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도박사 (2)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표현이 있다. 아마 연합왕국 장교들이 이 속담을 알고 있었다면 실로 자신들의 처지에 적절한 용어라고 말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원정군은 여문에서부터 강주까지 고작 100km도 되지 않는 거리를 주파하며 수시로 저격을 당한 탓에 상당한 피해를 안아야 했다.
사상자 숫자는 60여 명. 피해 규모가 그리 많다고 할 수 없었지만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희생자들이 대부분 장교와 준사관들이었기 때문이다.
장교 한 사람의 가치를 단순한 휴머니즘의 관점으로 사병 하나와 동등하게 취급할 수 없었다. 실은 수십 명의 보병을 상실한 것에 비유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연합왕국의 조직력 자체를 노린 공격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왕국군은 이 막대한 손실로 조직력이 붕괴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고참병들에게 준사관의 역할을 떠맡기고 살아남은 준사관들을 임시 위관의 지위로 수직 이동시키는 비상 조처를 강구했다.
그럼에도 숙련된 중간 지휘부의 손실을 완전히 메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저격에 대한 반응에서도 증명되었다.
처음에 저격을 해온 사냥꾼들의 생존율이 40%를 맴돌았다면, 강주에 다다랐을 무렵의 저격에서는 그 생존율이 70%까지 올랐다. 그만큼 왕국군의 반응 능력이 저하된 것이다.
아무리 왕국 보병들이 질적으로 우수하고 훈련이 잘 되었다고 하더라도 지휘관의 의도를 적시적소에 전달하여 군대를 한 몸처럼 움직일 중간 간부들이 없으면 그런 강점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력 감소인 셈이다.
왕국군이 자랑한 정교한 화력 통제의 이점과 엄격히 통제된 전술 기동이 불가능해진 이상, 신의 수적 우위는 그만큼 무서워질 수밖에 없다. 붉은 코트들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윌리엄이 있었다.
“이건 신사다운 전쟁이 아니야.”
윌리엄은 고개부터 저었다. 그가 생각하는 신사적인 전쟁은 양측 군대가 전열을 갖추고 상호 간의 예의를 표시한 다음, 민간인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선택된 전장에서 승부를 가리는 것이다.
체면도 염치도 모르는 이따위 비정규전은 야만인들이나 할 짓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에우로페에서 벌어진 근대적인 전쟁(반혁명 전쟁은 예외)들은 대부분 이런 격식과 예의를 갖춘 싸움이었다. 심지어 전투 전에 적 지휘관에게 홍차와 찻잔 세트를 보내 차 대접을 한 후, 결전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야만인들에게 그런 염치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야만적인 토속 신앙이나 믿으며, 조상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신에게 제사나 올리고 복을 기원하는 이 미개인들에게 상식을 기대한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었다.
윌리엄은 모자를 고쳐 쓰며 대열 사이사이에 낀 장교들을 보았다.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미개한 야만인들의 공격이 어찌나 심각한 피해를 주었는지 신대륙 독립 전쟁 당시에 도입된 각종 저격 대응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장교에 대한 거수경례의 중지, 장교의 승마 금지, 칼과 권총의 휴대 금지 등 장교를 구분할 수 있을 법한 모든 행위와 표징에 대한 금지 조치를 들 수 있었다.
원정군으로서는 장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그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 금지된 사항은 모두 장교의 특권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귀족 가문 혹은 부유한 부르주아 가문에서 돈을 주고 장교 자리에 들어온 ‘상류층 신사’들에게 ‘특권’은 의복과도 같았다. 그것이 사라진 순간 하층민 출신의 사병들과 다를 것이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못 했다. 육군의 급여는 장교들의 품위 유지비도 되지 않는 코 묻은 푼돈인 터라, 매일 적자를 보며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특권이라도 한껏 향유하는 재미로 군 생활을 하게 마련인데, 그것이 안 된다면 그만큼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빵.
다시 총성이 울리고 누군가가 총탄에 맞아 널브러졌다. 총성을 듣기가 무섭게 병사들이 재빨리 엎드리며 길 주변으로 산개했다.
하지만 적을 제압하기 위한 신속한 대응은 결여되어 있었다. 지휘를 해야 할 장교단의 손상이 심각한 탓이다. 장교가 몰살당한 것은 아니지만 기습에 대한 대응은 정예 로열 노섬브랜드 연대와 해병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제길. 뭣들 하고 있나. 총성은 좌측면에서 들렸다. 일렬은 견제 사격을 가하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소위님의 뒤를 따른다. 모두 정렬하라!”
