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56화 (56/425)

제56화. 도박사 (1)

여문 전투의 충격은 원정군을 경악시켰다. 최초 강주로 진공할 예정이던 로열 노섬브랜드 연대와 근위 기병 연대는 괴멸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의 피해를 입어 더 이상의 공세 능력을 상실했다.

대개 병력의 30%만 상실해도 전면적인 재편성이 요구된다고 말하는데, 근위 기병의 경우에는 총원 550명 가운데 180명의 기병을 상실했다.

비율로 보면 30%를 넘는 수치인 셈이다. 거기에 포격 후유증으로 각종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는 자들이 속출하여 기병 연대의 경우는 말 그대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고 보아도 좋았다.

로열 노섬브랜드 연대도 마찬가지다. 1,350명의 장병 가운데 500명의 병사를 상실했는데(부상 포함), 이는 40%에 육박하는 손실 비율이었다.

최초로 투입된 대대의 경우에는 생존자가 반편 중대에 불과할 정도였고, 두 번째 투입된 대대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 정도의 피해를 입으면 통상 보병 부대의 작전 수행 능력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게 상례다. 손실이 이처럼 엄청나다 보니 원정군은 선뜻 진격을 결심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적의 예상치 못한 막강한 화력을 목격한 터라 적의 아가리 속으로 전진하는 것 자체에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강주 공격군은 원정군 사령부에 증원을 요청하고 신규 병력의 도착을 기다리며 사흘간 여문에 머물렀다. 그들은 이 휴지 기간을 이용해 부상자를 후방으로 송환하고 부대를 재편성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이들이 바로 공세에 나섰다면 승도도 심각한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었다. 사냥꾼들을 준비해두긴 했지만 정면에서 싸울 병력 자체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터라 저격을 감수하며 강주 코앞까지 급속 진군해올 경우에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연합왕국은 상상을 초월한 피해에 자신감을 잃고 공격을 머뭇거렸다.

그들이 공세를 주저한 사흘 동안, 승도는 패잔병들을 수습하고 예비대와 합쳐 진용을 재정비할 황금 같은 시간을 얻었다.

그는 패잔병들을 재편성하여 부대 편제를 마련하고 그들의 정신무장을 가다듬었다. 어찌 되었든 머리 위로 포탄을 뒤집어쓴 자들이기에 그들에게 전투에 대한 동기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전투에서 죽은 자들에게는 구휼미를 베풀었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쌀과 밀, 보리 등을 스무 섬씩 주기로 했다. 먹을 것이 귀한 시대라 이것만으로도 남은 자들에게 싸울 이유를 주기에 충분했다.

사흘 동안 병사들의 전의를 고취하고 전열을 완전히 재정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이 없었다면 부대 진용을 갖출 여유조차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연합왕국 측에 뼈아픈 시간이었다.

더욱이 승도에게는 시간을 벌어줄 저격수도 남아 있었다. 덕분에 다소 불안한 토대 위에서 출발한 작전은 큰 변수 없이 진행되고 있다 보아도 좋았다. 물론 승도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흘이 지나서야 왕국 측은 해병대 1개 대대를 증원받아 진용을 재정비하고 진격을 재개했다. 이 시점에서 연합왕국의 전력이 다시 우위에 섰다.

해병대의 1개 대대를 합쳐 로열 노섬브랜드 연대가 예하에 두게 된 보병 전력만 1,170명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수치상으로는 2,500명을 헤아리는 승도 측 방어군(부족한 숫자는 패잔 수습이 되지 않은 탈주 인력)에 비해 열세였으나 그 질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최소 5배 이상의 전투력을 가진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재차 회전을 벌이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을 하고도 남을 압도적인 전력 차였다. 물론 기병이 괴멸되어 동원될 수 없다는 점은 나빴지만, 그것은 단순한 이점의 상실에 불과했다.

왕국은 적의 포병 전력이 상당 부분 혹은 대부분 감소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승리의 확신을 다졌다. 무엇보다 떨어진 사기를 만회할 새로운 카드가 손에 들어온 터라 승리에 대한 희망은 단순한 수뇌부의 바람이라고 잘라 말할 수 없었다.

군악대가 북을 두드리며 행군을 알리자 붉은 코트들이 4열 종대를 이루어 전진을 시작했다.

특이한 점은 지금까지 선두에 있던 로열 노섬브랜드 연대기가 뒤로 물러나고 새로운 부대기가 앞에 섰다는 점이다. 그 깃발을 든 자들은 사기도 높고 전의도 충만한 새로운 전투 부대였다.

