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61화 (61/425)

제61화. 무중생유 (2)

승도는 적의 포대 배치 상황을 보고 적의 의도를 통찰했다.

노련한 포병 장교로서의 커리어를 가진 그의 눈을 속이기엔 적의 움직임이 너무 정직했다. 중앙 돌파가 적의 주목표가 틀림없었다.

“중앙 돌파가 적의 주목표라. 상당히 곤란한 수를 꺼냈군요.”

“중앙 돌파가 적의 주 의도라면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장애물을 늘려야 합니다. 목책을 전부 거둬서 중앙으로 옮기세요.”

승도는 전열 전투를 벌이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여겼다. 만에 하나 왕립 해병대 수준의 강병이 일시에 아군의 약점을 치고 들어와 백병전을 벌이면 이쪽이 받을 피해의 수준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승도가 몇 마디를 하는 동안에 적 진영이 부산스러워지는 기색이 역력했다.

포병의 전진에 이어 왕립 해병대가 참호선을 벗어나 도열하는 모습이 곧 공세가 이루어질 것 같았다.

승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목책을 배치할 시간도 없을 듯싶었다. 할 수 없는 일에 미련을 가지는 것은 가장 멍청한 지휘관이나 하는 일이다.

승도는 조금 전에 내렸던 지시를 철회했다.

“이 대인. 목책 재배치는 시간이 부족하겠습니다. 그것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습니다.”

이 대인이 대답하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꺼냈다.

“대신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선. 이 선을 내주시면 안 됩니다.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명령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만, 제 역량이 닿지 않을 것이 저어됩니다.”

“역량이 닿지 않으셔도 해주셔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병사들에게 은급을 더 약속하셔도 좋습니다. 그건 제가 책임지지요.”

승도의 말에 이 대인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돈은 인간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때로는 목숨조차 걸게 만드는 힘이 있는 마력이 있다. 병사들을 버티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동기는 될 것이다.

그래도 장담은 어렵다. 승도가 대답을 기다리자 이 대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하면 대인께서는?”

“저는 예비대를 직접 지휘할 생각입니다. 제가 전장에 나선 순간이 우리 군의 운명을 건 마지막 싸움이 되겠지요. 이미 필요한 지시는 모두 내렸습니다. 남은 것은 각자가 최선을 다해 홍모귀들에 맞서는 일. 그것이 전부입니다. 어느 쪽이든 실수를 하는 날엔 우리 모두가 위태로울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승도는 이 대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뒤로 돌아섰다. 조금 전의 교전을 포함해 승도에게 남은 병력은 모두 2,240명. 그 가운데 1,800여 명이 일선에 서 있는 까닭에 승도가 예비대로 직접 관제할 수 있는 병력은 400명을 조금 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승도가 예비대가 위치한 후방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렸다.

“여왕 폐하 만세! 전열 전진!”

왕립 해병대가 발을 곧게 뻗은 채로 열과 오를 맞추어 앞으로 움직였다. 붉은 코트들이 일사불란하게 전열을 갖추고 다가오는 모습은 실로 인상적이었다.

동시에 팔을 뻗고, 동시에 발을 내딛는다. 총을 흔드는 동작조차 기계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최초로 교전에 나섰던 육군과는 또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몰려왔다.

그나마 저것도 조직력이 대단히 약화된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격조차 하지 않았다면 저들이 보여주었을 모습은 얼마나 대단했을 것인가.

승도는 새삼 적과 아군의 차이를 재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병이 전진하는 것과 동시에 막 방열을 마친 적의 대포들도 양각을 틀어 올렸다. 발사 준비 태세를 갖추는 모습이 여실했다.

곧 초탄을 발사한 후, 탄착점을 보고 이쪽을 향해 정확한 포격을 가해올 것이 자명했다. 물론 그 포격이 별로 두렵지는 않았지만 그 포연을 끼고 다가올 해병대가 두려웠다.

‘하지만 여기서 질 수는 없는 일이지. 가문이, 가족이, 그리고 강주의 운명이 이 일전에 달렸다. 이번 전투만 비길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은 없다. 반드시 여기서 놈들을 막는다.’

승도는 적을 보며 필사의 각오를 다졌다. 성큼성큼 예비대를 향해 걷는 그의 등 뒤로 백린탄이 쏟아졌다. 우박처럼 쏟아진 백린은 곧 불꽃과 함께 엄청난 연기를 뿜어냈다.

