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59화 (59/425)

제59화. 도박사 (4)

“조준!”

윌리엄은 배에 힘을 주고 절제된 음성을 냈다. 그런 그의 눈에 자신의 목소리에 맞추어 민첩하게 총을 들어 올리는 병사들의 기계적인 반응이 보였다.

그들은 정확한 사격 자세를 취한 채로 그의 명령만을 기다렸다. 몇 달에 걸친 속성 훈련을 반복하며 단련된 병사들의 자질은 실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이 같은 수준의 움직임은 막대한 돈을 들여 훈련을 시킨 왕국 육군의 풍부한 재원에 기인한 바가 컸다.

사실 왕국 육군의 재원은 처음부터 풍족하진 않았다. 섬나라에서 상비군을 보유한다는 개념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의회와 국민들의 통념 때문이었다.

그래서 육군은 언제나 적은 수의 군대를 겨우 유지할 정도의 군비밖에 할당받지 못했다. 그 때문에 육군에서는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고, 한때는 에우로페에서 가장 허약한 군대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오죽하면 군사국가로 유명한 프리지아의 재상이 자국의 관구 하나에서 편성한 연대 하나면 붉은 코트들을 모두 ‘체포’할 수 있다고 허세를 떨었을까.

그런 육군이 변하게 된 계기는 ‘매관매직’이 정착하면서부터였다. 육군은 장교 자리를 팔아 병사들의 피복과 장비를 새것으로 바꾸어주고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훈련도 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의회에 목을 매지 않고 상류층의 허영심을 자극하여 저항 없이 재원을 확보한 것이다. 덕분에 왕국 육군의 보병들은 연간 1천 발 이상의 실탄을 쏘아 총기에 대한 숙련도 면에서 타국의 베테랑 보병을 뛰어넘을 정도까지 성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국가들이 연평균 40발의 실탄을 훈련으로 소모하는 것이 고작인 세상이다.

그 돈 많이 드는 가공할 속성 훈련을 거친 결과물이 바로 윌리엄의 앞에 선 이 강인한 보병들이다.

한 명당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들인 전쟁 병기들인 셈이다. 단위 보병의 전투력으로 따지면 에우로페에서도 타국 군의 2배에 이른다는 평을 받을 정도.

한낱 뜨내기 동양인 군대 따위와 맞상대하는 것조차 수치스러운 왕국의 자랑이다.

“사격!”

윌리엄은 배에 힘을 주고 힘껏 외쳤다. 그 음성에 맞추어 병사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연달아 일어나는 총성에 총 연이 뽀얗게 깔렸다.

붉은 코트들의 사격은 실로 놀라워서 신체의 일부만을 노출시킨 채로 재장전을 이어가던 적에게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단순한 보병끼리의 대결이라면 이들을 이길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자국에 대한 투철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로망스 군대도, 자국의 장교들을 저승사자보다 더 두려워하여 전열을 유지하는 프리지아 군대도 적수가 될 수 없다.

-뿌우우.

병사들이 재차 재장전을 하는 동안, 아군의 트럼펫소리가 길게 울렸다. 윌리엄은 잠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떠올리다 금세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챘다. 그 소리는 포격 준비를 알리는 신호였다.

윌리엄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격 중지! 전열을 유지하며 뒤로 물러난다!”

미리 포격에 관해 귀띔을 받았던 준사관들이 전열 곳곳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명령에 붉은 코트들이 썰물처럼 뒤로 쭉 물러났다.

그들의 후퇴에 신의 병사들이 함성을 냈지만 윌리엄은 그런 가소로운 반응에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곧 저 함성 소리가 절규로 바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신제국 만세! 오 대인 천세!”

적의 왁자지껄한 반응에도 붉은 코트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정신무장이 기본적으로 잘 되어 있는데다 자신들의 지휘관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다.

그들의 지휘관들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아도 상당한 자질을 가진 장교들로 그 능력만큼은 이미 여러 차례 검증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대로 그 지휘관들이 이 이상한 전투를 벌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이 짧은 전열 전투를 통해 상대적으로 노출도가 심한 구획을 확인하는 한편, 적 보병들의 화력 지향점을 미리 점검해보기 위함이었다. 정석적이라면 정석적인 대응이었다.

