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62화 (62/425)

제62화. 무중생유 (3)

“홍모귀들이 중원을 뚫었구나.”

승도는 오랜만에 전장에 선 기분을 느끼며 칼을 뽑아들었다. 최고 지휘관으로서 일선에 서본 경험이 얼마냐 되겠냐 하겠지만, 그는 사선에 서본 경험이 많았다.

황제라고 해서 총탄이 비켜가는 것이 아니듯 그의 인생에도 위기는 많았다. 한때는 지휘용 막사까지 밀고 들어온 적의 척탄병들과 육박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그렇게 생사의 고비를 넘겼기에 그는 영웅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공자님. 지금 돌격하시면 위험합니다. 차라리 제가 지휘를 맡겠습니다.”

정씨가 만류하자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이성적인 논리라면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전장은 반드시 차가운 이성으로만 굴러가는 곳이 아니다. 비논리적이라도 감성과 이성을 조율하여 군의 사기를 적절히 유지하는 것이 지휘관의 역량이다.

그래서 승도는 이 시점에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자신이 나서야만 최고 지휘관의 얼굴을 보고 병사들이 사기를 유지할 수 있다 여겨서다.

“그보다 다른 일이나 맡아 주었으면 합니다.”

“하문하십시오.”

“아까 전진해둔 포대의 위치를 지금 이 자리로 옮겨 주었으면 하는군요.”

“포대를 말씀이십니까?”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구식 대포라지만 마지막 저지선 역할을 맡길 수는 있었다. 대포가 옮겨질 시간을 벌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까지는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었다.

정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포권을 했다.

“하문하신 대로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합니다.”

승도는 정씨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돌아섰다. 그의 앞에는 수백 명의 병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을 보고 심호흡을 한 승도는 짧은 말만 꺼냈다.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시간도 없었고 그런 말재주도 없어서다. 병사들을 격려하려는 의도만 전달할 정도면 충분했다.

“들어라. 이 싸움은 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나를 위한 싸움도 아니다. 이것은 너희 자신을 위한 싸움이다. 나는 이미 너희에게 은급을 약속했으나, 이 싸움에서 패한다면 당장 너희에게 돈을 주는 일이 쉽지는 않다. 바꾸어 말하면 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너희는 약속받은 은급을 모두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재를 더 내어 너희의 용맹을 치하할 생각도 있다. 돈을 받지 못하는 싸움을 하고 싶다면 홍모귀들의 앞에서 물러나도 좋다. 하지만 이 싸움으로 가족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다면 물러나지 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전부다.”

“대인. 진정 은급을 더 얹어주실 생각이십니까?”

앞에 선 한 병사가 묻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 앞에서 물러나지 않고 싸운다면 죽은 자라 할지라도 그에 합당한 값을 더 받게 될 것이다.”

승도의 말에 병사들이 표정을 굳혔다. 어차피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는 삶이다. 한 목숨 내놓고 가족을 배불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리할 수 있다. 적의 앞에서 죽음과 마주한 순간에는 생각이 달라질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의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승도는 병사들의 바뀐 표정을 보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전원 착검!”

그 명령 한마디에 병사들이 재빨리 총검을 끼웠다. 실수를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 착검이 이루어졌다. 병사들이 모두 총검을 끼운 것을 확인한 승도는 병사들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그가 쥔 칼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을 냈다.

승도는 심호흡을 하고는 마지막 명령을 내뱉었다.

“돌격!”

그가 앞장서자 수백 명의 단련들이 뒤를 따랐다. 이미 얽히고설킨 전장은 피로 얼룩진 지 오래였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자욱한 일선에 도착하자마자 승도는 칼을 휘둘렀다. 로망스 왕국의 장교이던 시절부터 기본적인 검술은 몸에 익히고 있던 그였다.

상인의 자제로 살아왔으나 그는 검술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롭게 쏟아진 단련의 물결에 붉은 코트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승도는 기수에게 신의 깃발을 힘껏 흔들라고 했다. 그의 목표는 아군의 사기를 꺾고 있는 적의 기수였다. 그는 한 무리의 단련들과 함께 매서운 기세로 적의 기수를 향해 나아갔다. 그런 그를 발견한 붉은 코트들이 총검을 쥔 채로 몰려들었다. 승도는 그 중 선두에 선 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승도의 검이 총검에 부딪친 순간 붉은 코트는 능숙하게 총검을 뒤로 당겼다. 승도는 상대의 유연한 대응을 느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붉은 코트가 달려들자 단련 둘이 승도의 앞을 막아서며 상대의 총검을 밀쳐냈다. 그 호기를 이용해 승도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고는 붉은 코트의 가슴을 쏘았다.

