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60화 (60/425)

제60화. 무중생유 (1)

참호선을 점령한 연합왕국군은 적의 포격을 우려하여 잠시 공격의 템포를 늦추었다. 동료의 머리 위로도 포탄을 쏟아부을 정도로 냉정한 적이니 만큼 퇴각하는 적의 뒤로 바싹 따라붙는다고 해도 포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서다.

어떻게 보면 여문 전투의 경험이 그들을 다소 신중하게 만든 셈이다. 하지만 붉은 코트들은 그 판단이 실수였다는 사실을 겨우 몇 분 만에 깨달았다.

망원경을 들어 적의 포대를 유심히 살피면 헨들릭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포병 장교에게 그것을 건넸다. 번즈 소령은 그것을 건네받은 채로 적의 포대 쪽을 한참 동안 살피다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그는 한창 포대의 전진을 지휘하다 헨들릭의 호출을 받고 달려온 차였는데, 눈앞의 상황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구식 대포입니다. 포의 구경만 클 뿐 사거리는 기껏해야 1,000m도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유효 사거리는 그 반의반. 저런 구식으로 산탄을 쏜다 해도 우리 측에 피해를 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번즈 소령의 말에 헨들릭의 미간에 힘줄이 돋아났다. 주도면밀한 포격을 통해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고 왕립 해병대의 백병전 유도를 통해 적 병력 전체의 연쇄적인 붕괴를 계획했던 작전이 고작 구식 대포 따위에 기만당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에 기가 막혔다.

여문에서 적의 대포를 모두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겁부터 먹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그것은 헨들릭만이 아니라 연대 수뇌부 모두에 해당되는 문제였다. 결국 여문에서 본 피해에 지레 겁먹은 것이 문제였다.

“우리가 놈들에게 속았다는 말이군. 제대로 기만당한 셈인가. 기껏 포탄을 쏟아부어 만든 기회를 구식 대포 따위에게 기만당해 날려 버리다니.”

헨들릭이 분통을 터트리자 번즈 소령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받았다. 그 역시 눈으로 직접 상황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지 않을 수 없었다.

긍지 높고 자부심 높은 붉은 코트가 이렇게까지 기만당할 수 있다는 현실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백린탄밖에 없습니다. 혹시 몰라 포대를 전진 배치하고 있습니다만, 포병대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결정적인 기회를 날려 버렸습니다.”

전열 전투에서 결정적인 무기가 되지 못하는 백린이 유일한 수단이라.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이언 볼이라도 아껴두는 것이었는데. 아주 교활한 놈들이야. 포병의 이점을 이렇게 상쇄해 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헨들릭이 탄식했지만 없는 포탄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적은 참호선에서 후퇴한 다음 보란 듯이 야지에 부대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쪽의 공격을 의식하여 다소 유리한 위치에 배치한 것은 물론이다.

참호에 비하면 지형적 이점이 거의 없는 환경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지점을 골라 부대를 배치한 적의 안목은 경탄할 만했다. 포탄만 있었다면 적을 두드려 그 위치에서 밀어냈을 것이다.

“적장의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헨들릭도 고개를 끄덕였다.

적으로부터 교활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대단히 유능하다는 뜻이다. 적장은 비정한 정도를 넘어 전술적 완숙도도 수준에 이른 지휘관이다.

“현재 문제는 적이 완만한 고지대를 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직하게 정면으로 밀자면 손실이 상당할 겁니다.”

“물론 그럴 테지.”

저지대에서 고지대를 공격할 땐 위치 에너지를 극복해야 한다. 총탄도 위에서 아래로 쏘는 게 사거리가 더 길다. 물론 시계가 넓다는 것도 큰 이점이다.

전열 전투로 이길 자신이 없는 건 아니나, 손실은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었다.

야만인 따위와 비슷한 교환비로 소모전을 치르라고 전쟁성이 엄청난 훈련비용을 지불하는 게 아니다.

“일단 백린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적의 우측 익으로 덤불이 많은 편인데, 그쪽으로 백린을 집중하여 화재를 유발, 적의 운신을 제한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번즈의 말에 연대 부관 스미스 대위가 고개를 저었다. 포격의 효율성만 고려하는 번즈의 제안은 수락할 수 없었다. 연대의 현재 배치만 고려해도 그의 제안을 채용할 수 없다는 것이 스미스의 생각이었다.