경험이 풍부한 연합왕국 장교들은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건설된 참호가 얼마나 포격에 저항력이 강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같은 확인 작업을 통해 취약 지점을 선별하고, 해당 지역에 화력을 때려 박을 심산이었다.

승도가 이 같은 점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연합왕국 측의 포탄이 심각하게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당초 연합왕국의 동방 원정군이 강주 전역에서 사용할 예정으로 준비한 포탄은 모두 2,400발이었다. 포 한 문당 40발가량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이었는데, 이중 백린탄 10발과 유산탄 10발, 아이언 볼 10발을 제외하면 당장 전투에 지극히 유용한 카니스터는 10발 분량밖에 되지 않았었다.

겨우 40발이냐고 하겠지만 이것도 동시대 타국의 침공군에 비하면 대단한 보유량이라 할 수 있었다. 먼 타지를 향해 원정에 나선 군대는 기동력 문제 탓에 포탄 보유량을 극도로 제한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더욱이 지구 반대편까지 원정에 나선 동방 원정군은 그 제약이 더 심했다. 가장 기본적인 보급품의 상당 부분을 7만 리 바깥의 본국에서 조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참에 부담을 주게 마련인 탄약의 수송량은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적은 포탄조차도 수송에 문제가 생겼는데, 그 이유는 바로 신의 열악한 도로 때문이었다. 신의 도로는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겨우 100km를 이동하는 동안에 보급 수레가 수시로 망가지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탄약을 실어 나를 수레 자체가 매우 부족해졌다. 이 점에선 도로 관리 비용을 횡령한 탐관들에게 감사할 필요가 있었다.

거기에 더해 여문에서 발생한 막대한 숫자의 부상자를 실어 나르고 의약품을 보충하기 위해 수레를 대량으로 전용한 탓에 탄약 운반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식량과 무기를 줄일 수는 없으니 결국 대포의 탄약을 줄이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포를 줄이고 탄약을 전부 수송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포문 수를 줄이면 결정적인 시점에 필요한 화력을 투사하는 일이 곤란해지니 그럴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실제로 쓸 수 있는 포탄의 양은 현재 포문당 카니스터 5발, 아이언 볼 10발, 백린탄 4발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나마 적이 참호를 판 탓에 아이언 볼은 효율성이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고, 백린은 강한 강바람이 불어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태이니 믿을 것은 카니스터뿐이었다.

그렇게 제한된 포탄을 가장 효율적인 시점에 쓰자면 사전 포격으로 낭비할 수 없었다.

물러나는 전열 속에 섞여 100m 이상을 물러난 윌리엄이 부대에 정지를 명령했다. 본래라면 소위 계급장을 단 그가 전열 전체에 명령을 내릴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장교들이 많이 죽어나간 탓에 그것이 가능해졌다.

이 전열에서 그와 같은 위관 계급 장교는 겨우 둘이었고, 그나마 임관일은 윌리엄이 가장 빨랐다.

곧 적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의 귀에 육중한 포성이 들렸다.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무수한 포탄이 적의 참호선 위로 우박처럼 쏟아졌다. 참호선 전체를 고르게 타격하는 포격이 아니라 한 지점으로만 포격이 쏟아지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전열 전투에서 적의 사상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장소였다. 상대적으로 손질이 덜 되어 엄폐 효과가 떨어지는 구획으로 보였는데, 연대 수뇌부가 정확하게 타격 지점을 고른 것이 분명했다.

“쐐기 대형으로 재편한다. 착검 준비!”

윌리엄의 전열 바로 뒤쪽에 위치한 왕립 해병대의 전열에서 한창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착검을 한다는 것은 백병전에 나서겠다는 의미인데 그의 전열에는 그런 명령이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 말은.

“우리를 제치고 지나가겠단 소리군. 제기랄.”

