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58화 (58/425)

제58화. 도박사 (3)

‘지휘관의 의도를 실천에 옮길 수 없는 군대는 이미 패배한 군대와 같다.’

왕국 육군의 명장 밀버러의 유명한 격언을 빌릴 것도 없다. 원정군 지휘관들은 강주 초입에서 부대를 전개하며 그 같은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껴야 했다.

평소라면 연대 급 병력의 전개 및 배치에 5분 이상 소요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한 위치에 병사들을 배치하도록 명령하는 중간 간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두 배의 시간이 지나도록 연대의 전개가 완료되지 않고 있었다.

부대 전개가 느리다는 점은 부수적으로 다른 부분도 지휘관들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기본적인 부대 전개조차 문제가 생긴다면 명령에 따라 적진으로 전진할 때, 전열을 정확하게 유지하며 기동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전열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은 적에 대한 심리적 압박의 약화뿐만 아니라, 부대 전체의 공격력 약화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다소 심각한 문제였다.

경험 많은 베테랑인 헨들릭 중령은 이러한 점을 통찰하고 있었으나, 마땅히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노련한 장교단과 준사관들이 있어야 해결되는 부분이다. 이미 소모되어 버린 자들을 다시 만들 재주는 없었다.

헨들릭은 이맛살을 찌푸리다 연대 부관을 불렀다.

“스미스, 망원경을.”

연대장의 말에 부관이 들고 있던 망원경을 넘겼다. 전쟁에 대한 공훈으로 기사 작위와 함께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금제 망원경이다.

헨들릭이 유난히 자랑하기를 좋아하여 평소에는 부관의 손에 들려둔 것이었다. 그는 망원경을 건네받자 그것을 눈가에 가져갔다. 곧 손에 잡힐 듯 적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적은 모두 12개의 전열로 나뉜 보병 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한 열에 대략 200명가량을 배치하고 있었으니 적의 전체 병력 규모는 2,400명에서 2,500명 사이로 짐작되었다. 수적으로는 연대의 두 배 이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금포와 여문 전투에서 증명되었듯 적의 보병은 정면 대결에서 이쪽 보병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수적으로 아무리 차이가 나더라도. 그가 걱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사상자가 많아질지 모른다는 부분이었다.

이미 연대가 낸 사상자가 너무 많아 그가 받는 심적인 부담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왕국의 식민 전쟁사 및 간섭 전쟁을 전부 살펴도 단일 전투로 낸 희생자로는 이미 최대 기록을 갱신한 지 오래였다.

여기서 또 수백 명이 죽어나가면 헨들릭은 본국의 사교 클럽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을 터였다. 그는 그 사실이 가장 부담스러웠다.

명예를 추구하는 육군 장교들은 전투에서의 공적을 발판으로 대령 혹은 소장 계급장을 단 후에 예편하여 사교 클럽에 입성한 후, 정치적 기반을 닦아 지역구 하나를 얻어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코스를 최고로 쳤다.

그러자면 왕국 언론이나 정치가들이 주목할 정도의 빛나는 승리를 거두어야 했는데, 그 부분은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이제 헨들릭이 바라는 것은 그런 영광이 아니라 본국에서 지탄을 받지 않을 정도에서 전투를 마무리하는 것뿐이다.

“12개의 전열을 펴다니. 적장이 에우로페 전쟁사를 안다더니 아주 헛말이 아니었어. 여문에서도 그랬지만 보통은 넘는 자야. 오합지졸들로 화력을 극대화하기엔 가장 좋은 방식이군.”

헨들릭의 말에 부관이 말을 받았다. 그도 눈대중으로 적진을 본 터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12개의 전열을 세운다는 건 프리지아의 프레드릭 대왕이 만든 기본 제식 대형을 쓰겠다는 말이니, 오합지졸들을 제대로 써보겠다는 생각이라는 데는 저도 동의합니다. 도대체 적장은 어떻게 에우로페 표준의 전술을 상황에 맞게 구사하고 있는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프레드릭의 기본 제식 대형이라면 운용법은 어떨 것 같나? 정석대로라고 보나?”

연대장의 물음에 부관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제식 대형을 취한다는 것은 정석적인 운용을 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자기편의 머리 위에 포탄을 때리는 강수까지 두어가며 완전한 패배를 틀어막은 작자이니 변칙적인 수야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보아야 했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프레드릭의 12열 배치는 변형이 쉽지 않은 전통적인 전열 방식입니다. 정석적인 운용을 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내 생각도 같네. 그렇다면 우리 쪽 전열을 변형할 필요는 없겠지.”