그것을 막기 위해 막 달려들던 다른 붉은 코트를 단련이 다시 막아섰다. 승도는 그자를 군홧발로 걷어차 밀어내고, 그 옆에서 단련을 쓰러트리던 붉은 코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비록 검술 실력이 탁월한 것은 아니었지만 난전 중에는 눈먼 칼도 한두 번 맞게 마련이었으니, 붉은 코트는 옆구리를 베어온 승도의 칼을 피하지 못하고 피를 뿌렸다.

적을 단련들이 막는 동안 승도는 권총을 재장전하며 흘깃 주변을 살폈다. 아수라장인 전장은 새로운 단련들의 투입으로 다시 팽팽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훈련도가 높더라도 총검을 한참 휘두르다 쌩쌩한 적과 상대하게 되었으니 조금은 고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도 붉은 코트는 붉은 코트인지라 교환 비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승도는 침을 삼켰다. 상황이 썩 낙관적이진 않았지만 적의 기수만 쓰러트리면 무너진 사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희망을 갖지 않으면 이 싸움에서 버틸 수 없었다.

막 승도가 권총의 장전을 마치고 검을 쥔 손을 움직이려는 차에 함성 소리가 들렸다. 승도는 본능적으로 함성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은 우리를 보호하신다! 전열 앞으로!”

그 우렁찬 소리에 승도의 눈이 절로 치떠졌다. 그의 눈에 비친 풍경 속으로 수백 명의 붉은 코트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악몽과 같았다. 그들의 정체는 해병대의 뒤를 이어 제2제대로 돌입해온 적의 육군이었다.

“성 조지에 영광을!”

별안간 수백 명의 생생한 붉은 코트가 새롭게 쏟아져 들어오자 승도가 겨우 균형을 맞추었던 전세는 순식간에 다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사기왕성한 붉은 코트들이 쏟아진 돌파구 좌우에 있던 단련들은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았다.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붉은 코트들이 서넛씩 달려드니 도무지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하얀 백지 위에 떨어진 붉은 잉크처럼 단련들의 전열이 그 충격에 들썩였다.

전열 전체가 그 압도적인 충격을 견디지 못해 급속하게 뒤로 구부러졌다. 해병대의 충격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육군이 가세하자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거의 반원형을 그릴 정도로 중앙이 밀린 바람에 종심은 거의 붕괴 직전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승도는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는 단련들과 발을 맞추어 물러섰다. 지휘관인 그가 솔선하여 자리를 고수해야 했지만 물러나지 않을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 정도로 붉은 코트들의 압력은 거셌다. 얼마나 물러났는지 거의 100m는 뒤로 밀려난 것 같았다.

“오 대인.”

문득 부르는 말에 옆을 보니 이 대인이 있었다. 그도 정신없이 밀려온 것 같아 승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둘 모두 제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긴 마찬가지. 그나마 이 대인은 혈전을 벌였는지 전신이 상처투성이였다.

“이 대인께서도 밀리셨군요.”

승도의 말에 이 대인은 부끄럽다는 듯 탄식했다.

“면목 없습니다.”

“아닙니다. 저 역시 물러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패하는 수밖에 없습니까?”

이 대인이 달려드는 붉은 코트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묻자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전투를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에게는 아직 믿는 구석이 있었다. 별로 믿고 싶지 않았던 마지막 수단.

승도는 그것을 생각하며 이 대인의 물음에 답했다.

“아직 포기하긴 이릅니다. 일단 예비대가 있던 위치로 포대를 옮기라 하였으니, 거기까지 밀리면 포병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구식 대포의 화력으로 저들을 얼마나 감당하겠습니까?”

“시간 벌이지요.”

승도는 그렇게 대답하며 막 앞으로 달려들던 붉은 코트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붉은 코트는 그 총격을 피해 얼른 몸을 움츠렸다. 붉은 코트의 위협이 잠깐 사라지자 이 대인이 다시 물었다.

“시간 벌이로 어찌 승리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으로 승리를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면 무엇으로 승리를 만드실 요량이십니까?”

“이런 말을 드리긴 뭣하지만 운에 맡긴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 하늘이 도와 적이 속아준다면 우리는 적을 쫓아낼 수 있을 겁니다.”