윌리엄은 그 생각에 조금 불쾌해졌다. 연대 수뇌부가 왕립 해병대에 백병전을 맡긴 것은 육군보다 해병대의 전투력을 신뢰한다는 반증이었기 때문이다. 육군이 같은 육군을 믿어주지 않고 해병대를 믿어주다니.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짜증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소위님. 해병대에 우리 자리를 뺏기는 겁니까?”

그의 혼잣말을 들은 병사 하나가 물었다. 윌리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연대 수뇌부가 위치한 후방을 물끄러미 보았다. 명예로운 전투에서 자기 자리를 빼앗기는 것만큼 불쾌한 일은 없다.

기왕 선두를 맡겨 주었다면 자리를 계속 맡겨줄 것이지, 이게 뭔가?

윌리엄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수의 신호를 기다렸지만 다른 지시는 없었다.

***

참호는 포탄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만들어진 터라 한자리에서 몰살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건설 작업이 잘 되어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승도가 건축 전반을 모두 눈으로 보고 살필 수 없을 정도로 촉박한 일정 속에 참호가 건설되다 보니 일부 구획의 부실함은 아무래도 피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포탄이 그곳으로 쏟아졌으니 한자리에서 떼죽음이 나온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 백 명이 뭘 해보지도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사상자로 변했다. 비명을 지르는 자들의 머리 위로 포탄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뒤늦게 일선 지휘관들이 한 지점에 포격이 집중되는 것을 알고 대응할 수 있는 위치로 부대를 옮기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연합왕국 포병은 기다렸다는 듯 방어군의 증원이 가능한 위치로 아이언 볼을 쏘아 돌파구를 막을 준비를 하는 것조차 방해했다.

단시간에 카니스터와 아이언 볼을 모조리 쏟아부으며 단판 승부를 걸어온 것이다. 말 그대로 단 한 번의 교전으로 승부를 결판 짓겠다는 생각이 여실히 느껴졌다.

“한 방 먹은 셈인가.”

승도는 코를 문지르며 망원경을 다시 들었다. 적은 전열 전투를 통해 이쪽의 허실을 파악한 후, 일시에 가용 가능한 화력을 몽땅 투사하여 돌파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돌파구를 통해 가장 강력한 전력을 쑤셔 넣어 아군의 최초 전열 자체를 와해시키려 할 공산이 컸다. 만약 첫 제대가 힘도 못 써보고 붕괴당한다면 나머지 전력이야 볼 것도 없었다. 이 싸움은 한 판 승부라고 보아도 좋았다.

과연 적 진영에서 변화가 있었다. 포격을 가하는 와중에 적의 2열부터 4열까지가 급속히 전열을 압축하더니 쐐기꼴 대형으로 전환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분명 전선을 분단하고 종심을 붕괴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쪽의 선택은 아주 간단하다. 적이 원하는 계획에 이끌려 소모당하는 수순을 밟아줄 필요는 없었다.

발상의 전환이란 그래서 중요했다.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전략가들은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곤 했다. 그 점에서는 승도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지휘관이었다면 돌파구를 틀어막을 생각부터 했겠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망원경을 내리고는 단련 지휘관에게 말했다.

“참호에 있는 병사들을 모두 뒤로 후퇴하라 이르세요.”

승도의 말에 이 대인은 잠시 당황했다. 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명령이었다. 혹시나 오승도가 잠시 상황에 격동되어 흔들린 것이 아닌지 저어되어 한마디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참호선을 내주면 우리가 적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참호선에 집착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적의 의도대로 끌려갈 뿐이다.

승도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전투에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주도권을 적에게 허락하지 말 것. 적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 주는 것은 결국 패배의 지름길입니다.”

“알겠습니다.”

승도는 급히 움직이는 단련 지휘관을 일별하곤 입술을 핥았다.

적은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승부를 위해 포탄을 아꼈다. 그 말은 포탄이 모자라다는 의미였고, 지금 쏟아붓는 화력이 사실상 그들의 가용 가능한 화력의 전부라는 의미와 같았다.

