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지옥의 문턱 (5)
놀랍게도 A중대의 생존자들은 수적으로 몇 배나 되는 단련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었다. 그들이 끈질기게 버티는 동안, 논두렁을 넘어오는 붉은 코트들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쌍방의 수 차이가 빠르게 줄어들자 단련들이 슬슬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아닌 말로 총검을 거침없이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붉은 코트들의 기세를 감당하기엔 그들의 전의가 너무 형편없었다. 그저 수적 우세만 믿고 일시적인 용기를 내었을 뿐이다. 그 이점마저 상쇄되었으니 전의가 꺾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죽어버려!”
붉은 코트 하나가 악을 쓰며 단련의 배를 총검으로 쑤셨다. 그 옆에는 단련의 손에 배가 찢어진 채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붉은 코트가 하나 있었다. 동료를 곧 잃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분노로 눈이 뒤집혔는지 그는 이미 죽은 자를 계속해서 총검으로 내려찍었다.
피까지 보면서 광기까지 뒤집어쓴 붉은 코트들의 공격력은 최초 시점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급기야 단련들 중 일부가 슬금슬금 전장에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전투에 대한 최소한의 전의마저 사라지려는 징조였다. 이대로라면 몇 분 안에 2선에서 싸우는 병력 전체가 와해될 판이었다.
그때 다시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그 굉음에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붉은 코트와 단련들이 뒤섞인 자리로 무수한 쇠구슬이 쏟아졌다. 그 참혹한 공격에 모두가 놀라 총검을 휘두르던 손마저 늦추었다.
“카니스터. 미친 야만인 놈들. 제 동료들의 머리 위에 산탄을 쏘다니?”
붉은 코트 하나가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절규했다. 산탄이 휩쓴 자리는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비명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쇠구슬이 쏟아진 자리에 있던 병사 하나는 전신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피거품을 쏟아냈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다. 그나마 정신무장이 잘 된 연합왕국 측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총검을 쥐었다.
공황에 빠진 상태에서 주도권을 잡는 쪽은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이는 쪽이다. 그 점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은 무엇보다 강력한 우군이 되어주었다. 전투 경험이 부족한 신으로서는 이런 부분에서 도무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총검이 번뜩일 때마다 피분수가 터졌고, 시체가 겹겹이 포개졌다.
하지만 연합왕국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산탄은 주기적으로 쏟아졌고, 그 때문에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산개 대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병사 간의 간격이 넓어지자 조직적인 화력의 통제와 탁월한 집단 전술에 전투력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던 붉은 코트들의 강점도 상당 부분 상쇄되었다.
“명예도 모르는 야만인들. 아군의 머리 위로 포탄을 쏟는 더러운 짓을 하다니.”
윌리엄도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산탄 때문에 아이언 볼과 총탄의 사선을 넘어 이곳까지 도달한 A중대의 절반이 시체가 되었다. 하필 그의 부대를 향해 산탄이 집중된 탓에 피해가 배가되었다.
그나마 윌리엄은 그의 앞에 서 있던 단련 병사 덕분에 산탄의 살상을 피할 수 있었지만, 운 나쁜 동료들은 달랐다. 나름 정을 붙인 자들이 모두 피를 뿌리며 신음하는 꼴을 보고 속이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선두에 서 있던 기수가 홀로 피에 젖은 국기를 흔들며 사투를 벌이다 단련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본 윌리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명예도 모르는 비천한 것들에게 국기를 모욕당할 수는 없었다. 칼을 뽑아든 그는 냉큼 단련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머리 위로 산탄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처절한 혈전을 벌였다. 그 광경은 지옥과도 같았다.
“전세가 좋지 않습니다.”
헨들릭 중령이 인상을 찌푸리며 망원경을 내리자 에이번 대령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전개를 막 마친 세 번째 보병 대대를 가리켰다.
“아직 낙담할 건 없네. 저 친구들이 전장에 가담하면 돌파구는 만들 수 있을 거야.”
“피해가 너무 큽니다. 벌써 연대 병력의 2할을 잃었습니다.”
헨들릭이 입술을 질겅이며 한마디를 던지자 에이번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피해 없는 전투는 드문 법이지. 너무 마음을 졸이진 말게. 그 피값은 내가 받아줄 테니까. 기다려보게.”
에이번 대령이 기병 연대의 전개를 지휘하기 위해 뒤로 돌아가자 헨들릭은 다시 망원경을 들었다. 이번 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빌어먹을.”
***
“제기랄. 전군 돌격!”
뒤늦게 도착한 세 번째 보병 대대가 전장에 가담했다. 새로운 붉은 코트들의 출현은 적과 뒤섞여 수라장 같은 전투를 치르며 산탄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단련들에게 절망적인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다.