그 자욱한 연막이 전장을 뽀얗게 가렸다.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연막은 향배를 짐작하기 어려운 전투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 짙은 전장의 안개 사이로 왕립 해병대가 내는 군홧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

“누구는 알렉산더를 말하고 누구는 헤라클레스를 말하고, 누구는 헥터와 라이샌더를 말하고, 그러한 위대한 이름들을 말하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위대한 영웅들 중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건 바로 줄맞춘 왕국 해병들이라네. 저 옛날 영웅들은 절대 대포알을 못 봤다네. 적들을 쓰러뜨리는 화약의 힘도 모른다네. 그러나 우리 용감한 용사들은 그걸 알고 있네, 그래서 겁이 없다네. 자, 왕국 해병들을 위하여 줄맞춰 노래하세. 우리가 목책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을 받을 때마다, 우리 지휘자들은 수발 총을 들고 전진하고, 우리는 수류탄을 들고 전진하지. 우리는 요새의 경사 벽에서 적의 귀에다 폭탄을 던진다네. 자, 왕국 해병들이여 줄맞춰 노래하세. 이제 포위 공격이 끝나면 우리는 마을을 보수해야 하지. 마을사람들이 외치길 ‘만세! 얘들아, 여기 해병들이 온 단다!’ 여기로 의심도 두려움도 없는 해병들이 온 단다! 그래. 자, 왕국 해병들이여, 줄맞춰 노래하세.<영국 척탄병의 노래 개사>”

붉은 코트들은 전장의 안개 너머에서 자신들의 군가를 노래하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들이 내는 뜻 모를 노래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단련들은 강한 압박을 받았다.

군홧발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적의 기척은 전장의 포연 때문에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전투 준비! 전원 착검하라!”

지휘관의 명령에 단련들이 일제히 긴 총 앞에 총검을 꽂았다. 연합왕국 보병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착검을 진행하기에는 그들의 숙련도가 부족했다.

총검을 끼우다 바닥으로 떨어트리는 자들도 속출했다. 겨우 총검을 다 끼웠지만 그것을 쥔 자세도 어설펐다.

체격이 큰 서역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긴 총에 총검을 끼우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 키보다 큰 총검을 수월하게 다루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어설픈 병사들의 모습을 본 단련 지휘관들은 고개부터 저었다. 이래서야 지난 여문 전투의 재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적으로 상대를 압도하고도 백병전에서 밀렸던 그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두려움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야만인들에게 지옥을!”

해병들의 우렁찬 구호가 더 가까워졌다. 단련들은 침을 삼킨 후, 총검을 앞으로 치켜들었다. 거리가 대충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이 대인이 손을 들었다. 그의 신호를 본 기수들이 일제히 깃발을 들었다.

동시에 지휘관들이 힘껏 입을 열고 소리쳤다.

“사격 준비!”

단련들이 일제히 총탄을 욱여넣고는 자신의 상체 앞으로 총을 당겼다. 사격 준비까지는 그런대로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병사들이 제 앞을 겨누자 지휘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조준!”

긴장감에 떨던 자들 중 일부가 그 명령을 잘못 알아듣고 실수로 방아쇠를 당겼다. 처음 총성이 울리자 나머지들도 사격 명령으로 오인하고 총격을 가했다.

그 바람에 최초의 전열 사격은 완전히 엉망이 되고 말았다. 전장의 안개 너머로 날아간 총탄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유효한 공격이 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빨리 재장전을 해!”

뒤늦게 지휘관들이 다시 장전을 재촉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전장의 포연 너머로 희미한 실루엣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붉은 코트들은 조금 전의 사격에 전혀 손상을 받지 않은 듯 온전한 전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둘 포연을 벗어나는 광경에 단련들은 더욱 급해졌다. 총탄을 장전하는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지만, 그럴수록 실수는 잦았다.

“전열 정지!”

장교의 구령과 동시에 붉은 코트들이 일제히 발을 멈추었다. 필시 일제 사격을 가하고 돌격을 해올 작정인 듯했다. 이제까지의 전열 사격과 달리 세 개의 전열이 한데 뭉친 것이 압도적인 화력을 쏟아내고 돌격하려는 모양이었다.

이 대인은 그 끔찍한 결과를 예상하자 병사들을 독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사격 준비를 완료하라고 전하라. 빨리!”

그의 성화에도 전열 사격은 좀처럼 준비되지 않았다. 그사이 붉은 코트들의 장교가 명령을 내렸다.

“사격 준비!”

