듯 유산탄 포격을 뒤집어써 본 경험은 인간적인 공포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화약 병기에 익숙할 수가 없던 이들에겐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포격이 떨어지는 동안 지레 겁을 먹은 몇몇이 몸을 돌려 뒤로 달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지휘관이 악을 썼지만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곧 그들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독전대의 사격을 받아야 했다.
첫 포연이 걷히자 왕국 포병은 탄착점을 확인하고 포탄을 바꾸었다. 그들이 조심스레 포에 밀어 넣은 포탄은 바로 백린. 악마의 병기라 불리는 그것이다.
백린은 인간의 살점에 붙을 경우 고열을 내며 타들어가는 터라 백린이 묻은 즉시 피부채로 긁어내지 않으면 뼛속까지 태워버리는 무시무시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이 병기의 사용에 대해 규제를 하자는 에우로페 대륙 차원의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물론 동양에서의 사용엔 해당 사항이 없었다.
펑, 펑 소리와 함께 두 번째 포격이 이루어졌다. 포병이 백린을 쏘며 흰 신호기를 흔들자 보병대가 기다렸다는 듯 밀물처럼 개활지를 향해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장교들은 포격 때문에 소리가 방해된다는 것을 알고 오직 장갑을 낀 손의 손짓과 기수의 깃발만으로 병사들의 이동을 통제했다.
보통의 오합지졸들이라면 그렇게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했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거친 왕국군대에겐 가능했다. 질서정연하게 개활지로 쏟아져 나온 붉은 코트들은 제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움직였다.
장교들은 병사들의 이동을 독려하며 녹기 쪽의 움직임을 살폈다. 다행히 그쪽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아니,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계획에 없던 돌발적인 전개였다. 물론 승도의 계획에도 없던 일이다. 양측 지휘관은 그 광경을 보고 잠시 넋이 나갔다.
최초의 백린탄이 녹기의 머리 위로 쏟아진 순간만 해도 그런 상황 변화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한 차례 포격에 군이 동요할 거라고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고열과 연기를 동반한 백린이 떨어지자 녹기 사이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당연히 그 비명은 녹기의 사기를 꺾어놓았다.
그래도 승도의 엄포와 위협이 있어 녹기가 물러설 정도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정말 그들을 두렵게 한 것은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게 만든 연기 때문이었다.
비명 소리만 들리고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는데다 따가운 통증이 엄습한다면. 오합지졸들을 무너뜨리기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개미 새끼처럼 흐트러진 전열을 본 연합왕국 장교 일부가 ‘돌격’을 외쳤다. 전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적진이 스스로 붕괴되는 꼴을 봤다.
‘기회’라고 느낀 마당에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부대 전개를 기다렸다간 적이 뒤로 후퇴해 공황을 수습할 기회만 줄 것 같았다.
차라리 무너지는 적의 뒤에 바싹 붙어 공격을 펼친다면 제국군을 차례로 와해시키고도 남았다. 그들의 경험은 ‘기세’를 타고 밀어붙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부 장교가 돌격을 외치며 부대를 전진시키자 뒤쪽에 있던 지휘관들은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놀라 잠시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정지를 명하기에도, 공격을 명하기에도 애매했다.
지금 정지를 명했다간 이미 헝클어진 부대 전개를 정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전진을 명령하기엔 제대로 전개도 되지 않은 병력을 적진에 돌입시키는 문제가 있었다.
몇몇 부대가 돌출하듯 튀어나가고 지휘관의 명령도 없자 나머지 장교들도 마지못해 그것을 뒤따랐다. 그 때문에 승도와 연합왕국 양측의 계획이 동시에 흐트러지고 말았다.
제대로 전개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왕국군의 돌격과 포격만으로 무너진 녹기. 양측의 교전은 처음부터 예상치 못한 전개로 출발하고 있었다.
***
“전원 착검 돌격하라!”
적의 진형이 무너진 이상 전열 전투 방식을 고수할 이유가 없었다. 착검을 한 채로 돌격해오는 붉은 코트들의 노도 같은 기세에 제1진의 붕괴는 가속화되었다. 백린을 뒤집어써 공황에 빠진 상태에서 적의 착검 돌격까지 받게 되니 제대로 반응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것만으로 제1진 전체가 공중 분해되었다. 흩어지는 적의 뒤를 쫓기 위해 붉은 코트들이 날렵하게 논두렁 앞까지 몰려들었지만 이번엔 연합왕국도 큰 실수를 저질렀다.
