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65화 (65/425)

제65화. 추격 (2)

붉은 코트들은 후퇴라는 생소한 상황 속에서 상당한 피로를 느꼈다. 끈질기게 뒤를 따라오는 적의 은근한 위협도 그것에 한몫했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반복되는 저격이 있다. 그것을 막기 위한 척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방향을 감시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총성이 울리면 반드시 무언가가 쓰러졌고 그때마다 병사들은 그것을 찾아 숲을 누벼야만 했다.

그렇지만 사냥꾼을 잡아내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산길을 알고 날렵하게 달아나는 적을 쫓기엔 붉은 코트들이 너무 지쳐 있었다.

거기에 더해 저격을 당한 말과 소가 또 그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들 운반용 가축들은 부대의 중장비를 견인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는데, 이들이 끄는 중장비란 바로 대포 같은 것들을 가리켰다.

대포는 육군의 장비 중 가장 값비싼 것이라 버린다는 생각은 쉽게 할 수조차 없는 물건이었다.

단순히 주조에 들어간 철의 가치만 따져도 웬만한 장교의 급여보다 비싸다. 그 정도로 고가의 물건이기에 말과 소가 쓰러져도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것들이 대단히 무겁다는 데에 있었다.

연대에 소속된 중포는 그나마 기동을 위해 ‘경량화’를 어느 정도 거친 물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몸무게의 몇 배를 상회하는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사람이 견인하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질 않았다. 기동을 위해 달린 바퀴가 없었다면 끄는 것은 시도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미칠 노릇이군.”

병사 하나가 불평을 토하며 식은땀을 닦았다. 말들이 죽어나간 덕분에 병사 십여 명이 교대로 밀고 당기며 대포를 끌어가다 보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말고기는 잘 먹지 않았나?”

함께 대포를 끌던 동료가 말을 받자 그는 농담 삼아 툭 던졌다. 말고기란 죽은 말을 해체하여 병사들에게 나누어준 고기 배식을 말했다. 종종 전장의 병사들은 이렇게 말고기를 먹을 기회가 생기곤 했다.

“말 그대로 죽이는 맛이었지. 이렇게 지금 내가 죽어나가는 맛이니까.”

그의 너스레에 동료들도 실소를 지었다. 그 말처럼 말고기는 상당히 맛이 있었다. 붉은 고기 육류 중에서 말고기는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다. 담백함과 고소함.

그 모든 풍미를 갖춘 고기이기 때문이다. 그냥 고기라도 비스킷과 흑빵, 스튜에 지친 병사들에겐 꿀맛이었을 텐데, 이처럼 질 좋은 고기이니 더할 수밖에 없었다.

“말고기 한 근을 주면 대포를 얼마나 더 끌겠나?”

동료 하나가 농담으로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죽이는 맛이라고 해도 사양하겠네. 오 분만 끌어도 다리에 힘이 풀리는 판인데 뭘 더 끌고 싶을까.”

“그렇겠군. 아무렴.”

병사들이 대포를 끌며 잡담을 하는 동안 장교들은 대포의 처분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계속해서 말과 소를 잃고 있다 보니 포병대의 대포 일부를 사람이 끌고 가야 했다.

겨우 몇 문을 끄는 것만 해도 병사 백 명 이상이 교대로 동원되고 있었는데, 포병대가 보유한 60문의 대포를 전부 견인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그 대응책이라는 것도 뻔한 것이어서 그들의 논쟁 주제는 결국 대포 유기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우선 병사들이 끄는 대포는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부대 전체가 느려져 저격을 한 번 받을 것도 두 번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장비를 유기하는 일은 우리 군의 명예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여왕 폐하의 이름을 새긴 대포가 아닙니까?”

그 말에 대포를 버리자고 말한 장교가 입을 다물었다. 대포에 여왕의 이름을 새긴 것은 붉은 코트들의 명예 의식과 연관되어 있었다.

전장에 나가서 그 어떤 장비도 버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기 위해 취한 상징적인 행위로, 그 맹세를 깬다는 것은 당연히 명예에 대단한 흠결이 되기에 충분했다.

“맞습니다. 가뜩이나 우리 육군은 왕립(Royal) 칭호를 받지 못하는 불명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판에 폐하의 대포까지 팽개치고 어떻게 고개를 들겠습니까?”