단 한마디에 붉은 코트들이 기계적으로 총을 앞으로 당겼다. 착착 소리와 함께 선두 전열부터 후미 전열까지 전원이 총구를 앞으로 겨누었다.

맨 앞의 전열은 앉은 채로, 중간은 무릎을 굽힌 채, 마지막은 서서 사격 준비를 갖추었다. 말 그대로 일제 사격 준비다.

“맙소사.”

신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3열 일제 사격의 위력을 두 눈으로 보게 된 이 대인은 침음성을 삼켰다. 붉은 코트 장교는 기다릴 것도 없이 다음 명령을 복창했다. 신의 지휘관으로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는 신속한 진행이 아닐 수 없었다.

“조준!”

“사격 준비!”

뒤늦게 신 쪽도 재장전이 끝났다. 이 대인이 급하게 명령을 전하자 병사들이 겨우 사격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전원이 조준 단계로 넘어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지만 붉은 코트들은 그 준비를 기다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격!”

붉은 코트들의 장교가 명령을 내리기가 무섭게 무자비한 총성이 울렸다. 삼열로 겹쳐진 보병들이 일제 사격을 퍼붓자 지금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악마적인 위력이 발휘되었다.

이것이 포병을 염려하지 않고 제 실력을 낸 붉은 코트들의 진정한 전투력이었다.

엄청난 집중 사격에 그 전면에 섰던 단련들이 피 보라를 뿌렸다. 그저 총격 한 번이었을 뿐인데, 50명이 죽어나갔다. 거리도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잘 통제된 일제 사격이었던 까닭에 살상 능력은 지금까지의 전투와 궤를 달리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막강한 적의 화력에 넋이 나갔던 이 대인이 뒤늦게 손을 내렸다.

“발사!”

총성은 간헐적으로 연거푸 터졌다. 일제 사격을 받은 후유증으로 부대 전체가 흔들린 탓이다. 붉은 코트들은 그 사격이 끝나기도 전에 돌격 태세를 갖추었다. 두 번 사격은 필요도 없었다. 단번에 승기를 굳히고 적의 전열을 붕괴시키면 이 지긋지긋한 전투도 끝이었다.

“연합왕국 만세! 돌격!”

장교가 칼을 빼들고 앞장서자 붉은 코트들이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내딛었다. 한 번에 수십 명이 죽어나간 터라 전열에 뚫린 구멍은 상당했다.

죽지는 않았더라도 다친 자들이 있었고, 압도적인 화력에 잠시 정신이 나간 자들도 있었다. 그 구멍으로 붉은 코트들이 쇄도했다.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오랑캐들을 쳐라!”

이 대인도 칼을 뽑아들고 외쳤다. 모두가 총검을 든 채로 전열로 밀려든 붉은 물결에 맞섰다. 희고 붉은 물결이 교차한 순간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한 치의 자비도 없는 육박전 중에 머리가 부서지고 팔다리가 찔린 자들이 부지기수로 생겼다. 고함 소리, 비명 소리에 파묻혀 명령은 전달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난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의 입장이다. 붉은 코트들은 그 처참한 난전 중에도 훈련받은 대로 기계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총검을 내지르는 동작조차도 가능한 한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려 애를 썼다.

그 같은 차이가 압도적인 사상자 차이로 나타났다. 총을 다루는 숙련도의 차이도 컸지만 백병전에 대한 훈련도 차원이 달랐다. 죽어 나자빠지는 자들은 대부분 신의 병사들이었다.

“더러운 홍모귀 놈들!”

동료들이 일방적으로 죽어나가는 와중에 단련 하나가 용기를 내어 총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붉은 코트는 능숙하게 총검을 들어 그 공격을 받아낸 다음,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단련의 가슴을 쏘았다.

백병전은 결국 평소에 숙달시킨 훈련의 차이가 누적되어 승패를 가늠 짓는 전투였다. 그 점에서 신의 단련들은 결코 붉은 코트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목숨을 내걸고 싸우려 의지를 다지려고 해도 왕성한 전투력을 가진 붉은 코트들 앞에서 제 위치를 지키는 것은 무리였다.

“자라 새끼들아. 더는 물러나지 마라! 이 자리만 지키면 오 대인께서 은급을 베풀어 주신단 말이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일부 지휘관들이 부하들을 독려하고 나섰지만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마침내 전열의 중앙 한가운데로 들어온 붉은 코트들의 기수가 사자기를 힘차게 흔들었다.

그것은 중앙에 돌파구를 만들었다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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