부대를 제대로 전개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각 공격 제대가 시간차도 두지 않고 돌입한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적의 대포 사거리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예단해버린 생각도 오판이었다.
애초 전개 자체를 효율적인 공격 진형의 재편과 혹시 모를 적의 통제된 사격에 대한 대비 정도로만 생각했던 왕국군이다. 그들은 적의 포격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지에 대한 대가를 몸으로 비싸게 치를 참이었다.
씌이잉.
별안간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그것이 공기를 울릴 때까지만 해도 붉은 코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다. 자신들의 몸에 와 닿는 순간까지.
“적의 포격이다!”
누군가 뒤늦게 자신들을 향해 통통 튀는 물체를 발견하고 경악성을 토해냈다. 이 거리까지 적의 포병대가 포탄을 날려 올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터라, 충격은 훨씬 컸다.
바닥을 튕긴 아이언 볼은 그대로 밀집한 병사들의 팔다리,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압도적인 운동 에너지로 무장한 강철 구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연약한 피륙을 수수깡 부러트리듯 부수고 지나갔다.
비명 소리가 순식간에 개활지를 메웠다. 병력이 지나치게 밀집된 탓에 한 발의 아이언 볼에 대여섯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일도 있었다.
수십 발의 포탄이 휩쓸 때까지 제대로 분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발생한 사상자만 백 명에 육박했다. 왕국군이 상정하지 못한 끔찍한 수준의 피해가 아닐 수 없다.
“맙소사. 적에게 우리와 동등한 수준의 대포가 있단 말인가?”
왕국 측이 경악할 틈도 없었다. 포격은 계속 이어졌고 피해는 조금씩이지만 계속 누적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서 현실감마저 없었다. 그럼에도 전투력 면에서 월등한 붉은 코트들은 논두렁을 타넘어 두 번째 방진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그제야 상황을 인식한 연대 지휘관들이 제2진을 개활지로 내보냈다. 전투는 그들이 계획한 범주를 벗어나 있었지만, 물러나는 선택을 고려하기엔 이미 흐름을 타버린 상태였다.
***
“예상보다 적의 피해가 작군.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나빠.”
승도는 입맛이 쓰다고 느꼈다. 최초 교전부터 뒤틀린 상황의 여파는 모든 작전을 엉망으로 뒤틀었다. 독전대의 벽을 넘어 물러서는 녹기들 때문에 제2열에 선 단련들의 진영도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수적으로는 승도가 훨씬 유리했지만 포격에서 살아남은 홍모귀들의 제1진을 저지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포격의 악몽조차 이겨내며 악귀같이 전진해오는 붉은 코트들과 아군의 패주에 휩쓸려 혼란에 빠진 다수의 오합지졸. 어느 쪽이 우세할 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숫자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안정된 진지를 끼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아무리 못해도 적의 1진이 가해오는 압력까지는 상쇄할 수 있다. 승도는 그렇게 믿었다.
새빨간 물결이 곧 단련들의 흰 물결 앞으로 쇄도했다. 총격이 오가고 비명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연합왕국 측의 2차 포격이 이어졌다.
양각을 한껏 끌어올려 최대 사거리로 포탄을 쏘아대는 적의 기세가 만만찮았다. 승도 역시 이에 맞서 포격을 퍼부었다. 값비싼 카니스터 대신 값싼 유산탄을 퍼부었다.
포격이 이어질 때마다 시체가 즐비하게 깔렸다. 상대적으로 노출된 상태로 교전을 벌이는 붉은 코트들의 피해가 커야 정상이었지만 사실 상황은 정반대였다.
잘 훈련된 포병과 보병을 보유한 붉은 코트들의 공격은 이쪽의 이점을 간단히 씹어 먹고 있었다. 피해가 속출하다 보니 단련들의 방어선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그래도 홍모귀 1진의 전력이 상당히 약화된 상태여서 아직 견딜 만했다.
“대인. 적 2진입니다.”