“적의 우측은 곤란합니다. 우리 쪽의 부대 배치를 고려할 때 그쪽 방향으로 화력을 돌리는 것은 전력 낭비입니다. 그쪽은 최소한의 전력으로 견제하도록 전개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간을 갖고 부대 전개를 바꾸면 될 것 아니요? 어차피 적이 회전을 할 의도를 갖고 있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번즈가 스미스에게 반문하자 헨들릭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신 답했다. 원론적으로 생각하면 번즈의 말이 옳았지만 여문 전투의 전훈을 생각하면 그 말은 틀렸다. 적어도 헨들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부대 전개를 바꿀 여력이 없네. 또 시간을 줬다간 적이 아예 강주까지 물러나버릴 가능성도 있지. 생각해보게. 적은 전투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전투 방식을 골라왔네. 그자들이 이제 와서 제 놈들 민간인의 피해를 신경이나 쓰겠나?”

연대장의 말에 번즈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적이 강주까지 물러나 버리면 공격군이 여러모로 안는 부담이 커진다. 동료도 적과 함께 날려버릴 정도로 비정한 적이라면 얼마든지 자신들의 도시도 방패로 쓰는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오승도가 그런 선택을 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다면 어디로 백린을 쏘는 것이 좋겠습니까? 현재 강바람이 불어 대인 살상 효과는 거의 기대할 수 없어 연막을 만드는 정도가 최선이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강이 이곳에서 먼 곳에 있긴 하지만 워낙 하천의 크기가 커 바람은 이곳까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 포병 장교의 입장에서 바람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변수였다.

헨들릭도 바람을 무시할 수 없다는 건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적 중앙으로 쏘아 연막 효과를 만들어주게. 연막만 있다면 해병대가 전열 전투를 최소화하고 바로 백병전으로 넘어갈 수 있다네.”

연막이라.

번즈는 헨들릭의 지시에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강바람을 고려하면 백린이 이쪽으로 날리는 것을 감안해야 했다. 그렇다면 포격 지점을 조금 당기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포격 직후의 해병 돌입을 생각하신다면 포격 지점을 적의 앞으로 당길 필요가 있습니다.”

“포격 지점을 당긴다. 어째서인가?”

“백린은 어차피 우리 쪽으로 날려 오게 마련입니다. 그 단점을 장점으로 활용하려면 차폐 효과를 최대한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적의 머리 위로 쏘면 적은 시야가 확보되고 우리는 시야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그럴 바에 우리 측이 연막 효과를 최대한 누리며 전진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거리를 좁힌 후 일제 사격을 한다면 연막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포격 시점도 아군 보병이 돌입하기 직전이 좋겠습니다.”

보통의 군대라면 기겁할 얘기다.

전진하는 군대의 코앞에 백린을 쏘겠다니?

하지만 강철의 심장을 가진 붉은 코트들에겐 선택 가능한 옵션이다.

‘돌입 직전에 커튼을 친다.’

헨들릭은 잠시 손익계산을 해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진 않겠군. 좋아. 포격 문제는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수고해주게.”

“감사합니다. 기대에 모자람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성 조지에 영광을.”

헨들릭의 말에 번즈가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고 자신의 부대로 돌아갔다. 번즈가 돌아가는 모습을 쫓던 헨들릭이 스미스에게 말했다.

“신호를 보내 해병대부터 돌입시켜. 전열은 최대한 압축해서 진격하라고 하고. 어차피 각 제대의 간격을 벌리는 것은 무의미해. 그리고 연막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돌파구를 제한할 필요도 없다고 전하게.”

연막이 생각보다 넓게 퍼지지 않을 경우, 커튼은 도리어 이쪽의 공격전면을 제약하는 요소가 된다.

경험 많은 헨들릭은 이 점을 잊지 않고 지적했다.

“알겠습니다. 해병에 공격 신호를 발하고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를 대비한 것인데, 혹시 모르니 미리 준비해두게.”

“예, 각하. 말씀하십시오.”

헨들릭은 모자를 고쳐 쓰며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만에 하나 소모가 예상을 뛰어넘어 예비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네. 지난 여문 전투처럼 말이지. 포격이 끝나는 대로 포병대 전원에게 총을 들게 하고, 군악대도 무장시켜 두면 좋겠어. 그러면 전열 하나 정도의 소모는 견딜 수 있을 거야.”