윌리엄은 갑갑한 마음에 언성을 높였다. 다음 순간 그가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보았는지 총성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윌리엄의 운이 조금 좋았다. 말을 하느라 몸이 움찔거린 탓에 그의 목을 겨눈 총이 빗나가 그의 어깨 위로 살짝 스쳐 견장만 찢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윌리엄은 공포를 맛보았다. 명예 의식에 찌든 그라 해도 잠시나마 사선 위에 섰는데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윌리엄이 명령한 대로 병사들은 신속하게 총격을 가하며 한 무리가 윌리엄의 뒤로 도열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잘 훈련된 왕국군의 기강 자체는 저격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하나 평상시보다는 훨씬 둔하고 어설픈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정확하게 병사들을 움직여줄 준사관들이 부족한 탓이다. 병사들이 뒤에 서자 윌리엄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모자를 앞으로 흔들며 앞장섰다.
하지만 저격수의 제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초 견제 사격으로 상대의 탈출을 저지하고 재빨리 추격 조를 보내 상대를 포위하여 사살하는 것이 정석이었는데, 그런 움직임을 보이기엔 왕국군의 조직력이 너무 약해진 상태였다.
노련한 준사관이었다면 말할 것도 없이 제 위치로 병사들을 움직였겠지만, 임시로 그 위치를 대행한 고참병들은 달랐다. 전장에 대한 이해도나 병사들에 대한 통제력 면에서 너무나 부족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정밀한 기계처럼 돌아가는 연합왕국 기준으로 부족하다는 소리다. 타국이라면 한 사람의 준사관 역할을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잘 훈련된 자들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연합왕국 군대가 지금까지 고도로 훈련된 조직에 의존해 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날렵하게 마른 덤불을 타고 오른 병사들이 수풀을 지났다. 견제 사격이 이어지는 듯 총성이 반복되었다. 총성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해 적이 아직 아군의 시계 안에 있다는 의미였다.
윌리엄은 안도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막 수풀을 헤치고 발을 내딛던 그가 어느 순간 발을 멈추었다.
“아니?”
“진흙탕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 앞에는 예상치 못한 넓은 진흙탕이 버티고 있었다. 작은 개울이 흘러내려 오며 만든 질퍽한 자연의 장애물이었다. 폭이 10m도 넘어 보였다. 물은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일단 마음이 급한 탓에 먼저 발을 담근 병사 하나가 바로 문제를 보여주었다. 질퍽한 진창에 빠진 병사가 한 걸음을 옮긴 순간 그의 발이 진흙에서 쑥 빠졌다. 군화만 남겨놓고 맨발만. 그것을 본 윌리엄은 뒤늦게 진흙탕의 위험성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장애물을 우회해서 지나갈 방법은 언뜻 생각해 보아도 없었다. 바로 진흙탕 너머에 사냥꾼들의 도주로가 있어 시간을 맞추어 적을 잡으려면 이곳을 지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험 많은 준사관들이 있었다면 진흙에서 운신할 방법을 바로 알려 주었겠지만 그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윌리엄은 진흙에 군화가 파묻혀 움직임을 방해받는 병사를 보다 고개를 저었다.
“추격은 포기한다.”
진흙탕에서 운신도 못 하는 상태로 꿈틀거리다 달아나는 사냥꾼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역으로 학살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은신도 할 수 없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니 말 그대로 사격 표적이 되고 만다. 진흙탕을 신속하게 돌파할 방법을 강구하지 못하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반적으로 진흙탕에 군화가 빠지면 진득한 흙의 압력 때문에 군화가 벗겨지기 일쑤였다. 로망스 군대는 자국 군에 멜빵을 지급하여 군화가 벗겨지지 않도록 조치했지만, 그런 부분에서는 다소 ‘게을렀던’ 연합왕국은 순전히 준사관들의 경험과 판단력에 의지하여 대처하도록 했다.
준사관들이 있었다면 커다란 나뭇잎들을 따다 군화 끈으로 군화 아래에 동여매고 진흙탕을 돌파하도록 조처했겠지만, 신임 장교인 윌리엄에게 그런 경험이 있을 리 없었다.
“…….”
윌리엄은 그렇게 코앞에서 달아나는 사냥꾼들을 놓아 보내야 했다. 그것은 윌리엄 개인의 아쉬움 이상의 의미를 가진 상징적인 해프닝이었다. 왕국군의 전력 약화를 의미하는.
***
“대인, 홍모귀 군대가 강주에서 10리 거리까지 다가왔습니다.”
“알겠습니다.”
승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진 채로 막사를 나섰다. 이미 전투 준비는 거의 막바지에 도달해 있었다. 병사들의 재조직과 사기 회복, 전투 동기의 부여.
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난 터라 적이 오기에 앞서 부대의 배치만 다시 한 번 점검하면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투 자체는 지금까지 대국적인 견지에서 그의 의도를 크게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일시적으로 터무니없이 막강한 연합왕국 보병의 위력 앞에 전술적 붕괴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의 전략을 무너트릴 정도의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물론 적이 여문 전투 직후 그 전과의 확대에 나섰다면 그럴 위협이 되고도 남았겠지만, 적은 이미 시간을 잃어버렸다.