승도가 망원경을 들자 과연 적의 두 번째 보병 대대가 첫 논두렁을 타 넘으며 전장을 향해 급속히 전진해오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세 번째 보병 대대가 개활지로 들어와 전개를 하는 중이었다.
“기병만 몰려오면 적 전력을 모두 볼 수 있겠어.”
승도는 장검으로 마른땅을 쿡쿡 찔렀다. 두 번째 보병 대대의 돌입 시점에서 아마 단련들의 붕괴가 시작될 터. 예상과 달리 보병만으로 결판이 나버린다면 적 기병은 전력을 온존한 상태에서 아군 전체를 씹어 먹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수순이다.
보통 기병은 전과 확대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 시대만 해도 전장의 첨병에 나섰던 기병이 전과 확대 등의 역할을 떠안게 된 것은 그만큼 보병의 화력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병이 약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병은 여전히 후퇴하는 잔병 추격에 있어 가장 무서운 사냥꾼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패잔병을 싹 쓸어 재기의 기회를 없애버리는 병과. 그것이 기병이다.
전투 자체가 그의 의도를 상당 부분 벗어나 진행되고 있어 승도는 빨리 상황을 바꿀 묘수를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승도는 고심 끝에 단련 지휘관 하나를 불렀다. 그는 제3진의 보병 방진을 지휘하는 자였다.
“이 대인께서 2진으로 이동해 주셔야겠습니다.”
“아니 왜요? 포병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반문에 승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2진으로 중앙을 막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장 2진이 무너지는 걸 막아야 합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단련 지휘관이 읍하며 물러나자 승도는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병력이 모자란 상황에선 결국 더 중요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병력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2진의 붕괴를 늦추어 가능한 한 적의 출혈을 강요하고 기병이 나올 때까지 적을 붙들어 두어야 했다. 적 기병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면 잔병의 수습도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승도도 이런 선택은 피하고 싶었다. 그만큼 지휘부와 포병을 위험에 노출시킬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어느 정도 통제 하에 둘 수 있을 예비 전력을 완전히 고갈시키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예비대가 없는 지휘관은 대사건의 구경꾼일 수밖에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상기할 필요도 없다. 예비대가 없을 때 무슨 꼴을 당하는지는 승도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는 내놓을 수 있는 패를 모두 던져놓고 남은 계획이라도 온전히 펼쳐지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변수에 대항할 수 있는 카드는 그의 손에 더 이상 없었다.
그래도 승도는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포를 다루는 자들을 불러 군영의 목책을 옮기라고 지시했다. 포대 주변에는 이미 대기병 목책이 상당수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의 위치를 바꾸라고 지시한 것이다.
어차피 포탄을 몇 발 더 쏜다고 해도 밀집도가 낮은 적 1진에 대해 재미를 보긴 어려웠다. 그 시간에 목책의 위치를 조금 바꾸어 보병을 고려하여 설계한 포병의 시계를 다소 바꾸려 시도한 것이다.
2진이 돌파되는 시점에 그와 지휘부는 포병 진지를 이탈하여 후방에 위치한 콩그리브 로켓 쪽으로 이탈해야 했던 까닭에 지시를 내릴 시간도 빠듯했다. 승도는 촌각을 다투어 포병의 배치도 다시 지정했다.
원래대로라면 포병대는 2진의 머리 위로 진내 사격을 쏟아부은 다음 수평 사격으로 전환할 예정이었는데, 이때는 3열의 보병을 고려하여 포의 발사 방향에 맞게 포구를 돌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달라진 이상 포병의 재 방열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각 포대는 말 그대로 고슴도치 모양으로 포구를 바꾸도록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별 모양으로 포탄을 쏟아부을 수 있도록 방열되도록 계획되었는데, 이는 지난날 로망스의 명장이었던 뷔르방 원수가 설계한 효율적인 화력 투사 방식을 참고한 것이었다.
승도가 막 포병의 재배열 작업을 서두르는 찰나에 함성을 지르며 몰려온 연합왕국 보병 제2진이 단련들의 방어선에 도달했다.
아직까지 이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던 1진과 합류한 2진은 압도적인 사격을 퍼부으며 금세 기선을 제압했다. 거의 비슷한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연사 속도는 차원이 달랐다.