헨들릭의 말에 부관이 긍정했다. 로열 노섬브랜드 연대와 해병대는 10개의 전열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방식은 12열 전열에 비해 화력의 집중도가 높고 부대의 기동이 편리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병사들에게 주는 안정성이나 지속적인 화력의 투사라는 점에서는 12열 전열 쪽에 뒤쳐졌다. 물론 잘 훈련된 왕국 보병들에게 12열 전열은 하등 필요가 없는 기본 전열이다.

헨들릭은 망원경을 들어 적진을 유심히 살피다 적진 앞에 길게 파인 고랑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열 전투에서 백병전을 시도하려는 이쪽의 착검 돌격을 막기 위한 조처일까. 그로서는 생소한 장애물이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로망스 제국군이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자주 파곤 하던 참호다.

참호는 보통 요새에 거치된 대포의 포격을 피하며 아군의 대포를 접근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개발되었다. 그것을 파는 방식 역시 전문적인 공병 장교들에 의해 다양한 참호가 고안되면서 정교한 모습을 띄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경험 많은 장교들이라면 참호를 몰라보진 않았다. 단지 그것이 나타난 장소가 의외였을 뿐이다. 요새가 아니라 야지에서 참호라니?

고랑은 다소 기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왕국군을 향해 완만한 경사를 그리고 있어 반쯤 노출되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백병전을 막기 위한 용도로 보기에는 애매했다. 경험이 많은 장교라도 경험하지 않은 것을 볼 때는 낯선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헨들릭도 그래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 이상한 참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답을 알 수는 없었다.

“각하. 부대 전개가 완료되었습니다.”

부대 전개를 마치고 차례로 부대기를 흔드는 기수들을 모두 확인한 부관이 말을 꺼냈다. 곧 헨들릭이 참호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다 상념에서 빠져나와 대답했다.

“알았네. 군악대에 명령을 내리게. 진군 신호를.”

“예. 진군 신호, 위풍당당 행진곡을 연주한다.”

부관이 목소리를 높이자 군악대 장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휘봉을 들었다. 곧 트럼펫과 북, 나팔이 일제히 왕국군의 ‘당당한 진군’을 묘사한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왕국의 제2국가로 널리 알려진 멜로디가 낯선 이국땅에서 울려 퍼졌다. 연합왕국의 영광을, 위대함을 상징하는 선율에 일부 병사들은 시키지도 않은 가사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사랑하는 희망의 땅, 당신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고. 하느님이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들었네. 위엄에 찬 눈, 사랑스럽고 명성을 떨치네. 다시 한 번 당신의 왕위가 굳건히 서고 자유를 얻었기에 당신은 오래도록 선하게 통치하네. 자유를 얻었고 진리가 유지되니, 당신의 나라는 굳건하리라. 희망과 영광의 땅, 자유의 어머니. 당신에게서 나온 우리가 어찌 당신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 넓고 넓게 당신의 영역이 세워지니.(위풍당당 행진곡의 가사, 희망과 영광의 나라로 中)”

군악대의 연주에 이어 연대 본부에 머물고 있던 기수가 연대기를 흔들자 각 부대의 기수들도 일제히 부대기를 든 채 앞으로 몇 걸음 나섰다.

그것을 신호로 장교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비록 많은 동료들을 잃긴 했지만 그들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실려 있었다.

“부대 앞으로!”

조직력이 많이 쇠약해졌다곤 하지만 그래도 사자는 사자다. 사자는 이빨이 빠져도 초식 동물인 영양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왕국의 위엄을 상징하는 사자기가 펄럭일 때마다 병사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발을 맞추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 박력 있는 전진을 가리켜 ‘당당한 진군’이라고 불렀는데 전열 전투에서 이 같은 질서정연한 모습이 상대에게 주는 압박감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나마 전열이 조금 흐트러진 모양새가 나오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잡혀 있어 오합지졸인 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열을 갖춘 붉은 코트들의 당당한 진군은 고요하게 대지를 적시며 나아오는 붉은 해일을 연상시킨다. 지금까지 그들의 앞에 섰던 무수한 적들은 그 질식할 것만 같은 붉은 파도의 압박 앞에 으스러졌다.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쓴맛을 보여준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그들의 앞에서 굴복하고 말았다. 왜? 그들이 바로 세계 최강의 전열 보병, 붉은 코트들이기 때문이다.

