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추격 (1)
“적 보병이 전진해오고 있습니다. 추정 규모는 육천 이상입니다, 각하.”
“우리에게 피로를 회복할 시간 따윈 주지 않겠단 거로군. 터무니없는 야만인들 아닌가. 이쪽이 무능하게 보일 지경이야.”
헨들릭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적의 의도는 최초의 예상대로 아군을 완전히 포위섬멸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혹시나 적의 기만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전열을 재정비하여 재공격을 가해볼 생각을 품고 있었던 그로서는 당혹스런 상황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전투는 회피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그건 헨들릭도 알고 있었다. 2시간 이상 전투를 벌인 병사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적의 압력을 받아 한 번 병력을 물린 상태. 사기마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적의 생생한 대군과 격전을 벌인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자살 행위다.
물론 아직 전열 전투를 몇 번 벌여볼 능력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투 양상이 백병전이 된다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연대의 현 인원은 확인했나?”
연대장의 물음에 부관이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현 인원 954명입니다, 각하. 전열을 보고 임시로 확인한 숫자라 다소의 오차가 있음은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상보다 피해가 컸군.”
헨들릭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붉은 코트들의 정예함을 믿더라도 적이 생생한 정규군들로 이루어졌다면 승산은 전무했다. 그러니 물러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물러난다는 말만큼 붉은 코트에게 수치스러운 단어는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헨들릭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적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헨들릭이 입을 열었다.
“금포로 전면 퇴각 명령을 내리겠다.”
“기수는 후퇴 명령을 전한다. 군악대는 왕국 국가 연주를. 전군 급속 후퇴다.”
스미스 대위가 목소리를 높이자 붉은 코트들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왕의 영광을 노래하며 앞으로 나아갔을 붉은 코트들이 적을 피해 물러서는 광경은 실로 서글프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헨들릭은 지휘봉을 쥔 채로 뒷짐을 지고 섰다. 차마 후퇴하는 병사들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였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긍지 높고 자부심 높은 전열 보병들에게 수치스런 명령을 내리고 어떻게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야만인들에게 등이나 보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다니.’
“각하. 선두 전열이 뒤로 물러났습니다. 이제 뒤로 물러나시는 것이.”
“아니. 조금, 조금만 있다가 가겠네.”
헨들릭이 보인 씁쓸한 얼굴에 부관도 두 번 권하지 않았다. 연대장은 무거운 마음으로 도달하지 못한 적의 도시, 강주 방향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연합왕국의 첫 공격이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모든 병사들에게 이 무거운 짐을 주었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졌다.
하지만 바로 그때 병사들 사이에서 낯익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들어본 선율.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기를 꺾지 않은 고지 용사들의 민요다.
헨들릭은 그 노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노래가 탄생한 왕국의 하이 랜드는 그가 나고 자란 고향. 이 노래를 모를 수가 없었다.
“오, 하이 랜드의 꽃이여, 언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너와 같은 사람들을, 너의 자그마한 언덕과 골짜기에서 싸우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그리고 에드워드의 군대를 맞아 맞서 싸운 그 사람들을. 그리고 에드워드의 군대를 집으로 돌려보내 다시 생각하게 만든 사람들을. 그 언덕들은 황량해졌다네. 그리고 낙엽들은 쌓이고 쌓였지만 아직도, 우리의 땅은 우리 것이 아니라네. 그 사람들이 굳건히 지켜낸 그 땅은, 에드워드의 군대를 맞아, 맞서 싸운 사람들이, 그리고 에드워드의 군대를 집으로 돌려보내 다시 생각하게 만든 사람들이 지켜온 그 땅이라네.<스코틀랜드의 꽃 참조>”
그들의 노래는 아직 꺾이지 않은 붉은 코트들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전의를 잃지 않고 싸우겠다는 기백이 노래 가사에서 묻어났다.