승도의 이해 못 할 대답에 이 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고민은 잠시다. 막 앞으로 몰려온 붉은 코트들을 상대하기엔 손발이 바빴다. 승도도, 이 대인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오에 시작된 전투(최초 전열 전투 포함)는 전투 개시 2시간 만에 신의 패배로 확정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오승도가 지휘한 단련들은 모두 1,200명의 사상자를, 붉은 코트들은 11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제 승부는 누가 보아도 제국의 패배가 확실해 보였다.

***

피 칠을 한 윌리엄이 칼을 연신 휘두르며 앞장섰다. 그를 중심으로 한 무리의 붉은 코트들이 해병대와 더불어 적의 한쪽 측면을 날카롭게 베어냈다.

마치 장작을 패는 도끼질이 연상되었다. 한 번 충격을 가할 때마다 적들이 우수수 쓰러지며 저절로 돌파구가 열렸다. 그들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야만인들이 무너져간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병사들이 체력 소모가 큰 백병전의 와중에도 기력을 북돋기 위해 마법과 같은 구호를 입에 담았다. 얇아질 대로 얇아진 적의 전열은 더 이상 붉은 코트들을 가로막지 못했다.

마침내 윌리엄과 그 부하들이 스무 명의 단련들을 쓰러트리자 전열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렸다. 사태가 이쯤 되자 서서히 뒤로 물러서던 단련들의 후퇴가 더욱 빨라졌다. 혹여나 적에게 포위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 바람에 붉은 코트들은 100m를 더 전진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백 명도 넘는 적을 추가로 쓰러트린 것은 부수적인 수확이었다.

“승리가 코앞이다. 적을 살려 보내지 마라!”

바야흐로 추격전 양상으로 전환되었다고 판단한 붉은 코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승리를 확신한 그 목소리에 병사들도 힘이 났다.

총검을 쥔 손이 더욱 빨라지고 걸음에는 절로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더 싸우면 승리가 확정된다. 죽음으로 버무려진 전장이 아니라 승리자로서 그 과실을 향유할 수 있다. 그 생각에 그들은 남은 힘을 짜내어 단련들을 계속해서 압박했다.

승리는 이제 코앞이다.

그것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가 그렇게 쉽게 확정되지는 않는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쟁의 신은 승리자들에게도 그만한 피값을 요구하는 법. 단련들과 뒤섞여 적의 2선으로 전진하던 붉은 코트들의 머리 위로 대포알이 쏟아졌다.

요란한 포성과 함께 쏟아진 포탄은 무자비한 살상 효과를 냈다. 비록 구식 대포라곤 하지만 대포는 대포. 사거리가 짧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들이지만 이런 상황에선 단련 수백 명보다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열을 막 돌파하여 전진하던 붉은 코트 십여 명이 유산탄 세례를 뒤집어썼다. 그 옆에서 전투를 벌이던 단련들도 피해를 받았지만 정확히 준비된 직사는 명백하게 붉은 코트들을 노리고 있었다.

제대로 직격당한 붉은 코트 몇 명은 말 그대로 고기 조각이 되어 흩어졌고 그 옆에 선 자들도 유탄을 맞아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공격 덕분에 완전한 전열 붕괴로 치닫던 상황이 일시적으로 수습되었다. 하지만 워낙 많은 병력을 잃은 탓에 신은 전열을 유지할 능력이 부족했다.

거의 대등한 숫자까지 머리수가 떨어진 상태이니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계 최강의 붉은 코트들과 동수로 싸워 이긴다. 그런 기대를 품는다면 허황된 망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전열 전체가 흔들리고 있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중앙은 그래도 대포 덕분에 나았다. 붉은 코트들이 조금만 돌파를 시도해도 유산탄 세례가 쏟아진 덕분이다.

붉은 코트들로서는 결정적인 돌파를 이루어 적을 섬멸할 기회가 번번이 무산되다 보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노련한 장교와 준사관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적과의 접촉을 끊고 뒤로 물러난다. 신속하게 전열을 정비하라!”

그들은 대포를 의식하여 중앙에서는 몇 걸음 물러나 적과 거리를 벌였다. 하지만 전투를 중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장교의 명령 하에 재차 전열을 형성하고 일제 사격을 준비했다.

거리를 두면 총을, 근거리에선 총검을 쓰면 될 일이다. 그 어떤 것으로 싸워도 그들은 상대를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단련 쪽이 급하게 대포 앞으로 전열을 형성하는 동안, 먼저 대형을 갖춘 붉은 코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사격 준비!”