***

압도적인 인상을 주는 붉은 코트들의 전진에 신의 단련과 녹기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제 고장에서 나고 자라 불타는 전의를 감추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녹기나 제 고장이 아닌 객가 출신의 단련들은 그 정도로 전의가 왕성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오승도가 베풀 은급을 기대하며 전장에 섰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했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기세등등한 붉은 코트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신의 오합지졸. 표면적인 동기나 훈련도만 본다면 역시 붉은 코트들의 우세는 절대적이다.

점차 다가오는 적들의 얼굴이 또렷해지자 단련과 녹기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지난날 여문에서 보여준 홍모귀 보병들의 악귀 같은 전투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고도 두렵지 않다면 이상하지 않다.

그래도 산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으려고 돈에 목숨을 팔아 이 자리에 섰으니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억지로 뻣뻣해지려는 몸에 용기를 넣으며 제자리를 지키고 섰다.

“야만인들과 이교도는 지옥으로!”

우렁찬 홍모귀들의 외침이 귓가를 때렸다. 그 알 수 없는 함성 소리에 모두가 일제히 움찔했다. 병사들이 다소 동요한다고 느낀 지휘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승도가 지시한 내용을 반복해서 떠들었다.

“적의 수괴들은 강주로 오는 길에 거의 모두 죽어나갔다. 남은 것들은 잔챙이들뿐이다. 저것은 최후의 발악이다.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것은 오승도가 내용을 짧게 끊어 병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만든 말이다. 당장 적과 비교해 심리적으로 압도당하기 쉬운 자들에게 반발을 사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을 해줌으로써 그들에게 안정감을 주려는 목적에서 지휘관들에게 말하도록 명령해둔 것이었다.

사기와 전의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전열 전투에서 이 같은 부분을 배려해두는 것은 다른 요소들만큼이나 중요하다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한마디로 사람이 백 퍼센트 달라질 수야 없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 명령어를 주입받는 기계다.

승도가 바란 것은 한 번 전장의 공포를 맛본 병사들이 일시적 압박으로 동요하는 것을 막고 전장의 공기에 재적응할 시간을 버는 정도가 전부다. 그 정도만 해도 전투 전에 부대가 와해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붉은 코트들의 선진이 급격하게 가까워지자 지휘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멀리 후방에서 전장을 관제하는 승도가 별도의 지시를 내리지 않는 한, 사전에 받은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단련 지휘관 이 대인이 앞장서서 명령을 입에 담았다.

“제1열부터 3열까지 참호로 돌입하라!”

그 명령에 600명이 넘는 보병들이 일제히 참호로 뛰어들었다. 단련이나 녹기 지휘관들은 승도가 판 이 장애물의 효용성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실 이것을 판 이유가 있었다. 바로 지난날 여문 전투에서 승도 측 보병의 붕괴를 막아준 논두렁 효과를 재현하기 위함이었다.

일반적으로 차폐물이 없이 그냥 벌판에서 전투를 벌일 경우에는 재장전을 위해 몸을 노출한 상태에서 총격을 받기 십상이었다.

이 부분을 신경 써두지 않고 정면으로 붉은 코트들과 격돌했다간 문자 그대로 교환비가 10배 이상 벌어지는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연사 속도나 조준 사격의 정확도, 화망의 위력에 있어 신은 절대 붉은 코트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런 승부를 해보려면 동등한 무기를 장비한 병력이 적의 10배는 필요했다.

그런 까닭에 승도는 붉은 코트와 신사적인 전열 전투를 벌여 승부를 본다는 미친 생각은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판 것이 참호다.

참호의 이점을 누린다면 그나마 붉은 코트의 이점을 다소 상쇄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실탄 사격에 있어 총탄을 허공으로 띄우기 일쑤인 오합지졸들의 조준점을 아래로 강제 조정함으로써 살상 율을 올릴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조준.”

붉은 코트들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던 이 대인이 제1열의 보병들에게 조준을 명령했다. 사격을 통제할 훈련된 중간 간부도 없는데다 총기에 대한 이해도도 형편없어 제대로 된 순차 사격을 기대하긴 어려웠지만, 가능한 화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단단히 주지 받은 이 대인은 깃발을 흔들 때마다 총을 쏘라고 병사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신의 보병들이 자신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음에도 붉은 코트들의 제1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가왔다. 사형장의 사형수와 같은 입장임에도 그들은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받은 훈련의 질과 양이 차원이 다르기에 가능한 일이다.