또 한 사람의 장교가 불명예를 입에 담자 장비 유기를 언급한 장교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도 그 불명예를 강하게 의식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왕국 육군의 불명예란 의회 혁명 당시, 왕국 육군이 의회의 편에 서서 국왕의 목을 잘랐기 때문에 불충하다는 의미에서 왕립 칭호를 쓰지 못하는 데서 유래했다. 같은 이유에서 의회 군에 가담하지 않은 해군은 여전히 왕립 칭호를 붙이고 있었다.

설전이 길어지자 또 유기에 손을 들어주는 장교가 하나 끼었다. 윌리엄이었다.

“그러다간 그 ‘폐하의 대포’들을 모두 잃을 수도 있습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윌리엄은 여왕의 명예는 대포 따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얻어진다고 믿었다. 정통 육군 장교가 아닌 까닭에 그의 사고는 다른 장교들과 차이가 있었다.

“여왕 폐하의 대포를 버리고 가자는 말은 말도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착각을 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이것은 왕국의 긍지와 명예가 달린 문제입니다.”

“그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폐하의 기사로서 내가 확언합니다.”

윌리엄은 단언했다. 그의 신분 중에 여왕의 수호 기사이자 왕실 근위 기사단장의 작위도 있던 까닭에 그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아니, 전하. 여왕 폐하의 명예를 누구보다 챙기셔야 할 분이 어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폐하께서는 그런 대포 하나보다 병사 한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하라는 호칭은 뺍시다. 나는 이 자리에 한 사람의 장교로서 서 있는 것이니.”

윌리엄의 단호한 말에 귀족 장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닫았다. 장교들의 토론을 지켜보던 헨들릭은 팔짱을 낀 손을 풀었다.

부하 장교들을 모아놓고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은 결국 그가 내릴 판단에 대한 부하들의 저항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왕실 인사이자 귀족 장교인 윌리엄이 이렇듯 대포 유기에 힘을 실어주니 그로서도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럼 대포는 유기하기로 하지. 견인 중인 것들 중 사람이 끄는 것은 모두 유기하고 이후로 말이 사라진 대포는 모두 유기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겠네.”

“하지만, 각하.”

“그럼 자네가 직접 대포를 끌고 가겠나? 여왕 폐하의 명예를 위해서?”

연대장이 반문하자 유기에 반대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

붉은 코트들은 여문을 거쳐 금포까지 비교적 신속하게 후퇴했다. 여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만 사흘로 일일 평균 35km를 기동한 셈이었다.

통상적으로 군대의 이동 속도가 시속 4~7km임을 고려하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은 일처럼 보일지 모르나, 이들은 적을 뒤에 두고 저격에 시달리면서 움직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했다.

무엇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달성한 이동 속도이기에 군사 관계자라면 붉은 코트들의 기동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승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도로 사정이 좋은 에우로페에서 프리지아 군이 400km를 주파하는데 자그마치 15일을 소요했음을 기억하고 있는 그로서는 붉은 코트들이 달성한 군사적 위업에 상당히 놀라운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보여준 후퇴는 전성기의 로망스 공화국 군대나 보여주었을 법한 놀라운 기동에 버금갔다. 퇴각의 순간에도 정예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붉은 코트들이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이 같은 위업을 달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후퇴 과정에서 상당한 장비를 유기함으로써 기동력을 높였다.

그들이 여문을 지나 금포까지 후퇴하는 과정에서 상실한 장비는 모두 중포 44문, 수레 27개, 자루 17개.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유기한 장비들이라 기본적인 처리 절차만 밟아 그 대부분은 회수하여 수리가 가능한 것들이었다.

승도는 그 기본 처리된 장비들을 회수하여 처리 상태를 보고 그것들을 재빨리 분류했다.

먼저 대포는 대부분 수리가 가능한 것들이었다. 단 신의 기술로는 처리가 쉽지 않았다. 대포는 모두 나사못을 박아 넣고 포가를 탈거시킨 상태였는데, 포가야 다시 만든다고 쳐도 나사못은 그렇지 않았다.

이를 처리하려면 상당한 정밀 가공 기술이 필요했는데 신에는 그런 기술을 사용할 만한 야금 공장과 기술자가 없었다. 결국 이것은 연합왕국의 상인들에게 수리를 의뢰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수레는 왕국군이 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바퀴만 부수고 버린 덕에 승도는 이것들을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군수용 수레들은 상당히 튼튼할 뿐만 아니라 바닥이 쇠로 만들어져 있어 민간에서 발주하기에는 그 값이 비쌌다. 승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으로 얻은 운송 수단인 셈이다.