그 점에서 승도는 상대에 대해 우위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조차 100%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된 전열 보병. 전략 레벨의 격차조차 전술 레벨에서 역전시킬 수 있는 정예 중의 정예다. 그 사실 자체는 여문 전투에서 이미 한 번 구경한 바 있었다.
왕국 보병 1,350명이 분당 6발, 승도의 보병 3,000명이 분당 평균 2발(최대치가 3발)의 화력을 쏜 터라 동등한 총기를 장비하고도 수가 적은 왕국 보병들이 압도적인 화력을 발휘한 바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실질적인 화력의 우세까지 점하고 있었다. 잘 훈련된 장교단에 의해 정밀하게 조율된 일제 사격, 그것으로 극대화된 살상력의 증가. 무엇보다 정확한 위치 선상에 병사들을 위치시킨 준사관들의 대열 정리와 탁월한 사격술. 그것으로 왕국 보병은 양적으로 1.3배 남짓한 화력을 실질적으론 10배 이상 끌어올렸다.
그 덕분에 논두렁을 끼고 적의 화력을 서전에 80%나 상쇄시키고도 승도의 병사들이 화력에서 압도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 막강한 적이니만큼 약해졌다고 해도 전투력을 경시할 수는 없었다. 사격술과 연사 속도만큼은 조직력이 사라져도 건재한 왕국군의 이점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승도는 그 사실을 망각하지 않았다.
승도가 막사에서 나서자 병사들이 고개를 숙여 읍했다. 대부분 강주와 그 주변 토박이인 자들에게 그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오씨와 반씨가 연관된 각종 일자리에 몸을 담은 자들이 가족 중에 반드시 하나는 있을 정도이니 경외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탐욕스런 조정과 달리 죽은 자들에게도 구휼미를 지급하고 먹고살 호구지책을 어느 정도는 마련해 주었으니, 그들이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공자님.”
정씨가 급히 달려와 예를 표하자 승도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침 전투를 앞두고 그를 장원에 심부름을 보냈던 차였다.
“하문하신 대로 가주님과 반 대인, 마님께도 말씀을 올려 두었습니다.”
“그래. 뭐라고 하시던가요?”
승도가 묻자 정씨가 코를 문지르고는 대답했다.
“마님께서는 동반자로서 공자님과 운명을 함께하시겠다고 피난을 거절하셨습니다.”
“으음.”
승도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동반자. 말 그대로 험난한 여정의 동반자가 되어달라는 의미였건만.
그녀는 그 말을 운명의 동반자가 되어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유하를 보내고 텅 비었던 마음에 조금은 무언가가 채워진 것 같았다.
“하옵고 오유도 어른께서는.”
“아버님께서는?”
“공자님만 믿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오랑캐들을 막기 어렵게 된다면 어른께서 나서주실 터이니 목숨을 아끼라고 하셨습니다. 행상 기금으로 힘을 모으면 은 오백만 냥을 마련하실 수 있으니 그 돈으로 양이들을 물리치겠다고.”
“질 수 없는 싸움이구나.”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역시 철저한 상인이었다. 자신을 믿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물론 그 준비는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야 없는 일이다.
“그리고 반 대인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자님께 이미 모든 것을 주기로 마음먹으셨는데 목숨 하나 더해주는 것이 무엇이 아까울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에 승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반진유는 상인으로서는 어려운 말까지 하며 자신에게 신뢰를 보여주고 있었다. 돈도 주고 신뢰도 줄 수 있지만 목숨만큼은 절대 줄 수 없다는 것이 상인이었다.
그런 상인이 목숨까지 걸고 자신을 믿겠다고 했다. 평범한 상인도 아닌 강주 거상 반진유가. 그런 높은 신뢰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이길 수밖에 없다. 철저하게. 지는 것 따위는 머릿속에 둘 수 없었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말씀이야.”
승도는 중얼거리며 정씨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그 옆을 지났다.
승리. 철저한 승리. 가문과 가족들을 위한 승리.
승도는 그것을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어차피 신, 이 나라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은 일이다. 이번 한 번만 이겨 강주만 지켜낼 수 있다면 이 나라가 망하는 것 따윈 아무래도 좋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신이여. 정말 당신이 있다면 하나만 부탁하겠습니다. 새로운 삶에는 소명이 하나 정도는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할 하나의 소명. 그렇다면 내 소명, 그 야망의 길을 걷는 여정에서 가문과 가족을 버리지 않도록. 그런 선택을 할 수 없는 길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전투에 운명을 걸겠습니다. 진다면 여기서 내 날개도 꺾이겠지요. 당신이 나의 비상을 바란다면 내게 승리의 여신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 건네는 제안입니다.’
승도는 기도인지, 신에 대한 협박인지 모를 말을 곱씹었다. 그런 그의 앞에 막 마지막 배식을 마치고 서서히 대열을 갖추기 위해 어기적어기적 모이는 병사들이 보였다.
운명을 건 일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