“부대 정지!”

막 신의 병사들을 유효 사거리에 넣은 순간 장교가 외쳤다. 그 한마디에 붉은 코트들이 기계적으로 발을 멈추었다. 조직력이 둔해졌다곤 해도 전체의 정지에는 2초 이상 걸리지 않았다.

붉은 코트들이 발을 멈춘 순간 이 대인이 기수들을 향해 외쳤다.

“사격!”

기수들이 일제히 신호기를 내리자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연합왕국에 비해 훈련도가 압도적으로 낮은데다 화력을 제대로 통제할 사람도 없어 총성은 거의 20초 이상에 걸쳐 났다. 순차 사격(열 단위의 사격)을 가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연합왕국이었다면 하나의 전열이 일제 사격을 가하는데 길어도 3초면 충분하다. 그 안에 전열 전체가 사격을 가하니 그야말로 가공할 화력의 집중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합지졸들치고는 훌륭했다. 그 일제 사격에 붉은 코트 대여섯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것을 본 이 대인이 다시 외쳤다.

“제1열과 2열을 교대한다.”

1열과 2열이 자리를 바꾸는 사이 붉은 코트들의 장교가 목소리를 높였다.

“조준!”

그 한마디에 붉은 코트들이 어깨에 걸고 있던 총을 단 1초 만에 상체 앞으로 당긴 다음, 신의 병사들을 향해 조준했다. 그 신속한 반응을 보며 장교가 재차 명령했다.

“사격!”

굉장한 총성과 함께 연기가 뿌옇게 피어났다. 일제 사격의 이점은 화력의 집중에도 있었지만 사격을 방해하는 총 연을 피해 비교적 정확한 사격을 전체 병력이 가할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짧은 시간에 화력을 집중할 수 있는 군대의 이점은 실로 지대하다 할 수 있었다.

총성은 약 5초에 걸쳐 이루어졌다. 적시에 화력 조준점을 지정하고 사격 태세를 점검해줄 준사관들의 수가 모자란 탓이다. 왕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화력이 경감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놀라운 수준의 사격 실력은 거의 건재했다. 엄폐물을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 명이 넘는 신의 병사가 뒤로 죽어 나자빠진 것이다. 개활지에서 그냥 싸웠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는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양측의 보병이 거리를 둔 상태에서 전열 전투를 벌이는 동안, 승도는 연신 망원경을 들고 적진 쪽을 살폈다.

이쪽은 포병의 힘을 빌리기 어렵다지만 적은 사정이 달랐다. 그럼에도 포병이 동원되고 있지 않아 적의 의도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분명 그의 망원경에는 적의 대포가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만약 그가 적 지휘관이라면 전열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아이언 볼이라도 쏴서 이쪽의 전열을 흐트러트리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은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다.

“포병을 쓰지 않는다면 우리를 얕잡아 본다는 건가? 그럴 리는 없겠지.”

승도는 적이 그 정도로 바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연합왕국의 장교들은 평균치로 보아도 질적인 면에서 우수한 편이었다. 신에 비교하는 자체가 미안한 수준의 사람들이다 보니 그런 그들이 몰상식한 전술을 쓸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포병은 대개 적의 전열 보병이 사각 방진을 이루었을 때 최대의 효율을 낸다. 전투 중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렇다. 지금은 사각 방진을 치도록 강요할 기병이 없으니 포병이 활약할 여지가 더욱 작았다.

승도처럼 자기편의 머리 위에 포탄이라도 쏟아붓는다면 모르겠지만, 사상자 수에 벌벌 떠는 연합왕국이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적이 사전 포격을 가하지 않은 경우의 수는 둘이다. 적에게 포탄이 부족하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결정적인 상황에 변칙적인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남겨 두었든지. 어느 쪽이든 이해 불가능한 영역은 아니다.

“조금은 걸리는 변수로군. 차라리 사전 포격을 했다면 계산이 편했을 텐데.”

전열 전투 자체는 백병전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이상 상당히 오래 지속되게 마련이다. 지금 당장 특별한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마 전장에 변화가 생기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변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쪽이 승자가 될 것이다.

승도가 망원경을 내리고는 뻣뻣해진 목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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