칼을 뽑아든 장교의 외침에 붉은 코트들이 홍수처럼 전장으로 쏟아졌다. 새롭고 강력한 적의 증원은 전세를 일시에 바꾸었다.
이제까지 중앙부에서의 격전에 양측의 운명이 걸렸다면, 이젠 전선 전체가 요동쳤다. 총검을 쥐고 쏟아진 붉은 코트들이 일제히 일제 사격을 퍼붓고 백병전을 벌이자 지금까지 근근이 버티던 단련들의 방어선이 뒤로 쑥쑥 밀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승도가 지형에 맞추어 2선의 방어선을 조정해둔 덕분에 한순간에 와해되는 것은 면했지만, 구멍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새빨갛게 몰려온 붉은 코트들의 거침없는 공격에 일순간 팽팽하게 늘어나던 전선의 한곳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보병 서넛 정도가 저항 없이 지나갈 수 있는 돌파구다. 그 돌파구를 확장하기 위해 붉은 코트들은 병력을 집중했다.
양측 모두 보병 전력 전체를 쏟아부은 터라 예비 보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저 돌파구 주변에서 병력을 끌어다 소모적인 싸움을 벌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선 전체가 붕괴되고 있던 신의 단련들로서는 더는 돌파구를 막아내지 못했다.
마침내 사람 열이 지나가고도 남을 정도로 큰 구멍이 뚫렸다. 그 돌파구 위에서 붉은 코트 하나가 왕국의 국기를 흔들었다. 불길한 신호였다.
망원경을 내린 에이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개활지에 부대를 전개한 채로 공격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더없이 기다려지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보병들의 선형진을 상대해야 한다면 ‘죽음의 행진’이 되겠지만 전열은 이미 없다. 뻥 뚫린 돌파구를 지나 전진할 수만 있다면 보병 따위는 기병의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보병을 당장 사냥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의 표적은.
“일단 포병부터 쓸어버려야겠지. 아무래도 산탄을 더 뒤집어썼다간 사상자가 천까지 가겠어.”
그는 냉정하게 표적을 선정했다. 강력한 로망스 제국군을 상대로 중앙 돌파를 감행하여 적 포병 진지를 공격해본 바 있던 그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대기병 저지용 목책이 둘러져 있다 하더라도 그런 표적을 상대해본 경험은 이미 충분했다.
말을 타고 오를 수 없다면 하마(下馬)하여 적진을 공격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왕국 기병은 보병으로서의 훈련도 충분히 받은 만능의 병과였다.
에이번이 검 집에서 칼을 천천히 뽑아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유난히 싱그럽게 들렸다. 그는 햇빛을 받아 번뜩이는 칼을 높게 치켜세운 채로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여왕 폐하와 연합왕국의 이름으로, 명예로운 기병의 돌격을 보여주도록 하자. 근위 기병의 이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머저리 야만인들이 꿈에도 잊지 못하도록 각인시키자. 자, 가자. 나의 아이들아!”
“여왕 폐하 만세!”
기수가 연대기를 펄럭이며 앞으로 나서자 말들이 일제히 푸드덕 소리를 냈다. 다음 순간 기수가 앞으로 달려가자 연대 전체가 전진했다.
처음에는 전마의 피를 데우기 위해 속도를 내지 않았다. 돌파구를 지나는 지점부터 폭발적인 속도를 내기 위해 전마의 체력을 아끼기 위함이다.
제 속도를 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지축을 울리며 전진하는 550명의 근위 기병이 발하는 존재감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뽀얀 먼지 구름과 지축을 울리는 소리를 동반한 수백 기의 기병은 멀리서 보기엔 수천은 되는 듯한 대군처럼 보였다. 이것은 기병이 가지는 심리적 이점 중 하나였다. 대개 기병에 패하는 보병들은 이 압박감에 못 이겨 스스로 대열을 무너트렸다.
서서히 돌파구에 가까워지자 장대한 기병의 물결은 5열종대로 바뀌었다. 물결의 선두가 보병들이 사투를 벌이는 돌파구에 이른 순간 선두에 선 기수가 깃발을 치켜세웠다.
그것을 신호로 기병 전체가 속도를 올렸다. 지축을 울리는 소음과 함께 진흙이 튀며 말들이 달렸다. 거친 호흡 사이로 기병들이 내는 함성 소리가 메아리쳤다.
근위 기병의 명예와 자부심이 담긴 울림에 돌파구 주변에서 싸우던 자들이 뒤로 비켜났다. 운 나쁘게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돌파구 쪽으로 걸음 하던 단련 병사들은 질주하는 기병의 말발굽에 유린당했다.
운이 좋아 말발굽을 피한 자는 마상에서 휘두른 기병의 칼을 맞고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고통스런 신음을 토해야 했다.