지금까지는 수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단련과 수가 적은 홍모귀 1진이 비등한 총탄을 주고받았지만, 홍모귀의 수가 몇 배로 불어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분당 6발 이상의 총탄을 쏠 수 있도록 잘 훈련된 홍모귀들은 총의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내며 압도적인 화력을 발휘했지만, 단련들은 달랐다. 그들은 분당 3발을 겨우 쏘아내기에 바빴다. 몇 달의 강훈련을 받았음에도.
그러다보니 수는 단련이 많음에도 화력에서는 홍모귀 쪽이 우세한 기현상이 벌어졌다. 소총탄 레벨에서 차이가 벌어진 데다, 화력 통제와 조준의 정확도에서 차이가 너무 컸다. 논두렁이 없었다면 진즉에 붕괴되고도 남았을 격차였다.
수차례 총격이 오가자 금세 단련들은 파탄을 드러냈다. 특히 공격이 집중된 중앙부는 그야말로 폭격이라도 맞은 듯 사상자가 급증하여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돌격!”
장교가 칼을 빼들고 소리치자 붉은 코트들이 기세 좋게 논두렁을 향해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그 강렬한 기세에 거듭된 공격으로 얇아진 단련들의 방어선이 실낱처럼 얇아졌다. 총탄을 퍼부으며 돌입한 붉은 코트들이 거침없이 총검을 휘둘렀다.
피 보라가 튀고 연합왕국 국기가 휘날렸다. 아무리 보아도 승부는 결판이 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붉은 코트들이 잇따라 동료들의 뒤를 쫓아 논두렁을 타 넘었다. 연합왕국 보병이 기대한 결정적인 돌파구가 만들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새로운 병력이 중앙부로 도착했다. 승도가 적시에 이동시킨 3열의 보병이 출현한 것이다.
***
핏물이 튀고 비명 소리가 울린다.
막 흰옷 사내의 가슴을 검으로 찌르던 윌리엄은 다음 순간, 함성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적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옆에서 총검을 휘두르던 병사들도 그것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돌파구에 들어선 붉은 코트들의 수는 겨우 100여 명이다. 하지만 새롭게 나타난 적은 자그마치 500은 되어 보이는 숫자다. 머릿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대규모 적이다.
검에 묻은 핏물을 바닥에 튕겨낸 윌리엄의 푸른 눈에 담긴 적의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 적은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많고 강해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기엔 그의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동료들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퇴각’을 부르짖는 대신, 마법과도 같은 한마디로서 자신들의 용기를 표현했다.
그것은 정말 마법처럼 그들의 전의를 북돋아 주었다.
“여왕 폐하 만세! 돌격 앞으로!”
선두에 선 윌리엄이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앞장섰다. 총검을 꼬나 쥔 붉은 코트들이 그 옆을 엄호하듯 뒤따랐다.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그 사기만큼은 도리어 이쪽이 월등히 위였다.
세계 최강국의 육군이라는 자부심과 명예, 그리고 조국에 대한 긍지와 여왕에 대한 충성심, 전우들에 대한 믿음. 무수한 요소를 발판으로 만들어진 왕성한 사기는 절망적인 격차에도 굴복하지 않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더러운 홍모귀 놈들. 죽어라!”
단련 하나가 악을 쓰며 총검을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제식 총검술을 숙달하고 싸우는 붉은 코트를 상대로 총검을 휘둘러 승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체격 면에서 붉은 코트 쪽의 우세는 확고했다. 일대일의 싸움이라면 붉은 코트 쪽의 우세는 확실했다. 곧 총검을 휘두른 단련은 붉은 코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제 가슴을 내준 채 진흙을 입에 머금어야 했다.
피 보라를 뿌리며 단련의 목을 친 윌리엄의 칼이 다시 유려한 선을 그렸다.
왕실이 주최한 펜싱 시합에서 3위에 랭크될 정도로 기술면에서 출중한 사람이 바로 그다. 그의 검이 다시 빛나는 선을 그리며 춤을 추자 단련 하나가 피를 토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얼마든지 덤벼라.”
윌리엄은 새카맣게 몰려드는 적병들을 향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