포병대와 군악대에 전열 전투를 준비하라.

붉은 코트가 전열 전투를 시작한 이래 이 같은 명령을 받은 전례는 거의 없었다.

‘그 정도로 전투가 어렵게 돌아갈 수 있다고 보시는 건가?’

스미스는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예. 준비시키겠습니다.”

명령을 모두 전한 헨들릭은 재차 망원경을 들고 적진을 보았다. 보일 리가 없는 적장을 찾아 독수리의 그것처럼 번뜩이는 푸른 눈이 시린 빛을 뿌렸다.

‘이번만큼은 여문에서처럼 빠져나갈 수 없을 거다. 쥐새끼 같은 놈들. 대 연합 왕국의 진군 앞에 스러져라.’

***

“전열을 압축 배치하세요. 부대를 넓게 배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 뒤 병사 간의 간격은 10척 안으로 조절하세요. 지금 시점에서는 화력의 극대화에 기대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하면 3열이 아니라 4열 순차 사격도 해야 합니다.”

“하오나, 대인. 적의 포격을 우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단련 지휘관의 반문에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적의 포탄이 남아 있다고 한들 전열을 파괴할 정도로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몇 발 정도는 맞아줄 각오를 하고 밀집 배치를 하는 편이 나았다. 가공할 붉은 코트의 충격력을 견디자면 그 정도의 위험 부담은 감수해야 마땅했다.

“그 정도는 감수해도 될 위험입니다. 그보다 저기 대열이 흐트러진 것이 보기 좋지 않군요.”

승도가 손가락을 들어 울퉁불퉁하게 만들어진 열을 지적했다. 그가 겉멋이 들어 대열을 반듯하게 정리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열이 맞추어지지 않으면 그만큼 지휘관이 사격을 통제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적으로부터 특정 부분이 집중 공격을 받기 쉬워 상당히 곤란했다. 그래서 열을 잘 맞추는 것 또한 군대의 전투력과 상당 부분 관련이 있었다.

승도가 지휘하던 로망스 제국군, 그 중에서도 그가 아끼던 제국 근위대는 전장에서 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라고 명령해도 대열을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며 움직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런 능력이 있었기에 제국군의 꽃이라 불린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붉은 코트들도 마찬가지. 붉은 코트들 역시 전열 전투에 있어 전열을 잘 유지하기로 유명했다. 이처럼 정예로 이름난 군대들에게 있어 전열 유지는 기본과 같았다.

“대인 말씀 못 들었나? 당장 가서 줄을 바로잡도록 하게.”

“예, 대인.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이 대인이 뒤를 따르던 심복에게 몇 마디 하자 그들이 재빠르게 달려가 튀어나와 있던 자들을 걷어차며 대열을 바로잡는 모습이 보였다.

승도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손을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음에도 급조한 군대의 전투력은 역시 어쩔 수 없었다. 평시에는 지휘권에 손도 대지 못하여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겨우 손을 대어 볼 수 있던 터라, 붉은 코트에 대적할 수준의 강병으로 키우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들을 교육할 교관도 문제였다. 정규 군사 교육을 이수한 장교단과 준사관들로부터 몇 달에 걸친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연합왕국과 군사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얼치기들로부터 열과 오를 맞추는 방법이나 겨우 배우는 단련들의 훈련은 그 질적인 측면에서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나마 오승도가 전생에 보병 장교로서 커리어를 쌓았다면 그래도 쓸 만한 보병들을 길러낼 수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포병 장교 출신이었다.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수재이자 촉망받는 사관학교 졸업생이 육군의 꽃이라 불리는 포병 대신 남들 다 가는 보병을 선택하는 일도 우습긴 했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포병보다는 보병 쪽이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니면 무엇일까.

결국 이 전투는 패할 것이고, 운에 기댄 기책을 쓰는 수밖에 없을 것인가.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전열을 점검하며 걷던 차에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대인. 저기 저쪽에 적의 대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수행원 중 하나가 말을 꺼내자 승도가 망원경을 들었다. 과연 이쪽 전열을 겨냥할 수 있는 위치로 무거운 중포들이 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신의 구식 대포들과 달리 그나마 경량화가 되어 있어 사람의 손으로도 밀 수 있는 포들이었지만, 그 기동은 한없이 느려보였다. 그래도 몇 분 안에 사격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승부수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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