“대양을 건너 적의 육지로 다가간다. 우리가 가는 길에 살아남는 자는 없다. 우리는 위대한 왕립 해병대.”

군가의 일부를 흥얼거리는 붉은 코트들이 선두에 섰다. 그들은 지난날 염화 포대에서 승도에게 호된 맛을 보여준 바 있던 왕립 해병대(Royal Marine)였다.

해병대는 앞에 왕립이란 수식어가 붙어 육군과 차별화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해병대의 훈련이 육군보다 강도 높기도 하거니와 전시에 ‘모병’을 하여 전력을 확충하는 육군과 달리 전체 전력을 상비군으로 유지해온 덕에 기강이나 훈련도 면에서도 육군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무기에 대한 숙련도야 일정 수준에 오른 육군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지만 기본적인 전술 이해도는 육군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정신무장은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는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해전에서 포탄을 주고받을 때 발생하는 무수한 나무 파편에 바로 옆의 동료가 고기조각이 되어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육군의 정신무장이 아주 뒤쳐진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이들은 그런 선상 생활을 짧게는 삼 년, 길게는 십 년 이상 겪으며 살아온 베테랑들이다. 숙련도란 측면에서 육군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머저리 육군 놈들. 정예라고 큰 소리는 한껏 다 쳐놓고 야만인들에게 피를 봤다지?”

“왕국의 수치인 거지. 우리 해병대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꼴을 당하진 않았을 거야.”

해병대원들은 여문 전투에서 혹심한 피해를 본 육군을 비웃었다. 사실 그들은 그런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왕립 해병대는 지금껏 압도적인 적을 상대한 상황에서도 패한 적이 거의 없었다.

전력에서 동등 혹은 그 위인 상태라면 그 전적은 불패(不敗). 한낱 야만인들에게 쓴맛을 본 육군이 우습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냥 야만인은 아닌 것 같더군. 출발 전에 대포를 확인했는데 모두 신형으로 보이더라고. 아주 우스운 상대는 아닌 것 같아.”

“돈밖에 모르는 버러지들이 또 일을 저지른 것이겠지.”

동료의 말에 해병대원이 냉소를 지었다. 연합왕국 상인들의 일탈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전쟁 중인 적국을 상대로 공공연히 밀수를 하여 적을 돕는 이적 행위 자체가 하도 많다보니 왕국 해군 차원에서도 어떻게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반혁명 전쟁 중에 벌어진 군복 밀수 사건이다.

당시 대륙을 지배하던 로망스 제국은 면화 수입이 끊어진 탓에 자국 병사들의 군복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실정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바로 연합왕국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자그마치 20만 벌에 달하는 군복을 해협 너머로 밀수하여 필립 아우구스트 퐁퓌르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이적’을 발휘했다. 더 어이없는 점은 그 군복이 전부 연합왕국 수병용이었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로망스 제국군은 자신들의 상징과 같은 푸른 코트 대신 왕국 수병의 남색 코트를 걸친 채로 전장에 나서야 했다. 전장에서 자기 나라 수병의 제복을 입은 군대를 적으로 마주한 붉은 코트들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래서 이 군복 밀수 사건은 ‘왕립 제국군 사건’이라는 웃을 수 없는 별명을 달고 있었다.

“뭘 그리 수군거리는 건가? 고향에 놓고 온 애인 생각이라도 나나?”

“이번에 받을 월급 생각했습니다.”

부하의 넉살 좋은 대답에 해병 위관이 미소를 지었다.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부하들의 사기가 높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처럼 해병대는 여유가 있고 자신감이 넘쳤다. 여문에서 쓴맛을 보고 사기가 꺾인 육군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월급이라. 이번에는 전쟁 수당이 붙을 테니 제법 쏠쏠하겠군?”

“그래봐야 나포 포상금에 비하겠습니까?”

나포 포상금이란 말에 위관도 껄껄 웃었다. 나포 포상금은 해군 사이에서 돈벼락으로 통하곤 했다. 보통 배를 나포하면 해군성에서 배 가격의 50~80%에 해당되는 현금을 배를 나포한 자들에게 지급하곤 했는데, 이 비용은 계급 순으로 쪼개져 전원에게 분배되었다.

말단의 병사들에게 돌아오는 비율은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포 포상금이 워낙 커서 운이 좋으면 50개월 치 월급을 한 번에 손에 쥘 수도 있었다. 해군은 그런 가외수입이 종종 있어 육군만큼 전쟁 수당에 목을 맬 필요가 없었다.