총검을 다시 빼고 총을 든 그들의 준비는 매우 신속했다. 총탄을 집어넣는 움직임조차 상상을 초월했다. 겨우 8초도 되지 않아 그 모든 움직임이 완료되었다. 단련들은 아직 전열조차 제대로 서지 못한 상태였지만 붉은 코트들은 달랐다.

그들은 벌써 장전을 마치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흡사 기계를 연상시키는 움직임이었다.

“조준!”

붉은 코트들이 척척 소리를 내며 총구를 겨누자 단련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전열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 사격을 받으라니. 이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승도가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엎드려!”

그의 명령을 들은 자들은 재빨리 바닥으로 움츠렸지만 온갖 소리가 횡행하는 전장에서 그 목소리가 멀리 퍼질 리 없었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 선 자세를 유지했다. 명백한 실책이다.

“사격!”

붉은 코트들이 일제히 불을 뿜자 사형장 앞의 사형수들처럼 단련 수십 명이 우수수 넘어졌다. 짚단처럼 쓰러지는 병사들을 본 승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포의 도움을 얻어 겨우 전멸을 면하고 있었지만 붉은 코트들이 다시 총을 들고 나온 이상 방법이 없었다.

이 공격을 피하자고 병사들을 대포 뒤로 보냈다간 재장전이 느린 구식 대포의 약점을 이용해 붉은 코트들이 한 번에 쇄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군이 몰살한다.

그렇지만 이대로 대포 앞에서 전열 전투를 벌여도 몇 분이면 부대 전체가 녹아버릴 것은 분명했다. 그 정도로 적과 아군의 격차는 절망적이었다.

“미치겠군.”

오랜 전투를 경험한 전생의 경험 중에도 이 정도로 절망적인 선택지를 강요당한 적은 없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머릿속으로 구상한 전략을 현실로 옮겨줄 수 있는 군대가 있었고, 그의 의도대로 상황을 짜 맞출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부족했다. 군대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그의 기준에 미달했고, 그의 의도를 관철시키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한때나마 우세한 조건을 만들어 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붉은 코트와 신의 격차는 컸다. 그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이대로 물러서서 전열을 정비한다면 좋겠지만 적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겠지. 무엇보다 이 오합지졸들은 벌써 한 번의 패배를 경험했다. 단 시간에 두 번의 후퇴를 경험하면 우리 군은 재기할 수 없어. 여기서 승부를 볼 수밖에. 하지만 어떻게?’

승도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재차 재장전에 들어간 붉은 코트들을 노려보았다. 정말 하늘에 맡긴 운을 기대하더라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벌려면 지금 이 오합지졸들이 무너져선 안 되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적의 사격 준비를 지켜보던 승도의 눈에 아직도 겁을 먹고 바닥에 엎드려 있는 병사가 보였다. 이런 겁쟁이라고 호통을 치려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

사실 전투의 지속이란 부분에서 보자면 그것은 아주 멍청한 행위였지만 시간 벌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것만큼 유용한 방법도 없어보였다.

말 그대로 발상의 전환이다.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단순한 것도 상황에 따라서는 유용한 수단이 된다. 승도는 바로 그것을 떠올렸다.

전열 전투에서 적을 죽이려면 서서 싸워야 하지만 총탄을 장전하기를 포기한다면 서서 싸울 필요가 없다. 엎드려 있다면 당연히 적으로부터 받는 피해도 압도적으로 줄어든다. 이는 전장 식 소총의 특징 때문이었다.

승도는 그제야 자신이 내릴 명령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달았다. 백병전이라면 몰라도 전열 전투로 돌아갔다면 이 방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엎드리라 전하세요.”

옆에서 피를 닦던 이 대인이 그 말을 듣고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도 그냥 총격을 맞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던지 승도의 말을 복창했다. 모든 지휘관들이 명령을 다시 입에 담자 병사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백병전이 진행되는 좌우 날개의 병사들을 제외한 모든 자들이 대포 앞에 제 몸을 움츠렸다. 막 재장전을 마치고 ‘조준’을 외치려던 붉은 코트들이 그것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

본디 전열 전투에서 일제 사격은 당연히 서 있는 적에게 효과를 발휘한다. 총탄의 특성상 위로 뜨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고려하여 사격을 한다고 하더라도 전열에 대한 사격만큼 효율성을 낼 수는 없다. 말 그대로 사격의 효율성을 8할 이상 감소시키는 행위라 할 수 있었다.

승도는 병사들과 함께 움츠린 채로 적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가 바랄 것은 성공을 하늘에 맡긴 마지막 수단이 통하는 것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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