단번에 돌파구를 확장한 기병의 물결은 그대로 적진의 중앙, 포병 진지를 향해 쇄도했다. 기병들은 검을 집어넣고 권총을 뽑아들었다. 적을 포위한 상태에서 빙빙 돌며 권총을 쏘는 방식은 전통적인 기병의 공격 수법 중 하나였다.
그들이 포병 진지로 쇄도하는 동안 포의 재 방열을 급히 진행한 적 포병들이 포탄을 포구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기병들은 민첩하게 좌우로 갈라지며 거리를 벌렸다. 경험이 풍부한 에이번 대령이 지휘하는 기병이다. 상대가 자신들을 향해 직사를 퍼부을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리 없었다.
첫 포격이 기병을 향해 쏟아졌다. 최초로 쏘아진 것은 산탄. 무수한 쇠구슬이 우박처럼 쏟아졌지만 보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공간을 벌린 기병에게 별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포병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지 잘 연구한 연합왕국 기병에게 승도가 고심한 포병의 방열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기병들은 둘로 갈라져 포병 진지를 빙글 돌았다. 단번에 포위를 마친 것이다.
그들은 그 상태에서 주저 없이 말에서 내렸다. 보병 방진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포병을 상대할 때 말을 타고 빙빙 돌며 권총이나 쏘는 짓은 시간 낭비였다. 말에서 내린 다음 그대로 돌격하여 포병을 쓸어버리는 쪽이 간단하고 피해도 작았다.
왕국 기병의 예상치 못한 신속한 반응에 포병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지 못한 차였다. 그나마 승도가 미리 배려해둔 덕분에 이 위기의 상황에서도 살아날 수단은 갖고 있었다.
“모두 구덩이로 들어가!”
지휘관이 말할 것도 없이 포병들은 구덩이로 뛰어든 다음 미리 준비한 철제 뚜껑으로 구덩이 위를 막았다. 왕국 기병들은 포병들의 반응에 의아해하면서도 못부터 꺼냈다.
혹시나 적의 예상치 못한 예비대가 나타날 경우에 대비해 미리 포를 못 쓰게 해두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씌아아아앙.
대포알이 나는 소리와는 다른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기병들은 그 소리를 처음 듣는 터라 그것이 무슨 무기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 무기를 사용해본 경험이 있는 에이번 대령은 달랐다. 그는 경악에 찬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콩그리브 로켓이었다.
자그마치 수백 발에 육박하는 콩그리브 로켓이 포병 진지를 노리고 쏟아졌다. 유감스럽게도 연합왕국 기병은 그것을 피할 기동력이 없었다. 말이라도 타고 있었다면 모를까. 하마한 상태에서는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그것을 피할 능력이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포병 진지에 가득 쌓인 탄약이었다.
“빌어먹을.”
에이번의 욕설과 함께 수백 발의 콩그리브 로켓이 기병들 사이에서 폭발했다. 강력한 인화성 물질을 탑재한 로켓의 폭발에 발맞추어 가득 쌓여 있던 탄약이 유폭을 일으켰다. 엄청난 폭발에 휩쓸린 기병 백여 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몰살했다.
하지만 공격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바로 기병들이 피할 공간을 노리고 2차로 쏘아진 콩그리브 로켓 세례가 쇄도한 것이다.
거대한 불꽃과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다. 사람의 손가락과 팔이 바스라진 채로 허공으로 튀었다. 일부 기병은 산 채로 익어 버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끔찍한 지옥의 풍경이었다.
살아남은 기병들은 넋이 빠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리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자들이라도 동료 수백 명이 일시에 구워지고 산산조각 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멀쩡할 수는 없었다.
-뿌우우우.
멀리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맞추어 포병들이 구덩이에서 기어 나와 재빠르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로켓 세례로 대포들은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그나마 멀쩡한 것들도 포가가 망가져 제대로 쓸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포병들이 탈출한 시점에서 2차 방어선에서 혈투를 벌이던 단련들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패주했다. 하지만 이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인간 사냥을 해야 할 기병은 존재하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덫에 걸려 전력의 상당 부분을 잃고 공황에 빠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승도는 패주 과정에서 입어야 할 피해의 대부분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날 여문 전투에서 연합왕국은 모두 680명의 사상자를 냈다. 단일 전투로는 ‘아편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에서 입은 피해로 최대 규모의 것이었다.
이에 반해 오승도가 지휘한 단련 및 녹기는 모두 1,350명의 사상자 및 행방불명(포로 및 실종)자를 기록했다.
피해 규모에서는 연합왕국 측의 두 배에 이르렀으나 쌍방의 질적 격차를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교환 비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연합왕국 측에 진짜 피해가 있다면 바로 잃어버린 자신감이었다. 그들은 이 끔찍한 피해에 진저리를 내며 강주 공략의 성공 여부에 회의감을 품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