“그 말은 맞네. 나포 포상금에 비교할 수야 없지. 그래도 이번엔 군표로 수령하지 말고 묵혀 두었다가 본국에서 바꾸게.”

“그럼 술을 어떻게 마십니까?”

“군표는 손해가 크잖나?”

위관은 술을 사마시기 위해 월급을 현지에서 군표로 받는 병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군표는 해군이 지급해 주겠다는 일종의 증서와 같았는데, 이것은 액면가의 85% 내외로 계산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가뜩이나 소득의 10%를 꼬박꼬박 공제당하는 말단의 병사들이 군표 할인까지 덤터기를 쓰면 쥐꼬리만 한 월급이 반편이가 된다는 것을 위관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그렇게 논리적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술을 마시고 싶을 땐 마셔야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숲으로 들어선 지도 제법 된 것 같았다. 20여 분을 행군했으니 못해도 1km는 전진한 듯싶었다. 군대의 행군 속도는 통상 시속 4~7km. 이동거리가 그리 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숲으로 들어온 터라 공간감이 상당 부분 흐트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탁 트인 해상에서 작전을 해온 해병의 입장에서는 숲에서 공간감을 제대로 잡는 것은 다소 어려운 문제라 할 수 있었다.

부하들과 말을 몰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위관이 계속 아래를 보고 말하느라 뻣뻣해진 목을 풀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좌우로 목을 돌리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다시 숲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차에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빵.

멀리서 오렌지 빛 섬광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위관의 이마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말에서 떨어져 진흙탕을 굴렀다. 천둥 같은 총성이 뒤를 이어 푸른 대기를 울렸다. 그것을 본 해병들이 소리를 높였다.

“적이다!”

“1열은 현 위치에서 사격하고, 2열부터는 좌우로 돌아 적을 공격한다.”

붉은 코트들은 불시에 장교가 전사했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노련한 대응을 보였다.

가장 바깥 줄에 선 보병들이 공격 의심 지점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하는 동안, 뒤쪽에 있던 보병들이 재빨리 숲으로 뛰어들어 공격자를 포위하기 위한 기동에 들어갔다.

그 움직임은 지휘를 받지 않는 병사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신속하고 정확한 것이었다. 실은 부대의 허리를 이루는 다수의 준사관들이 제때 지시를 내리고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

“얼마나 기다려야 한다든가?”

“하루만 더 기다려보면 되겠지. 이틀이나 기다리라고 하겠는가?”

사냥꾼 관씨와 우씨는 장죽을 입에 문 채로 다가올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쟁과 아무 상관도 없던 그들이 전장에 나선 것은 결국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인구의 증가로 산이 마구 개간되고 사냥꾼의 수도 급증하면서 벌이도 시원찮아진 탓에 입에 풀칠하기도 마뜩잖던 처지였다. 그러던 차에 오승도가 곡식과 돈을 내걸고 사람을 모으니 산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그 휘하에 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도 정면에서 홍모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맹수 사냥하듯 총 한 방 쏘고 달아나면 충분한 일이다. 장교 사냥만 잘 하면 그에 맞는 포상도 확실히 준다고 했다. 전과를 확인해주는 사람도 따로 있다고 하니 믿을 만했다.

적어도 강주에서 오승도의 이름은 그리 낮은 값어치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번에 자네 아들 혼사 밑천 마련하려면 홍모귀 장교 놈 두엇 잡아봐. 공자님이 모르긴 해도 은자 수십 냥은 내려주실 터이니.”

“어디 그게 말처럼 쉽나. 맹수 사냥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사람 사냥 아닌가.”

“사람이 더 쉽지. 사람은 죽을 자리도 못 알아본다지 않나.”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멀리서 요상한 소리가 들렸다. 신국어가 아닌 기이한 말투들이 점점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북소리도 들리는 것이 아무래도 군대 같은 것이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관씨가 고개를 들어 숲 사이를 살피더니 총을 고쳐 잡았다.

“홍모귀들이 왔구먼.”

“어디 보이는가?”

“저기. 저쪽일세.”

관씨가 가리킨 방향으로 우씨가 고개를 내밀었다. 과연 어렴풋이 붉은 코트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평범한 색상의 옷이었다면 다소 구분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붉은색은 너무 강렬하여 그 색감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우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구만. 정말 홍모귀들이 왔어.”

관씨는 입에 문 장죽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범 사냥할 때 기억나는가?”

“잘 기억하지.”

“그때처럼 하세나. 자네와 내가 동시에 쏘기로 하세. 설마 우리 둘이 쏴서 한 놈을 못 맞히겠는가?”

“한 놈만 잡으려 하는가?”