세 번째는 자루. 주로 식량과 기타 보급품을 담은 것들인데 신과 달리 양의 창자로 만든 가죽 부대들인 터라 보관성이 좋은 물건들이었다.

이것은 군사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붉은 코트들이 그냥 유기하여 아무런 수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것도 승도가 유용하게 회수하여 쓸 수 있었다.

이들 물건을 회수하여 선별, 처리 과정을 마친 승도는 그것들을 강주로 보내 처리할 것을 명하고 그간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단련과 녹기들을 여문에 배치했다. 그리고 강주 사람들은 모두 강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임경문과 장원의 무인 몇과 함께 금포 근처로 시찰에 나섰다.

어차피 붉은 코트들은 호된 맛을 본 데다 포병 전력도 대부분 상실하여 강주 공격을 다시 시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는 긴장할 것도 없었다.

금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둔덕에 다다른 승도 일행은 그곳에서 말을 멈추었다. 그들의 눈 아래로는 금포와 그 주변에 배치된 붉은 코트들의 군세가 펼쳐져 있었다.

임경문이 망원경을 꺼내 금포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홍모귀들의 군세가 실로 대단하구나. 금포강 앞바다로 작은 산만 한 배들이 수도 없어 보여. 금포는 이미 적도들의 소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임경문의 말에 승도도 긍정의 뜻을 나타냈다. 아닌 게 아니라 금포 포구 앞에 닻을 내린 연합왕국 군함만 스무 척에 육박했다.

그 거대한 군함들에 실린 화력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신이 이를 퇴거시키려면 문자 그대로 ‘백만 대군’을 동원한다고 해도 가능할지 미지수였다.

보이는 전열함만 8척에 프리깃함이 10척, 박격포함이 2척이다. 이들 함정에 실린 대포만 따져도 1,200문은 될 터.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한 화력이다. 물론 해군만 따져서 그렇다는 것이다.

금포로 로열 노섬브랜드 연대가 급히 퇴각해 왔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동방 원정군이 이곳으로 증원한 로열 아크 연대와 해병 1개 대대가 달려와 금포 일대의 연합왕국군대는 그 수만 2,500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강주 전역에서 승도가 상대한 모든 붉은 코트들을 합쳐도 이 숫자만큼은 되질 않았다. 말 그대로 가공할 적세다. 이런 적을 상대로 공세를 편다는 것은 자살 행위다.

승도는 임경문과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적진을 가만히 살폈다. 만에 하나 적에게 강주를 다시 침공할 의지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이 적정 정찰은 꼭 필요한 행위였다.

한참 적정을 살피던 승도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대인. 강주 근방에서 추가로 징발할 수 있는 군세가 있겠습니까?”

“추가 징발을 할 군세라. 적어도 내 관할에 있는 군대는 없네. 알다시피 자네에게 모두 몰아주지 않았던가?”

“그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군세가 조금은 더 필요할 듯싶습니다.”

승도의 대답에 임경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 적진을 바라보던 임경문이 입을 열었다.

“아주 군세가 없는 것은 아닐세. 물론 내 관할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지만 강주 북쪽에는 육영평과 홍광의 군대가 있다네.”

“육영평과 홍광이라 하심은.”

“자네도 아는 자들이지. 팔기와 녹기 지휘관들일세.”

그 대답에 승도도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강주 북방의 팔기 지휘관 육영평은 천둥 장군이란 별명을 가진 유명한 인물로 승도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어찌나 달아나는 속도가 빠른지 대포 소리가 울리면 벌써 백 리 바깥으로 사라졌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천둥 장군이다. 달아나는 속도 하나 만큼은 천하제일인 사람이니 그에게 기대할 것은 없다고 해도 좋았다.

마찬가지로 홍광도 그에 버금가는 명성(?)을 가진 사람이다. 홍광을 칭하는 다른 말이 있다면 백만 석 장군이다. 얼마나 뇌물을 받아먹었으면 관할지 토지의 절반이 홍광 소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붙은 수식어가 백만 석이다. 승도는 괜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금포에서 전사한 오줌 장군 혁리가 나아보일 정도다.

그래도 병력은 꼭 필요했다. 승도는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을 잇지 않을 수 없었다.

“대인. 육영평과 홍광으로부터 병력을 얻어낼 방법은 없겠습니까?”