침략자가 부르기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노래였지만 불리한 입장에서도 상대에게 굽히지 않겠다는 전의를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바로 이런 긍지 넘치는 병사들이 자신의 휘하에 있었다. 이것이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붉은 코트들이다. 그 어떤 위기와 고난도 그들을 진정으로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잠시의 고난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국 승리하리라. 병사들의 노래는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헨들릭은 그들의 노래 소리를 듣고 눈을 감았다. 거듭된 후퇴 명령으로 사기가 꺾였을 병사들조차 긍지를 지키고 있는데 자신이 풀이 죽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헨들릭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강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잃어버린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군대가 직면한 현실이었다.
“각하께서도 이만 자리를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관이 다시 다가와 말을 건네자 헨들릭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한마디를 던졌다.
“그보다 적의 피해는 얼마나 된 것 같나?”
헨들릭은 비록 물러나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아닌 남의 입으로 전술적인 패배는 하지 않았다는 평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 마지막 자존심을 아는지 부관이 머리를 문지르며 대충 셈을 해보았다.
“교환비는 대충 10배 이상은 나왔다고 여겨집니다. 아군 사상자 200명 남짓에 대해 적의 사상자는 2,000명 내외로 추정됩니다. 애초 일선에 투입된 적 병력의 80%가 괴멸되었다고 평가해도 좋습니다.”
“80%라. 세계 전사에 적 일선 병력의 80%를 때려 부수고도 물러나는 일이 있다니. 희한한 기록을 가진 패장이 되겠군그래.”
헨들릭이 부관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부관이 따라붙었다. 전장에서 물러나는 붉은 코트들로부터 200m 앞에서 신의 군대는 전진을 멈추었다. 압박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상징적인 전진 한 번으로 강주는 연합왕국의 위협에서 해방되었다.
***
붉은 코트들이 적에게 등을 보이고 물러난 사례는 거의 없다.
근 백 년 간 그들에게 후퇴를 강요한 사례라면 로망스 제국의 황제가 친정한 세 차례의 전투 정도가 고작이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적을 상대로 싸우며 겨우 세 번 등을 보이고 물러날 정도였으니, 이들의 일보 후퇴는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누구보다 승도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 번 물린 적의 걸음을 두 걸음, 세 걸음으로 바꾸어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그럴 기회도 없었다.
이 기회에 쓴맛을 보여줌으로써 강주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 그것이 그가 해야 할 가장 큰 과제였다.
“오 대인. 적은 3리 앞에 있습니다. 계속 이 거리를 유지하며 추격하실 요량이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 홍모귀들이 반전하여 공격해 온다면 낭패를 보기 쉬운 거리라 여겨집니다.”
이 대인의 말에 승도는 고개부터 저었다.
“전장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전력이 얼마나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하다.’라는 말입니다. 적이 우리를 강하다고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 전력이 허깨비라 할지라도 적에게는 저들을 물리치기에 충분히 막강한 대군으로 보일 수밖에요. 그러니 저들은 3리가 아니라 1리의 거리를 두어도 우리에게 도전해올 수 없습니다.”
승도는 그 말을 하고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러고는 멀리 보이는 붉은 코트들의 대열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거리가 가까워지면 우발적인 전투로 우리 실력이 노출될 가능성이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3리입니다. 지나치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압박을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승도가 말하는 동안 멀리서 총성이 울렸다. 이어 무수한 총성이 연달아 이어졌다. 승도는 그 소리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면 적은 제 측면을 제대로 방어할 여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우리 측의 저격이 보다 효율성을 가질 수 있다는 뜻. 그렇게 되면 적은 십중팔구 말과 소를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승도의 말에 이 대인도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말을 받았다.
“말과 소를 모두 잃게 만든다니. 적의 발을 묶으실 참이십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적을 지나치게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적당한 위기 상황을 만들고 압박을 가하면 적은 지고 갈 수 없는 병기를 모두 놓고 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전쟁에서 잃은 물자는 어느 정도 채울 수 있게 되니 우리 입장에선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인의 계책은 참으로 신묘하기 그지없습니다. 홍모귀들에게 불운이 있다면 하필 강주에 대인이 계셨다는 사실인 듯합니다.”
“과찬의 말씀을.”