“욕심 부려서 뭘 하겠나? 일단 한 놈이라도 확실히 잡아야지.”

관씨의 말에 우씨도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괜히 여럿을 노리다가 하나도 잡지 못하면 말 그대로 헛고생이지 않은가?

“그럼 어느 놈을 잡으려고 그러나?”

관씨는 날카로운 눈으로 홍모귀들의 대열을 바라보다 대열 선두에서 유독 눈에 띄는 자 하나를 골랐다. 복장도 화려하고 말도 탄 것이 착각할 수 없는 표적이다.

“저기, 저 말 탄 놈으로 하세. 복장도 그럴듯한 것이 홍모귀 장교 놈이 틀림없네.”

“저놈 말인가? 거리가 조금 먼 것 같은데.”

“범도 잡은 사람이 그리 약한 소리를 하면 쓰나? 잔말 말고 총이나 잡게.”

“알겠네.”

관씨의 말에 우씨도 총을 잡았다. 총을 잡으니 사냥을 하던 생각이 났다. 따지고 보면 전쟁은 인간 사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산 생물인 것은 매한가지인데. 우씨는 불가의 윤회설을 떠올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두 사냥꾼은 심호흡을 하며 자세를 낮추었다. 맹수 사냥에서 언제나 총탄 한 발로 승부를 보았던 그들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냥도 한 발로 승부를 볼 참이었다. 두 발은 없다. 그 생각을 하며 눈빛을 주고받은 둘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셋 펴보였다. 우씨가 동의한 순간 관씨가 낮은 호흡을 한 번 쉬었다. 첫 호흡은 아니다. 두 번. 세 번째 호흡에 총을 쏘겠다는 뜻이다.

우씨는 바로 그 한 호흡 뒤에 총을 쏘아야 했다. 우씨가 긴장한 표정으로 홍모귀 장교를 조준한 채로 동료의 사격을 기다렸다.

총성이 울렸다.

타앙!

요란한 총성과 함께 홍모귀 장교가 피를 뿌리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것을 본 우씨가 관씨를 보고 덕담을 건네려던 차에 관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홍모귀들이 몰려오네. 어서 자리를 뜨세.”

그 말이 끝날 새도 없이 연속적으로 불꽃이 번쩍였다. 홍모귀들은 장교가 총탄을 맞고 쓰러진 그 짧은 시간 동안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정확히 판단하고 있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축적된 실전 경험과 총기에 대한 이해도가 그런 놀라운 반응을 가능하게 했다.

총탄이 수도 없이 날아온 탓에 애꿎은 나무와 바위에 탄흔이 연속으로 새겨지는 통에 두 사냥꾼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 제 위치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2인 1조로 구성된 저격 조는 철저히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일격 이탈의 공격을 구사하도록 준비되었다. 지형에 익숙하고 단 한 발로 맹수를 잡도록 훈련된 사냥꾼인 터라 그 같은 방식을 몸에 익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붉은 코트들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점에 있었다. 아무리 라이플로 장거리에서 사격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대 역시 총을 들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붉은 코트들이 주로 중단거리에서부터 일제 사격을 퍼붓는 것은 유효 사거리에서 화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화력을 통제한 것일 뿐이다. 그들이 장거리 사격을 할 줄 몰라서 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사격의 정확도 면에서 이들만큼 단련된 자들은 드물었다.

수십 발의 총성이 울린 끝에 뒤늦게 움직이던 우씨가 피를 뿌렸다. 그는 돌부리를 넘기 위해 몸을 잠깐 들었다가 그대로 넘어졌다.

“우 씨, 이봐! 이 사람. 정신 좀 차려보게!”

관씨가 우씨 사내를 흔들었지만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전장의 도리도 모르는 더러운 야만인들. 죽여 버리겠다.”

어느새 성난 홍모귀들의 음성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씨를 데리고 달아나기엔 홍모귀들의 접근이 너무 빨랐다.

우씨가 비록 절친한 친우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관씨는 우씨의 손을 쥐며 말했다.

“미안하이. 내 자네 가족들을 꼭 보살펴줌세.”

관씨는 이를 악물고 우씨를 버린 채 수풀 사이로 달아났다. 관씨가 사라진 자리로 곧 수십 명의 무장한 붉은 코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아직 살아서 희미한 호흡을 내던 우씨의 몸에 수십 발의 총탄을 박아 넣었다. 우씨의 죽음. 그것은 사냥꾼들이 치른 숱한 희생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연합왕국은 그 별것 아닌 공격을 점차 우습게 여길 수 없게 되었다. 사냥꾼들의 장교 저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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