“황명이라도 내려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의 군대를 움직일 방법은 없을 것이네. 설령 내려온다고 해도 온갖 구실을 붙여 1리를 움직이는 데 하루를 소요하며 미적거리겠지. 아니 그렇겠나?”

그 말에 승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이 무능한 작자들은 그런 부분으로는 잔머리가 정말 잘 돌아갔다.

구실 하나는 수백, 수천 가지를 만들어 전장으로 나가지 않으니 중세 시대 에우로페 봉건 영주로 태어났다면 적성에 잘 맞았을 것이다. 하필 시대를 잘못 태어나 본인과 주변 모두를 망치니 그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다른 군대는 없겠습니까?”

“시간이 좀 걸리는 군대라면 그보다 북쪽에 있는 양호의 군마가 있네. 지역 방어를 위해 소집하는 향군으로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1만이 좀 넘는 군세일 걸세.”

“그들이라면 움직이실 수 있으십니까?”

“그건 장담할 수 없네. 양호는 제 고장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타향에는 좀 무관심한 사내라서 말일세. 서찰은 한 번 보내보겠네.”

“부탁드립니다.”

“그건 그렇고, 갑자기 군마는 왜 더 필요하단 겐가?”

임경문이 궁금하다는 듯 묻자 승도는 손을 들어 금포강을 가리켰다.

“저들을 위협하기 위해섭니다.”

“저들을 위협한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저들은 기천의 정예 병력에 산더미 같은 군함을 수십 척이나 갖고 있네. 어찌 그것이 가능하다 생각하는 건가?”

“고사에 이르길 빈 수레가 요란하다 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 빈 수레가 필요합니다. 수레가 있어야 소리를 낼 테니까요.”

“허장성세를 펴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다. 군세가 없어 허장성세를 편다는 소리는 들었으되 군대가 필요한 허장성세라니. 정말 기이한 말이 아닌가?”

임경문이 너털웃음을 짓자 승도도 웃음을 보였다.

“병법에 쓰는 기만책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최상의 기만책은 적이 우리를 두렵게 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들을 공격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저들을 공격할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적이 우리를 경계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군대를 모아 저들에게 경계심을 주는 것이 첫째라면 그다음도 있다는 말인가?”

“연환계(연속되는 계책)의 일종입니다. 군세를 모아 적을 위협하면 적은 우리의 위협이 과장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겁니다. 그 상태에서 입으로 공격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입으로 공격한다. 유언비어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사람을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눈에 보이는 위협이 아니라 뜬구름 같은 소문입니다.”

승도는 이 방법의 유효성을 확신했다. 에우로페에서도 무수히 써먹은 수법이기 때문이다. 몇 날 몇 시까지 협상을 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최후통첩을 적국에 보낸 다음, 국경선에 대놓고 군대를 모으는 행위로 적국들을 굴복시킨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사전에 적국에 침투한 그의 정보원들이 유언비어를 퍼트려 침공을 할 것이라고 민심을 뒤흔들어 놓는 사전 정지 작업이 이루어지곤 했다. 사실은 전혀 침공할 여력이 없었음에도 그 허세에 속아 넘어가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지금 그가 하려는 짓도 마찬가지다. 금포를 칠 능력이 있어 보이도록 군세만 모아놓고 금포 주변에 사람을 풀어 소문만 퍼트리는 것이다. 연합왕국이 아주 돌대가리가 아닌 이상 신의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에 어느 정도 관심은 있게 마련.

결국 소문을 퍼트리면 그 이야기가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공격한다고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들면 연합왕국으로서는 강주가 자신들에게 대 공격을 감행할 정도로 강력하다고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쯤 되면 혹시나 ‘본전’ 생각에 강주를 치려고 생각하던 자들도 한 번은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금포에 있는 해군과 육군 전력을 알면서도 덤빌 정도로 강력한 적이 상대라면 그 도시의 점령에 얼마나 많은 피해가 날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희생을 내가면서 강주를 꼭 점령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승도는 바로 강주를 그렇게 보이게 하고 싶었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강주는 연합왕국이 신을 굴복시키는데 별 도움이 안 되는 땅이다. 동방 원정군이 피를 흘려가며 전략적 목표로 지정할 만한 장소는 아닌 셈이다.