그렇다면 적이 값비싼 화력을 지불하고 얻으려는 승리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다음 번에는 적의 포병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승도로서도 비싼 대가를 지불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참호선 하나를 내준 이상 엄폐물의 이점을 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적도 이 정도의 손익 계산까지 내다보고 있을지 몰랐다. 승도 역시 시간 부족으로 참호를 하나밖에 파지 못한 처지인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순수한 보병의 실력으로 승부를 낸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계 최강의 붉은 코트를 상대하는 일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로망스 제국군 수준의 보병이라도 휘하에 있다면 모를까, 신의 오합지졸들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그나마 짧은 시간 동안 광이 날 정도로 잘 닦아 이 정도까지 만든 것이지 평소였다면 붉은 코트들을 향해 총을 겨눌 용기조차 내지 못할 자들이다.

‘여기까진 결국 처음의 예상과 큰 차이가 없다. 아슬아슬하게 패배하는 대국 자체를 바꾸기엔 내 준비가, 역량이 모자라. 결국 운에 기대는 수밖에 없나? 운에 기대는 일만큼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승도는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가 승리를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패배할 수 없는 입장이기에 병사 하나만 남아 있더라도 적과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길 수 있는 방법론이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운’에 기댄 방법 하나를 꺼내야 하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하늘’에 맡기는 방법이었다. 전략가로서 변수를 통제하고 완전하게 상황을 손안에 넣기를 좋아하는 그로서는 가장 경멸하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그 방법도 옵션의 하나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린다는 자체가 사치이기 때문이다. 지휘관 개인의 취향에 맞지 않다고 가능성을 저버리는 행위가 얼마나 무능한 짓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정도의 분별력도 갖지 못했다면 에우로페를 호령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대인, 홍모귀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기수 하나가 몰려와 보고하자 승도는 표정을 폈다. 지휘관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내색할 수조차 없다. 그것이 홀로 전장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지휘관의 고독이었다.

승도는 망원경을 들어 적진을 다시 보았다. 붉은 코트들이 함성을 지르며 포격으로 붕괴된 좁은 돌출부로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준비된 4~6열의 보병들은 아이언 볼의 견제 때문에 참호로 다가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때마침 이 대인이 명령을 전달했는지 1~3열의 보병들이 한꺼번에 참호에서 뛰쳐나와 후퇴하는 광경이 눈에 잡혔다. 연합왕국 측도 그에 당황했는지 급히 포구를 돌려 새로 조준점을 맞추었지만 퇴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 쪽 대포에 전진 명령을.”

승도의 말에 기수가 깃발을 흔들었다. 승도가 현재 가진 대포란 것들은 모두 염화포대에 있던 것들을 수리해서 끌어온 구식 대포들로 포탄은 쏠 수 있게 손을 보았지만, 그 성능은 없는 것과 진배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포의 구경 자체는 몹시 커서 외양은 그럴듯하다 할 수 있었다.

곧 그의 명령에 따라 포병들이 둔한 중포를 앞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소가 견인해야 겨우 끌 정도로 무겁고 큰 대포들이라 겉으로 보기에는 그 위력이 여문에 투입된 신형 대포들보다 훨씬 막강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대포가 50문 가까이 전진하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 주었으니 붉은 코트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이쪽의 포병이 엉금엉금 전진하는 모양새를 취하자 참호를 돌파한 기세를 몰아 백병전을 걸어오려던 왕립 해병대가 잠시 진격을 멈추었다.

붉은 코트들도 눈이 있다 보니 이쪽의 포병이 산탄이라도 쏘면 어쩔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이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럴 만한 포탄도 없고 사거리도 되지 않았다.

승도가 한 명령은 그저 붉은 코트와 후퇴하는 단련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 전열을 수습할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방편의 조처에 지나지 않았다. 붉은 코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쪽의 대포가 허세라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벌 수 있는 시간은 10분이 고작이겠군. 임 대인께 강주로 먼저 돌아가 관과 행상에서 모을 수 있는 사람이란 사람은 전부 모아달라고 전해주세요.”

“그리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승도가 마뜩잖은 말을 꺼내고는 뒷짐을 지고 병사들이 있는 개활지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최고 사령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일선 부대 지휘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