승도는 망원경을 들고 적의 대열 후미를 살피다 손을 들었다. 그의 작은 행동에 지휘관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고 기수들이 깃발을 흔들었다. 일사불란하지는 않았지만 부대의 정지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승도가 군대를 멈추자 이 대인이 물었다. 적이 공격 태세를 갖춘 것도 아닌데 부대를 멈추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데 군을 왜 멈추셨습니까?”
“이쪽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저들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격을 한 사냥꾼들을 직접적으로 돕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술책으로 작은 도움은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대답에 이 대인이 탄복했다. 사소한 기책이지만 풍부한 전장의 경험 없이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이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청년이 능수능란하게 떠올릴 생각은 아닌 것이다. 하나 그간 승도가 보여준 용병술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정말 양이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저들을 농락하시는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마 저들도 우리 계산을 아주 모르진 않을 겁니다.”
승도의 말에 이 대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속셈을 알면서도 저들이 속아 넘어간다는 말씀이십니까?”
“세상에는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일이 많습니다. 또한 알고도 손을 쓸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들도 있게 마련. 저들의 입장이 그와 같습니다.”
그 말에 이 대인도 긍정의 뜻을 표했다. 바로 여문 전투와 지난 강주 전투가 그랬다. 적의 의도를 뻔히 알고 상대의 전술을 어렴풋이 꿰뚫어 보면서도 패배 직전까지 내몰렸던 경험만 떠올려도 승도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면 저들도 우리와 같은 입장을 경험하게 되겠지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승도는 그 생각을 하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붉은 코트들이 이처럼 곤란한 경험을 맛보는 일도 극히 드물 것이다.
반혁명 전쟁 당시 전투에서 패했을 때조차 제 무기만큼은 유기하지 않고 들고 후퇴한 것이 붉은 코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동양인 군대를 상대로 무기까지 버리고 후퇴하려면 속이 꽤나 쓰릴 수밖에 없을 터.
“여문까지 이렇게 느긋하게 압박을 한다 치고, 차후에는 계획이 있으십니까?”
“일단은 여문에서 군을 멈출 생각입니다. 어차피 금포 근처까지 진군하면 적 해군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건 말 그대로 자살 행위지요.”
승도는 해군을 상대로 도전한 육군이 어떤 꼴을 보게 되는지 이미 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반혁명 전쟁 당시 강을 등지고 포위된 연합왕국 연대 병력 하나를 잡아먹기 위해 사단 급 병력을 투입한 적이 있었다.
당시 붉은 코트들은 거의 붕괴 직전에 내몰린 상태에 놓여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돌격이면 무너질 처지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밀물을 타고 해안으로 다가온 연합왕국군함들의 무자비한 포격 앞에 그 공격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함대 단위의 포격도 아니고 전열함 3척의 포격 정도에 불과했음에도 그랬다.
사실 그 정도로도 육군이 감당할 수 없는 화력을 내기에 충분했다. 보통 육군의 군단 급 제대가 평균적으로 운용하는 대포의 수는 200문 남짓. 전열함은 겨우 3척으로 240문에 달하는 포를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겨우 몇 척으로도 육군의 군단 급 화력을 내는 것이 서역 해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금포까지 따라가는 것은 말 그대로 자살 행위다. 금포 근처에는 모르긴 몰라도 적의 프리깃함과 전열함만 열 척 단위는 버티고 서 있을 것이니 굳이 생각을 해볼 필요조차 없었다.
이 대인도 그 점에서는 생각이 같았다. 그는 서역 대선의 위력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육군이 가진 대포보다 해군이 가진 대포가 구경도 더 크고 수량도 압도적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미 적 육군의 위력을 유감없이 맛본 터라 그보다 훨씬 막강한 적 군함과의 대결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인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래도 저는 금포를 그냥 둘 생각은 없습니다.”
승도의 말에 이 대인이 고개를 끄덕이다 고개를 돌렸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군을 여문에서 멈춘다고 하시고 금포를 그냥 두지 않는다 하시니.”
“입. 입으로 공격할 생각입니다.”
승도는 씩 웃고는 망원경을 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