최초에 강주를 목표로 삼았던 이유를 들자면 전쟁의 구실이 된 땅이라 자국 대중들에게 ‘강주 점령’을 통해 ‘정의의 실현’을 광고하기 위함이다. 그 단순한 목적을 이루자고 전쟁을 수렁에 빠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정치적으로 이익을 챙기려면 제국의 제2수도인 상경이나 북경을 쳐서 제국 중앙 정부를 위협하여 협상을 강요하는 편이 빠르고 확실했다.

강주는 아무리 두드려본들 ‘변방’의 일로 치부하는 제국 정부의 둔한 영감들에게 위기감을 줄 수 없다. 연합왕국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터다.

승도의 목적은 강주를 ‘계륵’으로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뜬구름 같은 소문이라. 그것만으로 적도들이 넘어가겠는가?”

“넘어갈 것입니다.”

“그래. 자네가 확언을 한다면 그럴 게야.”

임경문은 승도에게 신뢰의 뜻을 드러냈다. 사실 그가 신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약관도 되지 않은 이 청년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홍모귀들을 상대로 몇 번이나 그 능력을 증명해 보인 바 있었다.

그러니 어찌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적어도 군사 부문에 있어서 오승도는 타고난 천재로 보였다.

“그리고 대인.”

“또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가?”

“적을 흔들고 나면 저들과 협상에 나서 주십시오.”

“적도들과 협상을 하란 말인가?”

임경문이 정색을 하자 승도가 가만히 그를 타일렀다.

“대인께서도 아시겠지만 저들의 군세는 우리 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강대합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싸워 우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으음.”

“지난 전투들만 보아도 그 사실은 자명합니다. 이겼다고 말은 하지만 내용을 보면 우리의 패배입니다. 홍모귀 하나에 열 명이 넘는 값을 치르고 겨우 물리친 것이 고작. 그런 희생을 언제까지 백성들이 감당하리라 여기십니까? 비록 상인이나 저 또한 그 정도의 이치는 통찰하고 있습니다.”

승도의 말에 임경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하지만 그 말을 인정해 버리면 불의에 굴복하고 만다.

그리고 그가 끔찍하게 여기는 아편굴, 매음굴의 천국이 만들어진다. 임경문으로서는 몸서리가 쳐지는 세상이다.

“하나 양이에게 쉬이 굴복하면 아편이 판을 치게 될 것일세. 자네는 그걸 바란단 말인가?”

“당연히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당 못 할 전쟁을 지속하면 아편이 아니라 아편보다 더한 중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강주만큼은 그런 중병을 얻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임경문은 그 말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천자의 신하로서 제 고장만 지키겠다는 말이 거슬렸던 것이다.

“신이 아니라 강주를 지킨다. 그것이 자네의 생각인가?”

“저는 큰 그릇이 아닙니다. 가문과 고향을 지키는 것 하나만으로도 힘에 버겁습니다, 대인.”

“어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 이 땅의 신하라면.”

“이 나라가 백성을 지켜줄 수 없으니, 제 것을 제 손으로 지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이 나라의 현실이 그러한 것을. 아편 밀수에 대한 강경한 반응을 드러내고는 있었지만 그 ‘정의’조차 지킬 힘이 없는 것이 신의 현실이었다. 힘이 없는 정의는 결국 힘을 가진 불의 앞에 무릎을 꿇게 마련.

승도의 대답은 결국 현실 가능한 목표를 좇으라는 말과 같았다.

임경문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말이 틀리진 않네.”

임경문이 한참 만에 어려운 말을 꺼냈다. 관료로서는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말이다. 승도도 그 무거운 발언의 의미를 알았다.

“대인이라면 목민관으로서 어느 것이 중한 것인지 알아주실 줄 알았습니다.”

“목민관이라면 애초에 고혈을 빠는 탐관들을 그냥 두지도 않았겠지. 그저 자리만 채우는 늙은이일 뿐일세. 협상은 언제 하면 좋겠는가?”

임경문의 말에 승도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깐 동안 생각을 마쳤는지 정리된 말을 꺼냈다.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보름 후가 좋겠습니다.”

“보름이라. 알겠네.”

“대인께 무리한 청을 드려 송구합니다.”

“아닐세. 강주에 터전을 둔 백성으로서 당연히 할 말이었네. 하나, 잊지 말게. 자네 역시 신의 녹을 먹는 관료라는 사실을.”

“물론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군마를 몰아 적도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임경문은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누다 금포를 뒤로하고 여문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말 머리를 돌려 여문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뒤편에서 연합왕국을 상징하는 사자기가 힘차게 펄럭였다.

아직도 그들의 적은 강주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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